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대왕

 




[image][초상화]
'''이름'''
'''프리드리히 폰 호엔촐레른
(Friedrich II von Hohenzollern)'''
'''생애'''
1712년 1월 24일 ~ 1786년 8월 17일[나이]
'''재위'''
1740년 5월 30일 ~ 1786년 1월 5일[재위기간]
'''신장'''
162cm[1]
'''출생지'''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성
'''사망지'''
프로이센 왕국
포츠담 상수시 궁전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군국주의 국가의 감수성 넘치는 왕세자
2.1.1.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의 만남
2.1.2. 베를린으로 귀환
2.1.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
2.2.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
2.3. 18세기의 유럽을 뒤흔든 명장
2.3.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2.3.2. 7년 전쟁
2.3.3. 이후
3. 비판
4. 기타


1. 개요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
프로이센 왕국의 제3대 국왕, 프리드리히 2세(재위 1740~1786). 독일인들로부터 프리드리히 대왕'''(Friedrich der Große)'''이라 불리곤 한다. 영문 표기는 Frederick the Great, 라틴어로는 Fredericus Rex.[2]
대표적인 계몽주의 군주이다.[3] '''계몽 군주'''라는 단어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내치에 있어서는 '반(反)마키아벨리론'을 저술하여 군림하는 군주가 아닌 '''봉사하는 군주'''의 역할을 강조했으며[4], 국가와 신민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봉사'''라는 의지를 실현하여 합리적인 국가 운영을 통해 프로이센의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러한 국력 안정을 바탕으로 선왕이 육성한 강력한 군대를 활용해 활발한 정복 전쟁을 벌였고 또한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켰다. 프리드리히가 즉위할 당시 독일의 변방 국가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의 치세를 거치면서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지닌 유럽 대표 강대국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현재까지도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 받고 있다. 대한민국의 세종대왕 포지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2. 생애


프리드리히의 생애를 요약하자면 ''''배경, 실력, 운 모두를 갖춘 18세기 유럽의 계몽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운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의 숙적이었던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력은 있었지만 그놈의 운 때문에 불과 한끗차이로 목표를 달성하는데 실패한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복이였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평생에 걸친 행운아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아래에서보듯 불운했던 유년기와 청년기를 견뎌내자 장년기에 이르러 결정적인 상황에서 운이 풀렸다고 볼 수 있다.

2.1. 군국주의 국가의 감수성 넘치는 왕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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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프로이센 왕국의 두번째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그의 왕비 조피 도로테아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다만 형이 되는 장남과 차남은 영유아기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5] 일찍 사망해, 삼남인 프리드리히가 왕세자가 된다. 소년 시절 어머니의 배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교육을 받아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랑스 문화에 심취하여 독일 문화를 경멸하게 되었다. 동시에 프리드리히는 어린 시절 누나에게 꽃 같은 건 싫고 북치고 놀겠다고 해서 부왕을 흐뭇하게 했던 활달한 아이였다. 다만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군사학을 배우면서도 문학과 음악 등에도 관심을 두었기에 무인됨만을 강조한 부왕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성장하는 동안 부왕의 피해망상과 정신착란으로 인해 폭력과 학대의 대상이 되는 일이 잦아지고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호엔촐레른 집안과 프로이센 왕국의 전통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왕위 계승자로서 소년시절부터 힘든 군사훈련을 묵묵히 받았으며, 타고난 재능으로 훌륭한 성과를 보였다.
더군다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프로이센과 영국간 동맹 강화를 위해 프리드리히 2세와 영국 아멜리아 공주간의 혼약을 추진하였으나, 프리드리히 2세가 영국으로부터 '특별한 취급'을 받는다는 이유로 이를 괘씸히 여겨 영국에게 베르크와 윌리히 공작령에 대한 누가 봐도 무리한 승계권을 요구하는 등 대놓고 이를 사보타주한다.[6] 다만, 처음부터 반대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영국-프로이센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한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에서 그 결혼 안된다며 결사 반대하면서 동시에, 영국이 꺼려하던 베르크 공국에의 승계권을 적극 지지하겠다고 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여기에 홀딱 넘어갔다.[7]
프리드리히 2세는 이런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영국 왕실과 혼담을 주고 받던 누이 빌헬미네와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이에 또 자극받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프리드리히 2세에게 가족과 떨어져 사냥용 궁전에서 살라며 출궁시켜버린다.

2.1.1. 한스 헤르만 폰 카테와의 만남


그런데 거기서 프리드리히 2세는 애인이자 훗날 지울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의 희생자인 한스 헤르만 폰 카테를 만났다. 표면상으로는 단순히 '절친한 친구' 사이였지만 이 둘이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자명했다.
폰 카테 스캔들은 프리드리히 2세의 인생에 있어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 스캔들을 통해 프리드리히 2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해서 다 알게 되었고, 이는 프리드리히가 성공적인 군주가 되고나서도 여전했다. 프리드리히 2세 주변의 예술가들이나 주치의들, 심지어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살기까지 했던 볼테르는 자신의 저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에 Alings나 Blanning, Burgdorf, Hahn와 같은 주류 사학자들은 모두 프리드리히 2세가 동성애자였다고 보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2세 스스로가 자기는 여자에게 꽂히지 않는다고 전쟁수기까지 남긴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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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헤르만 폰 카테.
프리드리히 2세는 18세가 되던 해, 폰 카테와 다른 귀족 장교 1명과 함께 어머니의 친정인 영국 궁정으로 탈주하려다 붙잡혀 감금당했다. 친구 한 명은 영국으로 탈출하고, 폰 카테는 붙잡혔는데,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는 재판이 불가능했지만 함께 체포된 폰 카테에게는 '탈영'을 죄목으로 2년형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이미 둘의 관계를 눈치채고 있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왕의 권한으로 이 판결을 번복하고 폰 카테는 사형, 왕세자는 '''왕위 계승권을 비롯한 모든 신분을 박탈한 뒤''' 마찬가지로 사형에 처하려 했으나 신하들이 간신히 말려 요새에 감금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자마자 내린 첫 포고령은 고문의 폐지와 법관의 독립성에 관한 내용이었다.
결국 프리드리히는 창문 너머로 폰 카테의 사형 집행 및 죽은 애인의 목이 자신이 갇힌 방을 바라보도록 내걸리는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지켜봐야 했다. 그것도 프리드리히가 그 광경을 안보려 할 수 있다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심모원려(...)로 경비병들이 강제로 프리드리히를 붙잡아서 얼굴을 감옥 창살에 거의 고정시켜놓다시피 하였다.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장면에 프리드리히는 충격을 받고 기절하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오히려 아들을 두고 '바보 같은 놈'이라 욕하며 저놈은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니 같이 참수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화가 날 때까지 난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차라리 날 죽이고 카테를 살려달라며 저항하고 있었기에 더 열받은 것도 있었다. 이에 곁에 있던 프리드리히의 모후인 왕비와 모든 신하들 및 왕족들은 물론, 이 막장인 아버지의 꼰대짓에 충격을 받은 이웃 나라 왕들까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를 뜯어말렸다.
나중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마저 이 일에 개입해서 '왕족에 대한 재판은 제국 의회만이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폭주를 막았기에 프리드리히는 간신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8]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때 자신을 살려준 황제 카를 6세가 바로 프리드리히 자신과 평생동안 가장 피터지게 싸웠던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였다.

