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븐(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1. 장문 배경
2. 부러진 검날의 고백
2.1. 제1부
2.2. 제2부
2.3. 제3부
4. 이음매와 흉터
5. 구 설정
5.1. 구 배경 1
5.2. 구 배경 2


1. 장문 배경


무수한 전쟁의 토대 위에 세워진 녹서스에서는 전쟁고아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리븐은 어머니마저 그녀를 낳다가 사망한 후 트레베일의 바위투성이 산비탈에 위치한 국영 농장에서 자랐다.
농장의 아이들은 육체의 힘과 필사적인 의지로 삶을 이어나가며 고철을 주웠지만, 리븐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그녀는 지역 군부대의 징집관들이 매년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침내 제국에 자신의 힘을 바치기로 서약한 날, 리븐은 녹서스가 자신을 그토록 되고 싶었던 제국의 딸로 받아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리븐은 역시 타고난 군인이었다. 비록 어리지만 수년간의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긴 장검의 무게를 이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 리븐은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전우애로 맺어진 형제자매들과의 유대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제국에 대한 리븐의 헌신이 너무나 독보적이었기에 보람 다크윌은 그녀에게 검은 금속을 벼려낸 룬 검을 친히 하사했는데, 이 검에는 그의 궁정 소속원인 창백한 여마법사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무게는 카이트 실드보다 무겁고 너비는 비슷했다. 리븐의 취향에 딱 맞는 검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녹서스군은 오랫동안 계획해 온 침공의 일환으로 아이오니아를 향해 닻을 올렸다.
새로 시작한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아이오니아가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리븐의 부대가 맡은 임무는 포위 공격 중인 나보리 지역으로 진격하는 다른 부대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 부대의 대장 에미스탄은 자운 출신의 연금술사를 고용했는데, 새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리븐은 녹서스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지금 이 부대원들에게서는 비뚤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리븐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이들이 무기와 함께 운반하고 있는 항아리들은 리븐의 눈에는 그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으로 보일 뿐이었다.
두 부대의 격전은 점점 더 격렬해져만 갔고, 심지어 부근의 땅조차도 그들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 기운이 감돌았다. 거센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언덕에서 진흙이 쏟아져 내려와 리븐과 전사들은 치명적인 그들의 짐과 함께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아이오니아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험을 목도한 리븐은 에미스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븐이 받은 답은 능선에서 날아온 한 발의 불화살이 전부였다. 리븐은 이 전쟁이 더 이상 녹서스의 국경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이 적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참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화살은 수레에 명중했다. 리븐은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으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화학 물질의 불기둥이 치솟고, 비명소리가 밤을 메웠다. 아이오니아군과 녹서스군 모두가 고통스럽고 소름 끼치는 죽음을 맞았다. 검의 마법 덕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독성 안개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리븐은 뜻하지 않게도 그녀를 영원히 괴롭힐 공포와 배신의 산증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리븐에게 이후의 기억은 파편과 악몽으로만 존재한다. 상처를 싸매고 죽은 자들을 애도한 어렴풋한 기억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검을 증오하게 되었다. 검에 새겨진 글귀는 리븐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환기시키며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서스와 자신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 동이 트기 전 검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검이 마침내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그녀는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생을 지탱하고 있었던 믿음과 확신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리븐은 스스로를 추방한 채 전쟁이 무참히 할퀴고 지나간 아이오니아를 방랑했다. 긴 방랑 끝에 리븐은 자신의 검을 산산조각 냈던 마을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녀 내면의 파괴성이 그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던 원로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나, 그럼에도 아이오니아는 용서와 함께 리븐을 품었다.[1]
허나 녹서스는 결코 자비롭지 않았다. 오래전 최초의 땅에서 물러나긴 했지만, 녹서스는 리븐과 그녀의 룬 검을 잊지 않았다. 리븐은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아이오니아 인들이 희생되지 않길 원했기에, 그녀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온 자들과 맹렬히 싸운 후 탈영이라는 죄목의 심판을 받기 위해 녹서스로 돌아가 자수했다.
녹서스로 돌아와 족쇄를 찬 리븐의 모습엔 근심이 가득하다. 더 이상 다크윌은 존재하지 않고 제국이 재건되었다는 것도 소문임을 알게 됐지만, 그녀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이 모든 것을 반복할 운명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2. 부러진 검날의 고백



2.1. 제1부


[image]
예리한 쟁기날이 울퉁불퉁한 겉흙을 파고들어가더니, 겨우내 잠들어 있던 아래 쪽 흙을 봄 하늘 아래 드러냈다. 리븐은 황소가 끄는 쟁기 뒤를 따라 조그마한 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팔을 넓게 벌려야 잡을 수 있는 손잡이를 눌러 쟁기를 안정시키는 한편,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외국어 단어를 떠올리려 애쓰고 있었다.
“''에마이. 파이르. 스바사. 아나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긴 잠에서 깨어난 비옥한 흙 냄새가 공기 중에 피어올랐다. 리븐은 나무 손잡이를 꽉 잡고 걸었다. 요 며칠 동안 밭을 갈다 보니 겨울에 사라졌던 굳은살이 다시 올라왔고, 대신 기억은 흐려졌다.
리븐은 입술을 깨물며 잡생각을 떨쳐내고 지금 하고 있는 두 가지 일에 집중했다. “어머니. 아버지. 자매. 형제.”
야위어서 갈비뼈가 드러난 황소는 쟁기를 끌면서 연신 한쪽 귀를 쫑긋거렸다. 쟁기날에서 흙덩이와 조그마한 돌멩이가 튀어올라 리븐을 때렸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올이 거친 셔츠를 입고 흙 얼룩이 진 소매를 말아올려 두툼한 끈으로 고정시키고 있었다. 같은 천으로 만든 바지는 흙물이 들어 누런 색이었다. 바짓단은 원래 주인에게는 이제 너무 짧겠지만, 리븐에게는 맨살이 드러난 발목과 진흙이 덕지덕지 붙은 조악한 신발에 스칠락 말락 한 길이였다.
“''에마이. 파이르. 스바사. 아나르.” 리븐은 기억을 더듬으며 주문처럼 단어들을 외웠다. “에르자이, 아들. 디에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눈썹 아래로 늘어졌다. 리븐은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소맷자락으로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녀의 양팔은 근육이 탄탄했고, 한 팔만으로도 쟁기를 어렵지 않게 제어할 수 있었다. 밭의 주인인 늙은 농부는 조금 전에 물이 든 가죽 자루와 점심을 가지러 집으로 갔다. 농부는 리븐에게 잠시 일을 멈추고 길 가장자리의 숲 그늘에서 쉬어도 된다고 말했지만, 리븐은 일을 끝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땀에 젖은 리븐의 목덜미를 스쳐지나갔다. 리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녹서스 제국은 아이오니아를 굴복시키려 했고, 아이오니아가 무릎을 꿇기를 거부하자 아예 부숴버리려 했다. 리븐은 정신을 집중하고 천천히 쟁기 뒤를 따라 걸었다. 녹서스 제국이 그렇게 기를 썼건만, 결국 이 땅에는 봄이 찾아들었다. 녹서스가 쫓겨난 지도 일 년이 족히 넘었고, 비와 진흙으로 회색과 갈색투성이였던 대지에는 초록색 새싹이 가득 피어났다. 대기조차도 새출발을 하리라 마음 먹은 듯했다. ''희망.'' 리븐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머리카락이 턱까지 내려왔다.
“''디에다'', 딸.”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다시 주문과 같은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양손으로는 쟁기의 나무 손잡이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에마이. 파이르.''”
“''파-이르''라고 해야지.” 느닷없이 숲 속 그늘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븐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다. 손에 쥔 쟁기 손잡이가 휘청 했고, 그 서슬에 가죽 고삐가 확 당겨지는 바람에 삐쩍 마른 황소도 제자리에 섰다. 쟁기날이 묵직한 흙덩어리를 호되게 들이받았고, 그 안에 있던 돌멩이가 날에 부딪히며 금속성의 “카랑” 하는 소리가 났다.
그 목소리는 늙은 농부의 것이 아니었다.
리븐은 입으로 천천히 숨을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는 한 명이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리븐은 몇 년 동안이나 훈련을 받았기에 즉각 방어 태세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대신 느릿느릿 움직여 목소리가 들려온 쪽과 자신 사이에 쟁기와 황소가 놓이도록 방향을 틀었다. 몸은 지나칠 정도로 가벼웠다. 리븐은 쟁기 손잡이를 꽉 틀어쥐었다. 몸을 고정시키려면 옆구리 쪽에 묵직한 지지대가 필요했다. 오른쪽 허리에 조그마한 채집칼을 차고 있기는 했지만, 그 작고 구부러진 날로는 야생 사과 꼭지나 딱딱한 풀줄기를 자르는 게 고작이었다.
“''파-이르''가 맞아.”
목소리는 밭 가장자리, 짙은 소나무 숲과 농지가 만나는 지점에서 들려왔다.
“중간에 살짝 늘어져야 한다고.” 남자는 앞으로 걸어오며 다시 말했다. 검고 숱 많은 머리카락을 뒤로 당겨 묶었고, 거친 천 망토를 어깨에 둘렀지만 왼쪽 어깨의 금속 견갑과 검집도 없이 허리에 찬 검이 그대로 드러났다. 전사인 것은 분명했지만 어느 가문을 섬기거나 어딘가에 소속된 것이 아니었다. 남자는 떠돌이 검사였다.
위험해. 리븐은 그렇게 판단했다.
“''파-이르.''” 남자가 다시 말했다. 정확한 발음이었다.
리븐은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을 하면 억양이 드러나는 게 싫어서였다. 그녀는 남자와 자신 사이에 쟁기가 놓이는 방향으로 몇 걸음 옮겼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고정하고는 몸을 숙여 돌멩이에 걸린 쟁기날을 살펴보는 척했다. 진흙을 가르도록 날을 세운 쟁기날이니만큼 채집칼보다는 쓸모가 있을 터였다. 오늘 아침에 늙은 농부가 쟁기날을 틀에 고정시키는 모습을 지켜보았으니,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전에 여기 있을 때는 널 못 본 것 같은데. 하기야 세월이 좀 지났지.” 남자가 말했다. 떠돌이 생활을 꽤 오래 한 듯, 목소리에는 투박함이 묻어났다.
리븐은 침묵을 지켰다. 아까부터 있었던 벌레 울음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치안판사들이 수마 원로가 사망한 사건에 대해 새로운 증거를 찾으려고 공판을 열 거라던데.” 남자가 말을 이었다.
리븐은 남자를 무시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황소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치 가축에 씌우는 굴레의 전문가라도 되는 듯한 손길로 등에 얹은 가죽 끈을 쓸어주는 한편, 커다랗고 검은 눈에 몰려드는 각다귀를 쫓아주었다.
“하기야 네가 이곳 사람이 아니라면 그 사건은 잘 모르겠구나.”
리븐은 그 말에 고개를 들고 낯선 남자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물론 남자와 자신의 사이에 황소를 방패로 둔 상태에서. 남자의 콧대에는 긴 흉터가 나 있었다. 리븐은 저 흉터를 남긴 사람은 지금 살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남자의 눈길은 단단했지만 그 아래에는 호기심이 얼핏 엿보였다. 문득 얇은 가죽으로 만든 신발바닥을 통해 땅이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천둥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누가 오는군.” 남자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리븐은 늙은 농부의 집이 있는 언덕을 향해 어깨 너머로 돌아보았다. 무장을 하고 말을 탄 사람 여섯이 막 등성이를 넘어 쟁기질을 해놓은 밭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 있다!” 그 중 한 남자가 억센 말투로 소리쳤다. 리븐은 그토록 오랫동안 배우려고 기를 썼던 억양의 미묘한 차이를 분석해 보았다.
“그런데… 혼자가 아닌데?” 다른 남자가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때문에 눈을 찌푸리며 물었다.
바람이 불어와 쟁기와 리븐을 휩쓸고는 숲의 그늘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리븐은 낯선 남자가 서 있던 쪽을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기수들이 정체를 궁금해할 여지도 남기지 않고.
“유령인가 보지.” 우두머리로 보이는 맨 앞의 남자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저 여자애가 베어버린 누군가가 복수를 하러 나타났던 걸 거야.”
기수들은 말에 박차를 가하더니 오늘 아침 리븐이 갈아놓은 이랑을 마구 짓뭉개며 그녀를 빙 둘러쌌다. 우두머리 남자가 탄 말 뒤쪽에는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뻣뻣한 꾸러미가 얹혀 있었다. 리븐의 시선이 그 말을 따라가는 동안 다른 말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말굽에 밟힌 부드러운 흙이 그 아래 차갑고 단단한 진흙 속으로 파고들었다.
리븐은 마지막으로 쟁기날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기수 중 두 명은 석궁을 가지고 있었다. 쟁기날에 손을 대기도 전에 석궁 화살이 날아들 게 뻔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쟁기날을 건드리고 싶어 꿈틀거렸지만, 그녀의 마음은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온몸의 근육이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오랫동안 투쟁을 위해 훈련받은 몸은 쉽사리 진정하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솟구치면서 귀가 먹먹해졌고, 머리 안쪽이 망치로 두들기는 듯 쿵쿵 울렸다. 넌 죽을 거야. 머릿속에서 고함 소리가 울렸다. 그렇다면 저놈들도 저승길에 동행시켜야지.
리븐의 손가락이 서서히 쟁기날 쪽으로 다가갔다.
“그 앨 놔둬요!” 농부의 아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는 틈에 리븐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아사, 빨리 와요! 어떻게 좀 해보라고요.” 말 안 듣는 소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단련된 목청이었다.
리븐 주위를 빙글빙글 돌던 기수들이 멈춰섰다. 늙은 농부와 농부의 아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리븐은 뺨 안쪽을 꽉 깨물었다. 그 쩌릿한 통증 때문에 싸우고 싶은 욕망이 누그러졌다. 저들의 밭에 아이오니아 인의 피를 뿌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일을 끝낼 때까지 집에 얌전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우두머리가 농부 부부에게 말했다.
늙은 농부 아사는 절룩거리며 밭으로 들어섰다. “그 앤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그건 제가 가져온 거예요.” 농부는 말등에 얹힌 꾸러미를 가리켰다. “그러니 제가 책임지겠어요.”
“콘테 영감. 오-파.” 우두머리가 말했다. 남자의 얇은 입술 한쪽 끝에 상대를 깔보는 미소가 걸렸다. “영감은 이 여자애가 누군지 알고 있지? 이 앤 나쁜 짓을 수도 없이 저질렀어. 내가 마음대로 할 수만 있었다면 이 앤 이미 시체가 되어 있을 거야.” 남자는 리븐을 내려다보더니 짜증스러운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러니 할 말이 있거든 공판에서 하라고.”
우두머리가 말하는 동안, 리븐은 양발이 축축한 흙에 깊숙이 박혀 있었기에 그나마 꿋꿋이 서 있을 수 있었다. 수렁에 빠졌다는 좌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맥박이 얕고 빠르게 뛰었고, 등 뒤 날개뼈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리븐의 머릿속을 차차 다른 시간, 다른 밭의 광경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군마들이 연신 코를 힝힝거리며 피로 물든 흙을 말굽으로 짓밟는 밭이었다.
기억 저편에서 더 끔찍한 공포가 밀려와 자신을 덮치기 전에, 리븐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숨을 깊숙이 들이켰다. ''봄비가 이 땅을 적시는 거야. 시체들이 아니라.'' 리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눈을 뜨면, 살아 있는 사람들만 보일 거야.''
리븐은 눈을 떴다. 밭은 그대로였다. 파헤친 무덤이 아니라 금방 갈아놓은 흙이었다. 우두머리가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손에는 아이오니아 금속으로 만든 쇠고랑을 들고 있었다. 리븐의 고향땅에서 범죄자에게 채우던 족쇄보다는 훨씬 정교했고 소용돌이 형상이었다.
“녹서스의 개 주제에 과거로부터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우두머리의 얼굴에는 잔잔한 승리감이 내비쳤다.
리븐은 쟁기날에서 눈을 들어 농부 부부를 바라보았다. 얼굴의 주름살에는 이미 너무 많은 고통이 새겨져 있었다. 저들에게 또다른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리븐은 부부가 서로에게 기대어 꼭 껴안고 있는 장면을 눈앞에 떠올렸다. 무슨 비극이 벌어질지 직감하고 저항 아닌 저항을 하는 모습이었다. 늙은 농부가 땀에 젖은 얼굴을 소맷자락으로 훔치는 순간, 리븐은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리븐은 우두머리 쪽으로 양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눈길은 차가웠으나 입에는 의기양양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리븐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이 와 닿았다.
“걱정 말아라, ''디에다.''” 농부의 아내가 소리쳤다. 잔뜩 긴장한 목소리였지만 희망이 섞여 있었다. 너무 많은 희망이. 너무 지나친 희망이. 농부 부부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와중에도 바람이 갓 쟁기질한 흙냄새와 더불어 긴장 섞인 그 목소리를 실어왔다. “''디에다.''” 목소리가 속삭였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말해 줄게.''”
“''디에다.''” 리븐은 그 속삭임에 답했다. “딸.”

