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쟁

 


'''7년 전쟁'''
[image]
(벤저민 웨스트의 '울프 장군의 죽음', 1771년 작.)
'''날짜'''
1754년/1756년 ~ 1763년
'''장소'''
유럽을 중심으로 북아메리카, 남아시아
'''이유'''
(아래 배경 문단 참조.)
'''교전국'''
<^|1>[image] 프로이센 왕국
[image] 대영제국
[image] 하노버 선제후국
[image] 이로쿼이 연맹
[image] 포르투갈 왕국
[image] 헤센 대공국
[image] 샤움부르크-리페
<^|1>[image] 프랑스 왕국
[image] 합스부르크 제국
[image] 러시아 제국
[image] 스페인 제국
[image] 스웨덴 제국
[image] 작센 왕국
[image] 무굴 제국
'''국왕'''
<^|1>[image] 프리드리히 2세
[image] 조지 2세조지 3세
[image] 페르디난트
[image] 주제 1세
<^|1>[image] 루이 15세
[image] 마리아 테레지아
[image] 옐리자베타 여제표트르 3세예카테리나 대제[1]
[image] 카를로스 3세
[image] 아돌프 프레드리크
'''결과'''
'''프로이센, 영국 연합군의 승리'''
'''1763년'''의 파리조약,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 체결
영국의 북아메리카, 인도 식민지 획득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권 확정
'''영향'''
미국 독립 전쟁프랑스 혁명 발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됨.
1. 개요
2. 최초의 세계대전?
3. 배경
4.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5. 유럽 외 전장
6.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7. 결과
8. 이야깃거리
9. 연도별 전투 목록[2]
9.1. 1754년
9.2. 1755년
9.3. 1756년
9.4. 1757년
9.5. 1758년
9.6. 1759년
9.7. 1760년
9.8. 1761년
9.9. 1762년
10. 관련 인물
10.1. 러시아
10.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0.3. 스웨덴
10.4. 스페인
10.5. 영국
10.6. 오스트리아
10.7. 작센
10.8. 포르투갈
10.9. 프랑스
10.10. 프로이센
10.11. 하노버
10.12. 헤센-카셀
11. 둘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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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七年戰争
Siebenjähriger Krieg / Siebenjähriger Krieg in Nordamerika
The Seven Years' War / The French and Indian War
1756~1763년에 걸쳐 유럽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영국, 프랑스 왕국, 스웨덴, 스페인 왕국 등 당시 유럽 열강 전부와, 기타 포르투갈 왕국이나 독일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제후국가들까지 참전했다. 아시아 쪽에서는 무굴 제국도 끼어들었다. 게다가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가 있는 신대륙에서는 아예 유럽 본토와 별개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판이 커져버려 이 식민지들이 모국을 따라 서로 싸우고, 이 싸움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끌어들였다. 이로쿼이족과 체로키족은 영국 편에 가담했고, 쇼쇼니족과 오타와족은 프랑스 편에 가담하여 부족들끼리 또 서로 싸우는 등 정말 각양각색의 세력들이 뛰어든 전쟁이다.

2. 최초의 세계대전?


독일(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중부유럽 대부분 지역과 서지중해, 이베리아 반도, 북해 및 북프랑스 지역에 북미 대륙 대부분과 서인도 제도, 동부 및 남부 인도필리핀, 그리고 남미의 우루과이 지역 등에서 벌어졌었고, 단순히 전장의 규모로 보자면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넓다. 그래서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총력전의 성격을 띠지 않았기 때문에[3] 일반적으로는 세계대전으로 보지는 않으나, 세계대전급 전쟁이었다고는 한다.

