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문 배경
검은 장미단의 수장, 르블랑의 정체는 모호할 따름이다. 그녀에 대해 오가는 속삭임만큼이나 형체가 없고,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 품는 환상만큼이나 덧없다. 수백 년 동안이나 스스로를 복제하고 수없이 모습을 바꾸었으니, 어쩌면 르블랑 본인도 자신의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녹서스가 건국되기 훨씬 전부터 검은 장미단의 원조 격인 일종의 비밀 결사단이 존재했다고 한다. 검은 장미단의 초기 단원들은 수 세기 동안 그림자 속에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며 재산과 권세가 많은 사람들을 구성원으로 끌어들였다. 이들 중에 자신들의 수장 르블랑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지만, 안색이 창백한 여마법사의 전설을 끄집어내는 사람은 많다. 이 여마법사는 먼 옛날 야만인 부족들이 이미 다르킨이 유린한 대지를 점령한 ‘‘강철의 망령’’과 싸울 때, 그 부족들을 도왔다고 한다. 이 강철의 망령이 어찌나 악명이 드높고 공포스러웠던지, 오늘날까지도 모데카이저라는 그 이름을 두려워하지 않고 또렷하게 발음하는 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 여마법사는 원래 강철의 망령의 심복 가운데 한 명으로, 독특한 마법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강철의 망령을 배반하고 그의 힘의 원천인 불멸의 요새를 무력화하겠다고 선언했고, 결국 강철의 망령이 세운 섬뜩한 제국에 힘을 부여하던 불멸의 요새, 그 죽음의 샘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야만인들은 바로 그 불멸의 요새에 자신들의 제국 녹서스를 세웠다. 그 요새가 간직한 비전의 비밀이 완전히 봉인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었다. 창백한 여마법사는 환영을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기에, 제국의 심장부에 어둠의 힘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녹서스 인들이 잊어버리도록 마법을 걸었던 것이다. 그 후 여마법사는 룬 전쟁 즈음에 흔적도 없이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지금의 검은 장미단은 이 여마법사가 구사하던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자들에게 은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기적에 대한 소문에 현혹된 평범한 귀족들로 구성된 일반 단원들은 검은 장미단에 얽매여 있으며 필요하다면 인정사정없이 이용당한다. 녹서스 제일가는 권한을 쥔 군 사령관이라도, 녹서스의 수도는 물론 그 국경 너머에서까지 음모와 정복의 게임을 펼치며 승률을 높이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검은 장미단 지도부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르블랑은 수백 년 동안 외국의 고위 관리들에게 비밀리에 조언을 제공하는 일을 해왔다. 환영술을 써서 여러 나라에 동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으며, 나타나는 곳마다 혼돈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세대가 바뀔 때마다 검은 장미단에 새로운 여수장이 등극했다는 소문이 나오지만, 오히려 의문만 증폭할 뿐이다. 대체 르블랑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 르블랑이 말을 할 때 그 목소리는 과연 진짜 그녀의 목소리인가? 르블랑은 자신의 제안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가장 최근에 깨달은 사람은 보람 다크윌이었다. 검은 장미단은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르도록 지원했지만, 황제가 된 다크윌은 검은 장미단이 직접 선정한 조언자들로 구성된 평의회를 거부했다. 르블랑이 과감한 조치를 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르블랑은 제리코 스웨인이라는 이름의 젊은 귀족을 조종하여 스웨인이 검은 장미단의 음모를 밝혀내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가장 거물급 단원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아니,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게 만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르블랑은 다크윌 황제에게 접근했고, 그가 자신이 언젠가는 죽는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갈수록 편집증 증상이 심해지고 있음을 파악했다. 르블랑은 다크윌 황제에게 생명을 연장하는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한 다음, 그의 마음을 서서히 파괴해갔다. 다크윌의 통치가 이어지면서 힘을 숭상하는 녹서스의 정복욕은 더욱 사악해졌고,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스웨인마저도 아이오니아의 전장에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몰렸다. 그러나 불멸의 요새 안에서 금단의 존재를 마주하고 야망을 키운 스웨인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보였다. 다크윌을 옥좌에서 끌어내리고 직접 녹서스를 장악한 것이었다. 