2.1.2. 베를린으로 귀환


대신 프리드리히 2세는 몇년 후 누이 빌헬르미네의 결혼식을 위해 베를린에 돌아오는 것을 허락받기 전까지 폰 카테가 처형당한 퀴스트린 요새에서 유배되다시피 살아야 했다.

2.1.3.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와 결혼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아들의 결혼 상대를 고려하는 도중에,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의 학대를 견디지 못하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청혼한다. 결혼하게 되면 왕위계승권도 포기하고 종교도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당시에 큰 스캔들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 6세는 프리드리히의 청혼을 매우 마음에 들어하면서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프로이센에서는 왕세자가 왕위계승권이고 뭐고 전부 포기하고 오스트리아로 도망가겠다고 선언한 꼴이라 나라가 발칵 뒤집어졌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절대적으로 반대해서 이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고 대신 사부아 공자 외젠의 제안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개신교 계열 외사촌이자 영국 왕실 하노버 가문의 방계 집안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 가문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Elisabeth Christine)와 결혼하였다. 훗날 프리드리히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이 가문과 혼인하면서 겹겹사돈을 맺었다.
이 결혼은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진행된 거였다.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장인은 오스트리아 육군 원수였으며 그의 처남들 역시 오스트리아에서 군인으로 복무 중이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군주 가문의 자제라 하더라도 모국이 이름 없는 소국일 경우 큰 나라의 궁정에서 복무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처남들이 휘하 장군으로 큰 활약을 했으나 전쟁 후의 불화로 인해 프로이센을 떠나기도 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장모 안토니아 아멜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는 친자매간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지라 엘리자베트 왕비를 사랑하지 않아 평생토록 가정적으로는 불행하였다. 그는 누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비록 의무에 따라 결혼하는 것이지만 우리 사이에는 사랑도 우정도 있을 수 없다.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고 썼다. 결혼 직후부터 동침하지 않고 별거했으며 왕위 즉위 후에는 아예 아내를 베를린의 별궁에 거주케 하며 잘 만나지도 않았다. 7년 전쟁 이후 몇 년 만에 만났을 때에는 '살이 좀 찐 것 같다'는 말만 전했다고 하며, 이러한 냉랭함으로 인해 둘 사이에 자녀가 태어나지 않아 결국 조카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나마 결혼의 대가로 부왕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이때 부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누워지내고 있어서 라인스베르크 별궁에서 독서와 음악으로 그동안의 울분을 달랬다.

2.2. 근면하고 현명한 군주


길고 우울한 청소년기/청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왕세자였지만, 프리드리히는 정치철학과 합리적인 사고에 있어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정치에 관한 저술은 아마추어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볼테르와 서신 왕래를 하며 저술한 《반마키아벨리론》[9]에서 프리드리히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데, 자신이 쓴 책의 내용처럼 프리드리히 2세는 합리적인 사고와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국왕 스스로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또한 부지런히 일하였으며, 관료 조직의 규모를 축소시키되 효율적으로 일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도 군림하는 군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스트리아나 프랑스와 같은 주변 유럽 국가의 군주들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모습이었다. 또한 과학의 발달을 추구하는 동시에 '''사상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 노력했으며, 이처럼 당시로써는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행보를 보임에 따라 여전히 지속되던 가톨릭개신교 간의 갈등을 피해 유럽 각지의 저명한 학자와 유능한 인재들이 프로이센의 날개 아래로 모여들어 프리드리히가 역설한 강력한 국가의 체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탄탄한 지식 기반을 이루었다.
게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비록 아들과 부하관리들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아버지이자 왕이었지만, 강한 군사력을 육성하고 아울러, 근면함을 강조했던 국가운영을 통해 많은 유산과 8만에 이르는 군사력을 남겨주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수도인 베를린을 화려하게 건설하는 한편, 국방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 덕에 프리드리히 2세 즉위 직후 8만 명 정도였던 프로이센의 군대는 총 19만여 명에 이를 만큼 거대하게 성장하였다.[10] 프리드리히는 이러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 정복을 꿈꾸는 타 국가에 대한 예방전쟁, 즉 선제 공격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2.3. 18세기의 유럽을 뒤흔든 명장


사춘기 시절 감수성이 넘치는 소년이었던 프리드리히는 왕위에 즉위하자 냉철하고 과감한 결단력과 행동력을 보였다.

2.3.1.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즉위하자마자 같은 시기에 오스트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제로 즉위하자 이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을 주도하여 일으켰다. 7년에 걸친 전쟁의 결과로 공업이 발달한 부유한 슐레지엔 지역을 오스트리아로부터 획득했다.[11] 이 전쟁을 통해 독일의 작은 연방국이었던 프로이센은 단숨에 유럽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고, 프리드리히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겸비한 젊은 명군주로 전 유럽 시민들에게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프로이센은 호엔프리트베르크 전투에서 작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대승에 고무된 프리드리히가 '''호엔프리트베르크 행진곡'''(Der Hohenfriedberger Marsch)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이 군가는 사람들이 18세기 프로이센군이라면 바로 떠올리는 유명한 곡 중 하나다.[12]
이후 프리드리히는 포츠담에 '상수시 궁전'으로 불리는 별궁을 세우고 학자, 문인과 함께 토론을 즐겼으며 작가 볼테르를 불러 상주하도록 했던 때도 있었다. 볼테르와 서신을 주고 받으며 개인적 호감을 보이던 프리드리히 2세는 볼테르를 상수시 궁전으로 초대해 지내게 했으나, 곧 볼테르가 같이 살기에 굉장히 피곤한 사람임을 깨달았고, 결국 볼테르가 프로이센 학술원장과 대판 싸우고 난 뒤에야 출궁을 허락하였다.[13] 둘은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며 좋은 친구로 남기로 하고, 50년 지기의 친구가 되었다.[14] 상수시는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 같은 거대한 궁전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으며, 프리드리히는 이 곳에서 시종 몇 명과 함께 검소하게 지냈다. 또한 베를린 시내에 국민들을 위한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국민들도 품격 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였다(당시 유럽에서 오페라 하우스는 왕과 귀족을 위한 전유물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또한 프리드리히 자신은 불가지론자로 여생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성 헤드비히 성당을 지어 종교에 대한 관용을 보이기도 했다.