소녀가 잡혀간 후 이틀 동안, 샤바 콘테는 남편이 느릿느릿한 손길로 짓밟힌 밭고랑을 다듬고 씨를 뿌리는 일을 돕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녀가 했더라면 훨씬 쉽게 해치웠을 일이었다. 아니, 아들들만 살아 있었어도 늙은 부부가 직접 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공판이 열리는 날 아침은 쌀쌀했다. 시내까지는 먼 길인데다 나이 먹은 발걸음으로는 더욱 오래 걸릴 것을 알았기에, 부부는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 공회당으로 향했다.
“그 애가 녹서스인이란 게 알려진 거야.”
“걱정도 많수.” 샤바는 그렇게 대꾸하며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가 그렇게 혀를 차는 게 남편 아사보다는 닭들을 진정시키는 데 더 어울린다는 것을 깨닫고는 남편에게 희망찬 미소를 지었다.
“녹서스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유죄 판결을 내릴 걸.” 아사는 집에서 짠 천으로 만든 옷깃 속에서 우물우물 말했다.
젊은 시절 말 안 듣는 가축들을 도축장으로 모는 일을 했던 샤바는 우뚝 멈춰서서 남편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사람들은 우리만큼 그 애를 모르잖아.” 샤바는 손가락으로 남편 가슴을 쿡 찔렀다. 그 손짓에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러니까 당신이 그 애가 좋은 사람이란 걸 말해 주란 말이야.”
아사는 아내의 성격을 잘 알았다. 아무리 말해도 아내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었기에, 그는 그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바는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고는 말없이 길을 재촉했다. 공회당에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샤바는 되도록 앞쪽 자리를 잡으려고 재빠르게 공회당 나무 긴 의자와 사람들 틈을 뚫고 들어가다가… 쿨쿨 자고 있는 남자의 한쪽 다리에 발이 걸렸다.
샤바는 작게 악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잠들어 있던 남자는 끙 하고 신음하더니,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샤바의 한쪽 팔을 잡아챘다. 덕분에 샤바는 돌바닥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남자의 손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발밑을 조심하셔야지요, 오-마.” 낯선 남자가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숨결에는 술냄새가 짙게 배어났지만 발음은 전혀 꼬이지 않고 정확했다. 남자는 샤바가 똑바로 서는 즉시 팔을 놓아주었다.
샤바는 이 괴상한 구원자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의 훑어보는 눈길에 남자는 망토로 어깨와 얼굴을 감쌌다. 강인한 콧대에 난 희미한 흉터도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
“공회당은 밤새 술이나 마신 사람들이 쉬는 장소가 아니라우, 젊은이.” 샤바는 옷깃을 바로잡았다. 턱끝을 쳐드는 동작에서 업신여기는 마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늘 여기서 한 여자의 생사가 결정돼요. 치안판사님들 앞에서 당신 악행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든 썩 나가요.”
“임자.” 아사가 다가와 한 손을 아내의 팔에 얹었다.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성질 좀 죽여야 하지 않겠소. 저 사람은 해를 끼칠 의도는 아니었잖아. 그냥 냅둡시다.”
망토를 눌러쓴 남자는 평화를 바란다는 몸짓으로 손가락을 두 개 들어보였지만, 여전히 얼굴은 망토에 가린 채였다. “문제의 핵심을 찔러들어가시는군요, 오-마.” 남자의 목소리에는 익살스러운 기운이 스며 있었다.
샤바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감추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 버렸다. 아사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내를 섣불리 평가하지는 말아주게, 젊은이.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무고한 영혼이 유죄 판결을 받을까 봐 걱정하는 중이라서 그렇다네.”
망토를 쓴 남자는 알겠다는 듯 낮은 소리를 냈고, 노인은 아내를 따라 걸어갔다. “그 점에선 같은 마음입니다, 오-파.”
그 나지막한 목소리에 놀란 노인은 뒤를 돌아보았으나, 남자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미풍 한 줄기만이 남아 옆에서 대화에 한창 빠져 있는 어느 부부의 옷자락이 잠시 바스락거렸다. 망토를 두른 남자는 이미 공회당 저쪽의 어둠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샤바는 모여든 군중 앞쪽의 자리를 택했다. 나무 긴 의자의 매끄러운 소용돌이 문양은 나무술사들이 시민의 의무에 대한 조화로운 토의와 균형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기에 편안해야 했지만, 샤바는 도무지 편안한 자세를 취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남편을 흘긋 보았다. 아사는 삐걱거리는 낡은 걸상에 가만히 앉아 호명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집행관 한 명이 서서 나무조각으로 이를 쑤시고 있었다. 샤바는 그 집행관이 멜케르, 즉 리븐을 잡으러 왔던 기수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멜케르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멜케르는 강당 뒤편에 자리한 문 여러 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문들이 열리고 어두운 빛깔의 망토를 걸친 사람 세 명이 나오자, 멜케르는 얼른 몸을 똑바로 펴고 입에 넣었던 나무조각을 내던졌다.
세 명의 치안판사들이 강당 앞쪽의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는 동안, 그들이 입은 법복의 매끄러운 천이 살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치안판사들이 사람들로 가득 찬 강당을 한 번 훑어보자, 시끌시끌하던 소음이 순식간에 침묵으로 바뀌었다. 치안판사 중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매가 연상되는 콧날의 여자가 엄숙한 태도로 일어섰다.
“이번 공판은 수마 원로 사망 사건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기 위해 열리는 것입니다.”
주민들 한가운데쯤에서 메뚜기떼의 날갯짓 소리 같은 웅얼거림이 퍼져나왔다. 판사가 말한 새 증거에 대해 들어본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이 중에 녹서스인이 있다는 소문 때문에 모여든 것이었다. 하지만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없었다. 수마 원로의 죽음은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그의 명상실을 빛나게 했던 마법, 바람의 검술만으로 증거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수마 원로 자신을 제외하면 그 검술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제대로 치유되지 않았던 상처가 벌어졌다. 공통의 고통을 느끼는 순간, 사람들은 한 마음이 되었다. 강당 안은 고함 소리로 가득 찼다. 수마 원로가 죽지만 않았더라면 마을 주민들이 그렇게 무더기로 죽어나가지는 않았으리라. 수마 원로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녹서스 부대의 절반 병력이 나보리로 가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녹서스와의 교전에서 수많은 아들과 딸들이 죽었다. 수마 원로만 살아 있었더라도 그렇게 처참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더 나쁜 일은, 마을 주민 중 한 명에게 그 책임이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크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마 원로를 살해한 사람이 누군지 우린 벌써 알고 있잖아요.” 풍파를 겪어 쭈글쭈글해진 샤바의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바로 배신자 야스오지요.”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 말에 동의하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새어나왔다.
“수마 원로의 바람의 검술을 누가 알고 있었죠? 야스오지요!” 샤바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요네는 그 용서 못할 동생을 찾으러 갔지만 아직 돌아오지 않았어요. 그 비겁한 야스오가 요네의 행방과도 관련이 있는 게 거의 틀림없어요.”
이번에는 군중들이 이를 갈며 야스오의 피를 바라는 웅성거림이 터져나왔다. 샤바는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긴 의자에 앉았다. 누가 죄인이냐는 물음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것이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매가 연상되는 콧날의 판사는 오래 전부터 제아무리 심하게 꼬인 옹이도 곧게 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한 나무술사 가문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밤색에 반들반들 닳은 완벽한 모양의 나무 구체 하나를 들어올려 새까만 받침대에 단호한 동작으로 내려놓았다. 그 날카로운 소리에 사람들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고 공회당 안은 순식간에 질서를 되찾았다.
“본 공판은 수마 원로 사망에 얽힌 사실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당신은 이해를 훼방 놓고 싶으신가요? 이름이…?”
샤바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뺨이 확 달아올랐다. “콘테. 샤바 콘테입니다.” 그녀는 훨씬 누그러진 어조로 말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아사는 걸상에 앉은 채 아내를 바라보다가 숱이 줄어들고 있는 정수리에 맺힌 땀을 닦았다.
“아까도 말했듯, 우리는 새로운 증거를 받아들이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매 같은 얼굴의 판사는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있는 군중을 한 차례 훑어본 다음 집행관 멜케르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여자를 데리고 오도록.”

