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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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us Furius Camillus
기원전 446년 ~ 기원전 365년(약 79-80세)
1. 개요
로마 공화국 초기 로마의 명장. 10년간이나 질질 끌었던 베이 시와의 전쟁을 마무리했으나 베이를 제2의 로마로 삼자는 평민들의 주장에 반대했다가 미움을 사 로마를 등져야 했다. 그러나 로마가 켈트족의 침략으로 파괴된 뒤 로마로 귀환해 5번이나 독재관을 맡아서 20년에 걸친 주변 라틴 부족과의 전쟁을 수행해 멸망의 위기에 몰렸던 로마를 강국으로 육성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활약상 때문에, 그는 '로마 제2의 건국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카밀루스는 기원전 446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투스쿨룸 시의 지도계층에 속한 푸리아 집안의 혈통이었다. 투스쿨럼은 기원전 490년대 로마의 적이었지만 나중에 라틴 도시들이 로마의 팽창에 맞서 전쟁을 벌일 때 대부분의 라틴 도시들과는 달리 로마에 귀순했다. 이후 푸리아 집안은 로마 사회에 통합되었고 기원전 450년대엔 중요한 로마 귀족 집안이 되어 주요 공직을 맡았다. 카밀루스의 아버지 루시우스 푸리우스 메들리누스는 호민관이었고 친척 퀸투스 푸리우스 파쿨루스는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다.
카밀루스는 일찍이 군대에 입대한 뒤 아이퀴인과 볼스키인과의 전쟁에 참가해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그는 이 전쟁에서 군대 맨 앞에서 말을 타고 진군하다가 허벅지가 적의 창에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내달려 적장을 공격하여 무찔렀다. 그는 이 공적으로 대정관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403년, 그는 켄소르(censor, 감찰관)에 임명되어 로마인들의 재산 및 호구조사를 착실하게 수행하고 끊임없는 전쟁으로 야기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과했다.
2.2. 베이 전쟁
기원전 406년, 로마는 에트루리아 족의 도시인 베이와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베이의 세력은 강력하고 천혜의 지형에 위치했기 때문에, 로마는 몇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원전 401년, 카밀루스는 군사 호민관에 선출되어 점점 더 인기가 없어지는 베이와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로마 군대의 지휘를 맡아 베이의 두 동맹 세력인 팔레리와 카페냐를 공격했다. 기원전 398년, 카밀루스는 전직 호민관의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어 카페냐를 약탈했다.
기원전 396년, 로마는 베이에게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이에 카밀루스는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독재관에 지명되어 전쟁을 이끌게 했다. 네페테에서 팔레리와 카페냐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카밀루스는 베이를 상대로 마지막 공세를 지휘했다. 그는 성벽 아래의 부드러운 땅을 파냈고, 로마군은 도시의 하수관을 통해 성 안으로 진입했다. 로마군은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모든 성인 남성을 학살하고 모든 여성과 어린이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로마 원로원은 10년에 걸친 베이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카밀루스에게 보답하기 위해 그가 4마리의 흰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나흘에 걸친 개선식을 개최하도록 허용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카밀루스는 로마에 거주하는 이들 중 절반을 베이에 이주시키려는 평민 세력의 계획에 반대했다. 또한 로마의 점쟁이 들은 전리품의 10분의 1을 아폴로 신을 위해 델피에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신들이 불쾌감을 느꼈다고 발표했고, 원로원은 이에 따라 시민들로부터 원하는 양의 금을 회수해 델피에 헌납했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분노했고 카밀루스와 로마 평민들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카밀루스는... 