3. 배경


단순하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수는 단순히 개인적 원한을 떠나, 지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끊고 정치적으로 완벽히 독립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철저히 박살내고 프로이센 왕을 과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처럼 합스부르크의 봉신으로 되돌려놓고 프로이센을 철저히 분할, 과거 공국 수준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가가 원래대로 보잘 것 없는 2등 국가로 돌아가는 것'''

- 오스트리아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공작. 전후인 1778년 전쟁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서[4]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전쟁이 유럽 전역 및 세계 각지로 확산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영국의 하노버 왕가는 프로이센으로 부터 하노버를 지키기를 원하여, 러시아의 군대를 이용하려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영국과 동맹하기로 하였다. 영국과 동맹하여 하노버를 방어하기로 한 프로이센에 대해 격노한 프랑스와 프로이센 탓에 영국으로 부터 받는 지원금이 끊긴 러시아에 오스트리아가 접근하여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동맹이 결성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 발발 이전에도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를 두고 이미 무력충돌을 벌이는 중이었다. 명예 혁명 이후 하노버 왕국을 동맹국으로 삼은 영국과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를 옹립시킨 프랑스의 유럽 패권경쟁은 치열했다. 정확히 말하면 하노버 왕가는 하노버 공국의 선제후이기도 했다. 거기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앤 여왕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물론 진지하게 왕위를 요구한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다.[5]
이처럼 당시 유럽에는 프로이센 vs 오스트리아, 영국 vs 프랑스의 양대 대립축이 격렬하게 충돌하려 하고 있었으며,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마요르카 섬[6]을 공격하면서(미노르카 해전) 전쟁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은 예방전쟁 차원에서 작센을 침공하여 점령한다. 이는 독일 내에서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자극하게 된다.

4. 중부 유럽 전역 (1756~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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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대왕
개전 첫 해인 1756년,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공격을 통해 먼저 오스트리아를 전열에서 이탈시킨 후,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전략으로 전력을 다해 오스트리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이후 군제를 개편하고 군비를 강화한 상태였다. 그래도 프리드리히 대왕은 로보지츠 전투, 라이헨베르크 전투, 프라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며 프라하 공략을 가시권에 두었으나 결국 콜린 전투에서 패하면서 프리드리히 2세의 조기종결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다만 러시아군이 내부사정으로 후퇴하여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그 직후 프리드리히 2세는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을 대파하며 다시 한번 천재적인 전술역량을 보여주었다. 로스바흐 전투의 패배로 본디 독일 내 전쟁에서 전의가 높지 않던 프랑스가 실질적으로 동맹에서 이탈하였으며, 로이텐 전투는 세계 전사에서 손꼽히는 천재적인 작전으로 아직까지도 회자되며 각국의 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1758년까지 이어진 프리드리히 2세의 대 오스트리아 공세는 보급부대의 붕괴(돔슈테트 전투) 등으로 인하여 모두 다 실패로 돌아갔고, 같은 해 8월 조른도르프 전투에서 러시아군과 맞붙어 가공한 피해를 입으면서 전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더니, 호크키르히 전투, 카이 전투에서 연전연패했고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최악의 패배를 당하며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렸다.[7] 프리드리히 2세가 독약을 몸에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전투 직후이다.
이후 프로이센은 공세를 포기하고 방어전으로 일관했으며, 러시아-오스트리아-스웨덴 연합군은 콜베르크 요새 및 베를린 등을 함락하며 승리 직전까지 나아갔다. 이때까지 프로이센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군을 영국-하노버 연합군이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하노버군 역시 방어전 중심으로 일관하고 있었고 공세는 여전히 동맹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문제는 프랑스가 영국과의 전쟁에 치중하느라 일찍 유럽전장에서 이탈했다는 것.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랑스와 어렵게 손을 잡은건 프로이센을 효과적으로 다굴하기 위해 프로이센의 인접국이자 육군강국인 프랑스의 도움이 필요해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까지 프랑스에 내어 줄 의향이 있었는데, 정작 프랑스는 몇 번 발렸다고 초반부터 이탈해버리니 속이 상했을 것이다. 결국 이는 유럽전장에서 동맹국이 프로이센을 빨리 무너트리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 외에도 오스트라이의 러시아에 대한 불신은, 가뜩이나 병참 문제로 승패 무관하게 철수할 수 밖에 없었던 러시아군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측 입장에서도 지난 전쟁당시 혼자서 프랑스-프로이센 양국을 상대하다가 이번엔 러시아와 함께 프로이센과 2:1 승부를 펼친 것이니 손해는 아니었다.[8] 그리고 프랑스가 아주 발을 뺀 것도 아니고 서부 독일 지역에서 계속 군사행동을 펼치긴 했는데, 프로이센 이전에 서북 독일 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하노버 공국, 그리고 하노버 공국과 '''동군연합 상태인 영국'''과 격전을 치루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부독일 지역만이 아니라 영국은 다수의 병력을 기습적으로 프랑스 북부 해안에 상륙시켜 약탈 및 파괴행위를 하고 있었기에 후방을 비울 수 없었던 상황이기도 했고.[9] 오스트리아도 사실 프랑스가 적극적으로 참전해주면 좋지만, 그냥 대륙에서 상대할 적을 하나 줄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전략적 이득이었고 애시당초 동맹 체결 당시부터 프랑스의 주 전략목표가 영국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좀 섭섭하다는 의사표시만 하고 그쳤다.

