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츠노 아이코 실종 사건
1. 개요
1988년 12월 4일, 후쿠오카 이즈카시에서 초등학교 1학년생인 마츠노 아이코(松野愛子)양이 실종된 사건. 이즈카 사건(飯塚事件)이라고도 불린다.
2. 실종
아이코양은 오전 7시반경 마을 내의 폐품 수집 작업을 도운 후 공원에서 친구들과 있다가 오전 10시경 동생의 친구(용의자인 쿠마 미츠토시의 아들)집으로 놀러간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졌다. 후쿠오카서는 무언가의 사건에 휘말려 실종된 가능성을 높게 보고 이즈카시의 경찰관과 학교 선생님, 봉사원들과 함께 호수와 숲을 수색하고 포스터와 찌라시를 배포하며 정보를 모았고 기상조건이 안좋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장소는 재조사하고 소방대원들을 동원해 잡초를 제거하는 등의 철저한 수색을 펼쳤지만 단서를 찾지 못한 상태였다.
3. 용의자 발견?
아이코양이 실종된지 4년뒤인 92년에 아이코와 같은 초등학교 1학년생 우메노 유리(梅野裕莉)・나카가와 아이(中川藍) 여아 2명이 잇달아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 후쿠오카현 국도 수풀림에서 2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1]
이 사건의 중요 참고인으로 출석했던 당시 54세의 쿠마 미치토시(久間三千年)가 조사를 받던 중 사복 경찰 2명을 칼로 찔렀기때문에 긴급 체포되고 벌금 10만엔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이 용의자는 두 아이의 살해도 부정하였지만 아이코양의 살해만은 완강하게 부정하였다. 하지만 아이코양 실종 당시 용의자가 근처 산림쪽에 있었다는 목격 정보[2] 와 거짓말 탐지기를 이용한 심문을 통해 나온 산림 일대를 120명의 경찰들이 조사한 결과 아이코양이 입고있던 옷과 일치하는 어린이용 빨간 점퍼와 트레이닝복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사건의 범인임이 확실한 증거들이 나왔으나 경찰 측의 과격한 조사 방법[3] 과 6년간의 철저한 조사에도 나오지 않았던 유류품이 단 20분만에 발견된 점 등을 통해 95년 아이코양 사건의 조사가 종결되어버렸다.
두 여아의 건에 대해선 DNA가 거의 일치했지만 경찰 조사관측이 아닌 제 3자였던 대학 병원의 DNA재감정 결과 일치 확률이 아주 낮다고 판명되어 체포까진 이르지 못했는데, 여아의 옷에 붙어있던 섬유와 용의자의 카 시트에 묻은 섬유가 일치한 것이 결정적 증거가 되어 살해 혐의로 재체포되었다. 하지만 DNA감정 결과가 최대의 증거라며 보도한 일대 매스컴들과 달리 체포 경위만 봐도 DNA는 그다지 큰 증거가 아니었음이 확실하였다.
4. 엔자이?
범행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매스컴들이 마치 용의자가 누명을 쓴 엔자이라는 인상을 주는 보도를 했기때문에 비판이 일었다.
일부 매스컴들은 DNA감정의 신뢰성을 의심하고, 대학 교수의 '단독범이라면 AB형일 수밖에 없다'(용의자는 B형)는 인터뷰를 사실인 것 마냥 보도하는 등 판결문에서 이미 확인되고 검증된 사실들을 새로운 사실마냥 보도하였다. 또한 용의자의 차내에서 발견된 소변과 성기에서 출혈한 증상이 시체에서 발견된 것과 일치하는 등의 증거에 대해선 일체 관심갖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억울한 누명을 쓴 것처럼 용의자를 감싸는 편파적인 보도를 내보내어 유족들에게 2차 피해를 부여하였다.
또한 쿠마 용의자의 심문으로 발견된 아이코양의 의류가 비교적 새것과 같았기때문에(의류가 발견된 곳은 평소 차로 가져온 쓰레기들을 버리는 장소로 통했기때문에 주변엔 잡초와 쓰레기가 많았다) 엔자이라고 생각하는 측에선 '경찰이 쿠마 미치토시를 범인으로 몰기위해 일부러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냐'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가택수사에 초조해진 용의자가 소유하고 있던 의류를 해당 장소에 가져다 버렸을 수도 있기에 해당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엔자이파들은 용의자의 이름에 꼬박 꼬박 '씨(さん)'를 붙이며 용의자를 감싸준다고.
5. 그 후
후쿠오카 지법은 쿠마 용의자에게 사형을 판결. 이에 항소했으나 'DNA감정 결과가 피고의 범행이라 인정된다', '성적 욕망을 달성하려고 한 비열한 범행. 저항하는 약한 여자 어린이의 목을 조르고 질식사시킨 행태도 냉혹하고 비정하다'고 고하고 용의자의 사형이 확정되어 2008년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형이 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