2.2. 제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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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판사들이 공회당에 들어오면서부터 하늘을 뒤덮은 구름이 군데군데 갈라졌다. 공회당 뒤편의 커다란 문들이 다시 열렸다. 리븐의 눈에, 공회당 안으로 내리쬐는 눈부신 햇살을 피해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이리저리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리븐이 공회당 문턱을 넘어 걸어들어가자, 차분히 가라앉아 있던 공회당 안 대기가 부산스러워졌다.
리븐의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두 명의 전투 사제가 군중 앞쪽의 널찍한 통로로 리븐을 데리고 갔다. 구름이 다시 하늘을 덮었고, 천정 높이 뚫린 소용돌이 모양의 창과 조각으로 뒤덮인 지붕에서 늘어뜨린 원통형 랜턴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공회당은 다시 한 번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리븐이 곁을 지나가자, 샤바 콘테는 침을 꿀꺽 삼켰다.
리븐은 군중의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잘 알고 있었다. 돌로 만든 감방에서 하룻밤을 지내느라 흰색 머리칼에 지푸라기가 군데군데 붙은 여자. 이방인. 적. 녹서스의 딸.
피로감이 지금도 옷에 들러붙어 있는 밭의 진흙처럼 온몸에 덕지덕지 스며들었다. 마음은 허물어져 있었으나, 아사 노인이 걸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리븐은 상체를 조금 세웠다.
리븐 앞 연단에는 세 명의 판사가 앉아 있었다. 중간에 앉은 근엄한 표정의 판사가 쇠고랑을 차고 서 있는 리븐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리븐은 마법으로 만들어진 나무 의자에 앉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옆에 선 집행관이 자신을 잡으러 밭으로 왔던 기수들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챘다. 집행관의 얇은 입술에는 그때와 똑같이 오만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좋을 대로 해. 그래봤자 더 힘들기만 할 테니.”
집행관은 자못 흡족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중앙의 판사는 책망하는 표정으로 집행관을 흘긋 보고는 리븐에게 말했다.
“너는 이 땅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이곳의 방언은 까다로우니, 이제부터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공용어로 말하겠다.”
녹서스인이 대개 그랬듯이, 리븐도 명령과 지휘에 필요한 정도로는 아이오니아 공용어를 배웠다. 하지만 아이오니아의 대지가 지역마다 다르듯이, 아이오니아의 각 마을은 주민들이 선호하는 바에 따라 억양이 다양하고 독특했다. 리븐은 판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기다렸다.
“이름이 무엇인가?”
“리븐.”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쉰 데다가 목에 무엇이 걸린 듯 꺽꺽 소리가 섞여나왔다.
“물을 가져다 주게.”
판사의 말에 집행관이 일어나 물이 든 가죽 자루를 가져오더니 리븐에게 불쑥 내밀었다. 리븐은 물 자루를 받지 않았다.
“그냥 물이다.” 중앙의 판사 옆쪽에 앉은 판사가 탁자 너머로 몸을 내밀며 말했다. “왜, 우리가 너에게 독이라도 먹일까봐 두려운 거냐?”
리븐은 고개를 저었지만 자루는 받지 않았다.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을 뿐 도움은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집행관은 입술을 일그러뜨리고는 자루를 자기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집행관은 이를 번들거리며 리븐에게 여봐란듯이 의기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네가 이 공회당으로 불려온 것은…” 판사가 말하는 바람에 리븐은 법복을 걸친 세 판사와 공회당을 가득 메운 주민들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네가 어떤 할 이야기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형을 선고받는 것 아닙니까?”
판사는 놀란 표정을 얼른 숨겼다.
“네가 온 곳에서는 정의를 어떻게 실현하는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는 정의를 위해서는 먼저 납득과 이해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판사는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리븐에게 말했다. “우리는 네가 이 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지식이 범죄임이 밝혀진다면, 그에 따라 너에게 형을 선고하고 처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리븐은 판사에게서 눈길을 돌려 아사를 바라보다가 다시 판사를 보았다. 녹서스에서 정의란 대개 전투로 결정되었다. 순식간에 죽게 된다면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리븐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판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무엇을 알고 싶습니까?”
판사는 상체를 뒤로 젖혔다. “리븐, 너는 어디 출신인가?”
“나는 고향이 없습니다.”
판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븐의 말을 반항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매를 연상케 하는 얼굴의 판사는 울화를 삭히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태어난 장소가 있을 것이 아니냐.”
“트레베일의 어느 농장입니다.” 리븐은 아사를 한 번 돌아보고 덧붙였다. “녹서스요.”
죄수의 말을 들으려고 쥐죽은 듯 조용하던 공회당 주민들은 일제히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렇군.” 판사가 말했다. “그런데 너는 그곳을 더 이상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냐?”
“고향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면 거긴 고향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추방을 당했다는 거냐?”
“돌아갈 마음이 있다면 그렇겠지요.”
“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것이냐?”
“녹서스는 이제 과거의 녹서스가 아닙니다.” 리븐의 목소리에 조바심이 스몄다. “이 문제는 이제 넘어가죠?”
“그렇게 하지.” 리븐은 판사의 냉정한 태도가 거슬렸다. 손목의 쇠고랑보다 더 마음을 자극했다. “너는 녹서스 함대와 같이 온 거겠지?”
“그럴지도 모릅니다.”
“모른단 말이냐?” 판사는 어리둥절한 듯했다.
“기억이 안 납니다.” 리븐은 뒤쪽의 군중을 흘긋 곁눈질하다가 샤바의 눈과 마주쳤다. 늙은 여인도 같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리븐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중요한 일입니까? 전투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게 다입니다.”
리븐의 말에 사람들이 마음 속에 꾹꾹 눌러두었던 고통스러운 전쟁의 기억이 단숨에 되살아났다. 기억의 단편들이 서로를 밀치면서, 어깨를 부딪치면서, 비명을 지르면서, 제각기 주민들의 머릿속을 차지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누군가가 고함을 쳤다. “녹서스의 쓰레기! 내 아들이 너 때문에 죽었어!”
곰팡이 핀 가지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와 리븐의 뒷덜미에 맞았다. 썩어버린 즙과 걸쭉해진 속이 셔츠 등을 타고 내려가며 젖은 얼룩을 남겼다. 썩은 냄새가 피어올랐다. 리븐은 죽음의 냄새를 닮은 그 냄새 때문에 오래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 가지가 신호라도 된 듯, 주민들은 들끓기 시작했다. 리븐은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발.” 그녀는 나직이 읊조렸다. 주민들에게 그만하라고 간청해야 할지, 아니면 이들이 분노를 폭발시키도록 부추겨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가지가 더 많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몇 개는 돌 바닥에 떨어져 터졌고, 하나는 리븐의 무릎 뒤쪽을 때렸다. 리븐은 비틀거렸지만 손이 묶은 상태로 할 수 있는 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판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민들과 리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치안판사의 법복을 펄럭이며 밤색 공을 받침대에 땅땅 두들겼다. 주민들이 앉아 있는 나무 긴 의자들이 치안판사의 의지에 화답하여 끼익끼익 소리와 함께 늘어났다 줄었다 하기 시작했다.
“이 공회당이 균형을 회복할 것을 요청합니다!”
판사의 질책에 주민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리븐. 우리는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 판사는 한층 자제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많은 아이오니아 인과… 녹서스인이… 유명을 달리했다. 너는 어떠하냐?”
그것은 리븐을 괴롭히는 질문이었다. 왜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나는 죽음을 모면했을까? 리븐은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리븐은 나직히 말했다.
“그래.” 판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리븐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가족이 목숨을 잃은 주민들을 달랠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하지만, 자신에게는 말할 진실이 없었다. 그 당시 일에 대한 리븐의 기억은 망가졌다. 리븐은 고개를 숙였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판사는 심문을 멈추지 않았다. 공회당 안에 들끓는 분노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이 땅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까지 오게 된 거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에 여기 온 적이 있느냐?”
“그…” 리븐은 주저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순간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수마 원로와 만났느냐?”
그 이름을 듣자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기억의 기억, 안개처럼 흐릿하면서도 동시에 예리한 것이 휙 스쳐지나갔다. 한때 과거가 자리잡았던 빈 자리를 분노가 채웠다. 리븐은 배신을 당했다. 그리고 배신을 했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리븐은 좌절감에 울컥 내뱉었다. 손목의 쇠고랑이 절렁절렁거렸다.
“전쟁은 많은 것을 파괴하지.” 판사가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도 말이야.”
이것이 아이오니아의 이해인가. 리븐은 전의가 누그러들었다.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훨씬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리븐은 농부 노인이 느릿느릿 걸어 판사들 앞에 놓인 증인석으로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굵은 눈썹에서 몇 가닥 삐져나온 털을 매만지는 아사의 손가락은 떨리고 있었다.
“아사 콘테.” 판사가 천천히 말했다. “오-파, 오늘 우리와 지식을 나누러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을 알고 있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압니다.” 노인이 대답했다. “지난 습한 계절이 시작될 무렵 우리한테 왔습니다.”
“우리요?”
“나하고 아내, 샤바 말입니다.”
판사는 콘테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공회당 앞쪽 긴 의자에 앉아 여전히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꿈지럭거리고 있었다. 판사는 리븐을 가리켰다.
“이 여자가 당신들에게 왔다고요?”
“그러니까… 우리 밭에 있는 걸 내가 발견했습니다.” 노인은 멋쩍어 하며 말했다. “전날 밤에 송아지 한 마리가 없어져서, 새벽에 찾으러 나갔거든요. 그런데 송아지 대신 저 아이를 발견한 겁니다.”
놀람과 우려가 섞인 웅얼거림이 다시 공회당 안을 휩쓸었다.
“그럼 첩자잖아!”
“첩자가 더 많이 올 거야!”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킬 수밖에 없어!”
판사가 탁자에 놓인 묵직한 나무 공에 손을 가져가자 소란은 멎었다. “그 여자가 무엇을 원했습니까, 콘테 씨?”
노인은 다시 눈썹을 매만지며 리븐을 흘긋 보았다. 미안하다는 표정이었다.
“죽기를 원했습니다, 치안판사 님.” 아사는 힘없이 말했다.
판사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땐 습한 계절이 시작될 무렵이었지요.” 아사는 말을 이었다. “아주 흠뻑 젖어 있더군요. 녹서스인답게 근육은 탄탄했지만 걸친 건 진흙뿐이었고, 열 때문에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저 여자가 녹서스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요?”
“무기를 갖고 있었거든요. 검이었어요. 칼집에는 녹서스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아이오니아 인이라면 그런 무기를 갖고 다니지 않죠.”
판사는 입술을 오므렸다. “콘테 씨, 녹서스의 침공으로 잃은 것이 많으시지요?”
“그렇습니다, 치안판사 님.” 노인은 아내를 돌아보았다. “아들 둘을 잃었지요.”
“그래서 저 여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노인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집으로, 샤바에게 데려갔습니다.”
공회당 안의 주민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그토록 무자비했던 적에게 아사가 보인 너그러움을 믿을 수 없어서였다. 주민들의 얼굴마다 가족을 잃은 사연이 떠올랐다. 공회당 안에서 녹서스의 침공에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노인은 고개를 들고 주민들을 돌아보았다. 단단히 닫힌 그들의 마음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는 태도였다.
“내 아들들… 내 아들들의 뼈는 이미 오래 전에 하늘의 섭리에 씻겨나갔지요. 우리가 잃은 그 사람들이, 과연 우리가 슬픔에 빠져 그들 곁에 묻히기를 바랄까요?”
리븐의 눈에 노인과 그 아내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보였다. 샤바의 눈은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우리는 아직 그들을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노인의 목소리는 떨렸다. “스스로를 과거라는 진창 속에 파묻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요.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있다면 말이죠.”
샤바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상체를 더 똑바로 세워 앉았다. 자신들의 선택을 비난하겠다면 어디 해보라는 자세였다. 아사는 군중들의 시선을 피해 돌아앉아 판사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가 앉은 걸상이 삐걱삐걱 소리를 냈다.
“그 동안 수많은 죽음이 있었습니다. 나는 또 하나의 죽음을 보탤 수 없었습니다.” 아사가 설명했다. “우리 부부는 저 아이를 씻기고 우리가 가진 것을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판사는 아무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은 판사가 자신이 입은 셔츠와 바지를 유심히 보며 걷어올린 소맷자락을 상상으로 내려보는 것을 느꼈다. 리븐은 판사가 어떤 그림을 떠올리고 있는지 알았다. 자신 역시 농부의 아내가 그 옷을 내주었을 때부터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 셔츠와 바지는 리븐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젊은 남자가 입을 만한 옷이었다. 어쩌면 샤바의 미소를, 어쩌면 아사의 친절한 눈매를 닮았을 남자.
리븐에게 그 생각은 자신의 나약함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었다. 녹서스의 힘으로 살아오거나 죽어갔던 그 모든 세월. 그리고 리븐은 그 시간에서 미약하게나마 뻗어나온 희망을 받아들였고, 그 옷을 입고,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에게 몸을 맡겼다.
“저 애는 원기를 회복한 후로 밭에서 일을 하고 싶어했습니다.” 늙은 농부는 말을 이었다. “아내와 나는 나이가 많죠. 그런 도움이 고마웠습니다.”
“목숨을 잃을까 두렵지 않았습니까?”
“저 아이는 녹서스와 관련된 건 쳐다보지도 않아요. 녹서스를 증오하니까요.”
“저 여자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했습니까?”
“아니요. 저 앤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했어요. 한 번은 아내가 물어봤지만 아무 말도 안 하더군요. 우린 그런 걸 묻는 게 저 애에게 고통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 이후로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저 여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고향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어떻게 안다는 겁니까?”
아사 콘테는 눈을 비볐다. 그 얼굴에 난감한 표정,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잠시 후 늙은 농부는 공회당 안의 주민들을 의식하고는 빠른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열에 들떠서 꿈을 꾸더군요, 치안판사님. 우리한테 온 그날 밤에요. 저 아이에게 속했던 무언가가, 저 아이가 아주 소중히 여겼던 무언가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그러면서 큰 소리로 녹서스를 비난했습니다.”
“저 여자가 무엇에 대해 말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요, 치안판사님.” 늙은 농부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저 아이의 칼자루 끝부분이 검집에 끈으로 묶여 있었거든요. 나흘 전에 저 아이가 그 끈을 푸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칼자루 안의 검날이 부러져 있는 것도요.”
그 날, 리븐은 헛간 안에서 그 모습을 본 것은 한창 쥐를 잡고 있던 뚱뚱한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녹서스 무기의 품질을 비웃는 몇 마디가 주민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럼, 그 지식으로 당신은 무엇을 했습니까, 콘테 씨?”
“나는 그 검을 사원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판사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매처럼 휘어진 코 너머로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목적에서죠?”
“사제님들이라면 그 검을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검날이 다시 붙는다면, 저 아이를 괴롭히는 과거의 유령들이 저 아이를 놓아주지 않을까 해서요.” 등 뒤의 군중들이 다시 들끓었지만, 노인은 리븐과 그녀의 손을 결박한 쇠고랑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현재의 저 아이가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당신의 지식을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콘테 씨.” 판사가 그렇게 말하며 군중들을 노려보자 공회당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증언을 마쳐도 좋습니다.”
판사는 탁자에 펼쳐놓은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집행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무기를 가져오도록.”