2.3.2. 7년 전쟁


그러나 프로이센에의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프로이센에 패배한 오스트리아에 실망을 느낀 영국은 든든한 동맹을 찾는 프로이센과 서로 이해가 일치하게 되었고,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이해가 일치하는 구도가 형성되어 결국 프로이센과 영국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동맹을 맺게 되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이 벌어졌다(이 시기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유럽의 패권을 다투던 전통의 강대국이자 라이벌이었다.).[15] 이 동맹에 프리드리히를 무척 싫어한 옐리자베타 여제러시아 제국, 한 때 프로이센의 편을 들었던 스웨덴도 가담한다. 루이 15세의 애첩이었던 퐁파두르 부인, 러시아의 엘리자베타 여제, 오스트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모였다 하여 '''삼부인 동맹'''이라고도 한다. 특히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획득을 위한 다방면의 물질적•군사적 기반이 필요했기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결국, 1756년 영국령 미노르카 섬에서 일어난 프랑스와 영국의 전투(미노르카 해전)를 시작으로 7년 전쟁이 발발하고, 북아메리카와 인도 등지에서는 프랑스&스페인 대 영국, 유럽에서는 오스트리아&작센&러시아&스웨덴 대 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충돌했다. 오스트리아를 초반에 굴복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진군한 프로이센군은 로보지츠, 라이헨베르크, 프라하 등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연파하며 보헤미아로 진입했으나 콜린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트리아를 무릎 꿇리지 못했고, 이 해 여름 동안 전병력의 1/3을 잃으면서 위기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바로 다음 해인 1757년, 로스바흐에서는 42,000명의 프랑스-오스트리아 연합군을 22,000명의 병력으로, 로이텐에서는 8만이 넘는 오스트리아군을 36,000명의 병력으로 철저히 박살내는 신기에 가까운 군사적 능력을 선보였다.[16] 더 무서운 건 이 격전의 와중에도 프로이센군이 입은 피해는 '''상대의 절반 이하'''였다는 것.
허나 다구리 앞에 장사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동쪽의 러시아, 서쪽의 프랑스, 북쪽의 스웨덴이 각각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해오고,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남쪽에서 몰려오자 조른도르프 전투부터 삐긋거리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패했고, 이 연패에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쿠네르스도르프 전투로 51,000명의 프로이센군이 6만명 가까운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이 전투에서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겼고, 포로로 잡힐 뻔도 하다가 기병대 장교가 가까스로 구출해 탈출했다.
이 와중에 동맹국인 영국이 내각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는 사태가 겹치면서[17][18] 말 그대로 무참히 관광당했다. 결국 전 국토가 유린당하면서 수도 베를린도 함락당하고[19] 그 와중에 리그니츠토르가우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분전하였으나 압도적인 국력 차로 찍어누르는 다굴빵은 군사 천재인 프리드리히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은 쫓기게 되어 목에 걸고 다니던 로켓에 담긴 독약으로 자살할 생각까지 하는 등, 말 그대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던 어려운 순간이었으나,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가 급서한 이후 1762년에 즉위한 독일 출신의 표트르 3세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것이다. 즉위하기 전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을 지지해왔던 표트르 3세는 제위에 오르자 전쟁 이전의 영토를 기준으로 한 화의를 맺자고 제의했고,[20] 이로써 프리드리히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여 오스트리아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다음 해에 이르러 7년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승리를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으로 칭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식민지 전쟁을 위해 러시아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유럽에서 일찌감치 손을 떼는 등 유럽 전선의 판세 자체를 뒤엎었다. 그러나 식민지 쟁탈전에서는 오히려 패배의 상징이 되어 퀘벡 지역을 포함한 많은 해외 영토를 상실, 제대로 체면을 구겼다. 다만 승리한 영국의 부담도 만만치 않아, 갑자기 높아진 조세 부담에 대한 북미 식민지 주민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해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결국 1775년에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게 된다.[21]

2.3.3. 이후


이후 폴란드 영토 분할에 참여하고[22] 바이에른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등 프로이센을 유럽 북부의 최강자로 자리매김시켰다. 이처럼 화려한 전적은 단순히 군사력의 승리로만 얻어낸 것이 아니라 학술, 교육, 복지 등을 크게 발전시켜 프로이센을 단순한 군사국가가 아닌 진정한 중유럽의 강국으로 끌어올린 결과이기도 했으며 계몽군주답게 미국 독립전쟁 때 자신의 장교들을 파견, 대륙군을 크게 강화하는데도 한 몫 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이 대표적.[23]
1772년에는 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게서 서프로이센을 뜯어내며 왕국의 숙원이던 브란덴부르크 본토와 동프로이센을 잇는 과업을 달성했으며 '프로이센 왕국 국왕'으로서의 칭호도 프로이센'''에서의''' 왕(König '''in''' Preußen)에서 프로이센'''의'''' 왕(König '''von''' Preußen)으로 바꾸었다.[24][25] '''대왕'''이라는 칭호도 자기 자신이 붙인 것이 아닌 국민들이 헌사한 것.
1786년, 노년의 몸을 이끌고 직접 군대를 검열하던 중 폭우를 맞고 발병한 폐렴으로 인해 7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갓 독립한 미국은 조기를 올리고 예포를 쐈으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어머니의 적이었음에도 "이제 한 시대가 저물었구나."라는 말로 심정을 대신했다. 이후 유럽에는 프리드리히 대왕 빠들이 매우 많이 양산되었다.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2세, 프랑스의 나폴레옹[26] 등이다. 심지어 먼 훗날 히틀러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그리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프리드리히 대왕을 벤치마킹했다.
명언으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계몽 군주라는 개념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과인은 국가에서 첫째 가는 심부름꾼이다.(Ich bin der erste Diener meines Staates)'''[27]


3. 비판


프리드리히는 독일에서 최고의 군주로 칭송받는 위인이지만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에 대한 비판점은 독선적인 국정 운영과 7년 전쟁에서의 처신에 집중되어있다. 일단, 프리드리히의 통치는 당대의 군주치고도 상당히 독선적이었다. 이는 당대 프로이센이 워낙에 중앙집권적인 군국주의 국가였던 데다가 선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부터 전제적인 정치 구조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이었다. 프리드리히의 독단성은 말년에 더욱 심각해졌다. 이는 그가 7년 전쟁 이후 유럽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군주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년 전쟁에서의 그의 업적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평가가 은근히 많다. 7년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승리는 프리드리히의 통치력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갑작스러운 운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당대 프로이센군이 유럽에서 손꼽히는 수준의 강군이었고, 프리드리히 자신도 유럽 최고의 지휘관이었음은 사실이다. 이는 7년 전쟁 초반에 프로이센군이 보여준 압도적인 전과와 교환비를 통해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결코 오스트리아-러시아-프랑스 연합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반 승세에도 불구하고 물량이 후달린 프로이센은 전쟁 중기부터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했다. 이내 러시아의 차르가 바뀌기 전까지 프로이센은 사실상 멸망 직전에 몰려있었다. 프로이센이 기사회생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의 황제가 바뀐 이후 러시아와 프랑스가 전선에서 이탈한 이후였다. 이는 순전히 프리드리히의 처신과는 무관한 역사적인 운이었다.[28]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프리드리히의 전쟁 군주로서의 능력은 과대평가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7년 전쟁에서의 막판 역전은 프리드리히의 능력이 아닌 운이 결정적인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평가는 내리기 어렵다. 그러나 프리드리히의 7년 전쟁은 1차 세계대전이나 2차대전 프리퀄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았다는 것이 현대 역사가들의 평가이다. 그렇다면 프리드리히의 외교 능력에 대한 재평가 또한 불가피하다. 7년 전쟁의 중요한 계기가 프리드리히의 대외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에 복수하고자 7년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빼앗고 그녀에게 굴욕을 주었기 때문이다.[29]

