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어: Guerra de Sucesión Española
프랑스어: Guerre de Succession d'Espagne
영어: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clearfix]
1. 개요
1701년 ~ 1714년에 걸쳐 유럽에서 발생한 국제적 전쟁. 당사자인 프랑스 왕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합스부르크 제국)이 싸우고 정작 이득은 영국이 본 전쟁. 이 전쟁과 관련된 분쟁으로 헝가리의 라코치 독립 전쟁, 프랑스 남부의 세벤 전쟁, 북미의 앤 여왕 전쟁,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소규모 분쟁 등이 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여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성립되어 현재에 이른다.
2. 과정
스페인 합스부르크(압스부르고)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병으로 위중해지자 후계자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주 공작 필리프(펠리페 5세)와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황가의 카를 대공(카를 6세),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3] 가 선상에 올랐다. 왜 후계자 후보가 세 명이나 되었냐면, 제1계승권자는 카를로스 2세의 외조카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1669~1692, 바이에른 선제후비)였으나 그녀가 산후 후유증으로 갓난아기인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남기고 일찍 사망한 뒤 남은 후계자 후보들이 모두 모계 계승권자[4] 인지라 논란이 생긴 것이다. 유럽 국가들은 루이 14세와 레오폴트 1세의 패권 야욕을 잘 알았고 카를로스의 조카손자인 바이에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왕위에 올려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1699년 7살의 어린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천연두로 병사(일각에서는 의문사를 제기함)하면서 후보는 두 명으로 줄었고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1700년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자신의 손자가 스페인의 차기 국왕이 되자 당연히 호응했지만, 루이 14세의 패권 야욕[5] 을 잘 알고 있는 주변 열강은 이를 수용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1702년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에 대항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문제가 된 스페인 왕위 계승자로 프랑스는 당연히 앙주 공작 필리프를 내세웠고, 영국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또 다른 후계자 후보였던,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자인 레오폴트 1세의 차남인 카를 대공을 내세웠다[6] .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스페인 왕위 계승이라는 명분에 가리워진, 루이 14세의 유럽 패권 장악이라는 야욕이었다. 루이 14세는 이미 오로지 영토 확장 야욕으로 9년 전쟁 등 명분 없는 전쟁을 몇 차례 일으킨 바 있어 주변국들의 불만이 높았다.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펠리페 5세를 인정하지 않고 카를 대공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영국, 프로이센도 프랑스의 지나친 팽창 정책을 경계하였다. 여기에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벌였던 네덜란드, 스페인과 앙숙인 포르투갈, 스페인에서 독립하려는 카탈루냐 등이 가세했다.
한편 프랑스-스페인 측에는 스페인 왕국 산하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이 참여했고, 합스부르크에서 분리를 시도하거나 합스부르크가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경계했던 헝가리, 바이에른, 쾰른, 리에주, 사보이 등이 가세했다.
여러 나라가 참전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반(反) 프랑스-스페인 동맹에서는 영국이 해전에서 절대 우위를 보이며 프랑스의 무역과 식민지를 위협하여 프랑스에 강한 압박을 가했다. 국제적으로 프랑스를 압박하여 빠르게 굴복시키고 루이 14세의 팽창을 막고자 한 것이다.[7]
그런데 1711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사망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 당사자인 카를 대공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세습령의 통치자인 카를 6세로 즉위하면서 전황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카를 6세 1인이 과거 카를 5세 시대처럼 스페인-오스트리아-신성 로마 제국을 혼자서 다스리는 것에 대해 유럽 각국이 경계했기 때문이다. 이에 영국 등 연합국 구성국들이 이탈하면서 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3. 결과
1713년에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트레흐트에서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펠리페 5세의 스페인 왕위 승계를 인정했지만, 대신 '''프랑스 왕이 스페인 왕을 겸하는 것은 금지'''되어 스페인까지 장악하려 한 루이 14세의 야망을 좌절시키게 된다.[9] 스페인은 실질적으로 프랑스 2중대가 되긴 했지만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프랑스의 왕가와는 분리되기 시작했고 결국 스페인은 독립국가로 남게 되었다.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까지 유럽 제일의 국력을 자랑하던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이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며 몰락이 가속화 됐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차지하고 있던 시칠리아 왕국, 나폴리 왕국의 왕위는 오스트리아에게 넘어가며 지중해 영향권이 대폭 축소됐고 얼마후엔 지중해 최후의 거점이던 사르데나까지 사보이 왕가에 넘어갔다. 또한 높은 세수를 자랑하던 스페인령 저지대[10] 가 오스트리아에게 할양되면서 재정위기를 겪어야 했고 지중해의 입구인 지브롤터를 영국에게 내주게 되면서 영국이 지중해와 대서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해로를 틀어쥐게 되었다.
