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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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의 유학자. 노(魯)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어려서부터 예(禮)에 밝았다. 30대부터 제자 양성을 시작했고, 50대에 이르러 노나라의 중도재(中都宰)[6] 를 지냈는데 잘 다스렸다. 이에 노나라 정공(定公)의 신임을 얻어 노나라의 세 권세가인 삼환(三桓)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과업을 맡았으나 끝내 좌절되었고, 그는 실각하였다. 자신의 이상이 노나라에서 실현될 수 없음을 안 공자는 이후 여러 제자를 이끌고 13년 동안 중국 천하를 방랑하며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았지만 이 역시 좌절되었다. 말년에 노나라로 귀국하여 국로(國老)의 대접을 받았으나 역시 등용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제자 양성과 고문헌 정리에 진력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2. 상세
사상적 측면에서는 동아시아적 휴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인(仁)' 을 최초로 제시하였다.[8] 인(仁)이란, 도덕적, 인본주의적, 인문주의적인 의미의 '사람다움', 즉, '사람의 따뜻한 마음'을 말한다. 최근 곽점묘에서 출토된 죽간에서 인(仁)의 원형이 되는 글자가 발견되었는데, '仁' 의 자리에 '身心'[9] 이 있었다. '身'은 갑골문과 금문에서 '아기를 임신한 어머니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身心' 의 본래 뜻은 ''' '임신한 어머니가 뱃속의 아기를 생각하는 마음' '''인 것이다. 이러한 "身心"을, 공자는 자신의 사상적 해석을 통해 "仁"이라는 문자로 바꾸었던 것.[10] 인(仁)은 " 亻" 와 " 二 "로 구성되는데, 여기서 " 亻"은 " 人 "을 뜻하고, " 二 " 는 앞의 글자를 반복하는 것을 뜻하므로[11] "인(仁)"은 ''' '人人' '''. 즉, '''사람은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이다.[12]
그러면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 인(仁)의 이전 글자인 "인(身心)"의 뜻까지 종합하면 알 수 있다. 바로 "임신한 어머니가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는 것처럼 '''타인'''(人)을 아끼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인 셈.[13] 이는 우리네 어머니들이 자식을 대할 때 그러하듯이, 배려하고 걱정하는 등, 조건없이 '''남을 챙기고 아끼는 마음'''이 "사람다움"의 본질임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배신 속에서 죽었기에 '남을 챙기고 아끼자. 그래서 사람답게 살자.'는 공자의 외침은 당시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크고 작은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주변을 아끼고 챙기는 사람다움(仁)을 잘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신뢰(信)를 얻게 되는데, 주변의 수많은 신뢰를 통해 높혀진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장(長)이 된다. 이로써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생기게 되니,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본받아 배운다. 공자는 이러한 상하관계에서의 올바름을 의(義)라고 하여, 공정하고 의로운 자가 높은 위치에 있어야 그 사회가 안정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주변 친한 사람을 챙기는 것도 너무 지나치면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상하관계의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있어서 순서가 없으면 미숙한 아랫사람이 그 미숙함으로 윗사람을 우습게 보아 가르침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으니, 친하더라도 거리를 지키게 하고 상하관계에서는 순서를 따르게 하였는데, 이러한 형식을 예(禮)라고 한 것이다. 따라서 인(仁)한 사람은 결국 높은 자리로 나아가 의로움(義)을 펼치며, 이러한 인(仁)과 의(義)의 적절한 순서를 지키자는 것이 예(禮)가 되는 셈. 여기서부터 효제자(孝悌慈), 서(恕), 경(敬)의 윤리관, 예치(禮治), 덕치(德治)의 정치관 등이 만들어졌다.
따라서 공자는 세상이 혼란한 연유를 이러한 인(仁)의 부재와 예악(禮樂)의 상실에서 찾았으며, 예악을 따르는 인군(仁君)을 일으켜 주(周)나라 초기와 같은 성세(聖世)를 회복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정치는 인(仁)을 갖추고 예(禮)에 밝은 군자(君子)[14] 가 주도해야 한다고 보았고, 이 군자를 양성함에 신분을 가리지 않고 보편적 교육을 베풀었다. 그가 정립(正立)한 사상, 그리고 그의 사후 후대 학자들이 그 사상을 뼈대로 하고 여러 사상을 곁들여[15][16] 발전시켜온 일련의 사상계(思想界)를 우리는 유학(儒學), 또는 유교(儒敎)라고 부른다.[17]
3. 호칭
이름은 구(丘). 사마천 《사기》에 따르면, 태어났을 때 머리 꼭대기 가운데가 움푹 꺼져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구(丘)라 했다고 한다. 자는 중니(仲尼).
원 성종 11년(대덕大德 11년, 1307년)에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으로 높혀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성균관 대성전 등지의 공문사당 위패에 표기되는 공식 존호이기도 하다. [18]
보통 논어에서는 '자왈(子曰: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줄여서 말한다. 논어 이외의 책에서 공자를 지칭할 때는 '부자(夫子)'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이런 까닭은 한자문화권에서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은 보통 공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간혹 '공부자(孔夫子)'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서구 선교사들은 이 표현을 라틴어로 바꿔서 '콘푸치우스(Confucius)'라고 불렀다.[19] '공부자'의 중국어 발음[20] 에다가 남성 명사 주격 단수 어미인 '-us'를 붙인 것. [21]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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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향교에 모셔져 있던 공자 초상
4.1. 조상
공자가어에 따르면, 주(周)나라 무왕이 폭군 주(紂)를 정벌하고 나서 그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상나라의 제사를 모시게 했는데, 무왕이 죽자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 등이 무경(武庚)을 옹립하여 난을 일으키고, 주공(周公)이 이들을 물리쳤다. 주공(周公)은 주(紂)의 의붓 형 미자(微子) 계(啓)[27] 에게 영지를 하사하여 송(宋)나라를 만들고, 여기에 상나라의 후예들을 모여 살게 하였다. 미자 계의 동생인 미중(微仲)은 아들 송공(宋公) 계(稽)를 낳았는데, 이떄부터 공(公)의 작위로 불리게 된다. [28]
이후, 송공(宋公) 계(稽) → 정공(定公) 신(申) → 민공(湣公) 공(共) → 불보하(弗父何) → 송보주(宋父周) → 세자(世子) 승(勝) → 정고보(正考甫) → 공보가(孔父嘉)를 낳았다. 불보하(弗父何) 이하는, 대대로 송(宋)나라의 상경(上卿) 벼슬을 하였다. 공보가 부터는 공(孔)씨.
일명 공보(孔父)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살았을 때 나라에서 준 호칭인데, 이것을 자손들이 자신들의 성(姓)으로 삼은 것이다. 공보가(孔父嘉)는 원래 송나라의 대부였으나 가문이 화를 입어 공보가는 죽고 그 후손이 노나라로 도망쳤다. 이후 공보가 → 목금보[29] → 역이 → 방숙 → 백하 → 숙량흘 → 공자 순. 숙량흘에 이르러 모든 작위는 사라지고 일개 군인의 신분이 된다.
결론은, 알고 보니 공자는 상나라 황실의 후예라는 것이다(...) 또한 공자의 조상들이 살았던 송(宋)나라는 상나라의 후예들이 많이 살았고, 상나라의 제사 방식을 예절로 삼았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찬가지로,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공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나라 사람은 동쪽 계단에 장사지내고, 주나라 사람은 서쪽 계단에 지내고, 상나라 사람은 양 기둥 사이에 지낸다. 어젯밤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는 일찍이 상나라 사람이었다."[30] 라고 말했다.
하지만, 공자가 상나라 황실의 후예라는 것과 주나라는 상나라의 예악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에 관련된 것은 공자의 유학사상이 세상이 널리 퍼지자 그것을 신성시하고 높히려는 유학자들에 의해 과장되거나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4.2. 출생 배경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31] 은 장대한 체구의 무인(武人)이었다. 노나라군이 유인계략에 속아 상대편 성 안에 갇힐 위기에 처하자, 아래로 내려오는 성문[32] 을 그냥 팔로 받쳐서 아군을 달아나게 했을 정도로 힘이 좋았다고 한다. 뒤에 태어날 공자 역시 아버지 숙량흘을 닮았는지 그 또한 체구가 좋았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이었다고 전해진다. 1척이 시대마다 달라서 도량형이 명확하지 않지만, 당대의 거구인 것은 확실하다. 자로가 아직 공자의 제자이기 이전, 그저 글귀나 읽는 비리비리한 서생인 줄 알고 쳐들어갔다가 이 장대한 기골에 기세가 꺾였다고 한다.