사원 사제 두 명이 진홍색 천을 덮은 커다란 나무판을 가지고 들어와 판사들 앞 탁자에 조심조심 내려놓았다. 전투 사제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세로로 홈을 새긴 나무 견갑과 흉갑으로 보아 고위층 사제임이 분명했다.
“보여주시죠.” 판사가 말했다.
전투 사제가 진홍색 천을 젖히자, 연 방패보다도 큰 검과 검집이 드러났다. 검집에는 우르 녹서스 글자가 예리하게 새겨져 있었다. 묵직한 각도에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모양새가,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아이오니아 글자와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판사들의 주의를 끈 것은 검이었다. 검은 너무나 두툼하고 육중해서, 훈련을 잘 받은 전투 사제라도 한 팔로 들어올리려 했다가는 팔이 부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하물며 그들 앞에 쇠고랑을 찬 채 서 있는 소녀의 가느다란 손목으로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사실 리븐 자신도 그 검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그 검은 조각조각이 나 있었다. 마치 성난 괴물의 발톱이 그 금속 날을 마구 찢어놓기라도 한 듯했다. 그 중 가장 큰 조각 다섯 개는 그 자체만으로도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러진 채 부드러운 아이오니아 천 위에 놓여 있어도,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검이었다.
판사가 리븐을 보았다. “이 무기는 네 것이겠지.”
리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산산조각이 났으니 휘두르는 건 어렵겠군.” 판사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민들 사이에서 숨죽여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사제가 언짢은 듯 선 채로 자세를 바꾸었다. “이 무기에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치안판사님. 녹서스인들이 그 검에 마법을 부여한 겁니다.” 목소리에서 역겹다는 감정이 강하게 드러났다.
리븐은 판사가 그 말을 귀 기울여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판사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일 뿐 조각조각난 검날을 계속 살펴보고 있었다. 이윽고 리븐이 예감한 대로, 판사의 눈이 리븐이 채워넣으려 했던 검날의 빈 부분을 찾아냈다. 매처럼 휘어진 판사의 코가 실룩거렸다.
“한 조각이 빠졌군요.”