5. 유럽 외 전장


중부 유럽 전선과 달리, 식민지에서는 프랑스군이 압승하고 있었다. 북미 전역에서는 유능한 장군이었던 루이 조제프 드 몽캄과 프랑스군의 선전으로 영국군은 참패를 거듭하던 상황이었다. 일례로 1758년 뉴욕주의 카리용 요새 전투에서 1만 6000명의 영국군이 몽캄 장군이 이끄는 3600명에 불과한 프랑스군에 대패를 당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본국에서의 대대적인 증원과 제임스 울프라는 뛰어난 지휘관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했다. 특히 프랑스령 캐나다의 중심부인 퀘벡에 대한 공성전중 벌어진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 장군은 4,400명의 병력으로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던 몽캄 소장을 전사시키지만 그 자신도 역시 전투 막바지에 전사한다. 피해 자체는 영국이 좀 더 컸지만 영국 해군때문에 병력충원과 보급이 막힌 프랑스군은 더이상 싸울수 없었다. 공군도 없었던 시절이니, 제해권을 내 주어 배후 보급선이 막혀버린 프랑스군의 패퇴는 예정된 수순이었던 셈.
울프의 죽음은 월리엄 피트(대 피트)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우상화될 정도로 컸는데, 그 결과만 따져봐도 루이지애나를 제외한 북미 전역의 프랑스 세력을 소멸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루이지애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황열병 때문에 침공을 못한 것이었다. 거꾸로 나폴레옹이 북미 전역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던 것도 이 모기로 인한 황열병 때문이다.
프랑스도 한때 승리의 기회가 있었고, 영국의 북미주둔군을 절대적인 위기로 몰아넣은 적이 있었으나 영국 함대가 신속하게 병력증원을 해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프랑스 주력함대가 영국 함대에게 격파당해 대서양 제해권을 영국에 빼앗겨 본국으로부터의 추가증원에 실패한 것이 북미 전역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북미 전역을 별도로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프랑스군 '''모두''' 병력과 보급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각기 다른 원주민 부족과 연합했기 때문. 흔히 프랑스 + 아메리카 원주민 vs 영국군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10]
인도에서도 클라이브가 이끄는 영국 동인도회사군이 플라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친영국적인 벵골 태수를 앉히고, 남인도에서 프랑스의 핵심거점인 퐁디셰리를 함락시켰다. 1760년, 프랑스의 동맹으로 참전한 스페인도 영국군에게 쿠바필리핀을 빼앗기며 패배를 거듭했다.
영국군은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모조리 휩쓸었고, 필리핀과 쿠바라는 스페인의 식민제국의 두 핵심지역을 장악했으며, 쿠바에서 막대한 부를 전리품으로 확보해 전시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군은 남미 우루과이 지역에서 포르투갈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브라질로 약간 진격했으나 큰 의미는 없는 승리였다. 이로써 대영제국과 거의 판도가 맞먹던 프랑스 식민제국은 몰락했다.
그러나 영국의 이와 같은 승리는 모두 비유럽 지역에서의 것으로, 대륙의 동맹국 프로이센이 패전 직전에 내몰리면서 이와 같은 승리는 빛이 바래고 있었는데...