4. 영향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해 별다른 힘도 들이지 않고 매우 큰 이득을 보게 되었다. 비단 영토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라이벌 국가인 유럽의 강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이 적절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자신의 의지대로 왕을 결정할 수도 없었던 스페인. 이후 스페인은 이후 벌어지는 국제분쟁에서 대부분 프랑스편을 들어[11] 프랑스의 2중대냐는 평도 들었고, 나폴레옹 시절에는 아예 프랑스군이 본토에 밀고 들어왔다.[12]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 소유였던 스페인이 이제는 원수 가문인 부르봉 가문(보르본 왕조)에 떨어지게 되었지만,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조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차지하여 그럭저럭 본전치기를 했다.
다만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지방은 1735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결과 스페인이 다시 탈환한다. 스페인 펠리페 5세의 5남 카를로스가 프랑스, 사르데냐와 연합하여 이탈리아 남부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 국왕(카를로 4세), 나폴리 국왕(카를로 6세)으로 즉위했다. 카를로스가 1759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로 즉위하면서 이곳은 카를로스의 삼남 페르디난도가 승계받아 스페인 왕가의 지배가 계속 이어진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14세 시대의 군대를 연구하는 학자인 존 린(john lynn)의 평가가 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프랑스와 루이에게 패배 또는 승리였는가?
저명한 외교사학자 Andrew Lossky의 말에 따르면 평화를 '사실상 지시'한 영국은 북미에서 식민지 양보를 몇 번 하고, 앤 여왕이 왕위를 확실하게 인정받을 것이며 앙주 공 필리프가 그의 할아버지의 것을 절대 상속받지 않을 것이라고 보증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작은 조약 수정만으로 국경을 유지했고, 부르봉은 스페인 왕관을 차지했다.
최종 조건은 1709년과 1710년에 연합군이 루이에게 요구한 것과 비교했을 때 특히 유리했다.
그 후 연합군은 '스페인 없이는 평화도 없다'고 요구했지만, 이것은 확실히 스페인 없는 평화였다.
루이는 전쟁을 왕조상의 승리로 간주할 수 있었는데, 그의 관점은 애초에 전쟁의 본질이었고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포위망을 탈출했다.
게다가, 루이는 몇몇 작은 영토를 추가했고 이전의 정복지를 유지했다.
물론, 이러한 계산은 금과 피의 비용을 가중시키지 않는다. 위태로운 쟁점들은 모든 면에서 희생된 생명을 앗아갈 만한 가치가 없어 보인다; 전투 사망 추정치만 해도 1,251,000명에 달하며, 이것은 부상, 질병으로 인한 사망, 그리고 아사자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도덕적인 기준으로 치면, 어느 한쪽이 승리를 주장할 수 있겠는가?[13]
무엇보다도 이 전쟁의 가장 큰 나비효과는 왕을 칭하게 된 프로이센 왕국과 사르데냐 왕국이 150여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각각 독일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프로이센은 브란텐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즉위했고, 선제후령과 공국을 합쳐 단일 프로이센 왕국으로 성립되어 본격적으로 유럽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르데냐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 공국 또한 이 전쟁으로 얻은 시칠리아가 지리적으로 멀다고 느꼈는지, 사르데냐와 교환하고 본격적으로 사르데냐 왕국이란 국명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한마디로 150년 후의 민족주의 대두 중심에 서게 된 왕가들을 만든 전쟁이었다.
5. 기타
그리고 약 26년 뒤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모계 후손인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이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지를 승계 받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14]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막바지에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루이 14세는 화평을 제의했는데 네덜란드,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은 평화조건 40개를 제의했다. 그중 스페인에 있는 손자를 더 이상 지원해선 안 된다는 요구조건을 보고 "내가 전쟁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적들과 할 것이다. 상대는 나의 손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는 태양왕이자 절대왕정의 상징이었던 루이 14세는 놀랍게도 프랑스 백성들에게 대자보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이 직접 백성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는 대자보의 파급력은 엄청나서 많은 돈과 지원병을 모을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프랑스의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장군은 말플라케 전투를 치름으로써 위기를 모면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이 애국주의에서 비롯된 자신들의 힘을 평민들이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어 루이 14세의 치세에 벌어진 이 전쟁이 수십 년 후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견해도 있다. 루이 14세 시기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절정기 임과 동시에 프랑스 왕정 몰락의 씨앗이 태동한 시기인 셈이다.'''"나는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명예가 훼손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백성들에게 필요한 평화를 곧바로 얻기 위해서는 내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대안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프랑스를 누르기 위해 무력과 책략으로 모인 모든 힘보다도 통일된 프랑스가 더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대결에는 여러분의 안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적은 우리가 결코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6. 주요 전투 목록