공회당에 불려나온 젊은 사원 달인은 초조한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달인이여, 콘테 씨가 사원에 가져온 무기가 이것이 맞는가?” 중앙에 앉은 판사가 물었다.
“맞습니다, 치안판사님.”
“이 공판에 보고한 사람이 자네가 맞는가?”
“맞습니다, 치안판사님.”
“이 무기가 우리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젊은 달인은 긴 소맷자락에 양손을 비볐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아니면 돌 바닥에 토하기라도 할 것처럼 창백했다.
“달인?” 판사가 대답을 재촉했다.
“저는 유골 정화사입니다, 치안판사님.” 젊은 남자는 힘겹게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었다. 양손은 촛농처럼 축 늘어졌다. “원로님들이 하늘로 가시고 몸뚱이가 남으면, 그 뼈를 모아 준비를 하는 게 제 일입니다.”
“유골 정화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자네가 이 무기를 주목한 이유가 무엇이지?”
“검날과 같습니다.”
판사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군중들도 똑같이 어리둥절했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리븐은 불안감이 뱃속에서부터 파도처럼 일어 피부를 뚫고 나오는 느낌이었다.
“제가 수마 원로의 뼈를 준비할 때, 그러니까, 그 분이 돌아가시고 사원에서 말입니다.” 달인의 설명은 아무 말이나 쏟아놓느라 요령부득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포기하고 망토 주름 안쪽에서 조그마한 비단주머니를 꺼내 길쭉한 손가락으로 더듬더듬 매듭을 풀었다. 그러고는 안에서 금속 조각을 하나 찾아내어 높이 쳐들었다. “이 금속입니다, 치안판사님. 저 부러진 검날과 같습니다.”
달인은 종종걸음으로 판사에게 다가갔고, 판사는 그가 내민 손에서 조각을 받아들어 뒤집어 보았다. 멀리서 보아도 부러진 검날의 금속과 아주 흡사했다.
리븐은 숨이 콱 막혔다. 그 조각은 자신이 오랫동안 찾아다니다가 포기한, 과거의 기억의 단편이었다. 이제 기억의 단편들이 합쳐지려 하고 있었다. 이제 리븐의 마음 속, 잊혀졌던 어두운 구석이 드러나려 하고 있었다. 리븐이 애써 깊숙이 파묻어 버렸던 죄책감이 마침내 고개를 내밀려 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밝혀질 사실에 대비해, 리븐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이걸 어디서 찾았는가?” 판사가 물었다.
달인은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었다. “수마 원로의 목뼈 쪽에 있었습니다.”
공회당을 메운 주민들이 헉 소리를 냈다.
“전에는 왜 이걸 가져오지 않았나?” 판사는 사냥감을 포착한 매 같은 기세로 눈을 가늘게 떴다.
“가져오려 했습니다.” 달인은 리븐의 부러진 검 옆에 서 있는 전투 사제를 보지 않으려고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그건 별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달인과 달리, 판사는 아무 거리낌없이 전투 사제를 바라보았다.
“가까이 오시오.” 판사는 그렇게 명령하고, 부러진 금속 조각을 전투 사제에게 넘겨주었다. “나머지 조각들과 맞춰 보시오.”
전투 사제는 달인을 매섭게 노려보았으나 판사의 명령에 따랐다. 그는 리븐의 검으로 다가갔다가, 조각을 내려놓기 직전에 판사를 돌아보았다. “치안판사님, 이 무기에는 흑마법이 깃들어 있습니다. 이 조각을 맞추면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집행하시오.” 판사의 어조는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전투 사제는 검 쪽으로 돌아섰다. 공회당 안의 모든 눈길이 집중된 가운데, 그는 금속 조각을 부러진 검 끝쪽에 내려놓았다.
검은 조용했다.
판사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리븐은 늙은 농부 부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이 품었던 희망이 이제 끝났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리븐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나약했다. 이 세상에 누군가를 그토록 낙담시킬 수 있는 것이 있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잠시 동안이나마 리븐이 무고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노부부가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이 되어버렸기에, 그것이 리븐을 아프게 했다. 이 자리에서 밝혀진 그녀의 과거는 그 어떤 검날보다도 날카롭고, 가슴 저미는 통증을 안겼다.
리븐의 귀에 검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제발요.” 리븐은 목청을 높였다. 그녀는 공회당 안의 소란보다 더 크게 외치려고, 쇠고랑을 떨쳐버리려고 기를 썼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검의 진동이 커지면서, 이젠 공회당 안 어디에서나 그 떨림을 느끼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주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서로를 마구 밀치면서 뒤쪽으로 물러났다. 판사가 벌떡 일어나 부러진 검이 놓인 나무 탁자로 양손을 뻗었다. 탁자 가장자리가 마구 비틀리면서 커지기 시작했고, 탁자 위쪽에는 푸르른 가지들이 싹이 트듯 피어나 검 위쪽으로 솟아올랐다. 하지만 리븐은 그런 정도로는 마법을 막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들, 엎드려요!” 리븐은 고함을 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검에서 나오는 소리에 묻혀버렸다.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면서 아예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다음 순간, 검의 힘이 폭발하면서 룬 에너지와 나뭇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돌풍이 휘몰아치면서 그나마 서 있던 사람들도 모조리 돌 바닥에 쓰러졌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사람들의 얼굴이 리븐을 향했다.
리븐의 입술은 차가웠고, 뺨은 반대로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마음 속 유령들, 철저하게 파묻어 버렸던 기억들, 그것들이 이제 완전히 되살아나 그녀의 눈앞에서 잇달아 어른거리며 솟아올랐다. 그들은 아이오니아의 농부들이었고, 아들과 딸들이었고, 이 마을 주민들, 결코 녹서스에 무릎 꿇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리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븐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들은 그녀의 죄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리븐의 동료 전사, 전우애로 맺어진 형제자매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제국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그리고 기쁘게 목숨을 바치려 했다. 하지만 리븐은 그들을 실망시켰다. 그녀는 녹서스의 깃발, 고향과 목적의식을 약속하는 깃발을 앞세워 그들을 이끌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배신당하고 버려졌다. 그들 모두가 전쟁이라는 역겨운 독에 목숨을 잃었다.
지금 그 유령들이 산 자들 가운데, 검의 힘에 쓰러진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주민들은 비틀비틀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리븐은 여전히 오래 전 그 때 그 골짜기에 서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죽음이 코와 목구멍을 조여왔다.
''아냐, 이들은 죽었어. 현실이 아니야.'' 리븐은 자신을 타일렀다. 그녀는 아사와 샤바를 보았고, 두 사람도 그녀를 보았다. 그림자 두 개가 그들 근처에 서 있었다. 하나는 아사를 닮은 눈을 지녔고, 다른 하나는 샤바의 입매를 지녔다. 노부부는 주위를 감도는 죽음의 과거는 의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의지하듯 꼭 끌어안은 채 서 있었다.
“''디에다.''” 샤바가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리븐은 더 이상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안고 있을 수 없었다. 노부부가 전해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의 판결에 순응하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에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당신들의 원로를 죽였어요.” 리븐은 숨을 헐떡이며 고백했다. 그녀의 갈라진 목소리가 공회당을 가득 채웠다. “내가 그 사람들을 모두 죽였어요.”

2.3. 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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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처럼 고요하던 공회당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주민들은 머리 위를 덮친 위험한 마법의 힘을 피하려고 우왕좌왕했고, 요란한 소리에 놀란 전투 사제들이 무장을 갖추고 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마구 밀어젖혔다.
바닥에 쓰러졌던 매부리코 판사가 몸을 일으키고 나무 공을 탁자에 두들겼다.
“공회당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십시오.”
공회당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뒤집혔던 긴 의자들이 바로 놓였고, 주민들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망토를 눌러쓴 남자는 콧대의 흉터를 긁다가 공회당 벽 가슴 높이에 생긴 시커멓게 그을은 자국을 살펴보러 걸음을 옮겼다. 전투 사제 하나가 머뭇거리며 마법 검으로 다가갔다.
탁자는 다리가 부러져 주저앉았고, 검과 검집은 그 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검날은 여전히 부러진 채였지만 초록빛이 감도는 에너지 불꽃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위를 감돌고 있었다. 전투 사제 하나가 허리를 숙이고 양손을 뻗어 칼자루 양쪽을 쥐더니 무게를 가늠해 보려는 듯 들어올렸다. 검날이 부러졌음에도, 검은 형체를 그대로 유지했다.
“그 저주받을 물건을 당장 치워버려요!” 군중들 속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사제는 검을 검집에 꽂아넣었고, 다른 사제들이 다가와 검을 가져갔다.
“내가 그 사람을 죽였어요.” 리븐은 그 말을 되풀이했다. 그 목소리는 그녀의 것인 동시에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이 그녀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리븐은 공회당 안의 얼굴들을 돌아보았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리븐은 다시 한 번 과거의 어두운 구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리븐.” 판사가 말했다.
리븐은 검에서 눈을 돌려 판사를 바라보았다.
“네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리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런 짓을 했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리븐은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손이 묶여 있었기에 조용히 턱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었다.
판사는 준엄한 표정으로 리븐을 노려보며 그녀가 더 말하기를 기다렸으나, 리븐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자 집행관에게 손짓을 했다.
“리븐, 너는 새벽까지 쇠고랑을 찬 채로 여기 있어야 한다. 네가 처벌을 받기 전에 너와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자유롭게 와서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리븐은 손목에 채워진 쇠고랑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치안판사들과 나는 서류를 검토할 것이고, 원로들이 너의 범죄에 적절한 처벌을 논할 것이다.”
주민들은 침묵 속에 공회당을 나갔다. 마지막으로 공회당을 나간 사람은 아사와 샤바 노부부였다. 리븐은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샤바가 남편의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감정이 북받친 목소리여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리븐은 노부부의 지친 발이 공회당 문턱을 넘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뒤를 돌아보았다. 공회당 안에 산 자는 아무도 없었다. 리븐 곁에 남은 것은 과거의 유령들뿐이었다.

한밤중의 공기는 차갑고 깨끗했다. 깜깜한 하늘 높이 솟은 보름달은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달빛은 공회당의 열려 있는 문으로 흘러들어왔지만 공회당 뒤켠에서 리븐을 덮고 있는 그늘까지는 닿지 못했다. 낮에는 그렇게나 붐볐던 공회당인데 지금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전투 사제들이 검을 가져갔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벽을 빙 둘러 들이박힌 나무조각들과 그을린 자국에 겁을 먹고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썩은 가지를 들고 열려 있는 문 앞까지 오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리븐은 혼자서 생각에 젖어들게 되었다. 잠깐씩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지만, 다가오는 새벽이 마지막 새벽일 수도 있음을 아는 사람의 얕고도 금방 깨는 잠이었다. 해가 뜨기 몇 시간 전, 발을 질질 끌며 걷는 소리가 들렸다. 리븐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오-파. 여긴 왜 오셨죠?”
늙은 농부는 리븐 옆에 느릿느릿 웅크려 앉더니 천으로 된 도구꽂이를 땅바닥에 펼쳤다. 리븐도 전에 보았던 이런저런 도구들이 주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아사가 기다란 쟁기날을 쟁기에 달거나 뗄 때 쓰는 금속 공구들이었다.
“얘야, 내가 여기 왜 온 것 같니?” 달빛을 배경으로 검게 떠오른 아사의 얼굴에서 주름살이 도드라져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그늘의 우울한 기분은 아사에게서 느껴지지 않았다.
“너는 죽고 싶다는 소망을 좀체 버리지 않는구나.” 노인은 부드럽게 꾸짖었다. “그건 균형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니야.”
아사는 리븐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쇠고랑을 풀기 시작했다. 그를 밀쳐내고 집으로 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리븐은 그러지 않았다.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었다. 이번 삶에서 곁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이 노인뿐이라면, 되도록 오래 그 시간을 누리고 싶었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는데, 공회당 바깥에서 자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리븐은 아사를 보았다. 마치 장난감으로 어린아이를 달래듯, 노인은 풀어낸 쇠고랑을 들어올려 잘랑잘랑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오-파. 빨리 숨으세요. 누가 오고 있어요.” 리븐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대꾸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아사는 발을 끌면서 구석진 그늘에 몸을 숨겼다. 리븐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잠이 든 척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눈은 뜬 채였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 나무들을 흔들었고, 공회당의 커다란 문 기둥들이 휘어졌다. 다음 순간, 달빛 아래 남자의 윤곽이 문지방에 나타났다.