하지만 새로이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 스웨인은 일신의 부귀영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녹서스 제국의 영광이었다. 그러니 스웨인은 손쉽게 타락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르블랑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호승지심이 일었다. 드디어 전력을 다해 겨뤄볼 만한 숙적이 나타난 것일까? 르블랑은 오랜 세월 동안 룬테라를 여러 번 전면전 직전의 상태에 몰아넣었다. 프렐요드의 혹한 속에서, 타곤 산 봉우리에서, 슈리마의 사막 한복판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서, 가장 어두운 마법의 힘이 다시금 이 세상에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녹서스의 땅으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르블랑이 지금까지도 강철의 망령을 배신했던 창백한 여마법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든, 수없이 만들어지는 공허한 환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르블랑의 힘과 영향력은 아주 먼 고대에서부터 자라난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검은 장미는 아직 활짝 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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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검은 장미단의 가시
[image] "이해가 안 되는군." 그란스 장군이 초조하게 등불을 끄며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없잖아. 막다른 길이야." 그란스는 입구 앞에 서 있었다. 시커먼 돌로 만들어진 입구 안으로 더욱더 시커먼 암흑이 펼쳐졌다. 입구는 활짝 열려 있었고, 주위로 각진 오치넌 글귀가 새겨져 있었으며, 발치의 판석 위에 뼛조각이 나뒹굴었지만, 그는 보지 못했다. 나는 평소처럼 웃으며 말했다.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란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아무리 사촌이라도 나랑 장난칠 생각 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냐고. 여긴 의회에서 출입을 금지한 곳이야. 군단 순찰병들이 사방에 깔렸어!" 사실이었다. 반역자 스웨인은 녹서스를 장악한 후 불멸의 요새 출입을 통제했다. 명목상으로는 트리파릭스 체제를 반대했던 귀족 가문들의 보복을 막는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브라닌 그란스 같은 자들이 적대감을 드러내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형의 충성심을 의심하진 않을 거야." 나는 그란스를 안심시켰다. "누가 뭐래도 형은 애도의 성문에서 활약한 영웅이잖아. 대장군이 직접 공을 치하할 텐데,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어? 들켜도 도망칠 필요 없어." 그란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트리파르 군단에게서 도망칠 순 없어..." 그 얄팍한 선전 구호는 지겹도록 들었다.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스웨인은 자신과 녹서스의 실력자, 그리고 트리파르 군단을 신비로운 존재로 포장하는 데 성공했다. 죽어도 인정하긴 싫지만, 훌륭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난 그란스가 떠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여기 온 목적이었으니까. 그란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애도의 성문에서 승리한 건 우리가 아니라 군단 덕분이야. 스웨인이 개선식에 오지 않은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 그 망할 자식은 우리 도움 따윈 필요 없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지. 녹서스 국민 앞에서 우릴 모욕한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란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우리가 복수하려는 거잖아. 형이 진정한 녹서스인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형 얘기를 했더니, 직접 만나고 싶어 하더군. '그분'도 형을 보고 싶어 해." "일단 들어가야 누굴 만나든 말든 할 거 아니야?" 그란스는 주위를 둘러보며 덧붙였다. "검은 장—" 나는 깜짝 놀라며 그란스의 말을 잘랐다.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선 안 돼. 안 그러면... 아까 형 말대로 '이해가 안 되는' 사람처럼 보일 테니까." 나는 그란스 옆을 지나 커다란 관문을 통과해 걸어갔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란스는 하마터면 등불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제야 그에게도 입구가 보이는 듯했다. 그란스는 미행이 없는지 확인하고는 휘청거리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가늘게 뜬 눈으로 어두운 통로 안쪽을 바라봤다. "사실이야?" 그란스가 속삭였다. "그 여자에 관한 소문 말이야." 나는 걸음을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직접 확인해 봐."