- 카르피 전투
- 키아리 전투
- 크레모나 전투
- 루차라 전투
- 카디스 전투
- 프리들링겐 전투
- 비고 만 해전
- 에케렌 전투
- 회흐슈테트 전투
- 셸렌베르크 전투
- 블레넘 전투
- 말라가 해전
- 카사노 전투
- 칼치나토 전투
- 라미예 전투
- 토리노 공방전
- 알만사 전투
- 오우데나르데 전투
- 릴 공방전
- 말플라케 전투
- 드냉 전투
- 바르셀로나 공방전
[1] (1703~)[2] (~ 1703)[3] 마르가레타 테레사(카를로스 2세의 친 누나, 이미 사망)와 레오폴트 1세의 외손자로 카를 6세의 외조카이다. 요제프 페르디난트의 어머니 마리아 안토니아는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한 후 요제프 페르디난트를 낳고 죽었다.[4] 다만, 카를 대공의 경우 부계로도 계승권이 있으나, 부계 계승권자로서는 촌수가 상당히 멀었고, 실제로 촌수와 항렬로 따지면 가장 후순위 후보였다. 그 대신 카를 대공의 경우 세 후보 중 유일하게 스페인 왕가와 같은 합스부르크 집안 출신이긴 하였다.[5] 루이 14세라고 하면 가장 먼저 베르사유가 떠오르지만, 사실은 루이 14세 치세의 5분의 2 가량이 외국과의 전쟁으로 장식되어 있다. 루이는 전지전능한 하느님께서 몸소 라인 강, 알프스 산맥, 피레네 산맥이라는 자연 조건으로 프랑스의 국경을 정해놓으셨다는 '자연국경설'을 주장했는데, 그 말에 따라 지도를 그려보면 '''오늘날 프랑스에 베네룩스 3국, 스위스 등등이 프랑스에 합병되어야 한다는 개소리나 다름없다.''' 참고로 그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서유럽의 중국, 프랑스가 자연국경을 그린 적이 단 한 번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세워진 프랑스 제 1공화국과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 1제국 뿐이었다. 즉, 나폴레옹만이 자연국경설을 만들어낸 셈.[6]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스페인 왕위 계승 후보라는 건, 카를 5세라는 희대의 엄친아가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동시에 겸임했었기 때문. 카를은 1556년에 건강상의 문제로 퇴위하는데, 그때 저지대 국가와 네덜란드, 스페인, 아메리카 대륙 식민지 등등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물려주었다. 참고로 이를 계기로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은 이후로도 같은 가문인지라 형님, 아우님 하며 지냈는데, 카를의 퇴위 이후 두 나라가 처음으로 서로와 전쟁을 벌였던 것이 바로 이 스페인 계승전쟁.[7] 다만 루이 14세 개인의 야욕보다는 스페인-프랑스 연합이라는 거대한 적의 출현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것이 훨씬 큰 이유였을 것이다. 실제로 16세기에 신성로마제국-스페인 연합이 등장하여 그 적국이었던 프랑스가 탈탈 털린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스페인과 연합하여 프랑스를 짓밟아본 경험이 있던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결합을 막고 싶어했던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8] 프랑스 혁명 당시엔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미 단절되고 마리아 테레지아를 통해 모계로 이어진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가가 그 자리를 대체했었다.[9] 다만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군연합이 성사되었다 해도 경우에 따라서는 해당 동군연합이 언젠가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모종의 이유(귀천상혼 문제, 남계 혈통 단절 문제, 쿠데타를 통한 왕위 찬탈 등)로 프랑스-스페인 동군연합의 왕위 계승권이 꼬이거나 프랑스와 스페인 중 한 나라에서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다른 한 나라는 군주제를 유지하는 경우(프랑스 혁명으로 프랑스의 왕정이 폐지된 후에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스페인으로 망명하거나, 아예 스페인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일원을 왕으로 추대하여 압스부르고-로레나 왕조 (Casa de Habsburgo-Lorena)[8] 를 세우거나 스페인 귀족 가문들 중 가장 강력한 가문의 수장이 스스로를 '스페인 대공' 내지는 '스페인 섭정'으로 칭하여 스페인이 부르봉 왕가와 완전히 결별하는 등)에는 스페인이 프랑스와 다시 분리될 좋은 명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해당 대체역사의 스페인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진하게 받아 흔히 알려진 스페인 문화와는 많이 달라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0] 스페인령 네덜란드. 현재의 벨기에[11]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등[12] 사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당시의 스페인 민중들은 프랑스의 편에 섰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지만 상대 동맹국에는 영국, 네덜란드 등 신교국가들이 있었다. 그래서 동맹군이 침공했을 때 침략자를 대단히 싫어하는 스페인 사람들은 특유의 게릴라식 저항으로 맞아주었다. 그리고 약 100년 후에는 반대로 침략자가 된 프랑스를 똑같이 게릴라 전법으로 맞아주는데...[13] 존 린 (john lynn)-the wars of louis xiv [14] 애초에 신성 로마 제위는 선거제였고 여성은 피선거권이 없었다.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직은 프랑크계 국가가 아니므로 살리카법과는 상관이 없었기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뛰어난 리더십에 감복한 헝가리-크로아티아 군은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에서 마리아의 심복이 되어 활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