숙량흘은 딸만 9명을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서 겨우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은 몸에 장애가 있었다. 이름이 맹피(孟皮)였는데, 맹은 서장남[33] 의 뜻을 지닌다. 절름발이로 추정된다. 논어에 형의 딸을 공자가 시집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형이 맹피이다.
결국 숙량흘은 노령의 나이에 16살 무녀(巫女)[34] 안징재를 부인으로 들인다.[35] 안씨 집안에서는 3명의 딸이 있었다고 하는데, 숙량흘이 셋 중 하나를 아내로 맞으려 하자, 막내딸 안징재가 스스로 나서서 숙량흘의 아내가 되었다. 안징재는 이후에 공구에게 아버지의 무덤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고 죽었고 후한의 학자 정현은 안징재가 숙량흘과 관계를 맺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기록했다.[36] [37]
안징재는 노나라 수도 곡부 인근의 니구산(尼丘山)에서 살았고 숙량흘은 가끔 찾아오다가, 얼마 후 안징재는 공자를 낳았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공자의 탄생을 야합(野合)이라고 표현했는데, 도올 김용옥은 이를 말 그대로 '들에서 했다'라고 설명한다. 즉,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은 비공식적 관계라는 뜻이다. 쉽게 말해 공자는 거의 사생아나 다름 없었다. [38][41][42]
위에서 나오는 결론은 공자는 정말 별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공자의 부친을 숙량흘로 보더라도, 숙량흘은 60대 이상의 노인이었고 직책은 귀족의 끝자락인 사(士)이었으며, 공구가 태어난 지 3년여 만에 죽었다. 이후 안징재와 공구는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다. 공자의 자가 둘째 아들을 의미하는 중이 들어가서 중니인데, 형인 맹피가 서장자라면 공자도 적자는 아니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숙량흘도 부친 아닐 것이라는 아래쪽 주장까지 가면 더해지는데, 공구가 완전 평민 집안이 되기 때문이다.[43] 공자는 자기가 젊어서 비천한 일을 많이 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데, 이런 이유인지 공자의 제자 중에서는 평민들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4.3. 유랑생활
춘추시대 말기는 유세객들이 출현하기 시작한 때이기 때문에 공자가 천하를 돌아다닌 게 유독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 31세에 낙양에 방문[44][45]
- 35세에 제齊나라 방문
- 38세에 동주東周에 방문
- 55세에 위衛나라에 방문
- 59세에 위나라에 재차 방문
- 60세에 송宋나라를 방문했으며 이어서 정나라를 거쳐서 진陳나라로 향함
- 61세에 진나라를 출발하여 채蔡나라로 이동
- 63세에 또 다시 위나라를 방문
- 그 외에 초楚나라에 방문했다라는 이야기가 있으나 시기는 불명.
- 1기 - 공자는 원래 밑바닥 출신이기 때문에 30대 때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는 여러모로 공자를 포장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적당히 필터링하면서 봐야 된다. 30~40대 때의 유랑은 거의 유학에 가까운 유랑이었다. [46]
- 2기 - 보통 공자의 유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60대 이후 노나라를 떠나 14년 동안 유랑한 것을 가리킨다. 이 유랑은 구체적으로 현실정치참여를 하려는 노력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공자가 다른 나라에 정착하지 못하고 노나라로 돌아온 것은, 그 나라의 군주들이 공자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군주들은 공자의 유명세만 이용하려고 하였지, 공자의 실천적 생각에는 공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당연히 공자는 혼자 다닌 것이 아니다. 많은 제자들과 함께 다녔다. 하지만 유랑이 극도로 힘들 때는 소수의 제자들만이 공자를 지켰다.
- 공자 보다 31세 아래였던 자공이 유랑생활에 돈을 많이 대어 주었다. 자공은 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에 돈이 많았다.
- 공자가 젊었을 때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다고 하는 계손씨와 남궁경숙(맹손씨)은 노나라의 대부였는데, 대부라는 건 쉽게 말해서 노나라의 한 지방을 지배하는 군주이다. 공자는 그 밑에서 일하면서 이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공자가 노나라를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 역시 바로 계손씨 맹손씨 등의 실권자들과의 충돌 때문이었다.
4.4. 정치인생
그가 다스린 지역은 몇 년 안에 질서가 바로잡히고 착실하게 내실이 갖추어졌다고 한다. 초나라에서 그를 초청했을 때는 초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가들이 합동으로 병력을 파견해 공자를 포위해서 죽이려고 했을 정도.
노나라에서 벼슬을 하기도 했었는데, 이웃 대국인 제나라가 공자를 견제하기 위해 노나라 실권자들에게 제나라 미녀들을 보내는 등 그들이 정치 외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끔 만들었다. 물론 공자는 이를 싫어하였는데, 공자를 두려워했던 노나라 기득권 층의 공격도 있고 해서, 결국 벼슬을 버리고 노나라를 떠나게 된다. 그 후 천하를 주유하며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하다가 실패하고, 말년에 국부(國父) 대접을 받으며 다시 노나라로 돌아와 교육에 전념하였다.
노나라 정공 10년(기원전 500년)의 일인데, 춘추 경문에서 "여름, 공이 제나라왕과 협곡에서 만났다. 공이 협곡에서 돌아왔다. 제나라 사람이 와서 운과 환과 귀음 땅을 돌려줬다."라고만 서술한 사건이다. 춘추 3전(곡량전, 공양전, 좌전)에서는 이 만남에서 공자가 보여준 활약을 각각 서술했는데, 좌전에 나오는 얘기가 가장 자세하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협박당할 위기에 처했고, 제나라는 "중니(공자)는 예를 좋아하지만 용맹하지 못하니 담판 때 주변에서 무기를 들고 춤추게 해서 겁을 주면 우리 뜻대로 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공자는 회담 전부터 위엄을 세워야 한다고 많은 군사를 대동하고 회담장으로 향했고 무기를 든 이민족 춤꾼들이 노나라왕을 위협하자 "두 나라의 임금이 만나는 곳인데 이런 자들은 있어선 안됩니다."라고 꾸짖어 물리쳤고 제나라왕이 요상한 차림의 미녀와 광대들을 들여보내자 "양국의 군주가 있는 자리에서 이런 행패를 부리며 분위기를 어지럽힌 것들은 마땅히 다 죽여야겠죠?"라고 외쳐서 광대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만들었다. 결국 그 제나라는 노나라를 협박하긴커녕 노나라에게 기가 죽어버렸다. 공자의 정치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다만 공자의 정치적 인생은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하였다. 마음에 이상을 품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쓰임받지 못하였고, 이 때문에 그것을 실현할 자리를 구하기 위해 천하를 주유한 것이다. [47] 이후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다 노나라에 돌아온 계기는, 공자의 제자인 염구가 계씨 밑에서 일하면서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의 일이다. 이때 공자의 제자들은 어느 정도 노나라에서 지위를 굳혔고, 그 존경하는 스승이 끈 떨어진 연처럼 지내는 것은 결코 그들의 체면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중국 역사의 성인으로 남은 이유는 그가 인생에서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철저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벼슬도 제대로 못했고, 안회, 자로와 같은 아끼는 제자들을 먼저 저 세상에 보내야 했다. 춘추시대의 혼란을 극복하여 '仁'에 입각해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이상은 천하의 비웃음을 살 뿐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그 전시대 보다 사회 시스템적으로는 분명 한 단계 발전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군주와 신하들 간의 배신이 난무하고, 남녀 간의 근친상간 및 타락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지배층이 백성들을 있는대로 쥐어짜는 말세이기도 했다. 그래서 논어의 구절 중엔 이를 직접적으로 지적하는 부분들도 있다.