녹서스인 대부분은 불멸의 요새가 기념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옛 부족들이 떠올리는 요새와도 거리가 멀었다. 사방을 둘러싼 돌은 힘이 넘친 나머지 '진동'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란스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나는 수 세기 동안 수도 없이 봐 왔던 광경이었지만 그란스는 팔다리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뒤통수가 간질거려서 막연한 불안을 느낄 뿐이었다. 힘의 원천에 이렇게 가까이 올 수 있는 인간은 극소수였다. 그때 어둠 속에서 망토를 쓴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란스는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지금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는 점은 인정할 만했다. '나'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두 사람을 지나쳐갔다. 내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관없었다. 곧 끝날 테니까. 그란스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다 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자신이 사촌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해드리온, 이들은 누구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자 그란스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네가 말한 다른 가문 출신의 동맹이 맞아?" 나는 실망감에 한숨을 쉬었다. 가장 뛰어난 군인마저도 눈앞에 있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다니. "우리 가문이 처한 상황을 동정하는 사람들이야." 난 그란스가 자신을 향한 경멸을 느끼지 못하도록 짐짓 꾸며낸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의 목표는 같아. 반역자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는 거지. 이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은 모르는 편이 좋을 거야." 그란스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함께 싸우려면—" 마지막 모퉁이를 돌자 그란스는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위대한 영혼의 샘 가장자리에 섰다. 샘은 녹서스의 기반을 뚫고 끝도 없이 내려갔다. 불멸의 요새 자체보다 훨씬 깊었다. 깊은 곳에서 차가운 푸른색과 불안정한 초록색의 독기가 소용돌이치며, 샘을 가로지르는 세 개의 다리 밑을 비추고 있었다. 그 사이로 무시무시하고 거대한 형체가 매달려 있었다. 녹서스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존재였다. 생기가 없는 갑옷은 역사책에 묘사된 것과 동일했으며, 옛도시 곳곳에 훼손된 채 흩어진 천 개의 조각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그란스는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두 눈은 눈물로 반짝였다. 나는 몸을 기울여 그란스의 귀에 속삭였다. "이제 알겠어? 위대한 녹서스 제국의 숨겨진 진실을 말이야. 어떤 대장군이나 황제, 폭군도 불멸의 요새를 다스리는 여왕의 허락 없이 왕위에 오를 수 없어. 초대 국왕부터 지금까지 수 세기 동안 그래 왔지. 여왕을 섬기려는 자들은 많지만, 자격을 갖춘 자는 많지 않아." 나는 떨리는 그란스의 손에서 등불을 부드럽게 빼낸 후, 그를 얼어붙게 한 광경에서 멀어져 통로 양쪽으로 늘어선 벽감 쪽으로 이끌었다. 벽감은 전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스웨인은 반드시 몰락해야 해. 우리 검은 장미단은 어떠한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그 목표를 이룰 거야." 내가 장막을 걷기도 전에, 그란스는 안에 뭐가 있는지 어느 정도 예상한 듯했다. 그것은 그란스의 사촌 동생, 해드리온의 건조된 시체였다. 해드리온의 얼굴은 죽음의 미소를 띤 채 굳어 있었다. 평온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브라닌 그란스, 너희 가문은 반란 중에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보람 다크윌을 섬기던 네 아비와 그 형제들은 변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했지. 해드리온은 복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았다. 너도 그의 뜻을 받들고 우리와 함께할 텐가?" 그란스는 무릎을 꿇고 번득이는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바로 당신이... 백색 부인이군요..." '또 다른' 백색 부인이 내 옆에 나타났지만, 그란스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우리는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난 어디에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다. 앞으로 네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볼지는 내가 결정한다."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는 건 제리코 스웨인만의 능력이 아니었다. 곧이어 세 번째, 네 번째 백색 부인이 그란스 뒤에서 걸어 나왔지만,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란스는 마침내 깨달았다. 해드리온 옆의 빈 벽감에 누가 들어가야 할지 알려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진심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바치겠습니다, 백색 부인이시여. 반역자 스웨인이 죽는 그 날까지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 순진한 녀석은 자신이 스웨인의 숨통을 끊을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착각'은 자유다. 대장군의 방어 태세만 확인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검은 장미단의 문장을 그란스의 머리 위에 띄웠다. 내가 그의 주인이라는 의미였다. 누구든 이 문장을 보면 우리의 계획을 방해하지 않을 터였다. "그럼 일어서라, 녹시이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여. 네 맹세를 받아들이겠다. 우리는 승리할 것이며, 네 이름은 제국의 구원자로서 연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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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스웨인의 단편소설
검은 화약으로 이어진다.