시민과 법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승리에 대한 자부심과 거만함, 그리고 4마리의 흰 말들이 그려진 전차를 몰고 로마를 돌아다닌 것을 지켜본 로마인들은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 로마인들은 4마리의 흰말이 몰고 가는 마차를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며 신이나 왕 만이 이러한 마차를 몰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듯 카밀루스의 화려한 개선식은 시민들과 카밀루스 간의 마음이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원전 394년 다시 군사 호민관에 선출된 카밀루스는 로마 사회계급간의 갈등을 외부 분쟁으로 돌리기로 하고 베이의 동맹시였던 팔레리를 포위했다. 이때 팔레리의 귀족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한 명이 카밀루스와 로미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실습을 한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로마 진영으로 가서 카밀루스에게 아이들을 바치며 아 아이들을 활용하면 손쉽게 도시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이 선물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옷을 벗긴 뒤 양팔을 뒤로 묶고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하나씩 들린 뒤 도시로 되돌아가면서 교사에게 혼쭐을 내주라고 했다. 팔레리 사람들은 이에 감사를 표하고 로마와 화해했다. 이후 아이퀴, 볼스키, 그리고 카페냐와 평화조약을 맺은 로마는 영토를 70% 확장했고, 그 땅의 일부는 가난한 시민들에게 분배했다. 이로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2.3. 로마를 떠나다
팔레리 시민들은 카밀루스의 인자함에 고마워했지만, 로마인들은 팔레리로부터 약탈한 전리품이 없었기 때문에 카밀루스를 원망했다. 게다가 카밀루스는 토지 재분배와 관련해 평민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자는 요구를 거부했고 베이 이주 역시 반대했다. 얼마 후, 카밀루스는 에트루리아 사람들로부터 얻은 약탈품을 횡령한 혐의로 정적들에게 고발당했다. 평민들은 그의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무조건 유죄를 선고할 작정이었고, 카밀루스는 아내와 아들 루시우스와 함께 로마를 떠나 아르다로 망명했다. 평민들은 그의 부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판을 진행한 후 그에게 1,500 데나리우스의 벌금을 부과했다.
2.4. 켈트족의 로마 점령에 맞서다
이 무렵, 켈트족은 에트루리아 지역의 클루시움을 포위했다. 클루시움은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로마는 사절단을 보내 켈트족에게 철수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런데 로마 사절단 중의 한 사람이었던 퀸투스 암부스투스 파비우스가 켈트족 귀족 한명을 죽이고 로마로 달아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세노네스족 족장 브렌누스가 그를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자, 로마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파비우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하고 켈트인들을 토벌하게 했다. 이에 격노한 켈트족은 클루시움 포위를 풀고 로마로 진군하면서 "우리는 로마를 징벌하기 위해 진군할 뿐이지 다른 도시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고래고래 소리질러 진군로에 위치한 도시들이 자신들을 치지 않게 했다.
그리하여 벌어진 아일라 전투에서, 로마군은 켈트족에게 완패를 당했다. 이후 켈트족은 로마로 진군해 단숨에 점령하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 이때 일부 로마 시민들은 카피툴리움 언덕으로 올라가 저항했고, 켈트족은 여러차례 언덕으로 올라갔으나 모두 저지되었다. 이에 켈트족은 카피툴리움 언덕을 포위하고 인근의 건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한편 아르다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카밀루스는 켈트족 일부가 아르다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자 도시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아르다 주민들에게 켈트족이 항상 패배한 적을 말살시키기 때문에 살아남으려면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후 그는 켈트족이 그들의 최근 승리를 축하하여 축제를 벌이며 주의가 산만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 야밤에 그들을 공격해 쉽게 격파했다. 이후 로마에서 도주한 로마인들은 그를 추대했고, 카밀루스가 보낸 전령이 원로원에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원로원 의원들은 카밀루스를 독재관에 앉히고 1년 동안 켈트족과 대적하는 임무를 맡겼다. 카밀루스는 12,000명에 병력을 끌어모았고 이후 더 많은 병사들이 각지에서 합류했다.