6. 다시 중부 유럽 전역(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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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리자베타 여제
표트르 3세
1762년 초, 대프로이센 동맹의 한 축이던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가 죽고, 그 뒤를 표트르 3세가 이었는데, 이 표트르 3세는 열렬한 '''프리드리히 대왕 숭배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시절부터 천재적인 용병술을 보였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당시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유럽 전역에서 인기가 드높았는데, 표트르 3세 역시 왕자 시절부터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용담에 감복하여 그의 열렬한 빠돌이가 되었다. 표트르 3세는 즉위하자마자, 프리드리히 2세에게 '''영토를 포함, 전쟁 이전 상태로의 회귀'''를 아무 조건없이 제안했고, 품 안의 독약을 언제 먹어야하나 고민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냉큼 화친을 받아들였다. 표트르 3세는 그걸로 부족해서, 대프로이센 전쟁의 동맹국이던 스웨덴까지 설득시켜 스웨덴도 전쟁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11] 이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을 "브란덴부르크 가의 기적(Miracle of the House of Brandenburg)"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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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이런 대반전으로 인해 프랑스의 루이 15세마담 드 퐁파두르, 그리고 무엇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원래 대프로이센 동맹은 마담 드 퐁파두르,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여제 때문에 3부인 동맹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정식지위는 황후인지라...그래서 옐리자베타 여제의 죽음이 전황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뒤엎을 정도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7년에 걸친 전쟁으로 더 이상 국력이 남아나질 않는 상태였으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 전쟁의 패배로 전쟁을 지속할 동기가 사라진 상태였는데, 유일하게 건재한 동맹국 러시아가 이탈하니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준이 아니었다. 동맹 이탈도 이탈이지만,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협상 내용을 그것도 러시아가 먼저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표르트 3세가 단순히 빠심에 의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당시 러시아는 근대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으며 표르트 3세는 이 근대화의 모델을 프로이센으로 생각했다는 것. 게다가 3국동맹이라고는 하나 프랑스는 이미 식민지 전쟁에 눈을 돌려 7년전쟁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고 도움도 거의 안되었으며 오스트리아도 사실상 쥐어짜내며 전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프로이센을 멸망시키긴 어려웠으며 목표 또한 프로이센의 멸망은 아니었다. 실제로 표르트 3세는 6개월만에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서 폐위 되었는데 그 이후로도 러시아는 7년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표르트 3세가 폐위가 된게 1762년 7월이고 7년 전쟁은 그 이후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게 연달아 패배하면서 1762년 10월에 끝났다.). 즉, 동맹에서 빠진게 마냥 이유없는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전쟁 배상금이나 영토 일부의 할양처럼 러시아에게 유리한 조건을 내걸었다면 모르겠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 부분에서 러시아가 가시적으로 얻은 성과가 없었다. 러시아가 7년 전쟁에 가담한 이유는 발트 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동프로이센을 점령한 뒤 프로이센과 강화하여 동프로이센을 얻어낸 후 이를 폴란드의 쿠를란트-젬갈렌과 교환할 속셈이었다. 차라리 원래 속셈대로 아직까지 물러나지 않은 동프로이센을 내놓으라 하면 좋았을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러시아 전선은 러시아가 유리하긴 했지만 보급선이 너무 길어져 사실상 공세종말점에 가까워졌고, 프로이센군은 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반전을 꾀하고 있었다고는 하는데, 사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 하거나 매우 어려웠지 않았나 싶다. 괜히 이 일이 '''기적'''이라 불리는건 아닐 것이다. 즉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그 것으로 러시아 국내의 여론을 납득시키기엔 여러 모로 부족했다. 무엇보다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패전국 상대로 되려 패전국에 이득이 되는 미친 협상을 해버렸다는 것 자체'''가 국내 뿐 아니라 국외, 나아가 현대 외교사를 비롯한 역사계에서 보면 정말 어이없고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이다.
이렇게 표트르 3세의 삽질은 프로이센에겐 큰 회생 기회가 되어버렸고 이 때문에 표트르 3세를 몰아낸 예카테리나 2세조차 그렇게 타격을 입었음에도 6개월만에 좀비같이 살아나 오스트리아에게 대반격을 성공해버리는 것을 보고 승기를 다시 잡기 어렵다 판단했는지 표트르 3세의 명령으로 프로이센 지원을 하게된 러시아군을 물리는 것으로 전쟁을 그칠수 밖에 없었다.
결국,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의 마지막 국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며 최후의 공세를 시도했고, 프라이베르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며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7. 결과