4. 기타


  • 프리드리히 대왕은 불가지론자였고, 종교로 인한 독선과 아집을 불신했기 때문에 종교로 인한 차별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왕실의 칼뱅파 개신교와 국교인 루터파 개신교뿐만 아니라 가톨릭 신자에 대한 차별에도 반대했으며, 보스니아 출신의 무슬림 용병을 위해서 베를린에 모스크를 지어주려고 할 정도였다.
  • 한국에서는 몇몇 학습만화의 오류[30] 때문에, 프리드리히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그저 음악과 문학만 사랑했던 유약해빠진 샌님이었다가 왕위에 오르자 갑작스레 전쟁광으로 돌변했다는 인식이 강하게 박혀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도 않다. 프리드리히가 어렸을 적부터 문예를 사랑했으며 풍부한 교양과 감수성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청소년 시절에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군사적 식견 또한 풍부했을 뿐 아니라 전쟁과 무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런 그가 왕위를 계승하고 곧 전쟁을 일으킨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 프리드리히는 부드러운 교양인이라는 세간의 이미지와는 달리 외골수스럽고 독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만사에 타인을 불신하는 등 냉소적인 태도가 강했다. 프리드리히의 험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성격이 이렇게 삐뚤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특히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혹은 타인이 자신의 견해에 토를 다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신하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심했다. 후술하겠지만, 세금을 거두기 위해 커피 밀매를 막으려는 목적으로 커피 냄새 탐지원까지 창설했을 때에는 측근들조차 아연실색하여 만류했으나 프리드리히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였다. 말년에는 나이도 많았을 뿐더러, 7년 전쟁을 거치는 동안 단순한 일국의 군주를 초월해서 이미 온 유럽의 위대한 전쟁영웅이 되어있었기에 아무도 프리드리히를 말릴 수 없었고, 때문에 그 고질적인 쇠고집은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면모는 프리드리히를 본받은 후대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계승되며 독일의 몰락을 가져왔다.
  • 집안이 전부 군인인 호엔촐레른 가문답게 프리드리히의 남동생들 또한 지휘관으로서 전쟁에 참여했는데, 특히 6남 프로이센 공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의 재능이 특출났다. 프리드리히 최악의 패배인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도 유일하게 전황을 똑바로 파악하고 있던 지휘관으로[31] 전투 결과 프로이센군이 완전히 와해되자[32] 그것을 수습하기까지 했다. 이 전투 이후 프리드리히는 동생을 완전히 신뢰했다. 7년 전쟁 유럽 전선의 마지막 전투인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한 지휘관 또한 바로 프리드리히 하인리히였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까지만 해도 프로이센군의 병사 대부분이 자국민이였지만,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대에는 외국인 병사의 비율이 반을 넘었다. 이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국민들을 믿지 않거나 외국인 병사들을 특별히 선호한 것이 아니라, 세금과 인구 문제로 인한 판단이었다. 프리드리히가 물려받은 프로이센의 인구가 200만명을 좀 넘을 정도였는데, 군대는 8만명이였다. 프리드리히는 군대를 19만명으로 늘렸는데, 군대를 순수하게 자국민들로 채우면 안 그래도 부족한 민간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세금을 낼 사람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드리히는 자국민들은 민간인으로 둠으로써 세원을 확보하고, 그 돈으로 외국인을 고용해 병사로 쓰는 쪽을 선호했다.
  • 동성애자였음이 거의 확실시되는 인물이다. 애인들이었던 한스 헤르만 폰 카테나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 등의 사례들을 보아 학자들이 동성애자로 여기고 있다. 미하엘 가브리엘 프레더스도르프는 평민의 아들이자, 프리드리히 대왕보다 4살 연상으로, 둘이 어느 시기에 처음으로 조우했는지는 기록마다 조금 분분해, 어릴 때 발레를 배우다 만났다던가 또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폰 카테와 도망을 치려는 시도를 하던 중에 동료 군인으로서 처음 조우했었다는 설들이 있다. 둘은 당대 예술 기조와 역사학에 대해 공통된 학구심이 있었고 그 때문에 죽이 잘 맞았던 것 같다. 프리드리히 2세가 왕이 되자마자 영지를 수여하였고, 프레데어스도르프는 개인 집사, 왕립 극장 총감독을 거쳐 후일 왕정 회계사가 되기도 하였는데, 당시에 평민 출신으로는 내각에 처음으로 등용된 것이라 풍문이 많았다고 한다.[33] 프리드리히 대왕이 상수시 궁전을 지었을 때에 둘의 침실은 아예 같이 붙어지었다.[34] 그러나 평민 출신인 프레데어스도르프는 이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프리드리히 2세의 반대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재정적 후원을 했던 부유한 은행가문의 딸과 결혼하였다. 프레데어스도르프는 7년 전쟁이 한창이던 1758년에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왕세자 시절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내인 엘리자베스를 적극적으로 이용했었는데, 왕위를 상속받자마자 아내인 엘리자베스와 아예 다른 건물에서 살기 시작했을 정도로 서먹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1786년 8월 17일에 임종했는데, 엘리자베스와 프리드리히 대왕이 마지막으로 서로 얼굴을 본 날이 그해 1월이었을 정도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유일하게 가장 가까이 했던 여성은 그의 누이인 빌헬미네 뿐이었다.
  • 고대 그리스 테베의 신성부대, 알렉산더 대왕, 하드리아누스 황제, 폰 슈토이벤 남작과 함께 세트로 거론되는 경우가 잦은 인물이다. 다름이 아니라 동성애가 국력이나 군사력을 약화시킨다는 주장에 대한 반례인 셈. 즉 한 개인의 성적 지향과 국가/군사 지도 능력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 폴란드폴란드인들을 굉장히 혐오했다. 폴란드의 귀족공화정을 '오스만을 제외하고 유럽에서 가장 쓰레기 같은 정부'라고 혹평하는가 한면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존재가 유럽에 알려지면서 폴란드인들을 이로쿼이유인원에 빗대기도 했다. 폴란드 분할서프로이센 땅을 얻게 되었을 때는 현지 민심을 다독이는 차원에서 가톨릭 신앙을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동등하게 대하고 폴란드어 교육을 허용했으며 프리드리히 자신도 폴란드어를 배웠으며 왕실 후계자들에게도 폴란드어를 배우라고 조언하기도 했으나[35] 이후에는 폴란드 농민과 귀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거나 내쫓고 그 땅에 독일인들을 정착시켜 독일의 일부로 동화하는 정책을 꾸준히 수행했다. 프리드리히 이후의 국왕들 역시 구 폴란드 지역의 독일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며 이는 어느 정도 성과를 얻어 프로이센 왕국 해체 직전인 1918년에는 서프로이센의 독일인 비율은 40%, 독일어를 제1국어로 구사하는 인구의 비율은 70%까지 증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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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드리히 2세는 개를 좋아해서 애완견을 많이 키웠는데 그 중에서 그레이하운드를 제일 좋아했다. 죽을 때도 유언으로 자신이 지은 상수시 궁전 뜰에 충견들 곁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뒤를 이은 조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큰삼촌이자 선왕인 프리드리히 2세를[36] 차마 서민처럼 땅 속에 묻는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 생각해서 프리드리히의 바람과는 달리 포츠담 성당에 석관묘 형태로 안장했다. 훗날 프로이센으로 원정을 나선 나폴레옹은 포츠담 성당에 있던 프리드리히의 묘소를 참배할 때 프리드리히의 석관 앞에서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추며 동행한 원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군,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했을 걸세." 그리고 나폴레옹이 베를린을 점령한 후 제일 먼저 챙긴 물건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시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전리품이라고 히히덕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작 나폴레옹의 모자와 칼은 베를린 독일 역사박물관에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참고로 나폴레옹이 가져간 것 중 칼은 파리의 앵발리드에서 전시하였고, 시계는 나폴레옹 본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될 때까지도 가져갔다.