춘추시대의 난세에서 군대를 가장 먼저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식량까지 버리는 한이 있어도 이런 '사람다움'을 바탕으로 한 국가와 백성들의 신뢰는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공자의 주장은 얼핏 듣기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리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을 가슴에 새긴 제자들이, 갖은 배신으로 두려움에 떨었었던 각 국의 군주들에게 쓰임을 받기 시작하면서, 공자의 가르침은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자로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공자 무리의 가치를 드높인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의 죽음 이후, 공자의 제자들이 노나라에서 대거 등용되기 시작했다. 자공과 염구는 각기 외교와 군사에서 계씨 밑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리고 수백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충심을 다하는 인간적인 제자들이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수없이 되뇌이면서, 유교는 동아시아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49][51]자공이 정치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충분하게 하고, 군대를 충분하게 하며, 백성의 믿음을 얻어야 할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부득이하게 버려야 한다면, 세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대를 버려라."
자공이 말했다. “부득이하게 버려야 한다면, 두가지 중에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버려라. 옛날부터 누구에게나 다 죽음은 있었지만, 백성들이 믿지 않으면 국가는 존립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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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말년
10년 넘게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채 고국으로 돌아온 공자는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다.
죽기 2년 전에 "(애공) 14년 봄에 서쪽에서 사냥하여 기린을 잡았다."(十有四年春, 西狩獲麟)라는 기사를 끝으로, 춘추#s-4의 집필을 중단한다. 붓을 꺾은 이유는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였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기린 문서 참조.
노년의 나이, 여러 국가를 떠돌아다닌 피로와 더불어서, 첫째 아들 백어과 애제자 안연이 사망하고, 자로마저 위나라에서 피살당해 젓갈이 되버리자 기원전 480년에 공자는 병석에 누웠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온 자공에게 공자가 왜 이리 늦었느냐고 탄식한 후 마지막 노래를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 "''태산이 무너지는가! 대들보가 부러지는가! 철인은 죽어가는가!''" '''[52]
《예기#s-1》 <단궁(檀弓)> 편에는, 《사기》에 전해지는 것과 거의 같은 이야기가 상당히 다른 뉘앙스로 서술되어 있다.
자공과 만난 후 일주일이 지난 노나라 애공 16년 4월 기축일(기원전 479년 3월 9일), 공자는 향년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5. 사상
5.1. 인(仁)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한다."
《논어》 학이편 16장 [53]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께서 조정에서 퇴근하여 말씀하시길,
"사람이 다쳤느냐?" 하고 물으시고
말(馬)에 관해서는 묻지 않으셨다.
《논어》 향당편 12장.[54]
번지(樊遲)는 공자의 수레를 몰던 공자의 제자로, 재치는 없지만 성실하고 순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 청년 번지가 순진하게도 당시 대스승이었던 공자에게 직접적으로 인(仁)에 대해서 물어 본다. 그러자 늙은 공자는 어린 제자에게 '인(仁)이란 남을 아끼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장면이다.번지(樊遲)가 인(仁)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끼는 것이다"
번지가 다시 지(知)를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을 아는 것이다"
《논어》 안연편 22장. [55]
공자의 가르침은 현란한 언어로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지는 않으며 평범하고 상식적인 수준의 말만 간단하게 해주는 스타일인데 공자의 중요한 사상 중 하나인 인(仁)또한 개념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의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후대의 해석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좋은 것을 좋아하고 안 좋은 것을 싫어할 줄 아는 마음, 궁극적으로 상대를 존중하기 위해 많은 교류와 접촉을 하기 전부터 상대를 먼저 인식하려 노력하고 적극 배려하는 마음을 의미한다.[56] 요즘 말로 하면 비언어적 소통 혹은 다중적 소통, 즉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에 가깝다. 그래서 도올 김용옥은 간단하게 심미적 감수성이라고 설명한다. 공자는 그럴듯한 말재주를 늘어놓거나 좋은 표정을 꾸미면서 남에게 가식 떠는, 교언영색하는 인간은 불인(不仁)하다고 말했다.
5.2. 호학
섭공(葉公)이 자로에게 공자에 관하여 물었는데, 자로가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왜 말하지 않았느냐? 그의 사람됨은, 분발하면 밥 먹기를 잊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어서 늙음이 곧 닥쳐온다는 것마저 모를 따름이라고."
《논어》 술이 19장. [57]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로야!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에게 가르쳐 주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논어》 위정편 17장 [58]
공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호학(好學)이다. 배우기를 좋아하라는 것. 논어에서 공자는 '10호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에도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이 나만큼은 되는 사람들이야 분명히 있겠지만, 나보다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부하며 말하기까지 했다.[60]자공이 물었다. "공문자는 무엇 때문에 문(文)이라고 부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영민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를 문(文)이라고 부른다."
《논어》 공야장 14장. [59]
그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배운다는 것은 '묻는 것'이다. 학문(學問)이 여기에서 나왔다. 무엇을 물어본다는 것인가? 다른 사람(人)의 상태를 물어보는 것이다. 남에게 끊임없이 물어봄으로써, 남을 더 이해하고 남에 대해서 배워 나가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사람다움(仁)인 셈.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묻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아낄 수 없다. 이렇기 때문에, 인(仁)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다른 사람을 아끼는 것이라고 말했고, 지(知)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다른 사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61]
5.3. 인성론
공자는 타고날 때부터 저절로 알아서 선(善)을 행하면 가장 최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배운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날때부터 아는 사람(
生而知之 )은 으뜸이요,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다.
곤란해서 배우는 것은, 또 그 다음이다.
곤란하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사람은 곧 아래(下)로 여겨질 것이다.
《논어》 계씨편. [62]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논어》 양화편 3장.[63]
여기서 '익힌다(習: 익힐 습)'는 것은 학습(學習)할 때 습(習)으로, "배우고 익힌다(배운 것을 반복하여 익숙해진다.)"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갑골문에서도 습(習)은 작은 새가 날개를 파닥이며 날아오르는 모습이어서, 아기새는 계속해서 날려고 연습해야지만 익숙해져서 날 수 있다는 뜻. 즉, 반복이나 연습을 뜻한다. 그러므로 공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람의 타고난 성품은 비슷하나, 반복해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 차이가 난다고.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사람의 본성(性)은 서로 비슷하나, 익히는 것에서 서로 차이가 난다"
《논어》 양화편 2장.[64]
종합해보자면, 태어날 때부터 아는 똑똑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해서 곤란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사람의 타고난 본성(性)은 그닥 차이가 나지 않는다.(近) 공자는 사람마다 타고난 차이가 있긴 해도 그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으며, 배우려고 하고 그것을 반복해서 익숙해지려는 그 의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4. 중용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는 것도 아닌, 딱 알맞은 적절한 정도가 중용(中庸)이다. 여기서 중(中)이란 갑골문에서 깃대를 뜻한다. 깃대에 달린 깃발은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지만 그 중심에 있는 깃대는 굳건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중용도 마찬가지다. 이는 '중간만 가라'면서 남들이 하면 우루루 따라가서 똑같이 해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다른 의견의 정 가운데에서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을 선택해라는 뜻도 아니다.[66] 자신의 중심은 꽉 잡으면서도, 변하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하는 것(時中)이 중용이다.[67]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인간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상황에 맞게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려서 적절하게 대하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꾸준히 정도(正道)를 펼쳐 나가라는 것이 중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68]자공이 물었다. "자장(師)과 자하(商) 중에 누가 어집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미치지 못한다"
자공이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자장이 낫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논어》 선진편 15장 [65]
서(恕)는 '같은(如) 마음(心)'이다. 즉, 공감하는 마음. 남의 불행에 같이 아파하고 남의 행복에 같이 즐거워하는 공감에서 가장 기본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중용에서 충(忠)과 서(恕)를 중요하게 여겼는데, 자신의 중심을 지키면서도(忠)[71] , 남의 상황을 적절하게 이해할 줄 알아야(恕)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72]자공이 물어 말하였다.
