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피

 

孟皮
유교의 창시자 공자(孔子)의 형이다.
기록에 의하면, 맹피의 선조는 본래 은나라(상나라)의 후예였기 때문에 자성이 되었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후에 주무왕은 상나라 주왕의 서형(정실에게서 난 아들이 첩에게서 태어난 형을 이르는 말.)을 봉하였는데, 상왕조의 충성스러운 명신인 미자계는 송나라(하읍)에 봉해졌다. 미자계가 죽은 뒤에 그의 동생인 미중이 즉위하였는데 미중이 바로 맹피의 선조이다. 맹피의 6대조인 공보가의 뒤로부터 후대의 자손들이 공을 성씨로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 증조부인 공방숙은 송나라의 내란을 피해 송나라에서 노나라로 도피했다. 맹피의 아버지 숙량흘(숙량은 자이고, 흘은 이름)은 노나라의 이름난 용사였다. 숙량흘은 먼저 시씨인 요영에게 장가들었는데, 딸만 아홉을 낳고 아들은 하나도 낳지 못했다. 그의 첩이 유일한 아들인 맹피를 낳았는데 절름발이였다. 당시의 정황하에서는 여자와 질병이 있는 남자는 모두 대를 이을 수 없었다. 숙량흘이 만년에 젊은 여자인 안징재와의 사이에서 공자를 낳았다. 맹피가 바로 공자의 형이기 때문에 공자를 ‘공씨네 둘째’라고 부르는 것이다.
맹피는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공충(孔忠)으로 자는 자멸(子蔑)으로(이때문에 공멸으로도 부른다) 숙부 공자의 제자로 72현중 하나였다고 한다. 다만 논어 공야장편을 보면 공충이 또다른 제자 복부재(자는 자천)와 비교당하며 까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공자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1] 딸은 공자의 제자인 남궁괄에게 시집갔다.

[1] 공야장 2장의 내용인데, 子謂子賤君子哉若人魯無君子者斯焉取斯라고 하여 자천을 군자라고 뜬금없이 칭찬하는 내용이다. 전후관계가 짤려있어서 이 한문장만으로는 어째서 이것이 공충과 복부재와의 이야기인지 알기 어려운데, 논어에 실리지 않은 전문을 모두 옮기자면 孔子弟子有孔蔑者與宓子賤皆仕孔子往過孔蔑 問之曰自子之仕者何得何亡孔蔑曰自吾仕者未有所得而有所亡者三曰王事若襲學焉得習以是學不得明也所亡者一也奉祿少鬻鬻不足及親戚親戚益疏矣所亡者二也公事多急不得弔死視病是以朋友益疏矣所亡者三也孔子不說而復往見子賤曰自子之仕何得何亡也子賤曰自吾之仕未有所亡而所得者三始誦之文今履而行之是學日益明也所得者一也奉祿雖少鬻鬻得及親戚是以親戚益親也所得者二也公事雖急夜勤弔死視病是以朋友益親也所得者三也孔子謂子賤曰君子哉若人君子哉若人魯無君子也斯焉取斯으로 동시에 출사한 조카와 복부재에게 벼슬을 하고 느낀점을 공자가 묻자 공충은 벼슬의 단점만 3가지를 말하였고, 복부재는 벼슬의 장점 3가지를 말하였다. 이에 공충을 까고, 자천을 칭찬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