사족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은 죽은 뒤에도 편하게 쉬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폭격으로 유해가 파괴될 것을 우려해 아돌프 히틀러가 튀링겐 주 베른테로데의 소금 광산으로 석관을 옮기라고 지시했고[37]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27일, 미군이 유해를 찾아내 유언대로 이장하려 했으나 상수시 궁전이 있는 포츠담이 소련 관할이 된 관계로 1946년 마르부르크 성에 임시로 이장되었다가 1953년 서독 정부가 종갓집인 바템-뷔르템베르크의 호엔촐레른 성으로 다시 이장했고 통일 후인 1991년, 사망한 지 205년만에서야 유언대로 상수시 궁전 정원에 안장되었다.
  •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의 왕실이 그랬지만 프리드리히의 일상어는 독일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정무 언어로 프랑스어를 썼고, 프리드리히가 남긴 모든 글도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한 신하와 독일어 vs 프랑스어라는 주제로 토론을 한 적도 있을 정도.
  • 물론 평생지기 볼테르와의 대화와 서간 왕래도 전부 프랑스어로 주고받았다. 그런데 이 편지라는 것들 중에 뭔가 비범한 것들도 섞여 있는데, 볼테르가 포츠담에 기거하던 시절 프리드리히 대왕이 사람을 시켜 보낸 편지에는 웬 그림 문자가 섞인 분수[* 위키백과 설명 링크] 하나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볼테르의 답장은 더 간단해서 "Ga!"라고만 덜렁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는 프랑스어를 이용한 말장난을 주고 받은 것. 프리드리히 대왕이 보낸 메모의 분수 숫자를 프랑스어로 읽어 보면 "Deux mains sous pe à cent sous scie[38]"가 되는데, 이것은 발음이 같은 프랑스어 문장인 "Demain souper à Sanssouci" ㅡ 직역하면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식사"라는 말로 읽을 수 있다. 즉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내일 상수시 궁전에서 저녁 먹을래? (Demain souper à Sanssouci?)"
볼테르가 보낸 "Ga!"라는 답장의 경우, 그 단어 자체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하지만 이것을 프랑스어로 풀어보면 넌센스 퀴즈가 된다. Ga를 "Gé grand, A petit"(대문자 G 소문자 a)라고 풀어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와 발음이 비슷해진다. 둘 다 '제 그랑[39] 아뻬띠'로 읽으며, 이 문장의 뜻을 직역하면 "나는 매우 크게 식욕을 느낍니다." 즉 볼테르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보낸 답장의 내용은 "배가 무지 고프군요! (J’ai grand appétit!)"
그리고 실제로 볼테르는 다음 날 상수시 궁전에 등장함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을 만족시켰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양반들은 "님 밥이나 같이 먹자" "ㅇㅇ"이란 말을 이렇게 빙빙 꼬아서 서로 퀴즈를 주고받았다는 얘기이다.
  • 근세 유럽 군주 중 최초로 아웃팅 당한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화가 윌리엄 호가스가 그린 작품에서 프리드리히 2세를 상징하는 플룻 연주가가 등장하는데, 대놓고 제우스가니메데와 오버랩되게 그려놓았다. 그런데 프레드리히 2세는 스스로 딱히 풍문이나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령 상수시에서는 남성 시종과 남성 귀족 청년들만 데려다놓고 살았고, 오레스테스와 필라데스 등 동성애 관계의 유명한 고대 그리스 신화 영웅들을 주제로 한 정자를 세워놓았다.
  • 전해지는 일화로, 궁의 정원에서 재배중이었던 벚나무의 체리참새들이 먹어치우자, 화가 나서 자기 벚나무에 참새가 1마리도 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참새가 오지 않아 오히려 벚나무에 벌레가 꼬이고 병들어 버렸는데,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쳐 참새를 내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이 너무 명확하기에 창작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 위에서 잠깐 지나가듯 언급되었지만 음악에 대해 관심과 조예가 대단히 깊었다. 1749년에는 그 유명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궁으로 초청했고, 프리드리히 본인이 바로크 시대의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요한 요아힘 크반츠에게 플루트를 배웠으며, 무엇보다도 프리드리히 곁에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측근으로 있었다.[40] 아무튼 본인의 열정도 열정이지만, 주위에 이처럼 훌륭한 음악가들이 많았던 덕에 프리드리히는 인류 역사상 그리 흔치 않은 "군주 겸 작곡가"가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음악을 직접 들어보자. 듣기 쾨니히그레츠 행진곡에 영향을 주었던 "Der Hohenfriedberger" 역시 프리드리히가 작곡했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300여 곡이나 되는 자작곡이 있고, 연주도 자주 한 탓에 천재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플루트 연주자로서의 능력은 잘 해봐야 2류 정도였다는 게 당시의 평가이자 함정. 더군다나 바로크 음악의 시대가 끝나가던 시절에 대략 반 세기 전에나 유행하던 스타일을 고집했던지라 프리드리히의 음악 취향은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운, 돌려 말하면 "옛 음악에만 꽂힌" 고전 덕후나 마찬가지였다.
  • 집안 전체에 강하게 박혀 있는 밀리터리 매니아의 기질을 타고났던 지라, 당시 강선의 개념을 고안한 인물인 벤자민 로빈스의 저서 <새로운 포의 원리>가 발간되자 직접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에게 번역을 맡겨 탐독했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올 정도로 진성 중의 진성이자 성공한 밀덕 그 자체.
  • 커피를 좋아했다는 말도 전해지는데, 프리드리히가 마시던 커피는 샴페인으로 끓여서 겨자로 맛을 낸 것이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마셔서 담당 의사에게 마시는 양을 줄이란 말을 들었지만, 줄여서 오전에 7~8잔, 오후에 한 주전자였다.[41]