남자의 망토는 이제 얼굴 뒤로 완전히 젖혀져 어깨에 느슨히 매달려 있었다. 검과 금속 견갑의 외곽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까 가지를 들고 왔던 주민들처럼 남자 역시 문지방을 넘지 않고 우뚝 서 있다가, 잠시 후 주민들과는 달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돌바닥을 밟는 남자의 발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남자는 리븐과 검 하나 정도의 사이를 두고 멈춰섰다.
남자는 등 뒤로 손을 뻗어 가죽 검집을 하나 꺼내들었다. 표면에 거친 솜씨로 룬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리븐의 발치에 풀썩 검집을 던졌다.
“어느 게 더 무거운 건가, 리븐?” 남자가 물었다. “너의 검인가, 아니면 너의 과거인가?”
낯선 남자는 리븐이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리븐은 더 이상 자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보았다. 회색 그늘에 얼굴이 가려져 있음에도, 콧대의 흉터는 선명히 보였다.
“누구시죠?” 리븐이 물었다.
“또 하나의 부러진 검이지.” 남자가 대답했다. “넌 죄에 따르는 책임을 받아들일 각오는 되어 있구나. 그 점은 감탄했다.”
남자의 얼굴에 잠깐이나마 말한 대로의 표정이 스쳐갔다.
“네 검에는 더 많은 사연이 얽혀 있지.” 남자가 말을 이었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말로 알고 싶나?”
“내가 그 사람을 죽였어요.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죽은 거예요. 모두가 나 때문에 죽었어요.” 리븐은 이 이상 더 큰 슬픔을 짊어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무기를 들어라.”
리븐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일어나서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는 거다.” 반박 같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어조였다.
바람 한 줄기가 세차게 불어와 공회당 안에서 소용돌이치더니 긴 의자를 넘어뜨렸다. 리븐은 바람에 떠밀려 일어섰다. 본능과 몸에 새겨진 기억 때문에 팔이 저절로 움직였다. 리븐은 검집에 담긴 검을 들고 이름 모를 남자를 마주보았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걸 부러뜨려 달라고 했어요.”
“네가?” 남자는 비웃는 투로 물었다.
남자의 질문은 신랄했고, 리븐의 기억을 뼛속까지 후벼팠다. 그때의 상황이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하자, 리븐은 몸서리를 쳤다. 수마 원로 목소리는 고요하고 차분했다. 명상실 안의 공기에는 생각의 무게가 켜켜이 쌓여 있었고 향 냄새가 가득했다. 수마 원로는 리븐이나 리븐이 짊어진 짐을 섣불리 평가하지 않았다.
리븐은 지금 눈앞에 선 낯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비통한 감정이 가슴 속에 차올랐고, 이윽고 온몸에 넘쳐흘러 양손에까지 다다랐다. 리븐은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휘어잡고 검집에서 룬 검을 뽑아들었다.
“당신은 왜 여기 있죠?” 리븐이 물었다.
부러진 검에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했다. 눈이 멀 듯한 밝은 빛이 나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에 비추었다.
“네가 죽기를 원한다고 들었다.”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리븐의 과거를 괴롭게 만든 유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리븐은 그들을 향해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남자의 검이 슬픔과 격노를 막아냈다. 그 바람에 리븐은 분노가 치솟았고, 현재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춤을 추듯 빙글빙글 돌며 검투를 벌였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공기가 윙윙거리며 진동했고 따다닥 소리가 났다.
“난 스승님의 살인자를 처치하려고 여기 왔다.” 남자는 악문 잇사이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래, 너를 처치하려고 온 거다.”
리븐은 웃음을 터뜨렸다.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럼 어디 해봐요.”
바람의 전사는 검을 내리고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는 공기의 흐름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마법의 힘이 극한까지 끌어올려지자, 남자는 룬 검에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검에 깃든 녹서스의 주문이 요동을 쳤고, 부러진 검 조각들의 간격이 넓어지더니 맨 앞쪽의 조각이 떨어져나갔다.
에너지가 붕괴되자 조각은 아사가 숨어 있는 그늘진 구석을 향해 굉장한 속도로 날아갔다. 그 조그마한 죽음의 조각이 노인의 목에 꽂히려 했다. 짙디짙은 향냄새의 기억이 리븐의 콧속을 가득 채웠다. 리븐은 어느 새 수마 원로의 명상실로 돌아가 있었다.
“안 돼!” 리븐은 검을 떨어뜨렸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검날의 파편은 주름진 노인의 살갗을 파고들기 직전에 멈추더니 바람의 힘으로 공중에 그대로 떴다. 콧대에 흉터가 있는 남자가 긴장된 한숨을 내쉬자, 검날 조각은 힘없이 돌바닥으로 떨어졌다.
“콘테 영감님, 운이 좋군요. 콧바람이 그렇게 세다니.”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리븐은 노인에게 달려가 힘껏 껴안았다. 그러고 어깨 너머로 남자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미풍에 검은 머리카락이 날렸다.
“''사실''이구나.” 남자는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와 검날 조각을 집어들었다. 조금 전까지도 분노가 가득하던 남자의 표정에 이해의 빛이 서렸다. “네가 수마 원로를 죽였어. 하지만 그분을 살해한 것은 아니야.”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리븐이 그렇게나 찾아헤맸던 순간이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 삶을 살고 있었다. 입에서 연신 말이 쏟아져 나왔다. 리븐은 아사에게 매달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그분에게 갔어요. 내가 애원을 했어요…” 감정이 북받치는 바람에 한 단어 한 단어를 또박또박 발음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 지경이었다. “그분에게 나를 도와달라고 애원을 했어요. 이걸 부러뜨려 달라고요. 나를 부려뜨려 달라고요.”
“수마 원로님은 네 검을 부러뜨리려 하셨고.” 흉터가 난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씩 잠기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우리의 과거를 부러뜨릴 순 없다, 리븐.”
리븐은 다시 살아갈 수 없는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죽은 듯이 지내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제 리븐의 눈에, 이 남자도 자신의 과거에서 온 유령들을 끌고 다니는 것이 보였다. 남자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주변에서 소용돌이치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수마 원로를 지키는 일은 내 책임이었다. 내가 만약… 그날 밤… 제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분을 보호할 수 있었겠지. 넌 그분을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었어.” 리븐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속사정을 알게 된 투사가 상대 투사에게 보내는 눈빛이었다. 남자는 자신만의 짐, 보이지 않는 악마들을 다시금 자기 어깨에 짊어졌다. 남자의 시선이 리븐의 시선과 마주쳤다. “결국 그분의 죽음이라는 책임은 나한테 있으니까.”
“야스오?” 노인이 남자에게 다가가 찬찬히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마디 진 손가락 하나를 들어 좌우로 흔들었다. “넌 이 문제에서 진실을 인정한 것으로도 훌륭한 명예를 보여준 거다.”
“내 명예는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어요, 오-파.” 리븐이 그랬듯, 야스오도 희망을 받아들이기를, 용서하는 마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덜어주는 아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의 실수가 너무나 많은 실수를 낳았어요. 그건 내가 견뎌야 할 형벌입니다.”
야스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갈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매부리코 치안판사가 공회당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신중한 태도로 걸어다니며 두 부러진 검사가 벌인 전투로 부서지거나 망가진 곳이 없는지 살폈다. 그녀가 한 걸음 뗄 때마다 금속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박자를 맞추듯 울렸다. 이윽고 판사는 리븐과 아사 쪽으로 걸어오며 속도를 늦추었다. 그제서야 판사가 한 손에 쇠고랑을 열고 잠그는 열쇠꾸러미를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판사는 콧대에 흉터가 있는 남자를 마주보게 되자 걸음을 멈추었다.
“책임을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속죄의 첫 단계지, 야스오.” 판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두 번째는요?” 그렇게 묻는 야스오의 목소리에는 약간이나마 간절함이 엿보였다.
야스오가 판사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공회당조차도 숨을 죽이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했다.
판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텅 빈 공회당 안에서 크게 울렸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거다.”
리븐은 야스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어 보였다. 리븐은 오랫동안 죽음을 원했다. 하지만 야스오의 분투를 목격한 지금은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힘든 일이야말로 살아가는 것임을.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짓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임을. 야스오도 이제 리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남자도 꿋꿋하게 자신의 과거를 직시하게 될까?
바람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는 등을 돌리고 공회당을 나가 밤의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리븐은 늙은 농부의 주름투성이 마디 진 손을 꼭 붙들었다.

해가 뜰 무렵의 날씨는 서늘했다. 하지만 두터운 구름의 상태를 보면 오늘 하루는 따뜻하고도 습한 날이 될 듯했다. 열쇠꾸러미를 든 매부리코 판사와 전투 사제가 리븐을 데려가기 위해 공회당을 찾았다. 바닥에 얌전히 놓인 쇠고랑을 보자 판사는 가느다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리븐은 자신의 미래와 마주하기 위해 공회당 밖으로 걸어나갔다.
다른 판사 두 명은 공회당 밖 광장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있었다. 아마도 리븐이나 리븐의 룬 검과 함께 공회당 안에 있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인 듯했다. 서늘한 미풍 한 줄기가 매부리코 판사의 땋은 머리칼을 휘날렸다.
“증거를 검토하고 원로들과 상의한 결과, 이 녹서스 여성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판사가 입을 열었다.
리븐은 자신이 태어난 땅의 이름이 나오자 울컥 화가 솟았다. 샤바와 아사가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죽음으로는 이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다.” 판사는 말을 이었다. “그것으로는 마을을 찢고 파괴하는 범죄의 피해에서 회복할 수 없다.”
주민들은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은 그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그들이 누구를 잃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젊은이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아들과 딸들.
“사실 본 공판에서는 더 길고 더 힘든 형벌을 선고하려 한다. 추방자 리븐은 이제부터 자신이 부순 것들을 수리하게 될 것이다.”
판사는 매부리코 너머로 리븐을 내려다보았다.
“힘든 노동을 요구하는 형벌이다. 먼저 콘테 부부의 밭을 가는 것부터 시작하도록.”
낮은 웅성거림이 주민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본 공판에서는 또한 리븐에게 공회당을 수리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녹서스의 침공으로 피해를 입은 집과 가족들에게도 보상하도록.”
판사는 기대하는 눈빛으로 리븐을 보았다. “이 판결을 따르겠느냐?”
모두의 눈길이 리븐에게 집중되었다. 낯선 감정이 목구멍 아래에서부터 차올랐다. 리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과거의 유령들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산 사람들 사이에 마구잡이로 섞여 있었다. 하지만 리븐은 그 광경이 오히려 반가웠다. 그 유령들에게 자신이 이런 선물을 받을 자격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네.” 사람들의 함성 때문에 리븐은 자기 목소리를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노부부가 달려와 양쪽에서 리븐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껴안았다. 리븐은 두 사람의 품 안에서 긴장을 풀고, 그들이 자신에게 기대듯 자신도 그들에게 기댔다.
“''디에다.''” 샤바가 리븐의 하얀 머리칼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딸.” 리븐도 마주 속삭였다.

3. 전장의 자매들


해당 문서 참고 바람.

4. 이음매와 흉터


[image]
"아이오니아에는 어쩌다 왔어요?"
무라마트는 가벼운 목소리로 물어보려고 애썼다. 시장으로 가는 길에 다른 여행자와 함께 모닥불을 쬐면서 불편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모닥불 건너편에 거대한 무기를 멘 녹서스인이 앉아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 칼에 얼마나 많은 아이오니아인이 희생됐을까?'
하얀 머리의 여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힐끗 보며 씹고 있던 검게 탄 피망과 밥을 삼키더니 그릇을 내려다봤다. "전 녹서스에서 태어났어요." 억양이 강했지만 흠잡을 데 없는 음조였다. "전쟁 이후로 돌아간 적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어요."
녹서스인의 아버지 아사 콘테는 미소를 지으며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단호히 말했다. "이제 여기가 이 애 고향이야."
함께 야영하자며 아사를 찾아간 무라마트는 아사의 수레 뒤쪽에 잠들어 있는 녹서스인을 발견했다. 아사는 지금과 같이 단호한 어조로 이 녹서스인이 자신의 딸 리븐이라고 소개하며 곧 뒤따를 의문에 대비하듯 턱을 쑥 내밀었다. 그때 무라마트는 아사의 말에 더 토를 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사의 '딸'을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제 질문에는 답을 안 했잖아요." 무라마트가 재촉하며 자신의 잔에 차를 따르자 목에 걸린 치료사 목걸이의 차임이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뭐 때문에 우리 해안까지 왔어요, 리븐?"
그릇을 꽉 쥐는 리븐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 "전쟁에서 싸웠거든요."
그 짧은 말에는 슬픔이 가득했다. 이렇게 후회하는 녹서스인은 흔치 않았다.
"왜 떠나지 않았죠? 자기와 자기 나라 사람들이 수많은 고통을 주고 파괴를 일삼은 곳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꽉.
하얗게 질린 리븐의 주먹에 쥐여 있던 접시가 반으로 두 동강 나면서 까맣게 탄 피망과 밥이 땅으로 떨어졌다. 리븐은 숨을 헉 들이쉬며 접시 조각을 떨어뜨리고 안쓰럽게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머리를 들며 중얼거렸다. "접시 값은 낼게요. 더는 저녁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이럴 생각은—"
그러나 무라마트는 듣고 있지 않았다. 대신 깨진 접시 조각을 들어 귓가에 갖다 대며 부드럽게 흥얼거렸다. 그리고 천천히 음높이를 조정하며 점토 안의 정령을 불렀다.
음색을 정확히 맞추자 정령이 그 소리에 공명하여 뒤통수가 잔잔히 울렸다. 무라마트는 음을 유지하며 목걸이를 들어 올려 자신과 정령의 노래와 합이 맞는 차임을 찾을 때까지 하나씩 튕겼다.
무라마트는 불빛에 비친 차임을 바라봤다. 각 차임에는 공명하는 정령의 치료법을 식별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번 차임에는 끝으로 갈수록 뚜렷해지는 곡선이 그려져 있었다. 연기 문양이었다. 무라마트는 모닥불 위에 접시 조각을 올려 연기로 감쌌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조각이 다시 하나로 붙었다. 약간의 검은빛 이음매와 굴곡만이 접시가 깨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저는 치료사예요." 무라마트는 눈이 휘둥그레진 리븐에게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그릇은 바꿀 필요 없어요."
리븐은 그릇을 받아 자세히 살펴봤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두꺼운 검은색 이음매를 쓸어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한 거죠?"
"모든 것에는 정령이 있어요. 모든 정령은 온전해지길 원하고요. 전 정령에게 치료에 필요한 것을 물어 그것을 주는 것뿐이에요."
"그래도 흉터가 남네요." 리븐이 한숨을 쉬었다.
"흉터는 회복의 흔적이에요. 그 접시는 다시 전처럼 돌아갈 수 없겠지만 온전해요. 그리고 튼튼하죠. 제가 보기엔 이 접시가 더 아름다운걸요."
리븐은 말없이 접시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제가 남은 이유는 이곳에서 수많은 고통을 야기하고 파괴를 일삼았기 때문이에요. 속죄하기 위해 떠나지 않았죠."
무라마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븐의 흉터는 보이지 않아도 아주 깊은 듯했다. 어쩌면 이 녹서스인은 다른 자들과 다를지도 몰랐다.
그때 무라마트의 시선이 리븐의 거대한 칼자루에 닿았다. 그것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베는 도구였다.
'달라 봤자 얼마나 다를까?'