  • 오스트리아와 마리아 테레지아는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고, 또 불구대천의 원수 프랑스와 혼인동맹까지 맺었음에도 또 패배하여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물론 슐레지엔 자체는 이미 전쟁 전부터 프로이센이 실효지배하고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잃은 것은 거의 없었지만, 이후로 두 번 다시 슐레지엔에 대한 영유권을 명목 상으로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전략적으로 실패한 마당에 경제적으로도 손실만 본 전쟁이었다. 슐레지엔이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 세입의 22%가 걷히는 중요한 지역이기는 했지만 그것을 수복하겠답시고 전비로만 무려 오스트리아의 11년치 예산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종전 시점에서 오스트리아 국가 재정은 부도 직전이었지만 남편인 프란츠 1세의 뛰어난 재정 운용 능력[12]으로 불려놓은 어마어마한 왕실의 사유재산을 써서 재정 파탄은 피할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쟁을 통해 대외적 이미지를 일신하고 국력의 굳건함을 과시했다. 동맹의 역전으로 프로이센을 단숨에 포위하는 외교적 수완과 다굴의 힘입은 것이기는 했지만 군사강국인 프로이센의 수도에까지 쳐들어가는 군사적 역량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전쟁 준비와 수행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도력을 의심했던 헝가리 귀족과 보헤미아의 도시민들을 상대로 다시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확립할수 있었고, 이후 프로이센에게도 오스트리아는 함부로 더이상 도발하기 힘든 여전한 강대국이란 위신을 새웠다. 이 전쟁에서 신장한 자국의 위상에 힘입어 오스트리아 제국은 더 오랫동안 유럽의 주요 열강 직위와 독일어권의 맹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 프로이센은 승리하기는 했지만 막대한 전쟁 피해를 회복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전쟁 과정에서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주변을 포위한 강대국들의 다굴빵에 거의 단독으로 맞서야했으니 물리적인 손해는 프로이센이 가장 컸다고 할 만하다. 빌헬름1세-프리드리히2세가 밀어붙인 초강경 인구증산 정책(강간죄 폐지 중혼제 의무화 등)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싸워댔으니 맨파워가 남아있을리가 없다. 이후 프로이센이 유럽에서 다시 외교적으로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되는 것은 프로이센이 폴란드 분할에 참여할 때즈음으로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 슐레지엔은 이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부터 실효지배하고 있던 터라 승전으로 얻은 물리적인 이득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확고하게 다져 오스트리아가 다시는 슐레지엔을 넘보지 못하게 했고 전 유럽에 프로이센의 군사적 강대함을 알렸다는 것이 소기의 성과였다.
  • 러시아의 표트르 3세는 이 전쟁에서의 실책으로 몇 달만에 부인 예카테리나 2세의 궁정 쿠데타로 실각하였다. 지나친 친독정책으로 전쟁 승리를 날려먹은 것에 대한 러시아 제국 내부의 반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무능의 대가로 표트르 3세는 폐위 후 목숨을 잃었다. 이와 별개로 이 전쟁은 러시아가 유럽의 국제 정치에 참여하는 시발점이었다. 러시아는 이전까지는 후진적인 사회구조와 경제 수준, 야만적인 문화 때문에 유럽의 일원으로 대우받지도 못했으며 아예 야만족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바탕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국제전에 러시아가 소방수 역할을 하면서 서구 열강 정치에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 영국은 이 전쟁으로 인도와 북미의 식민지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었으나, 북미에서는 초기 패전의 와중에 북미 식민지의 커다란 도움을 받고, 이들의 힘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다 장기간의 전쟁에 따른 지나친 전비부담은 영국의 재정을 악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힘이 커진 북미 식민지에 세금 좀 내시지? 했다가 식민지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영국 본국은 이에 강경책으로 대응하다가 북미 식민지는 대륙회의를 결성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으니 바로 미합중국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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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4배로 팽창한 영 북미 식민지
  • 압스부르고 왕조 이후 17세기 내내 내리막길만 타던 스페인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쳐 보르본 왕조가 들어선 이후 체질 개선에 성공해 16세기의 전성기까지는 아니지만 예전 열강으로서의 국력을 상당부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스페인은 7년 전쟁에서도 선전하여 플로리다를 영국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강 서쪽의 루이지애나를 얻으며 중남미 일대에 거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원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 오스트리아가 이 전쟁에서 제일 망한거 같지만, 실제로 제일 쪽박찬 것은 프랑스이다. 프랑스는 루이 14세 말기부터 마이너스로 변하기 시작한 국가재정이 악화된 건 물론이고, 명목상으로는 패전국이지만 내부 결속과 군제 개혁, 국력의 건재함 등을 과시함으로서 나름 얻은 점도 있었던 오스트리아, 러시아와는 달리 캐나다와 미시시피 강 동쪽 전체를 영국에게 빼앗기고 인도 역시 영국에게 넘겨주어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막대한 피와 돈을 썼음에도 얻은게 없었지만, 이번엔 얻은게 없는 수준이 아니라 참전국 중 가장 큰 손실을 보았다. 그나마 설탕과 커피로 막대한 수익을 보던 생도맹그 등 카리브 해의 식민지는 유지해 최악을 면하긴 했지만... 이러한 막장테크를 제대로 탔기에 루이 16세 때는 국고가 바닥이 나서 난리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왕인 루이 16세는 오로지 영국을 엿 좀 먹이려고(!!) 다시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이기긴 했는데, 국가 재정은 더 악화되어서 혁명이 터진다.