  • 이 시기에 커피와 관련된 웃픈 직업이 있었는데 커피 냄새 탐지원이었다. 커피가 프로이센으로 들어온 후 널리 보급되었는데, 문제는 커피에 붙은 세금이 장난 아니게 높았던지라 밀수가 성행했는데 프리드리히 대왕은 전쟁으로 파탄난 재정을 메꿀 겸 밀수를 단호히 금지하는 한편 허락 받지 않고 커피 볶는 것마저 금지시켰다. 그리고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가 있는지 알아오라며 커피 냄새 탐지원이라는 희한한 직업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남의 부엌을 멋대로 뒤질 수 있었을뿐더러 불법적으로 볶은 커피를 찾아내면 추가 수당을 얻어냈기에 매우 적극적으로 일했다. 문제는 당연히 시민들의 원망을 샀다. 결국 프리드리히 대왕의 죽음과 동시에 이 희한한 직업 또한 사라졌다.[42]
  • 중국의 문화를 동경해서 말년의 거처로 지은 상수시 궁전의 정원에는 중국식으로 설계한 다방(茶房)이 있는데, 건물 주변에 중국식 복장을 입은 동상을 세워 놓고 천장에도 중국 화풍을 흉내낸 그림을 그려놓았다고. 다만 중국에 대해 자세히 알고 좋아한 것은 아니고, 당시 유럽에서 중국의 도자기[43]가 유행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이것은 비단 프리드리히만의 경향이 아니어서, 이 무렵에 지어진 왕궁을 보면 중국산 도자기를 한가득 진열해 둔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있다.
  • 프로이센에 감자를 보급하기도 했는데, 당시 프로이센에서 감자를 키우기는 했지만 사람이 먹는 게 아니고 돼지 먹이로 쓰는 작물이었고, 탄수화물 공급은 전적으로 밀에만 의존했기 때문에 밀값이 요동치기라도 하면 식량 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1774년 전국에 대흉작이 발생하자 이 문제를 해결할 구황작물, 식량 증대, 전투식량 확보 등의 목적으로 전국에 감자를 심으라고 명했는데, 사방에서 "맛 없어서 개도 안 먹는 걸 사람더러 먹으라니 너무하지 않냐."라는 반발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수랏상에 매일 감자로 만든 요리들을 적어도 한 가지 이상 필수로 올리라고 했다. 이로서 감자를 개도 안 먹는다고 하면 왕에게 개만도 못하다고 디스하는 셈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자 보급이 영 지지부진하자, 프리드리히는 꾀를 내어 "감자는 귀족만이 먹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다. 이렇게 되자 사람 마음이 하지 말라는 건 더 하고싶어진다고, 감자를 돼지 사료라 경시하던 일반 농민들조차 "감자라는 게 사실 엄청 맛있는 게 아닐까?" "전하께서 드시는 감자는 여기 감자보다 훨씬 깨끗한 감자일 거야." 하는 생각에 몰래 대대적으로 재배하여 먹기 시작하였고, 결정적으로 프리드리히 2세 자신의 직할지에 대규모로 감자를 기르고 마을 공터에도 감자밭을 꾸며놓으면서, 그 유명한 거인 연대라고도 불리는 척탄근위대로 하여금 감자밭을 지키게 하였다.[44] 물론 감자 보급이 목적이었으므로, 밤에는 감자를 가져가기 쉽도록 일부러 초병을 철수시켜서 밭을 방치했다. 당연히 농민들은 경비가 허술한 밤을 틈타 감자를 서리해갔고, 결국 프리드리히의 계획대로 감자가 프로이센 전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국왕이 직접 나선 덕에 감자 보급이 그만큼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1778년~1779년에 걸쳐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맞붙은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 때는 두 나라의 병사들이 모두 하라는 전투는 안 하고 전투 식량 확보를 위한 감자 약탈을 더 열심히 해댄 탓에 '감자 전쟁'이라는 별명이 생기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약탈 대상이 된 바이에른 지방의 농부들만 엄청나게 죽어 나갔다. 프리드리히 대왕도 감자 보급의 공로로 '감자 대왕'이라는 애칭과 엄청난 존경을 얻었고, 현대에도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을 방문할 때 감자를 두고 오는 독일인들이 많다. 감자가 놓여 있는 왕의 무덤 모습.
  • 앞서 서술했듯이 아버지의 지독한 폭력똥군기에 시달리며 자랐으며, 이런 경험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평생 동안 그늘을 드리웠다. 나이가 50줄의 노년이 되어서도 왕세자 시절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강제로 체포되는 악몽을 꾸거나, 꿈속에서 결국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안도하는 꿈을 꾸었다는 등의 기록이 프리드리히 2세의 개인비서들을 통해 남아있다. 그런지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폐쇄적이고 인간 불신도 있었으며, 심지어 개의 충성심을 극찬하며 사람은 개만도 못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매우 고독하게 살았던 사람으로, 말년에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들이 세상을 뜨자 기르던 그레이하운드들만을 심적으로 가까이 했다고 하며, 자신이 죽으면 애견들 곁에 묻어달라는 부탁도 남겼다.
  •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다룬 영화 몰락[45]에서는 히틀러가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고뇌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죽고, 대통령직을 승계한 트루먼표트르 3세의 활약을 재현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을 표현한 장면. 실제로 괴벨스도 히틀러에게 루즈벨트의 부고를 전할때 '여제가 죽었다'며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과 동일시하기도 했다고 하며, 히틀러의 후임으로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도 반공주의를 내걸고 소련에 맞서 연합국들과 강화하려 했으나 서방의 떨떠름한 반응과 소련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망상을 한게 히틀러 하나만은 아니었던 모양.[46] 사실 트루먼도 갑자기 전쟁을 그만둘 사람은 아니었지만 당시 미국인들의 대부분이 전쟁수행 의지가 왕성했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나치의 만행들이 밝혀진 상황에서, 서방 진영은 당연히 공산주의 진영인 소련보다 나치 독일을 더욱 위험하게 여겼고 히틀러의 생각은 망상으로 끝났다.
  • 전해지는 바로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외국인 용병들은 독일어를 잘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드리히는 이들을 만날 때마다 질문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프리드리히가 하는 질문은 '나이가 몇인가?',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나?', '근무 조건과 급식 중 무엇이 더 만족스러운가?'로 거의 정해져 있어서 그냥 대답을 정해 두고 프리드리히가 물어보면 대답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리드리히가 어느 용병을 만났는데 하필 그 날은 프리드리히 2세가 질문 순서를 바꿔서 내서(...) 굉장히 대답이 이상하게 나왔다고... 그 질답을 서술해보면 '우리 군대에서 몇 년간 근무했는가?' '25년(25세) 입니다.' [47]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2살(2년)입니다.' 이런 괴상한 대답이 나오자 어이가 없어진 프리드리히 2세는 '대체 그대와 나중 누가 바보인가?' 라는 질문을 했는데 그것을 알아들을 리 없는 용병의 대답은 '둘 다입니다' (...).[48][49]