이 무렵 로마에서 전염병이 창궐한 많은 켈트족이 병사하자, 켈트족은 배상금을 받고 물러가기로 합의했다. 이때 브렌누스는 천파운드 중량의 금을 배상금을 지불받기로 했다.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따르면, 브렌누스는 자신이 가지고 온 엉터리 천칭으로 로마인에게 금의 중량을 산정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이에 로마의 호민관이 항의하자, 그는 천칭 그릇에 자신의 칼을 올려놓으면서 무게를 줄이는 놈을 죽일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 때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 그 유명한 "Vae victis".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밀루스는 바로 이 시점에서 로마군과 함께 도착해 검을 저울질 한 뒤 금이 아닌 철로 조국을 되찾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켈트족을 공격했다고 한다. 로마 시내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좁은 길과 골목 길에서는 어느 군대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없어 다음날 도시를 떠나 평원 일대에서 대대로 맞붙었다고 한다. 카밀루스는 이 전투에서 켈트족을 크게 격파했고 살아남은 켈트족 병사들은 도주했다. 이에 로마인들은 카밀루스를 로마의 2번째 창립자라는 의미로 '제2의 로물루스'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의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보고 있다. 로마인들이 패배를 숨기려는 흔적이 역력하게 보여서 갈리아족이 패배하는 과정에서는 자료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 시대의 역사를 다룬 리비우스는 갈리아족에게 패한 집정관들의 이름을 없애버리기까지 했다는 의혹을 사기도 한다. 또한 동 시대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켈트족으로부터 로마를 구원한 인물은 "마르쿠스"가 아닌 아들 "루시우스"라고 주장했다.
2.5. 라틴 전쟁
켈트족이 떠난 뒤, 로마는 1년여 동안 도시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이 당시에 볼스키, 아이퀴가 로마 영토를 침략했고 일부 라틴 도시들은 반란을 일으켰으며 에트루리아인들은 로마의 동맹이었던 사트리움을 포위했다. 카밀루스는 이러한 위기에 맞서기 위해 기원전 389년 다시 독재관에 임명되었다. 적군이 로마를 포위했을 때, 카밀루스는 대부분의 침략자들을 마키우스 산에 내몰고 바람이 부는 새벽 동안 그들의 야영지에 불을 질렀다. 이후 카밀루스의 군대는 라누비움에서 멀지 않은 매치움에서 전투를 벌여 볼스키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그는 아이쿼의 수도 볼라를 점령해 아이쿼를 제압했다. 하지만 로마는 사트리움을 잃었고 볼스키의 수도인 안티움을 제압하는 건 실패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서는 이 로마 포위전 때의 다른 이야기도 나와 있다. 적군이 로마를 포위한 뒤, 로마의 여인들을 자신들에게 보내서 혼인하게 하면 군대를 물리겠다고 협상을 시도하였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사신에게 로마는 여자를 팔아서 지키지 않고 오직 칼로 지킬 뿐이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그러나 적군을 물리칠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 고민을 하였는데 이 때 한 여자 하인이 계책을 말해주었다. 자신과 같은 여종들을 양가집 처녀로 치장해서 적진에게 보내면 적들이 안심을 하고 경계를 풀 것이니, 그러면 여종들이 적군의 무기를 빼돌리고 신호를 보내서 로마군이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카밀루스는 이를 받아들여서 작전을 시행했고, 이 계책은 잘 들어맞아서 로마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카밀루스는 에트루리아인들에 의해 함락된 사트리움에 진군했다. 카밀루스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사트리움에서 축하 행사를 떠들석하게 벌일 것이라고 과감한 돌격을 개시했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에트루리아인들은 도시 함락을 기뻐한 나머지 술을 퍼 마시다가 너무 취한 바람에 적의 공격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했고, 카밀루스는 사트리움을 쉽게 되찾았다. 이렇게 전쟁을 마무리한 뒤, 독재관 카밀루스는 로마에서 개선식을 개최했다. 이리하여 로마는 주변 국가들에게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이 건재함을 과시할 수 있었다.
2.6. 이후의 활약상
기원전 384년, 카밀루스는 감찰관에 임명되었다. 그후 그는 마르쿠스 만리우스 카피톨리누스와 대립한다. 만리우스는 카피톨리움에 침입한 켈트족을 상대로 용맹을 떨쳐 카피툴리움 언덕에 피신한 주민들을 끝까지 구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수도의 심장부를 결사적으로 지켜낸 공적을 인정받아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카피톨리누스라는 영광스런 별명으로 불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만리우스는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채탕감 조치를 취하고 옥에 갇힌 자들을 풀어줬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다수의 불평분자들을 규합해 로마에 독재정을 수립한 후에 만리우스 자신이 우두머리가 되기 위한 계략이었다고 한다. 이에 카밀루스가 총대를 매 그를 법정에 기소했고,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만리우스를 처형한 카밀루스는 카피톨리움에 들어서 있던 만리우스의 집을 철거한 다음 그 자리에 모네타 여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는 일종의 부관참시를 시행했다. 그는 어느 원로원 의원도 다시는 그곳에 집을 짓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후속조치를 취함으로써 만리우스 사건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했다.