"한 마디로써 종신토록 지켜 행할 만한 말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그것은 서(恕)이다.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69]
《논어》 위령공편 23장 [70]
화(和)는 갑골문에서 '피리를 부는 것'을 뜻한다. 서로 다른 소리가 함께 어울려서 하나의 아름다운 노래가 되는 것이 '화(和)'의 본 뜻이다. 하지만 공자는 그냥 조화롭게 어울릴려고만(和)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음악으로 예를 든다면 '하나의 톤'으로만 노래를 한다면 좋은 노래라고 할 수 없다. 여러가지 '다른' 음정을 '조화롭게' 섞어서 불러야 좋은 노래가 되는 것이다. 즉 각 개인의 '다름'을 지키면서도 전체 '조화'의 화합을 꿈꾸는 것이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되, (말과 행동이 그 사람들과) 같지 아니하고, (和而不同)
소인은 (말과 행동이 그 사람들과) 한가지로 같아 보이나,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논어》 자로편 23장 [73]
이것을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말하는데, "남들과 사이 좋게 어울리되(和), (자신의 중심과 원칙을 잃어버려) 남들과 똑같아져서는 안된다(不同)"는 것이다. 남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또는 남들이 한다고 해서, 자신이 '아니다'고 생각하는 것을 얼떨결에 해버려서는 안된다. 남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자신의 할 말은 하며 자신의 뜻은 굽히지 않는 자야말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는 당당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이 지키고자하는 원칙을 어겨가면서까지 어울리고자 남들에게 맞춰준다면, 아첨하는 것이랑 무엇이 다르겠는가? 적당히 어울릴 줄 알아야 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자신의 원칙을 바꾸면서까지 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74] 화이부동은 공자만이 말했던 것은 아니다. 안영의 고사에서도 나오니 참조.
5.5. 예(禮)
공자가 태묘[75]
에 들어가면서 매사를 하나하나 물으셨다.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누가 추인의 아들[76]
이 예를 안다고 하였는가? 태묘에 들어가면 매사를 묻는데"라고 했다.공자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예이다."
《논어》 팔일편 15장 [77]
임방(林放)이 예(禮)의 본질을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질문이 훌륭하구나!
예(禮)는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해야 되며,
장례는 평온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젖어야 된다."
《논어》 팔일편 4장 [78]
예(禮)란, 존중의 뜻을 표현하여 양보하는 행동양식을 말하는 것으로, 그 사회가 서로 합의한 형식을 뜻한다. 또한 검소한 것을 지향하며, 장례 같은 경우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예(禮)의 형식은 반드시 간결해야 되지 복잡해서는 안된다. 결국 예절이란, 존중을 표현하는 방식일 따름이라는 것. 지나치게 형식적이어도 예절이 아니고, 사치스러워도 예절이 아니며, 감정을 완전히 숨기는 것도 예절이 아니다. 또한 지나치게 굽신거리면서 재차 행하는 것도 예절이 아니니, 공자는 이를 두고 '과례(過禮)는 비례(非禮)'라고 하였던 것이다.(과한 예절은 예의가 아니다.)大禮必簡
훌륭한 예(禮)는 반드시 간결해야 한다.
《예기》 악기.
예의는 귀찮지만 그런 귀찮음을 이기고 하는 것은, 거기에 어진 마음(仁)이 있기 때문이다. 어진 마음(仁)이 바깥으로 드러나는 것이 예의(禮)이고, 거꾸로 형식적인 예의(禮)의 본 뜻은 어진 마음(仁)에 있다. 매번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은 자신이 닦아온 그 어진 마음이 저절로 표현되기 때문이지, 형식에 집착해라는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예의를 지키지 못하더라도 배려하려는 마음이 보인다면 그게 사람다움(仁)'이고, 보통의 상황에서 친하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더라도 굳이 예의를 지키는 것은 그게 서로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최소한의 방식(禮)이기 때문이다.안연이 인(仁)에 관하여 여쭈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
克己復禮 )이 인이다.날마다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온 천하가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인을 위하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 남에게 달려 있겠느냐?"
안연이 말했다. "청컨데 그 요점을 물어보고 싶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가 아닌 것은 보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듣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닌 것은 하지 말아라."
안연이 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모쪼록 이 말씀에 힘쓰겠습니다."
《논어》 안연편 1장 [79]
5.6. 정치
정치는 백성들의 민심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섭공(葉公)이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 하시길,
"가까운 곳에 있는 자는 기뻐하고, 멀리 있는 자는 찾아오는 것입니다"
《논어》 자로편 16장 [80]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그대로 따라하기 마련이다. 제일 위에 있는 군주가 스스로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면 누가 그 군주를 따르겠냐고 얘기하고 있다.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하여 물었다.
공자께서 대답 하셨다.
"정치(政)는 바르게 하는 것(正)입니다.
당신이 앞장서서 바르게 행한다면,
누가 감히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논어》 안연편 17장 [81]
각자의 직분을 하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 된다. 그것은 군주라고 다른 것이 아니다. 군주는 군주다운 행동을 하라는 뜻.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께 정치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 대답하시기를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논어》 안연편 11장 [82]
섭공은 반란을 제압했던 군사전략가이자 초나라의 재상이다. 자신의 영지에 법을 엄격하게 하여, 아버지가 양을 훔치더라도 그 아들이 그것을 신고할 정도가 되었는데, 섭공은 이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런 섭공에게는 엄격한 것이 자랑이 아니며, 백성의 민심을 얻는 것이 정치라고 말한 것이다.
계강자는 노나라의 대부로 자신의 군주보다 더 많은 군사와 돈을 가지고 있었던 실권자였다. 그런 계강자에게는 아랫 사람이 자신을 따르게 하려면, 자신도 윗사람인 노나라 군주를 잘 모셔야 된다고 꾸짖은 것이다.
경공은 부유한 제나라의 군주로 사치를 일삼고 노는 것을 좋아했으나, 중요한 일에는 명재상 안영의 말을 꼭 들었기에 춘추시대의 준패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경공에게는 노는 것을 삼가고 군주다운 행동을 하라고 꾸짖은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말하는 정치란, 군주 스스로가 그에 걸맞는 바른 행동을 하여, 백성들의 본보기가 되어야 백성들의 민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그게 정치이다.
5.7. 행동
공자는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는 인간다운 사회를 꿈꿨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된다고 보이는 것을 하는 이유는, 결국에는 사회는 조금씩 바뀌고, 한명한명 행동들이 쌓여 원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거대한 사회가 한번에 바뀔리 없거니와, 자신과 자신의 주변부터 바꿔나간다면 언젠가는 모두가 바뀌어 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자로(子路)가 석문에서 묵었다. 새벽에 문지기가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자로가 말하였다.
공(孔)씨 문중에서 왔소.
문지기가 말했다.
안될 줄 알면서도 굳이 하려는 사람 말인가?
《논어》 헌문편. 38장 [83]
조그만 것이라도 자신이 참여한 바가 있었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된다. 또한 공자는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됨을 항상 강조했다.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예컨대 산을 쌓는 것과 같아서, 한 삼태기의 흙을 갖추지 못해서 그만두더라도, 내가 그만둔 것이다.
예컨대 땅을 고르게 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한 삼태기의 흙을 덮는데에 나아가더라도, 내가 나아간 것이다."
《논어》 자한편 19장 [84]
5.8. 융통성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곧으면서도 고집부리지 않는다."
《논어》 위령공편 36장 [85]
학문을 한다는 것은 자신을 계속해서 바꿔 나간다는 것이다. 학문하는 자는 자신을 바꾸기 위해 항상 열려 있어야 된다.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잘못이라 한다"
《논어》 위령공편 29장 [86]
5.9. 친구 관계
선한 것을 서로 권하는 것이 친구의 역할인데, 권하고 그 친구가 바뀌지 않는다면 거듭해서 충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거듭해서 충고하면 결국 사이가 멀어지게 될 것이니 이후에 친구가 자신을 모욕하게 되도 그 때가서는 늦었다는 것을 말한다.자공이 벗에 대하여 물으니,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고하여 선한 것으로 이끌되
안된다면 그만두어야 하니,
(이 일로 인하여) 스스로 욕됨이 없게 하라”
《논어》 안연편 23장 [87]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는, 장점은 띄워주되, 그 친구의 단점에서는 멀어져야 한다. 그 친구를 억지로 좋게 바꾸려하지 않고, 그 단점에서 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배우는 것으로 그친다. 친구를 친하게 여겨 아끼되, 너무 친해져서 함부로 하는 것을 삼가고 조심한다면, 친구는 나를 믿게되어서, 내가 모범을 보이면 은연중에 그 친구는 그것을 따라하게 될 것이다. 말로써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가르치는 셈.공자께서 외출을 하려고 하시는데, 마침 비가 내렸으나 우산이 없었다.
문인들이 말하였다.
"자하(商)가 가지고 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였다.
"자하의 사람됨은 재물을 매우 아낀다. 내가 듣기로 남과 사귐에 있어서
그의 장점은 추켜 주고, 그의 단점은 피해야 한다고 하더라.