  • 명성에 걸맞게 근세 유럽을 다루는 Europa Universalis IV에는 행정, 외교, 군사 모든 능력치가 6점 만점인 소위 6/6/6 군주로 나온다.[50]
  • 역사적 비중과 독일에서의 인지도와 달리 영상매채에서의 등장은 상당히 저조한 편이다. 이는 프리드리히 2세의 능력치가 다방면에서 거의 만렙을 찍었기 때문인데, 삼국지로 치면 조조주유의 장점만 갖다 놓은 인물 정도 되시겠다. 정치적 철학과 사상에서 이미 당대의 군주들보다 앞선 것은 기본이고 당대의 석학들과 토론배틀을 할 정도의 학식, 비록 아마추어이긴 해도 오늘날로 치면 덕후에 준하는 바로크 음악 연주실력을 갖춘 당대의 팔방미인인데 이런 사람을 제대로 연기하려면 정치학과 음악 무예에 능한 삼국지의 주유의 거의 상위호환급 인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탓에 독일을 비롯한 중유럽 최고의 먼치킨과 인지도를 가졌음에도 영상화할 엄두가 안 난다고. 광무제를 다룬 사극이 많이 없는 것과 비슷할 듯.
[초상화] 7년 전쟁 중인 1757년 콜린 전투 직후의 대왕을 그린 것으로, 여기서의 패배로 인해 프로이센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었다. - 율리우스 슈라더, 1849년[나이] 74세[재위기간] 46년[1] 증거 하지만 키에 대한 정보는 많은 사이트에서 다르게 나오고 있고 키에 대한 분쟁이 심하다. 가장 많이 나오는 162cm로 기재함.[2] 동명의 독일 군가도 있다.[3] 시기적으로도 조선정조와 겹쳐 간간히 비교되기도 한다.[4] 군주론의 주장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도덕이고 나발이고 정치와 전쟁에서는 센 놈이 이기기 때문에, 욕먹을지라도 백성을 휘어잡고 현실적으로 통치하고 정치하는 테크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반마키아벨리론에서는 '정치의 소임이 도덕(신민의 안녕과 이익에 봉사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5] 장남은 세례식에서 왕관을 씌워줘야 한다고 우기다가 생채기가 나서 감염으로 인해 사망, 차남은 강하게(?) 키워야 한다면서 대포 소리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예포를 쐈는데 포성을 듣고 발작을 일으키며 사망했다.[6]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영국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의 딸이었다.[7]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문서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그 약속을 안 지켜서 노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오스트리아에 속았다며 이를 갈았다.[8] 프로이센 왕국에서 프로이센 지방은 신성로마제국 강역 밖이지만, 정작 수도인 포츠담과 최대 도시인 베를린이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지역과 해안의 포메라니아 지역은 신성로마제국 소속이기 때문에 프로이센 왕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으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압박이 가능했던 것.[9] 정치와 도덕의 분리를 기초로 군주의 위엄과 백성에 대한 공포정치를 주장하던, 혹은 당시 그렇게 해석되던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정면으로 비판한다.[10] 군대 규모를 총 인구 수에 비추어 보았을 때 당시의 프로이센은 세계에서 가장 군국화된 국가였다. 다만, 병력의 반 이상은 프로이센 외부 출신들이었는데, 이는 인구가 적은 프로이센의 현실상 병사로 차출하는 것보다 경제활동을 통해 세금을 내게 하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내려진 결정이라고 한다[11] 슐레지엔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전체 세금 수입 중 22% 가량을 차지하던 알짜배기 지역이었다. 또 개신교가 강세인 지역이어서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깃발을 꽂자 호의를 보였다고 한다.[12] 배리 린든에서 배리 린든이 프로이센군으로 복무할 적의 배경음악으로 나온다.[13] 볼테르의 작품을 읽어봐도 알 수 있겠지만 비꼬기를 좋아하고 입이 험하다.[14] 이 당시 프리드리히 대왕과 볼테르가 주고받은 편지가 참 비범하다. 아래 여담 항목 참조.[15] 더욱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의 편에 섰다.[16] 오스트리아군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주특기인 측면 공격을 피하기 위해, 전열을 무려 4마일까지 늘리자, 프리드리히 대왕은 양동작전으로 상대의 예비대를 한쪽으로 몰아넣은 뒤, 횡대를 종대로 바꾸는 파격적인 기동을 통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7] 이 자금, 물자 지원 중단으로 가용 병력이 15만명에서 6만명으로 쪼그라들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군 병사중 7할이 외국인 용병이었기 때문. 자세한 것은 조지 3세 항목 참조.[18] 영국의 이와 같은 오락가락한 대 프로이센 정책에 원한을 품은 프리드리히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 측과 무장중립동맹을 맺고 프로이센 장교단을 보내서 군사훈련을 도와준다. 이때문에 미국에서도 프리드리히의 사후 추모를 했고 현재도 호감을 갖는 사람이 많을 정도.[19] 다만 베를린 시장이 베를린으로 진군하던 러시아군에게 돈을 쥐어주고 도시 내로 입성하는 것만은 막아서 약탈은 피할 수 있었다. 대신 프로이센의 왕궁이 있는 포츠담은 얄짤없이 털렸다.[20] 물론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최악의 암군 중 한명이 되었다. 결국 이 일 이외에는 한 것도 없이 반 년만에 아내에게 쫓겨났다. 로마노프 왕조 참조.[21] 히틀러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위와 같은 전개를 기대했다. 영화 몰락의 후반부에 히틀러가 벙커 안의 자기 집무실에 걸린 프리드리히 대왕의 초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긴 모습이 나오는데, 턱 밑까지 칼날을 들이댄 소련군의 맹공을 연일 간접적으로 얻어맞던 히틀러로서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이 공산주의를 내세워 유럽을 위협할 수 있는 소련을 경계할테니, '이미 철저한 반공을 천명한 독일과 반공 동맹을 세우기 위한 강화를 맺자고 하면 그나마 괜찮지 않을까'라고 희망했지만, 이미 대세는 심각하게 기울어 소련군이 '''하루 종일''' 쏟아붓는 포화에 베를린 시내가 박살나고 있었으며, 나치의 만행이 점차 드러나는 와중에 미국이 갑자기 독일과 강화를 맺는 것은 도의상 불가능했다.