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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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로이센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11월 20일 작센의 막센에서 오스트리아군과 프로이센군이 격돌한 전투. 프로이센군이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오스트리아군에게 항복했다.

2. 배경


1759년 7월, 오스트리아군은 작센을 침공해 드레스덴과 몇몇 여러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의 동생 하인리히 왕자가 일단의 군대를 이끌고 반격했고, 그 결과 드레스덴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센 도시들을 탈환할 수 있었다. 11월 13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러시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한 틈을 타 작센으로 가서 하인리히 왕자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에 오스트리아군 지휘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드레스덴 쪽으로 후퇴했고 프로이센군은 그들의 뒤를 추격했다. 이때 대왕은 자신의 유능한 장군 중 하나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핀크 휘하의 14,000명의 병력을 오스트리아군의 후방으로 보냈다. 그는 이들이 오스트리아군과 보헤미아 사이의 보급로를 끊어 적을 고립시키려 했다. 대왕은 이를 통해 신중한 성격의 다운 백작이 후방이 위협받는 걸 경계하여 철수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오히려 핀크의 군대가 본대와 멀리 떨어져 있어 고립되어 있으니 포위 섬멸할 수 있다고 판단, 그들을 포위섬멸하기로 결심한다.

3. 양측의 전력



3.1. 오스트리아군



3.2. 프로이센군


  • 총사령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핀크
  • 병력: 14,000명

4. 전투 경과


11월 19일, 다운 백작은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누어 디폴디스왈드, 트로니츠, 도나에 배치했다. 그는 2만 7천 명의 주력 병력을 디폴디스왈드 근처의 말터 하이츠에 주둔시켰고 7개의 대대를 막센 동쪽에 있는 부르하드왈드에 주둔시켰다. 또한 디폴드시왈드 마을에 3개의 대대를 주둔시켰으며 나머지 병력을 트로니츠, 도나에 배치했다. 그렇게 진을 친 후, 다운 백작은 프리드리히 대왕의 기동을 감시하기 위해 드레스덴으로 돌아갔다. 한편 핀크 장군은 적이 자신을 포위섬멸하려 든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막센을 중심으로 초승달 모양의 대열을 구축했다.
11월 20일 오전 7시, 오스트리아군은 디폴디스왈드 근처에서 진영을 걷고 중앙에는 2개의 보병대 양익에는 2개 기병대 등 4개 대열로 행진했다. 전방의 경비대는 후사르 기병대, 그렌저 일부 부대, 5개 대대로 구성된 척탄병으로 구성되었다. 다운 백작은 작센 왕자 알브레히트와 함께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린하드르츠그림 근처 2개 전선에 싱클레르의 군단을 배치하고 프로이센의 진지를 정찰했다. 이후 그는 전군에 적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핀크 장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진격을 통보받자 전군에 산악 지형을 이용해 최대한 버티면서 구원이 올때까지 버티라고 지시했다. 이후 핀크는 사력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적의 압도적인 공세에 짓눌린 끝에 결국 유리한 고지를 빼앗기고 본군에 귀환하려 했다. 그러나 다운 백작은 그런 적의 기동을 사전에 눈치채고 퇴로를 차단해 버렸다.
결국 핀크와 그의 군대는 팔켄하인 고지로 후퇴했고, 오스트리아군은 그들을 완전히 에워쌌다. 다운 백작은 새로 확보한 고지에 군대를 편성하고 밤새도록 팔짱을 끼고 적을 지켜봤고 오스트리아군 플라우엔에 있는 그들의 캠프에서 새로운 탄약을 공급받았다. 핀크 장군은 어떻게든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에 11월 21일 새벽 3시, 핀크는 항복을 결심했다. 다만 기병대 만큼은 대왕에게 귀환시키기로 작정하고 윈치 장군에게 기병대를 맡겨 어떻게든 본대와 합류시키게 한 뒤 자신은 사절단을 다운 백작에게 보내 항복 협상을 벌였다.
동이 트기 한 시간 전, 다운 백작은 가능한 한 앞으로 포병들을 지시하고 수류탄병들에게 새벽에 새로운 공격을 감행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그때 사절이 와서 핀크가 항복할 의사를 밝혔다고 알리자, 다운 백작은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프로이센 기병대가 탈출을 시도한다는 소식을 접한 다운 백작은 핀크가 기병대 역시 항복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핀크는 윈치가 도저히 항복할 수 없는 별도의 군단을 지휘하고 있다며 뻣댔다. 그러자 총참모장 프란츠 모리츠 폰 레이시는 윈치 휘하의 부대가 돌아오지 않으면 즉시 대포를 퍼붓겠다고 위협했다. 그렇게 긴장감이 고조되던 중, 핀크는 윈치의 기병대가 포위망 돌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침내 기병대를 포함한 전 병력의 항복에 동의했다.

5. 결과


프로이센군은 막센 전투에서 3천 명의 사상자를 입었고 나머지는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984명이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대왕은 핀크 등이 항복했다는 소식에 격노해 그와 휘하 장군들에게 2년의 구금형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