그러므로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공자가어》 치사(致思)편 14장 [88]
하지만 이럴 경우, 친구가 끝내 나쁜 짓을 하고 그것이 내눈에 많이 거슬리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물어볼 수 있다. 우선, 공자의 가르침은 강요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감동을 통해서 사람을 달라지게 만드는 '감화(感化)'가 모든 공자 가르침의 기본이다. 억지로 변하게 하는 것은 그 억지력이 더 이상 없게 되면 다시 되돌아오게 마련이지만, 감화를 시킨다면 자신의 신념이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한 종신토록 그 선함을 지키고자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강요를 통해 잠시 친구를 바꿀 수 있다고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89]
6. 교육 방식
공자의 기본 교육은 원래 노래(詩)였다. 시(詩)라는 표현 때문에 그냥 조용히 독서만 할 것 같지만, 실제로 리듬을 타면서 노래까지 불렀다. 흔히 유교라고 하면 도식적으로 틀에 박힌 이야기를 듣기 쉽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고, 공자 본인은 그렇게 틀에 박힌 스타일로 교육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시경은 가사만 전해져서 멜로디를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90]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六藝)라는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 예는 그냥 예의범절이 아니라 각종 공식행사의 의례 절차를 배우는 것. 이걸 마스터하면 당장 외교나 제사 등의 국가행사를 주관할 능력이 생긴다.
- 악은 음악인데, 이것도 그냥 요즘 실용음악 같은 것 뿐만 아니라 행사 때 연주할 음악을 배우는 것이라서 역시 관료로서의 실질적 교육이 된다. 한편 유교 텍스트에서는 문화 자체를 예악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으므로 참고할 것.
- 사와 어는 활쏘기와 수레타기. 즉, 전쟁기술이다. 전차가 퇴화된 후에는 말타기로 바뀌었다.
- 서와 수는 문서 만들기와 회계처리라고 보면 된다. 단순 글짓기와 산수가 아니라, 공무원으로 일할 때 문서를 작성하고 세금이나 국가재정을 계산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공자의 진짜 업적이라면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던 교육을 민간에 전파했다'''는 것이다. 공자 이전에는 제대로 된 교육 기관이랄 것이 중국에 거의 없었고, 그나마 있는 것도 귀족 한정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지배계층에 필수적인 기술과 매너를 '폐쇄적'으로 가내에서 전승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예물로 육포 한 다발'''만 가져온다면 다 가르쳐주었고, 이 이야기는 지금에 이르러선 '''속수지례(束脩之禮)'''라는 성어로 굳어졌다. 여기서 '육포'를 언급한 이유는, 당시 육포는 남에게 주는 예물로는 가장 격이 낮은 물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치면 스팸이나 참치캔 정도 지위였다. 즉 배우고 싶어서 찾아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가르치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 논어 자로편에서 공자가 "백성들이 많으면 넉넉하게 해주어야 하고, 넉넉하게 되면 가르쳐주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공자에게 교육이란 귀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꼭 받아야 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다만 실력이 안 되면 그딴 거 없고(…) 공짜는 아니라는 의미도 숨어 있긴 하다. 이 육포를 촌지로 잘못 해석하는 반(反)유교인이 있지만 상술했듯 육포는 격이 낮아 고급 예물로는 부적절했다. 고로 '최소한의 성의'를 육포라는 것에 대유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봐야 한다. 결정적으로 논어 향당편을 보면 공자의 음식 취향이 나타나는데 말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공자는 자신이 배움을 좋아함을 자주 강조했다. ''' "''나는 태어나면서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한 사람이다.''" ''' 라고 말하는 구절에서 그 정신이 잘 드러난다.[92] 다만 공자 숭배가 심해지면서 "공자는 태어나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며 신적 존재로 숭배하는 유학자들이 많아졌고 최술은 《수사고신록(洙泗考信錄)》에서 이를 강렬히 비판했다.
덕분에 공자를 계승한 유학자들의 특징은 역시 강렬한 현실 참여 의식과 지적 자산에의 갈구를 들 수 있다. 아무리 잘난 집안이라도 공부를 열심히 안 하면 욕을 먹는다. 다른 문화권 지배계급은 공부 압박을 그렇게 심하게 받지 않았다. 공부가 입신양명의 거의 유일한 수단으로 각광받지도 않았고. 당연히 공부를 하려면 돈이 들고 명청대 중국 사족들은 상업이나 소작료 받기 등 공부와 아무 관련 없는 일로 돈을 잘 벌기도 한다. 근데 그렇게 돈이 생기면 일단 자식을 공부시킨다.
조선도 마찬가지라서 아버지가 고위 관료면 자식이 음서로 관직 나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음서로 커리어 시작한 사람들도 절대 다수가 공부해서 과거를 다시 본다. 음서는 그냥 호봉이랑 짬밥 좀 쌓으려고 깔아두는 것일 뿐. 게다가 음서로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낙하산 인사라는 경멸의 시선이 엄청났기 때문에 음서는 떳떳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렇게 현대 한국, 일본, 중국의 공부열이 설명될 수 있고 나아가 공부에 집착하는 서양의 아시안 스테레오 타입이 생긴것도 이런 연유라고 할 수 있다.[93] 다만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유교의 교세가 조선만큼 강하지 않았던 데에다 문벌 귀족의 관직 독점 문제가 심각하여 음서 출신도 조선처럼 멸시받지 않아 과거에 목 맬 필요가 없었다.
또한 스스로 전차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전차를 모는 사람은 지휘관이자 전사를 의미한다. 공자의 키는 9척 6촌[94] 이 넘는 거구였기 때문에 당연히 육체적 능력이 허당이었을 리가 없다. 덩치도 덩치지만 공자는 목수 일이나 전차 몰기 등 온갖 궂은 노동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이다. 심지어 그 자로[95] 를 무력으로 제압했다는 얘기도 있다. 위에서 말한 육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제자들에게 군사교육도 했던 사람이다. 춘추시대 때는 문관과 무관의 구분이 없었다. 공자는 본래 무장을 배출한 가문 출신이고[96] , 공자로부터 무예와 군사를 부리는 일을 배운 제자도 있었다.
원래 춘추시대의 당대의 사(士)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전사 계급이었다. 평소에는 정치를 하고 전시에는 전쟁을 하는 것이 사(士)였다. 즉, 공자의 집단은 거의 무장세력이었다. 당대에는 이런 무장세력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그것을 제자백가라 부른다.[97] 물론 싸움만 하는 건 아니며 국가를 운영하고 행정업무를 다루기 위해서 학문도 갈고 닦았다.[98] 참고로 고대에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재산과 지위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무장은 개인돈, 또는 지휘관의 돈으로 구비하던게 근대 이전 이야기여서 덕분에 군대의 의장과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즉 돈 없으면 전쟁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이후에 약탈하는 권리 또한 개인의 지위와 재산으로 참전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다. 그 때문에 지휘관이나 피 정복민은 그를 막으려면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어야 했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민들의 권리가 커져 고대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한 것도, 그리스 군대가 시민들로 구성된 중장 보병부대 위주로 구성되고 이를 통해 시민들의 경제력과 권력이 커질 수밖에 없게 된 것.
7. 제자
3천 명에 육박하는 제자들을 육성하여[99] , 이후 전국시대의 인재풀을 만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뛰어난 10명의 제자를 공문십철이라고 부른다. 사실 이 사람들이 대륙 곳곳으로 진출해서 상당수의 제자백가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묵자도 공자의 학문을 좀 더 보편주의화시킨 인물이고, 보통 법가로 알려져 있는 상앙은 공자의 제자 자하가 위나라에 세운 학교에서 배출된 인물이고, 한비자나 이사 등은 순자의 제자였다.
그러니까 자공, 자로 등의 주요 인물만 대단한 게 아니라, 공자의 제자들이 이후 전국시대에 활약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게 된 것이다.
공자가 유랑생활 할 때도 공자의 제자들은 수시로 다른 나라로 가서 일을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소개로 공자가 초청되기도 했다. 특히 공자가 10여년 동안 유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재벌이었던 자공의 경제적 지원이 컸다. 공자가 마냥 가난했다고만 생각하는 건 착각. 군주나 고위관료들과 교류하려면 최소한의 경제적 수준은 있어야 된다. 노나라에 돌아왔을 때도 공자는 집에 마굿간이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고급 세단 몇 대는 굴렸다는 뜻이다.