3. 구 배경
3.1. 장문 배경
모든 도시에는 어두운 면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이미 평판이 의심스러운 도시들의 어둠은 말해 무엇할까? 이러한 이야기라면 역시 녹서스를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열렬히 숭배하지만 동시에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혐오감을 드러내는 도시... 거대한 도시 녹서스의 지표면 아래에는 벌집 모양으로 뒤얽힌 깊고, 어둡고, 구불구불한 동굴이 존재하며, 이 복잡한 미로 속에 온갖 범죄자들이 들어차 있다. 종교 단체나 마녀 협회 같은 비밀 단체들, 그중에도 특히 환술사 르블랑의 '검은 장미단'이 이곳을 자신들의 은거지로 삼았다. 검은 장미단이 뭐하는 집단이냐고? 모를 법도 하다. 이제는 잊혀버린 부도덕한 역사의 잔재. 짧게는 이렇게도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그 옛날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전 녹서스에서 정치를 관장했던 마법사 집단이었다. 과거의 집권층이던 이들은 오늘날 통용되는 마법과는 다른 음지의 마법을 연마하고자 비밀스러운 모임을 주선하곤 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의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표면적으로 녹서스의 통치권은 귀족들의 것이었으나, 실제로 권력을 가졌던 것은 검은 장미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대가 바뀌어 무예가들이 제국의 앞날을 좌지우지하게 되자, 그 검은 장미단도 홀연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단원들이 사회정치적 패권에 관심을 잃은 것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검은 장미단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그러던 어느 날, 르블랑이 녹서스에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고 모두들 그간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림자와 화염 마법의 대가인 이들은 새로운 패권의 도래를 기다리며 조용히 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3.2. 단문 배경
르블랑은 검은 장미단의 다른 구성원에 비해서도 신비로운 인물이지만, 그 이름은 그저 녹서스 건국 초기부터 사람을 조정하고 사건을 조작하던, 안색이 창백한 여인들의 이름 중 하나이다. 르블랑은 마법을 사용해 자신의 상을 복제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든, 어디에든 나타날 수 있고, 심지어 여러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언제나 시야 밖으로 사라지는 르블랑의 진정한 동기는 끊임없이 이동하는 존재만큼이나 불확실하다.
원문 링크'''후보: 르블랑'''
날짜: CLE 20년 10월 29일
'''관찰'''
반들반들한 대리석 복도를 침착하게 걸어가는 르블랑의 걸음걸이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우아함과 기품이 넘친다. 잘 손질된 화려한 장식의 멋들어진 마법사 의상이 궁전 울타리를 벗어나선 쉬 볼 수 없는 위엄까지 더해준다. 섬세한 손에 쥔 기다란 지팡이의 봉 부분에는 여러 개의 자연스럽게 컷팅된 수정들이 신비로운 힘으로 고정되어 떠 있다.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에도 비슷한 수정 장식 머리핀을 꽂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방으로 휘황한 빛이 반사된다.