[22] 폴란드는 이미 18세기 초반부터 이미 러시아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흡수하기 전에 오스트리아와 합세하여 견제한 것이다.[23] 동성애자였던 폰 슈토이벤은 동성애 혐의로 자신에 대한 수사가 진행될 것 같다는 기미를 보고 미국으로 도망친 사람인데 당시 프로이센 군주가 동성애자였으니 아이러니.[24] 'von'이 아닌 'in'을 쓰게 된 이유는 프로이센 왕국 수립 당시 프로이센 지방의 서쪽 절반인 왕령 프로이센을 쥐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반대했기 때문이다.[25] 'in'과 'von'의 차이는 꽤 크다. 동양으로 치면 'in'은 외왕내제와 비슷한 표현.[26] 나폴레옹은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7대 명장에 프리드리히 대왕을 포함시켰고, 그들의 기록을 반복해서 공부한 것이 승리의 비결이라고 말했으며, 프로이센을 박살내고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 프리드리히 대왕의 묘 앞을 지나며 모자를 벗고 예를 갖춘 뒤 휘하 장교들에게 "제군, 모자를 벗게. 이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우린 여기 있지 못했을 걸세."라고 그를 고평가하기도 했고 전리품으로 프리드리히 대왕이 썼던 회중시계와 칼을 챙기며 이것이 가장 가치있는 전리품이라고 희희낙락했다고 한다.[27] '국가 제일의 공복'이라는 표현으로도 번역된다. 여기서 공복은 배가 비었음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앞서 표현한 말처럼 '심부름꾼'의 의미이다.[28] 단, 순전히 운에 의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은 당시의 러시아와 프랑스로서 어쩔 수 없는 필연이었다는 관점도 있다. 그러므로 속단은 옳지 못하다. 자세한 내용은 7년 전쟁 문서 참고.[29] 단, 슐레지엔은 이미 프로이센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곳이기는 했다.[30] 특히 8~90년대에 범람했던 각종 만화 세계사 시리즈. 이 오류의 원조는 일본 슈에이샤에서 발간된 16권짜리 "세계의 역사"에 이렇게 묘사된 것을 너도나도 베껴서(...)이다.[31] 프리드리히가 러시아군의 측면을 공격하자 공격을 중지하라고 건의했으나 프리드리히는 공격을 강행했고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예비대인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배후를 공략했다. 프리드리히는 병력을 재정비하고 다시 공격을 가했으나 공격은 러시아군의 완강한 수비로 막힌 상태에서 아까의 예비대를 포함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이 반격을 가했고, 결국 프로이센군의 좌익이 붕괴되면서 설명 생략. 프리드리히가 동생의 건의대로 공격을 중지했으면 이겼을 것이다.[32] 5만 명에 달하던 프리드리히의 병력이 전투 이후 3천 명 밖에 남지 않았다. 프리드리히 본인도 절망하여 '난 이제 끝났다'면서 베를린으로 편지를 보냈을 정도. 물론 3천 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 죽은 게 아니라 대부분이 도망치면서 흩어져서 그렇다.[33] 물론 그냥 빽만 믿고 등용된 것은 아니고, 프리드리히 2세가 왕세자이던 시절부터 왕세자의 후원을 받아 회계/재무 실습과 실무를 해왔기에 사무를 할 능력은 충분히 있었다. 특히 프레데어스도르프가 주로 하던 일은 왕실이나 군사 자금 등을 적국 모르게 은닉하고 송달하고 운용하는 등의 업무였다. 당대 신생 강대국으로서 굉장한 고강도 업무였던 것.[34] 프리드리히 대왕의 정원사는 프레더스도르프의 침실을 '왕의 애인의 침실'이라고 수기에 남기기도 하였다. 물론 프리드리히 2세는 별 신경 안 쓴 것 같지만.[35] 실제로 이후 프로이센의 군주들은 한동안 폴란드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 프로이센 국왕 중에서 유일하게 폴란드어를 구사 못 한 인물이 바로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왕인 빌헬름 2세.[36] 프리드리히 2세가 자손 없이 죽어서 후대 왕은 프리드리히의 형제였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왕자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이었다.[37] 참고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유해와 같이 탄넨베르크 기념묘지에 안장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영웅, 파울 폰 힌데부르크와 아내의 유해, 샤를로텐부르크 궁에 안장된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유해 또한 소금 광산으로 피신했다.[38] 직역하면 "100 분의 양손 분의 p".[39] 뒤에 나오는 단어가 모음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grand의 d를 묵음 처리하지 않는다.[40] 대중들에게 유명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차남. 실내악 단원으로 있다가 훗날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의 뒤를 이어 함부르크로 가 악장 생활을 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예산 감축에 따라 자신의 급료가 궁정 광대보다 낮아지자 미련없이 떠났다.[41] 출처-먹거리의 역사 하 마귈론 투생-사마 저[42] 사실 커피 냄새 탐지원의 창설 목적은 단순히 세금을 더 거두는데 그치지 않고 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 신세가 된 퇴역병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려는 의도도 있었다.[43] 특히 인물 초상화가 그려진 청화백자. 네덜란드 같은 나라에서 일부러 주문제작했고, 도자기 열풍이 불다 보니 도자기에 그려진 초상화에까지 관심을 가지게 된 것.[44] 현대로 따지면 DEVGRU, 델타 포스 같은 최정예 특수부대가 정부미 창고를 지키는 셈이다.[45] 히틀러가 부하들에게 연필 집어던지고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장면이 유명한 그 영화다. 패러디도 많이 되어서 유명한 장면.[46] 트루먼은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단 3일만에 파병 결정을 할 정도로 과감한 인물이었다.[47] 당시 그 용병은 굉장히 젋은 용병이었다고 한다.[48] 원래는 나이 25세, 군대 복무 2년째, 근무조건과 급식 둘 다 만족이라는 뜻이었는데...[49] 판본에 따라 시간대가 보불전쟁 이후로, 프리드리히가 빌헬름 1세로, 용병이 알자스-로렌 출신의 프랑스계 병사로 바뀐 경우도 있다.[50] 악바르 대제, 구스타프 아돌프 등이 6/6/6이고 세종대왕조차 6/5/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