공자가 살던 시대에는 확고하게 굳어진 신분제도가 없었다. 물론 노비 같은 게 있기는 한데, 신분적으로 규정된 노비가 아니다. 공자는 가르침을 베푸는데 있어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제자이자 친구인 자로도 들에서 살던 양아치였다. 공자 본인도 산골에서 태어난 천한 사생아나 다름없었다. 공자는 어릴 때 천하다며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이 있었고, 꽤 오랫동안 아버지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오나라 재상(大宰, 태재)이 공자를 보고 "정말 성인이시다. 다방면으로 재주가 넘치시니." 라고 말했는데, 이를 들은 공자가 말했다.'''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잔재주가 많을 뿐이다.군자가 재주가 많아야 할까?꼭 그렇진 않은 법이다.'''[100]
7.1. 공자의 제자 목록
- 안회 - 논어에서는 공자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수제자로 나온다.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일찍이 공자가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만 보았지 정체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101] 고 말한 적이 있지만,공자보다 일찍 죽는다. 안회의 죽음을 들은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 天喪予!)라고 탄식하며 슬퍼했다.
- 자로 - 논어에서는 무골(武骨)에다가 성격도 드센 전형적인 호걸형 인물로 나온다.또한 대부의 가신을 지낼 만큼 정치적 능력도 상당했다.공자에게 면박을 많이 받지만 칭찬도 받고 공자와의 인간적인 관계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후에 위(魏)나라 공실의 권력다툼에 휘말려 살해당하고 그 시신이 젓갈로 담겨진다.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한 공자의 행동이 자기 집의 젓갈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것이 공자식인설이라는 루머로 퍼졌다.
- 자공 - 논어에서는 머리가 비상하고 언변에 뛰어나며 장사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먼치킨으로 나온다.굉장한 부자였는데,이 재산으로 공자학단을 경제적으로 후원해 줬다. 공자가 세상을 떠났을때 무려 6년상을 치렀을 만큼 공자에 대한 존경심이 엄청났다.
- 나머지 - 자유, 자하, 자장, 증자, 민자건(민손), 염백우, 진항(진자금), 중궁, 염유, 재여[102]
그 외: 담대멸명, 복부제, 원헌, 공야장, 남궁괄, 공석애, 증점[103] , 안무요, 상구, 고시, 칠조개, 공백료, 사마경, 번수, 유약, 공서적, 무마시 - 여기까지 논어에 기록이 있는 제자들.
이하 언급되는 제자들은 논어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이름만 언급되어 있다. 일부는 공자가어, 사기 공자세가 등에 짤막하게 일화가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공견정, 공량유, 공서여여, 공서잠, 공손룡, 공조구자, 공충, 공하수, 교선, 구정강, 방손, 백건, 보숙승, 상택, 석작촉, 숙중회, 시지상, 신당, 악해, 안고, 안조, 안지복, 안쾌, 안하, 안행, 양사적, 양전, 연급, 염결, 염계, 영기, 원항적, 임부제, 적흑, 정국, 조휼, 좌인영, 진비, 진상, 진염, 진조, 칠조도보, 칠조차, 한보흑, 해용잠, 현성, 후처 등
8. 공자 관련 문헌
공자는 저술가가 아니었다. 스스로도 '''전해져 오는 것을 정리했을 뿐, 스스로 만든 책 같은 건 없다'''고 말했다. 시경을 정리하고 주역에 해설을 달고 (계사전), 춘추를 지었다고 전해져 오지만, 이 중에서 분명히 공자의 손에 의해 직접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춘추의 경문이며,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계사전도 공자가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후대에 제국과 같은 거대한 권력체의 후원을 받아 경전화될 때 성립되기 마련이다. 논어도 공자의 책이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 또는 관련된 사람들의 언행을, 공자의 제자들이 기록해 놓은 것이다. 공자는 이론보다는 행동을 한 사람이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의 인생에 대한 각종 일화와 기록의 일차적 소스로 가장 유명하고 진실성이 가장 높으면서도 내용이 풍부한 것은 당연히 논어. 그렇지만 예기에서도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공자와 관련된 일화를 상당히 많이 확인할 수 있다.(예: 가정맹어호) 그 외에 다소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한나라 시기까지 구전되거나 기록에 남아 있던 각종 일화들을 모아 놓은 공자가어도 중요한 소스.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관련 자료들을 모아 한편의 완성된 전기로 만들어 놓은 현전하는 최초의 문헌이며, 당연히 위의 소스들을 이용한다. 이상의 자료들을 제외한 다른 자료들은 단편적이거나 위서이거나(예: 공총자) 실화라기 보다는 우화에 가깝거나(예: 장자) 위의 자료들을 이용한 이차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다.
9. 평가
9.1. 한국에서의 평가
유학이 한국사회에 들어온 이래로, 공자는 맹자와 더불어 공맹으로 불리며 유교사회의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최치원은 <난랑비서>에서 "집에 들어와선 효도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공자의 취지이다. "면서 한국의 '풍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 안에 이미 공자의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공자의 인(仁)사상은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말했던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의 정신과 일치하는 면이 있어 예로부터 한국인의 정서와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고도 볼 수 있다. 삼국유사가 거꾸로 유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냐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삼국유사를 지은 사람이 불교에 충실했던 일연 스님임을 생각해 볼 때, 홍익인간은 공자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사상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국에 있던 내재적인 정신 문화와 외부에서 들어온 공자의 유교문화 - 인(仁)사상이 일치하는 면이 있어 받아들이기 쉬웠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아무튼 그 후 수많은 유학자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과거에 등용되어 학문을 펼쳤으니, 한국에서의 그 위상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공자의 사상은 현대에도 많은 영향을 끼지고 있다. 유교적 불교, 유교적 기독교, 유교적 자본주의 등으로 변형되어 한국사회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이러한 유교화된 사상들은 유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중 공자의 인(仁)사상은 '친족 중심에서 그 외연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 여러 문제를 야기시킨다. 특히 혈연, 지연, 학연 중심의 엘리트 사회 구성과 그에 따른 부정부패는 공자 사상의 고질적인 문제로 제기되어 왔으며, 이런 반감으로 인해서 2000년대 초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센세이션한 흥행을 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경(敬)사상 역시, 근현대 독재시절의 군사문화에 영향을 받아서, 나이가 조금이라도 많다면 깍듯이 높임말을 쓰는 상명하복의 예절로 변질되어 버렸다. 하지만 공자는 공자 자신의 나이보다 많거나 비슷한 또래의 제자들이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수십살 차이에도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오늘날 같이 한살 차이에도 민감하게 순서를 매겨서 윗사람의 말에 강제적으로 존대말을 요구하는 이러한 문화는, 근현대 군대문화의 유산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공자의 호학(好學)사상은 대한민국을 전세계에 유래없는 공부국가로 만들었다. 일년에 한번치는 수능 시험 떄에는 나라가 잠시 멈춘다고 말해도 거짓말이 아닐 정도로 많은 신경을 쓴다. 학원문화 역시 전세계에서 독보적이며, 대학진학율도 세계1위다. 옛날에는 소수의 양반들만 공부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대한민국은 전국민이 공부를 하는 양반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이러한 학구열은 여러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자원이 하나도 없던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올라설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현대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공자의 사상 중 일부가 현대 법치주의와 평등주의 사상에 반대되는 부분이 있어서 꾸준히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논어》에서 공자가 "오직 여자[104] 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 라고 말한 부분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 부분 등은 여자를 매우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했기 때문에 평등주의적 관점에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삼종지도는 어려서는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데, 삼종에서 종(從)은 '쫓아가서 모신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은 시대적 한계가 잘 보이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칠거지악은 칠출(七出)이라고 하는데, 남자가 여자를 쫓아낼 수 있는 7가지 경우이다. 근데 이것은,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가지지 아니하는 오불취(五不取)도 있어서, 칠출에서 여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고 오불취에서 남자의 나쁜 점을 열거하므로, 최근에는 칠거지악에 대해서 잘 언급하지 않는다. 유교의 나쁜 점을 말하는데 있어서, 삼종지도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