8. 이야깃거리


  • 이 전쟁을 알기 쉽게 서술한 만화가 있다.#
  • 7년 전쟁은 임진왜란의 서양사학계 명칭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에 대한 호칭이 당시 참전한 한중일 3국에서 다 제각각인데가[13] 각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명칭이라 해외에서는 중립적인 명칭이 필요하기 때문. 영미권에서 임진왜란을 주로 일컫는 명칭은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이지만 '침략'만으로는 해당 전쟁의 성격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있고, 만주사변남방작전도 'Japanese invasions'라고 하다보니 헷갈리는 명칭이기도 하여 다른 명칭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간혹 북미-유럽의 동양 사학계에서는 임진왜란을 '7년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다만 서양에서 7년 전쟁 하면 주로 이 문서가 설명하는 전쟁, 혹은 18세기 러시아 표트르 대제와 스웨덴간의 북방전쟁을 지칭하기에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정확히 구분해서 호칭하는 편. 임진왜란을 다룬 소설 중 김성한의 <7년전쟁>이라는 작품은, 당초 <7년전쟁>이 원 제목이었으나 1990년대 초반 <임진왜란>으로 바꾸고 나중에 다시 <7년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다만, 연도가 7년인 이 문서가 말하는 7년 전쟁과 다르게 임진왜란은 햇수만 따지면 1592년 부터 1598년까지, 다시 말해 6년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6년 전쟁이다. 물론, 단순히 연도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 두 전쟁의 지속일은 거의 겹친다. 임진왜란은 연말인 1598년 12월까지 이어졌고 7년 전쟁은 연초인 1763년 2월에 끝났기 때문. 7년전쟁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벌어졌는데 1756년 5월 20일 미노르카 해전을 개전일로 보고 1763년 2월 15일 후베르투스부르크 조약을 종전일로보면 정확히 2463일간 벌어진 전투고 임진왜란은 마찬가지로 계산하면 2399일간 벌어졌다.
  • 역사서는 아니지만 # Ladenijoa라는 블로거의 포스트들도 7년 전쟁을 가볍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러시아 드라마 예카테리나에서 간접적으로 전황이 언급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숭배자인 표트르 3세가 유리한 전황을 단숨에 뒤집어 엎는 상황 이 아주 상세하게 나온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캠페인의 액트 2인 얼음 챕터는 역사상의 가상 인물에 의해 스토리가 진행되는데 7년 전쟁의 북미 전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실존 인물로 조지 워싱턴도 등장한다.
  •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병사하자,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독일 측은 이 7년 전쟁의 기적이 재현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즉 친소련 성향이 강한 루즈벨트가 없어진 것을 이용해서 미국,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연합국들과 강화 협정을 맺고 소련의 유럽 진출을 저지하는 반공주의 연합을 맺는 방법을 구상한 것. 괴벨스가 히틀러에게 루즈벨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한 첫마디가 "차르가 죽었습니다."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나치 독일의 만행이 전세계에 폭로된 상태에서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과 관계를 끊고 나치와 협력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 기대는 망상으로 끝나고 독일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9. 연도별 전투 목록[14]