르블랑은 아름답게 장식된 문 앞에 잠시 멈추더니 새겨진 글귀를 찬찬히 읽는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즉흥적으로 따라 읊는 그녀의 입꼬리가, 그 역설적인 뜻을 비웃듯 순간 살짝 올라간다. 그리곤 이내 아무 감정도 읽을 수 없는 수수께끼같이 완고한 표정으로 돌아가는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녀가 흠잡을 데 없이 손질된 손을 뻗어 엄청나게 무거울 듯한 문을 아주 가볍게 밀어 연다. 그리곤 잠깐 위압적인 어둠이 깔린 실내를 들여다보더니, 아까와 다를 것 없는 보폭으로 암흑 속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간다.
'''회고'''
어둠과 함께 한기가 몰려왔다. 르블랑은 옷깃을 여미며 가벼운 오한을 떨쳐냈다. 두건을 쓴 희미한 형체가 두 손에 덮개가 달린 등을 들고서 발을 끌며 지나갔다. 희미한 등불에 비쳐, 돌과 회반죽으로 다져진 양쪽 벽이 보였다. 멀리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어둠에 가려진 형체 하나가 행렬을 따라 어기적거리며 곁으로 지나갔다. 이 무리의 한참 뒤 쪽에 서 있던 르블랑은 자기가 뭘 입고 있는지 내려다봤다. 늘 입는 화려한 궁정 복장 위에 새까만 겉옷을 걸치고 검은 장미 모양으로 조각한 오닉스 벨트로 여민 모습이었다. 항상 들고 다니던 지팡이나 머리 장식은 온데간데 없었다. 눈길을 들자, 저 앞 터널 끝이 넓어져 방처럼 된 어둑한 공간에 한 무리의 군중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르블랑은 인파를 헤치고 앞쪽으로 나아갔다. 막아서 있던 사람들이 길을 터 앞 주자 그녀의 입에서 헉하고 탄식이 새어 나왔다. 구경꾼들 한가운데에서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인이나, 어떤 면으론 자기 자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 그 즉시 과거에 겪었던 이 상황이 기억에 돌아왔고, 르블랑은 차분하게 다음에 전개될 일을 기다렸다.
두건을 덮어쓴 구경꾼들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군중 한복판에 있는 르블랑과 똑같이 생긴 여인에게 쉰 목소리로 말했다.
"르블랑, 우릴 불러모은 이유가 뭡니까? 지금 시기적으로 검은 장미단이 이렇게 대규모로 회합을 하기엔 위험합니다."
여인이 뭔가 대답하려 입을 열다가 갑자기 숨이 턱 막혀 마저 잇질 못했다. 그리곤 드레스 주름 사이에서 핏방울이 뿌려진 수놓은 손수건을 홱 꺼내 기침이 터져 나오는 입을 틀어막았다. 여인이 곧 목청을 가다듬더니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형제자매여. 여러분을 소환한 이유는 내가 늙고 병약해졌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아 난 흙으로 돌아가게 될 거에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우리 단체의 수장 자리를 물러날 때가 되었군요."
좀 전보다 더 큰 기침 소리가 뒤를 이었다.
"여러분 중에 뛰어난 가능성과 지도력을 보여준 사람이 있습니다. 재능도 출중하지만, 야망과 충성심도 견줄 데가 없는 분이죠."
이렇게 말을 이으며 반짝이는 장식을 머리에서 빼내자, 여인을 감싸고 있던 환영이 일순간에 가셨다. 도자기처럼 매끄럽고 윤기 흐르던 피부가 잿빛으로 변하고 풍성하던 머리카락은 지저분하게 늘어졌으며, 눈두덩이 움푹 꺼졌다. 여인이 주름진 손을 르블랑 쪽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베인, 이리 나와 명을 받으세요."
르블랑이 앞으로 나가 수정 핀을 받아 들고는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꽂았다. 그러자 전임자가 지팡이도 마저 내밀며 말을 건넸다.