삼종지도가 그만큼 악랄하다고 볼 수 있는데, 여자를 밥짓는 존재로 보고 집밖을 나가지 못하도록 구속하기 때문이다.[105] 현대의 학자들은 공자는 사람을 그렇게 중시하고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마라'라고 까지 말했는데, '저렇게 여자를 낮추어보고 속박하는 말을 했을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삼종지도처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사람을 가두어두려고 하는 것은 공자가 말하는 예(禮)와도 큰 차이가 있다. 사람과 예의를 중시했던 공자가 저런 말을 할 이유가 없을 뿐더러 여성을 비하하는 부분은 몇구절에만 한정되어 있어서, 최근에는 '후대의 제자들에 의해서 덧붙여진 문장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삼종지도의 말은 공자의 말로 여겨져 왔으며 또한 이러한 구절들을 가지고 공자의 권위를 이용해서 조선 중기(숙종 이후)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자의 자유를 구속하고 단지 밥짓는 존재로 여겨왔던, 과거의 미숙함은 반성하고 고쳐져야 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법치주의적 문제에서도 연관되어 있는 것이 있다. 효(孝)와 시스템 중 무엇을 우선하냐는 문제에 있어서, 논어에 이런 구절이 있는데, "섭공(葉公)이 공자에게 말하였다. '우리 고장에 마음이 곧고 바른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이 이를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우리 고장의 곧은 사람은, 그와 같지 아니합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니,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말한 부분은 우리나라 현행법에도 반영되어 있어 논란이 되는 구절이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 제224조 및 제235조가 바로 그러한 부분이다. 이 법률로 인해 자녀는 절대로 자기 또는 배우자의 부모를 고소, 고발할 수 없지만[106] 부모는 자녀를 상대로 자유롭게 고소, 고발할 수 있다. 이로 인해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상대로 거짓 고소, 고발해도 자녀는 방어할 수가 없다. 이 법률 때문에 자녀가 부모를 무고죄로 고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위헌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헌법재판소는 유교적 전통을 이유로 들어 합헌결정을 내렸다.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유교적 전통을 받아들이고 체화시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부분 엄연히 우리의 고유한 .의식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효’라는 우리 고유의 전통규범을 수호하기 위하여 비속이 존속을 고소하는 행위의 반윤리성을 억제하고자 이를 제한하는 것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차별이라고 할 수 있다. - 2008헌바56
9.2. 현대 중화권에서의 위치
청나라 말기부터 유교가 서방에게 뒤쳐지게 된 원흉 취급받게되면서 지식인층으로부터 격하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전근대성의 상징으로 까이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나서이다. 마오쩌둥식 근대화 과정에서 중국의 후진성·전근대성의 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았고 이 때 타깃이 된 것이 유교의 수장인 공자였다. 이에 따라 한동안 중국에서는 '공자 지우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뒤에는 조상 숭배가 금지됐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공자를 깎아내리는 캠페인이 전개됐다.[107] 이러한 맥락에서 문화대혁명 와중에 취푸의 상당수 유적이나 문화재가 홍위병들에 의해 파괴되거나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지나고 나서 문화대혁명에 대한 자성론이 사회전반적으로 확산되었으며 실용주의 경제노선을 내건 덩샤오핑도 근대화에 성공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홍콩·대만·싱가포르)’ 모두가 유가 문화권 국가라는 점에 주목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학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공자재평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고, 취푸의 유적과 문화재도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이후 소련이 붕괴되면서 공자에 대한 주목도가 더욱 높아졌다. 21세기 들어서 후진타오가 공자에 영향받은 조화사상을 내걸고 중국이 후원하는 중국어 학원의 명칭도 공자학원으로 정해졌으며[108] 교과서에서도 공자에 대한 긍정적인 서술이 크게 늘어났다. 즉,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공자는 완벽하게 부활한 셈이다.[109][110]
다만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워낙 강했기에, 중국 내에서는 여전히 공자를 고리타분하거나 전근대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도 적지 않기도 하고, 입으로는 공자를 존경한다고 하면서도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입으로는 공자와 유교를 비난하면서도 막상 몸으로는 그토록 비판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체화하고 실천하고 있는 한국인들과는 반대인 셈이다.
2012년 취임한 시진핑은 2013년 11월 산둥성 취푸에 있는 공자묘를 참배하고 또 공자연구원에서 연설했다. 공산당 창당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시진핑은 2014년 5월 베이징대의 유학자 탕이제 교수를 예방했다. 시진핑이 2014년 9월 공자 탄생 2565주기를 기념하는 회의에 참석해 담화를 발표했다. 2015년 6월부터는 중국 정부의 주요 부처 공무원들이 중국고전철학 전문가로부터 공자를 비롯한 옛날 학자들에 대한 강의를 듣는 것을 의무화 시켰다고 한다. 상공부, 교육부 등 중국 정부의 관료들은 당시 날짜를 정해 돌아가면서 하루에 2시간씩 강의를 들었다고 한다. 2천500년도 더 된 시절에 공자가 했던 발언 등을 들으며 효도 등 유교 사회에서 강조됐던 덕목을 따를 것을 권고받기도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시진핑이 유교사상 배우기를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정치사상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해석했다.
천라이 칭화대 국학연구원 원장이 2015년 7월 중공중앙기율검사위원회와의 인터뷰에서 “유가 문화가 중국 공산당원의 수양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의 학습에도 초청을 받아 강연했다. 대륙 신유학자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중국 정부가 유학을 존중하겠다는 신호로 보는가 하면 전통 사상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 ‘중국몽’ 제시를 탈 서구 프레임이 가동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륙 신유학의 대표자 격인 베이징사범대학 천밍 교수는 ‘중국몽’을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부터의 탈피로 설명한다. 반면에 간춘쑹 베이징대 교수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놓는다. 국가와 신유가는 여전히 긴장 관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산당이 유가를 이용하려 한다면 유가는 공산당을 교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만 공자가 복원되는것은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자의 이름이 지나치게 상업화된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중국 사교육 업계에서 공자이름을 들먹이라는것은 옛삿일도 아니고 공부가주나 공부채도 특산물화되어서 중국전역에 팔려나가고 있다. 그래도 여기까지였으면 지역발달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할수있지만 취푸 시 당국에서 단순 지역홍보를 넘어 유적지 일부를 호텔로 전용하거나 심지어 '''공자의 이름을 내건 복권'''을 발행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돈벌이를 위한 행보를 보이고 빈축을 사고있다. 이러한 상업화가 얼마나 노골적인지 공자가 중국 최고의 브랜드라는비아냥 조의 농담이 나올 정도. 다만 이러한 돈벌이가 취푸시 재정이나 공자 가문에게는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공자 가문 후손들[111] 이러한 상업화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 돈벌이를 해서 이익을 얻는다. 공가에 술광고판이 대놓고 내걸릴 정도.
대만에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국부천대로 마지막 연성공이자 초대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인 쿵더청이 직접 제례를 지내고 '중화 문명'의 적통임을 주장하는 대만에선 당연히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대만이 민주화하고 타이완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커지면서 공자에 대한 관심도가 옅어지고 있다.
9.3. 서양의 평가
로타 폰 팔켄하우젠의 저서인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112] 에 따르면, 공자는 주나라 정치인인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이상화하여 주나라의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공자가 생각했던 것처럼 서주 초기에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 개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공자는 주공에 의해, 상나라와는 다른 주나라만의 의례 제도가 수립되었다고 보았고, 그때의 의례 제도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제로 고고학 유물을 통해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상대의 의례 제도는 주초에 계승되었고, 주초부터 공자 대까지 최소한 두 번 이상 의례 개혁이 있었다.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의례 제도는 기원전 850년, 즉 서주 말기 이왕 혹은 여왕 대의 일이라는 것. 의례 제도 개혁을 단행했던 이유는 정치적 혼란과 특권 계층의 유지에 있다. 주나라의 왕위는 부자상속이므로 제7대 천자 의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자신의 동생이 왕위에 올라 제8대 효왕이 되었다. 후에 의왕의 아들은 효왕의 사망 이후 제9대 이왕으로 즉위했다.
바로 이 시기의 부자 상속의 단절과 회복에 대한 정치적 혼란을 시정하기 위해 의례 제도를 개혁함으로써 상하질서를 바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 특권 계층인 귀족의 수가 많아졌고, 특권을 누리는 귀족의 수가 많아지면 국가의 입장에선 자원이 너무 많은 이들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는 손해라는 것이다. 또한, 특권을 상속하기 위한 귀족 내부의 다툼도 심해지게 되니 의례 제도를 개혁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제사라는 행위는 단순히 조상의 넋을 기리는 것뿐만이 아니라, 자신들이 바로 그 조상의 후손이며 조상의 제사를 위해 공동체가 집단적인 행위를 함으로써 공동체의 내부적 단결과 집단적 기억[113] 을 하는 기능이 있다.