기원전 381년, 남부 라틴 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안티움과 볼스키의 몇몇 도시들은 프레네스테와 벨리트레이의 라틴 도시들을 포함하여 하나로 뭉쳤고 사트리움을 공략한 뒤 모든 로마 주민들을 살해했다. 카밀루스는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여섯번째 군사 호민관에 임명되었다. 이 당시 그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았지만 은퇴를 희망하는 그의 요청은 거부되었다. 카밀루스는 아들 루시우스를 통해 지휘하기로 결정했다. 카밀루스는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진영에서 안전하게 있는 동안 아들 루시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전쟁과 관련된 몇가지 지침을 내려줬다. 그러나 루시우스가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자, 카밀루스는 어쩔 수 없이 전장으로 이동했고, 로마군은 그가 오자 사기가 크게 올라 적을 무찔렀다.
이때 많은 전쟁 포로들이 투스쿨룸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카밀루스는 그들을 노예로 삼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승인을 얻어낸 후 그들에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줬다. 이 호의적인 대우는 카밀루스가 속한 푸리아 가문이 원래 투스쿨럼의 지도 계층이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이후 카밀루스는 완전히 은퇴했다.
기원전 368년, 로마는 벨레트레이 전쟁 과정에서 심각한 경제 침체로 인해 사회 전반의 갈등이 극심했다. 이에 로마는 국민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카밀루스를 독재관에 임명했다. 이때 호민관 리키니우스와 섹스티우스는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평민으로 선출하자는 법안을 제출했다. 카밀루스는 내심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민회가 이러한 법안을 승인하기 위해 모이지 못하도록 훼방을 놨다. 이에 분노한 민회 구성원들은 카밀루스가 독재관에서 물려났을 때 탄핵하려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켈트족이 벨리트레이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라티움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졌다. 이에 로마인들은 기원전 367년에 카밀루스를 다섯번째로 독재관에 임명해 켈트족을 막게 했다. 로마 병사들은 카밀루스의 지시에 따라 방어용 갑옷을 제공받고 부드러운 철제 헬멧과 황동 방패를 제작했다. 또한 길다란 파이크를 나눠줬는데, 이 파이크엔 적의 검을 부러뜨릴 수 있는 톱니바퀴가 달려 있었다고 한다. 한편, 켈트족은 최근 약탈한 약탈품을 가지고 Anio 강에 진영을 쳤다. 카밀루스는 첩보를 통해 적이 방심한 채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걸 파악하고 동이 트기 전에 야습을 감행했다. 이 야습으로 켈트족은 완패하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후 벨레트레이는 항복했고 카밀루스는 도다시 개선식을 개최했다.
하지만 평민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집정관 1명을 평민 계급에서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귀족들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카밀루스에게 의존했다. 평민 지도자들은 이에 맞서 카밀루스를 체포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카밀루스는 원로원을 소집해 언제까지 평민들과 마찰을 빚는다면 국가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설득했다. 그 대신, 그는 귀족만이 재임할 수 있는 법무관을 설립하여 귀족의 권리를 보호하게 하자고 제안했고 원로원은 이를 승낙했다. 이후 카밀루스는 비로소 로마에 화합이 맺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화합을 상징하는 콩코르디아 여신의 신전을 지었다.
2.7. 사망
기원전 365년, 치명적인 역병이 로마를 강타해 많은 로마인들이 사망했다. 이때 카밀루스도 역병에 걸려 사망했다. 로마인들은 그를 로마의 두번째 창시자로서 깊은 애도를 표했다.
3. 기타
2018년 토탈 워: 로마 2 DLC 공화정의 부흥 캠페인 트레일러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해당 DLC가 기원전 4세기 말 로마 공화정의 위기를 다뤘기 때문인듯. 인게임에서는 로마 세력의 장군으로 구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