무라마트는 마차 옆에 무언가 크게 부딪히는 소리에 흐릿한 눈을 떴다. 도적이었다. 무라마트는 가장 무거운 주전자를 쥐며 리븐이 밤새도록 망을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무라마트도 도적을 상대하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자신의 몸 하나 지키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문을 연 무라마트는 리븐에게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침입자 하나가 마차 밑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닥불 옆에 선 리븐은 커다란 도적 세 명에게 둘러싸인 상태였다. 리븐은 거대한 칼자루를 쥐었다. 무라마트는 그 끝에 부러진 칼날만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여전히 위협적인 무기는 도적들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리븐의 손에서 마치 고동치는 듯했다.
그 칼날을 본 무라마트의 속이 뒤틀렸다. 아이오니아인이 녹서스인의 손에 피를 흘리는 광경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라마트는 잠자코 지켜봤다.
도적들은 제각각 소리를 지르며 리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리븐은 한 발자국 나아가 칼날에서 나오는 기운을 터뜨려 도적들을 격퇴했다. 무기를 떨어뜨린 도적들은 어둠 속에서 무기를 찾으려고 허둥거렸다. 무라마트는 리븐이 도적들을 전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신 리븐은 섬뜩한 초록빛으로 빛나기 시작한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의 마법이 폭발하자 폭발에 닿은 도적 하나가 밀려나 바닥에 멍하니 쓰러졌다.
나머지 도적들은 여전히 손에 무기를 들고 서 있었다. 리븐이 팔을 뒤로 젖히자 수레에서 빛나는 금속 조각들이 리븐을 향해 날아왔다. 조각들은 검을 둘러싸며 하나의 형태를 이루었다. 사이사이 틈은 남아 있었지만 검은 마치 온전한 형태를 갖춘 듯 보였다. 그때 도적들이 다시 리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도에 그쳤다. 리븐이 검을 휘두르자 갑자기 돌풍이 불어 도적들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 마차에 세게 부딪힌 도적들은 전부 의식을 잃었다.
피를 흘리지 않고 거둔 승리였다.
쓰러진 도적들 위를 조심조심 건넌 무라마트는 리븐에게 물었다. "이제 어쩔 거예요?" 리븐은 땀도 한 방울 흘리지 않은 것 같았다.
리븐이 어깨를 으쓱하자 검의 파편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침까지 나무에 묶어 놓으려고요."
무라마트는 남아 있는 칼날을 바라봤다. 리븐이 검을 휘두르는 방식을 보고 나자 더는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무기를 좀 봐도 될까요?"
리븐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왜요?"
"나한테 줄 필요는 없어요. 들고만 있으면 돼요."
리븐은 경계하며 검을 들어 올렸다. 무라마트는 눈을 감고 음을 흥얼거렸다.
"뭐 하는 거죠?" 리븐이 깜짝 놀라 묻는 것과 동시에 무라마트는 정확한 음을 찾았다.
''—무언가를 찾는 눈 한 쌍—''
''—증오와 복수심으로 가득한 세 명의 사냥꾼—''
''—불타는 광경—''
''—모든 것이 불타는 모습—''
무라마트는 몸을 흔드는 리븐의 손길에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무라마트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이 검을 찾고 있어요. 당신을 찾고 있어요."
리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눈에는 아무런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뭘 한 거예요, 무라마트?" 리븐이 낮게 속삭이며 물었다.
"처음에 당신을 의심했어요. 사과의 의미로 검을 고쳐 주고 싶었죠."
"아니요." 무라마트는 단호한 어조에 깜짝 놀랐다. 리븐은 씁쓸하게 웃었다.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절대 이 검은 고치지 말아요. 당신이 고쳐 줬으면 하는 게 있지만, 그건 아무리 당신이라도 불가능하죠. 어쨌든...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리븐은 지친 듯 한숨을 쉬고 검의 파편을 주웠다.
"내일 일찍 시장에 가려면 다시 자는 게 좋을 거예요."
무라마트는 고개를 끄덕인 후 느릿느릿 마차로 돌아갔다. 뒤를 돌아보자 모닥불 옆에 앉아 불침번을 서는 리븐의 모습이 보였다.
무라마트는 사람을 치료하는 방법도 알고 싶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5. 구 설정



5.1. 구 배경 1


입술을 꼭 다물고 자기 키만큼 길고 무거운 장검을 휘두르며 매일같이 수련에 임하는 용맹한 소녀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리븐. 소녀는 그 무거운 검을 능숙하게 다루기 위해 굳은살이 박이고 그것이 다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자신을 채찍질하며 엄격한 훈련을 거듭했다. 리븐이 최고가 되기 위해 그토록 헌신했던 것은 녹서스의 이상인 '힘'에 대한 굳건한 믿음 때문이었다. 녹서스의 주민이라면 종족, 성별,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오직 힘을 키워야만 권력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녀가 소녀였던 시절부터 훌륭한 군인으로 두각을 나타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녹서스의 변하지 않는 진리는 단 하나, 바로 '힘'이다. 리븐은 효율적이며 무자비한 전사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녀의 진정한 저력은 힘에 대한 굳은 신념에 있었다. 전투에 임할 때면 그녀는 어떤 의심도 품지 않았고, 윤리 앞에 주저하는 법도 없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리븐은 이내 동료들 사이에서 젊은 리더로 떠올랐고 녹서스 정신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녹서스 최고 사령부는 그녀의 비범한 열정에 보답하고자 녹서스 마법으로 벼려지고 강화된 흑석 룬검을 하사했다. 이 룬검은 카이트 실드보다 무겁고 폭도 넓었지만, 그녀의 손에는 맞춘 듯 제격이었다.
리븐은 얼마 후 녹서스 침공군의 정예요원이 되어 아이오니아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시작하자마자 대학살로 변질되었다. 녹서스의 군인들은 무시무시한 자운 특제 전쟁기계들을 뒤따라 죽음의 들판을 행군했고, 그들이 지나간 곳은 모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리븐은 상관의 명을 받들어 이미 처참하게 부서지고 망가진 적의 잔당들을 말살했다. 침공이 계속될수록, 녹서스 군의 목표는 아이오니아를 교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들을 멸망시키려는 것임이 분명해졌다. 그녀가 생각하던 영광스러운 싸움이란 결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병사의 명예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격렬한 교전이 끊임없이 이어지던 어느 날, 리븐이 지휘하던 부대가 삽시간에 아이오니아 군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그녀는 급히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것은 하늘을 가득 메운 신지드의 생화학 폭격이었다. 리븐은 주위의 아이오니아 군은 물론 녹서스의 부대까지 말할 수 없이 섬뜩하고 처참한 형체로 녹아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녀는 가까스로 화학 무기의 포화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날의 기억까지는 지우지 못했다.
녹서스는 자취를 감춘 리븐을 전사 처리했고, 덕분에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었다. 리븐은 과거를 완벽히 끊어내기 위해 하사받은 룬 검을 파괴하고는 스스로 추방자라 칭하며 방랑을 시작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속죄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이 믿어온 순수한 녹서스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5.2. 구 배경 2


무수한 전쟁의 토대 위에 세워진 녹서스에서는 전쟁 고아가 사라질 날이 없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어느 전투에서 아버지를 잃은 리븐은 어머니마저 그녀를 낳다가 사망한 후 트레베일의 바위투성이 산비탈에 위치한 국영 농장에서 자랐다.
농장의 아이들은 육체의 힘과 필사적인 의지로 삶을 이어나가며 고철을 주웠지만, 리븐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 이상의 무언가에 목말라 있었다. 그녀는 지역 군 부대의 징집관들이 매년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서 자신이 꿈꾸는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마침내 제국에 자신의 힘을 바치기로 서약한 날, 리븐은 녹서스가 자신을 그토록 되고 싶었던 제국의 딸로 받아주리라는 것을 알았다.
리븐은 역시 타고난 군인이었다. 비록 어리지만 수 년간의 고된 노동으로 단련된 그녀는 자신의 키보다 긴 장검의 무게를 이내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전투의 열기 속에서 리븐은 새로운 가족을 얻었고, 전우애로 맺어진 형제 자매들과의 유대는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제국에 대한 리븐의 헌신이 너무나 독보적이었기에 보람 다크윌은 그녀에게 검은 바위를 벼려낸 룬 검을 친히 하사했는데, 이 검에는 그의 궁정 소속원인 창백한 여마법사의 마법이 걸려 있었다. 무게는 카이트 실드보다 무겁고 너비는 비슷했다. 리븐의 취향에 딱 맞는 검이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녹서스 군은 오랫동안 계획해 온 침공의 일환으로 아이오니아를 향해 닻을 올렸다.
새로 시작한 전쟁은 예상보다 길어졌고, 아이오니아가 무릎을 꿇지 않으리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리븐의 부대가 맡은 임무는 포위 공격 중인 나보리 지역으로 진격하는 다른 부대를 호위하는 것이었다. 그 부대의 대장 에미스탄은 자운 출신의 연금술사를 고용했는데, 새 무기를 시험해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리븐은 녹서스를 위해 기꺼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지금 이 부대원들에게서는 비뚤어진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리븐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 이들이 무기와 함께 운반하고 있는 항아리들은 리븐의 눈에는 그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짐으로 보일 뿐이었다.
두 부대의 격전은 점점 더 격렬해져만 갔고, 심지어 부근의 땅조차도 그들을 탐탁히 여기지 않는 기운이 감돌았다. 거센 비바람이 치는 와중에 언덕에서 진흙이 쏟아져 내려와 리븐과 전사들은 치명적인 그들의 짐과 함께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아이오니아의 전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위험을 목도한 리븐은 에미스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리븐이 받은 답은 능선에서 날아온 한 발의 불화살이 전부였다. 리븐은 이 전쟁이 더 이상 녹서스의 국경을 넓히기 위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상관없이 적을 완전히 말살시키려는 참극에 불과한 것이었다.
화살은 수레에 명중했다. 리븐은 본능적으로 검을 빼 들었으나 자신을 제외한 다른 이들을 보호하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금이 간 항아리에서 화학 물질의 불기둥이 치솟고, 비명소리가 밤을 메웠다. 아이오니아 군과 녹서스 군 모두가 고통스럽고 소름 끼치는 죽음을 맞았다. 검의 마법 덕분에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독성 안개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던 리븐은 뜻하지 않게도 그녀를 영원히 괴롭힐 공포와 배신의 산 증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리븐에게 이후의 기억은 파편과 악몽으로만 존재한다. 상처를 싸매고 죽은 자들을 애도한 어렴풋한 기억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검을 증오하게 되었다. 검에 새겨진 글귀는 리븐이 잃어버린 모든 것을 환기시키며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녀는 녹서스와 자신을 이어주는 마지막 끈을 끊어버리기 위해 동이 트기 전 검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검이 마침내 산산조각이 났음에도 그녀는 평화를 찾을 수 없었다.
일생을 지탱하고 있었던 믿음과 확신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 리븐은 이제 스스로를 추방한 채 전쟁이 무참히 할퀴고 지나간 아이오니아를 방랑하고 있다. 용서를 해줄 수 없는 땅과 죽은 자, 그리고 그녀 자신으로부터의 속죄를 찾으며.