9.1. 1754년


  • 네세시티 요새 전투 - 7월 4일. 북미 프랑스 식민지군 vs 북미 영국 민병대[15]

9.2. 1755년



9.3. 1756년



9.4. 1757년



9.5. 1758년



9.6. 1759년



9.7. 1760년



9.8. 1761년



9.9. 1762년



10. 관련 인물



10.1. 러시아



10.2. 브라운슈바이크 공국



10.3. 스웨덴



10.4. 스페인



10.5. 영국



10.6. 오스트리아



10.7. 작센



10.8. 포르투갈



10.9. 프랑스



10.10. 프로이센



10.11. 하노버


  • 조지 2세[16]
  • 조지 3세[17]
  • 니콜라 뤼크네르
  • 샤움부르크-리페 백작 빌헬름 프리드리히 에른스트
  •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10.12. 헤센-카셀



11. 둘러 보기




[1] 1763년 7월 9일 정변을 일으켜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킨 뒤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을 지원하고자 파견한 러시아군 2만 명에게 귀환 명령을 내렸다.[2] 1754~1755년은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의 전투이다. 중요 전투는 볼드 처리.[3] 사실 당시 국가들의 입장에선 충분히 총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전쟁 승리를 위해 당시 인간 취급도 안하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끌어들였고 프로이센은 멸망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국가에 비축된 힘까지 쥐어짜내어 전쟁을 치르는 것은 당시 국가들의 역량으론 불가능했기 때문에 현대적인 총력전이 아니다. 일례로, 여성들은 현대 총력전에서 군수공장에서 일하는 것처럼 전쟁에 기여하지 않았다.[4]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 <강철왕국 프로이센>, 도서출판 마티(2020), p285, p947[5] 이후 제위에 오른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포기하게 된다.[6]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은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 7년 전쟁 직후 스페인에 반환되었다.[7] 어찌나 심하게 털렸는지 프리드리히 2세도 포로로 잡힐 뻔했고, 이를 피한 직후 몰려오는 적군의 전열을 바라보며 당장 자결할지 싸우다 죽을지 고민하다 기병 사령관 폰 프리트비츠의 설득을 받고 퇴각했다.[8] 오스트리아 편에 선 스웨덴은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하진 못했다. 스웨덴은 포메른에만 관심 있었고, 프로이센 편에 선 영국은 북미 식민지와 하노버에만 신경 썼다.[9] 이처럼 후방 상륙 교란 행위로 꽤 성과를 얻은 영국이었지만 1758년 생 카스 전투에서 개털린 이후로는 프랑스 본토쪽으로는 신경을 꺼버린다. 문제는 그 때가 프리드리히가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의 국력 차로 인해 점점 밀리기 시작한 시기였다는 점. 여기에 왕실의 친정인 하노버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영국의 행동에 분노한 조지 3세윌리엄 피트 총리를 잘라버리면서 영국의 지원 또한 끊겼다. 병사의 상당수를 영국의 지원으로 고용한 용병으로 충당하던 프리드리히는 병사 숫자가 1/3으로 토막나면서 결국 개털이 되기 직전까지 몰린다.[10]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원작 소설이 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프랑스군과 동맹한 인디언 부족을 거의 부모안부까지 섞어 무지하게 욕한다. 그리고 그 소설에는 프랑스에 협력한 인디언, 영국에 협력한 인디언이 모두 나온다. 당장 책 제목의 주인공부터가.[11] 심지어는 러시아의 병력 중 일부를 프리드리히 대왕 휘하로 넣어주기도 했다.[12] 프란츠 1세가 자신의 지위를 통한 신용을 담보로 금융업을 운영하고 국채를 발행하면서 상당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미 전쟁 때도 매점매석을 이용해서 적국인 프로이센에게 전쟁 물자를 비싸게 팔아먹고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13] 임진왜란+정유재란(韓), 만력조선전쟁(中), 분로쿠・케이초의 역(日)[14] 1754~1755년은 프랜치-인디언 전쟁에서의 전투이다. 중요 전투는 볼드 처리.[15] 조지 워싱턴의 첫 전투.[16]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2세[17] 하노버 선제후 게오르크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