"이상하기도 하지. 마치 거울을 보는 것 같아."
르블랑이 지팡이를 받아 들자 주위가 희미하게 사라졌다.
다음 순간 르블랑은 서재에 앉아 팔에 우아하게 지팡이를 걸치고서 섬세한
찻잔을 기울여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맞은편엔 호리호리한 몸에 딱 맞는 군복을 걸친 쇠약한 인상의 사내가 어깨에 커다란 까마귀를 얹고서 앉아있었다.
"이렇게 친히 행차해 주시니 기쁘군요, 제리코 스웨인."
르블랑이 말을 건넸다. 스웨인의 갈퀴 같은 손이 찻잔 손잡이를 감싸더니 김이 오르는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향이 아주 그윽하군요, 수호자 르블랑. 당신의 취향은 늘 그렇지만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렇죠,"
르블랑이 미소를 지으며 수긍했지만, 그 미소에는 어딘지 슬픔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테이블 맞은 편으로 팔을 뻗어 사내의 흉터투성이 손을 잡았다.
"익히 알고 계시잖아요. 자신을 스스로 팔아넘기기 전부터요."
스웨인이 가시덩굴이 새겨진 오닉스 반지를 르블랑의 손에 쥐여줬다.
"맞아요. 전 희생을 치렀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요. 검은 장미단은 수호자님의 것입니다. 전 더 위대한 존재가 됐구요."
그 말에 동의라도 하듯, 어깨 위에 앉아있던 까마귀가 깍깍 울었다.
"이제 때가 됐습니다. 저와 힘을 합치면 보람 다크윌이 우리한테서 빼앗아 갔던 걸 되찾을 수 있습니다."
르블랑이 반지를 들여다봤다.
"이미 다크윌의 신임을 얻기 위해 정체성을 버리셨잖아요. 다른 사람들은 그리 탐탁해하질 않을 거에요."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요."
스웨인이 말을 이었다.
짐꾼 하나가 문간에 와서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고 알렸다.
"뒤 쿠토 장군이 뵙기를 청합니다, 수호자님."
르블랑이 호기심 어린 눈길을 스웨인에게 보내며 대답했다.
"올려보내세요."
짐꾼이 서재에서 물러갔다.
"뒤 쿠토라면 그 천박한 장군의 충견 아닙니까."
르블랑이 내뱉듯 말했다.
"우리에겐 필요 없는 인물이에요, 제리코."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걸 수도 있습니다, 환술사여. 뒤 쿠토는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에요." 스웨인이 대답했다.
르블랑이 반지를 들어 올렸다. "그래도 우리 일족이 아니에요!"
스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요, 르블랑?"
"우리 일족의 타고난 권리를 되찾기 위해섭니다,"
선언하는 르블랑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내 장담하는데, 반드시 되찾고 말 겁니다."
제리코 스웨인이 테이블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속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기분이 어떤가요?"
르블랑이 고개를 홱 젖히며 깔깔 웃었다.
"내가 속 마음을 드러냈다고, 소환사?"
조롱하는 말투가 역력했다.
"르블랑을 간파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 오산이오. 나보다도 연륜이 높고, 댁네들 소중한 리그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낸 분이시오."
스웨인이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1] 이 부분은 라코의 오역으로, 대사의 주어가 없이 나와 헷갈리기 쉽지만 앞의 문장 구조들과 비교해보면 위의 대사를 말한건 스웨인(을 가장한 소환사)가 아니라 르블랑이다. 즉 '''-"넌 절대 르블랑에 대해 알지 못할거다. 그녀'''(역대 르블랑)'''는 나'''(이베인=현재 르블랑)'''보다 연륜이 깊고, 너희의 대단한 리그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살아왔으니까." 스웨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번역하는 게 맞다.
눈앞의 문이 활짝 열리며, 쏟아져 들어오는 빛 속에 이젠 르블랑 혼자만 남아 있었다. 리그 오브 레전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