5.3.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리븐'''
날짜: CLE 21년 9월 9일
'''관찰'''
리븐이 스스로 짊어진 무게는 리븐 주변을 가라앉게 만드는 듯 싶다. 몇 조각 남은 녹서스의 갑주는 빛이 바랜지 오래며, 이를 통해 리븐이 얼마동안 녹서스에서 스스로를 추방시켰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들고 있는 부러진 검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하게 크다. 부러진 게 저 정도면 원래는 얼마만큼 컸는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전투의 여파가 그녀를 따라다닌다. 그녀의 눈빛 속에, 칼을 움켜쥔 그녀의 손에, 그리고 내딛은 한 걸음 한 걸음에서 느껴진다. 그것은 그녀를 놔두지 않는다. 대리석 관문을 통과하는 그 순간에도 리븐은 그 전투를 기억하고 있다.
'''회고'''
리븐의 손가락은 그녀의 칼에 새겨진 룬 글자를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오래 전 의미를 상실한, 이유 없는 버릇이었다. 자연스럽게 리븐은 어두운 곳에 있을 때 항상 생각나는 참담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어떠한 칼도 죄책감만큼 날카롭지는 않은 법이다.
자신의 죽음이 그녀 앞에 펼쳐지자 리븐은 무의식적으로 움찔했다.
마치 그 날의 참상을 가리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듯 자욱한 안개가 계곡 바닥을 덮었다. 지독한 악취가 진동했지만, 그것은 이미 아이오니아의 일부가 된지 오래였다. 죽음은 이제 아이오니아에 영원히 거주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갈수록 죽음의 권세가 커져갔다. 그런 광경을 수없이 봐온 리븐은 더이상 그런 것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중대가 그곳을 엄숙하게 행군할 때는 이미 해가 질 무렵이었다. 리븐의 군화 역시 진흙으로 뒤덮여지고 있었다. 그리고 땅을 적시고 있는 게 빗물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자 리븐은 순간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아야 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그런 생각을 밀어냈다. 앞으로도 수많은 전장, 안개, 그리고 참상이 있을 것인만큼, 그것을 인지하는 건 모든 게 끝난 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리븐은 자신의 훈련 교관의 말을 떠올렸다.
"집중은 필수다. 전장은 혼란스럽고 순식간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각자 한 번에 한 가지만을 수행할 수 있음을 명심하도록."
이제 행군할 시간이었다.
분노 중대는 42연대를 따라잡기 위해 며칠 동안 쉴새 없이 행군해왔었는데, 자운 부식부대가 발포한 곳을 지나오는 건 참으로 지저분한 일이었다. 전쟁에는 죽음이 따르는 법이지만, 민간인 희생자의 수는 섬뜩할만큼이나 늘어나고 있었다. 녹서스 고위 사령부는 평화를 사랑하는 아이오니아인들이 녹서스의 대군을 보는 순간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아이오니아의 저항은 강인하고 멈출 줄 몰랐다. 평화를 강조하는 국가 치고는 전쟁에 매우 능한 자들이었다.
리븐은 그것이 나름 인상 깊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그 중에서도 참으로 잔혹한 광경이었다. 쿠르 계곡은 부식부대가 숀-잔 북부 지역으로 가로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다. 아이오니아인들은 그 날 아침에 필사적으로 저항했었지만, 자운의 살상기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었다. 아이오니아의 대패였다. 녹서스 사령부가 예상한 병력의 절반도 긁어모으지 못했던 아이오니아인들은 패퇴했고, 녹서스 군은 부식부대가 지나가기에 앞서 충분히 조치를 취한 상태였다. 하지만 리븐은 그런 역부족인 저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녹서스군 시체가 널부러져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하루 정도 뒤쳐진 녹서스 마무리부대가 지원을 요청한 것이었다.
리븐은 그들 쪽으로 다가오는 발걸음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누군가가 그들의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리븐은 칼을 머리 위로 들어 중대의 진군을 멈췄다. 리븐의 검은 보기만해도 공포를 느끼도록 고안된 녹서스의 진정한 무기였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리븐보다 몇 살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녀였고, 앞으로 걸어오면서 그 소녀는 휘청거렸다. 소녀의 옷은 찢겨져 있었고 피투성이였다. 리븐의 중대를 본 소녀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안돼, 안돼, 안돼, 안돼. 제발, 그만하세요."
소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리븐은 병사 두 명에게 소녀를 데려가라고 지시했다. 병사들은 몇 주 동안 민간인들을 처리하느라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병사를 죽이기 위해 훈련을 받았지, 민간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훈련을 받은 게 아니었다. 아이오니아는 정규군조차도 없는 국가였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라고 리븐은 스스로 되새겼다.
두 병사는 소녀에게 다가가면서 서로 상대가 선두로 나서기를 바라는 듯 머뭇거렸다. 그것을 보다못한 리븐이 뭐라고 할 무렵, 소녀는 손을 움직였고 그녀의 앞에는 붉은 연무가 나타났다. 두 병사는 바닥에 쓰러지기도 전에 죽었다.
"기습이다!"
리븐의 외침은 병사들의 당황한 소리에 묻혔다. 중대 주변에 널부러진 수많은 시체들이 무기를 든 채 일어서 그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들은 시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산 자만이 가진 의지를 보이며 그들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리븐은 첩보원의 말을 기억했다: "예상했던 병력의 절반도 안 되는 숫자가......" 함정이었다.아이오니아 놈들은 이것을 치밀하게 계획했던 것이었다.
이미 중대의 후방은 함몰 직전이었다. 리븐은 중대에게 수비 태세를 갖추라고 크게 외쳤다. 사령부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리븐은 허리춤에서 신호탄을 꺼내 어두워지는 하늘로 그것을 쏘아올렸다. 희미한 녹색 빛이 계곡 전체를 밝혔다.
아이오니아인 한 명이 리븐을 향해 몸을 날렸다. 리븐은 한 칼에 그 상대를 두동강내버렸다. 아이오니아 놈들이 작전을 훌륭하게 짠 건 맞았지만, 리븐은 항복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자신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정당한 승리였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니까.
남아있는 녹서스 군사들은 서로 등을 맞대며 진형을 좁혔다. 중대의 절반이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었다.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이제 슬슬 녹서스 병사들의 절망을 즐기는 듯 공격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포위당해 있었다. 리븐의 병사들은 이미 피곤하고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반대로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리븐은 그들이 도대체 얼마동안 동료들의 시체 사이에 누워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끝을 보겠다고 결심한 리븐은 칼을 굳게 쥐었다.
그 때, 리븐의 앞에 눈부신 빛이 폭발했고, 아이오니아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라갔다. 포격이 어디서 온 건지를 알기 위해 몸을 돌린 리븐은 그 순간 또다른 포탄이 녹서스 진형 언저리에 명중하는 것을 봤다. 귀가 멍해진 리븐은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녹서스와 아이오니아 병사들은 모두 혼란에 빠져있었다. 일부는 싸웠고, 일부는 도망쳤고, 일부는 자신의 몸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 순간, 리븐은 깨달았다. 자운의 부식부대가 포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 법이다'라고 리븐은 되새겼지만, 그것은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 누구도 여기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생각대로라면 아이오니아 군대가 이 전투의 승자였지만, 그들 역시 처참하게 죽어갈 뿐이었다. 이것이 어떻게 녹서스의 가르침과 부합한단 말인가?
그 저주받은 계곡에서 도망가던 리븐의 주변에는 연이어 포탄이 작렬했다. 양측 병사들은 참으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 사건은 그녀를 바꿔놓았다. 그녀를 전장으로 앞장서게 했던 의지가 사라져있었고, 그 의지를 상실한 리븐은 길을 잃은 셈이었다.
기억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미 그 기억을 수천 번 되살아본 리븐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 날, 왜 그렇게 상황이 전개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녹서스가 스스로의 군대가 아닌, 자운의 끔찍한 기계공학에 의존했던 것인가? 자신이 왜 그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던 건지도, 자신이 왜 그곳에서 살아남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리븐의 등 뒤에서는 흐느끼던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일어섰다. 하지만 목소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니야, 뭔가 맞지 않아......" 리븐은 말하기 시작했지만, 계곡 전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술수를 부리고 있었다.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무슨 말을--"
"왜 리그에 합류하고 싶어하는가, 리븐?" 이번에는 상당히 짜증난 목소리였다.
"모르겠어!" 리븐이 내뱉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기억을 뒤져봤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나쁜 일이었다. 이미 몇 년 동안 그 기억을 가진 채 살아온 리븐이었지만, 그 기억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도 없었고,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다. 리븐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난 한 때 무언가를 위해 싸웠지만, 그것은 거짓이었어."
자신의 목소리로 그 말을 듣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난 여전히 녹서스를 사랑해. 하지만 이제......난 내 방식대로 싸우고 싶어."
"속 마음이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리븐은 그 질문을 곱씹었다. 그동안 리븐은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기를, 누군가가 함께 이 기억의 무게를 짊어지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그 기억을 공유하는 것, 자신의 눈으로 그 기억을 되살아보는 것은 그 무게를 줄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였고,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것이 존재함을 리븐은 깨달았다.
"드러나든 말든, 변하는 건 없어."
소녀가 사라졌고, 다음 순간 리븐은 전쟁기관소에 홀로 있었다. 부러진 그녀의 검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상당히 공격적인 절차였지만, 그를 통해 리븐은 거의 잊을 뻔했던 자신의 검의 무게를 느꼈다. 마치 그 자각에 응하듯, 리븐의 부러진 검에서 녹색 검기가 나타나 부러지기 전의 검의 형태를 따라 흘렀다. 리븐은 자신감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길을 되찾은 건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1] 아래의 배경은 요네 공개 이후 업데이트된 배경으로, 이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녹서스가 최초의 땅의 해안가에서 철수한 지 오래고, 발로란 내 힘의 균형이 몇 번이고 바뀌었지만, 아직도 리븐은 과거로부터 쫓기고 있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그리고 언젠가 다시 완전해질 수 있을지, 리븐은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