바로 이러한 목적으로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실제로 그 시기에 갑자기 주 문화권 내부에서 의례 제도가 개혁되어 나타난다. 요약하자면, 결국 공자는 주공 대가 아닌 기원전 850년 의례 제도 개혁을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그 시기의 의례 제도를 주공 때 의례제도라고 잘못 파악하였다는 것. 이러한 이유는 공자와 공자 이후의 유학자들의 철학적인 공상 때문이다. 주공 시절을 이상화하다 보니 역사상의 사실관계보단 주공, 혹은 주초를 유가적인 이상화 했다는 것.
그 밖에 라이프니츠는 공자의 사상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고, 근대 이후 이름난 소설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그의 최대의 걸작 유리알 유희에 공자의 예악사상을 녹여넣었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카스탈리엔은 마치 동양의 한림원같은 느낌을 주며, 대가는 이들의 수장으로서 동양에서 말하는 군자의 풍모와 매우 비슷하다.
10. 기타 등등
10.1. 불우한 인생
일단 아버지가 육십 노인에 어머니는 십대 중후반의 꽃처녀였다. 태어난지 3년도 안 되어 아버지가 사망했고, 공자는 부친묘의 위치마저 장성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사생아였다. 무녀의 자식이다보니 평범한 사람과 다른 세상을 접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공자 나이 십대 중후반에 사망했다. 신분이 천해 온갖 잡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114]
나이 들어 학문이 어느 정도 자리잡자 십 수년을 주유 열국하며 자신을 등용해줄 사람과 인을 구현할 나라를 찾아 떠돌아 다녔으나 온갖 조롱, 비판, 죽을 위기 등등을 거치면서 절망을 반복했고 끝내는 이름 뿐인 국부 하나 얻어 죽기 3, 4년 전에 노나라에 돌아왔다. 정치적 야망은 전부 무너졌다.
그래도 학식이 대단하고 인품이 지극히 높아 훌륭한 제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는 있었지만, 노나라에 돌아온지 첫해에 아들인 백어가 사망. 그 다음해에 수제자 안회가 이제 꽃을 피워볼려는 참에 사망. 그 다음해에 가장 친한 자로가 살해당해 젓갈이 되어 돌아왔다. 이 3단콤보를 맞은 공자는 노년의 나이에 심적 충격을 너무 받아 시름시름 앓다가 자신의 가장 뛰어난 세 제자 중의 마지막 한 명인 자공이 돌아오는 걸 보고 사망했다.
결국 살아서 정치적인 야망을 무엇 하나 달성하지 못했고, 자신의 학문의 적통을 이어줄 안회는 무엇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여 사실상 살아서 정치적이나 학문적이나 마땅한 무언가를 남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정치적, 학문적 야망은 죽고나서야 동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 짓궂다면 짓궂은 일일 것이다.
10.2. 식습관
공자의 생활 습관을 설명한 논어 향당편을 보면 식습관이 까다로운 미식가로 나온다. 곱게 찧은 쌀로 만든 밥과, 가늘게 채썬 회를 즐겼고 색깔이 나쁘거나 나쁜 냄새가 나거나, 제철 음식이 아니거나, 알맞게 익히지 않거나, 올바르게 자르지 않으면 음식을 들지 않았다. 음식에 어울리는 장(醬)이 없어도 음식을 먹지 않았고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술이나 육포/어포는 집에서 만들지 않고 밖에서 사온 것은 먹지 않았고 생강을 꾸준히 먹었으며 술을 마셔도 취해서 흐트러질 정도로 마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10.2.1. 공자식인설(?)
공자에 대한 낭설 중 인육을 먹었다는 설이 있는데, '''책을 팔기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특히 1990년대에 재미교포 폴 임 박사가 쓴 '책 속의 책'에 나온 공자가 인육을 즐겨 먹었다라는 내용으로 인해 이러한 인식이 상당히 퍼졌다. 참고로 해당 책은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뿔이 하나 인도의 코뿔소는 뿔이 두 개라는 오류도 범했다. 여기에 더해 일본 극우파의 사주를 받는 대만인 어용학자 황문웅이 이런 주장을 더 퍼뜨렸다.
본래 그는 양이나 사슴, 토끼 등의 고기로 만든 일종의 젓갈(즉, 고기 젓갈)인 해(醢)를 즐겼는데, 이를 중죄인의 시신을 젓갈로 만들어 버리는 당시의 형벌과 연관시켜서 마치 공자가 사람고기로 만든 젓갈을 즐긴다고 왜곡한 것. 무엇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사람'을 중요시하는 유가에서 그 '사람'을 먹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자로가 권력 싸움에 휘말려 살해당해 그 시체가 해로 만들어져서 고인드립까지 당하자 그 충격으로 해를 다시는 가까이하지도 못했다.
공자의 유학을 계승한 맹자의 서적인 "맹자- 양혜왕 편"을 보면 "옛날에 공자께서는 '처음으로 사람 모양의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순장에 쓰이게 한 자는 삼대가 멸할 것이다.'라 하시며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조차도 귀히 여길 것을 역설하셨습니다."라며 맹자가 양혜왕에게 백성의 목숨을 중요시 여길 것을 강조하는 구절이 나온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를 참조할 것. 진짜 순장은커녕 이러한 인명이 희생되지 않는 가짜 순장조차도 혐오한 공자이니만큼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유교를 떠나서, 원래 식인 행위는 현대에 비해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었으며 인권이라는 개념조차도 없었던 고대 중국에서도 분명한 비정상적 행위였다. 물론 전근대시절에는 영양상태나 의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긴 전쟁이나 기근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는 기록도 종종 나오지만,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나 나오는 행위였지, 제아무리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고대인이라고 해서 "먹을 거 없으면 사람 좀 잡아먹을 수 있지"란 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설령 극단적 상황에서 나온 식인이라도 두고두고 지탄을 받는 행동이었다.[115]
10.3. 자손 대대로 이어진 순탄치 못한 결혼 생활
부부관계는 본인은 물론 후대에까지 별로 좋지 않았던 듯하다. 공자, 공자의 아들, 공자의 손자인 자사까지 3대가 이혼을 했다는 말이 있는데, 예기의 단궁편의 다음 구절로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 백어의 어미가 죽었는데, 1년이 넘어도 여전히 곡을 했다. 선생님이 들으시고 "누가 곡을 하는가?"라고 물으셨다. 문인들이 "리입니다."라고 하니 "에휴. 심하네…."라고 하셨다. 백어가 이를 듣고 그만두었다.[116]
- 자사의 어미가 위나라에서 죽어서, 자사에게 그 소식을 알리자 자사가 사당에서 곡을 했다. 문인이 도착해서 말했다. “서씨의 어미가 죽었는데어째서 공씨의 사당에서 곡을 합니까?” 자사가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면서 그리고는 다른 방에서 곡을 했다.[117]
- 자상의 어미가 죽어도 상을 치르지 않았다.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아버님께서는 쫓겨나신 어머니의 상을 치르신 적이 있었지 않습니까?" 자사가 답했다. "있었지." "헌데 선생님께서는 왜 흰둥이한테는 상을 못 치루게 하십니까?" 자사가 말했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선 도를 잃으시는 법이 없으셨네.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도에 견주어 보시고 그 예를 높일만 하면 높이고, 낮출 만하면 낮추셨지.(내 아버지께서는 능히 그리하셨으나) 내가 (도를 잘 헤아리지 못 하는데) 어찌 그처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 생각하기로는) 내 마누라가 흰둥이 엄마지, 내 마누라가 아닌 사람은 흰둥이 엄마가 아닐세!(…) 이리하여 공씨네 집에서는 이혼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는 것이 자사에서부터 시작되었다.[118]
설화적으로 구성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복잡한 가정사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도올 김용옥처럼 부계만을 강조하려고 사실이 아닌 장례에 대한 이야기로서 썼다는 해석도 있다. 여담으로 효자로 유명했던 증자도 아내가 부모가 좋아하는 찐 배를 잘못 쪄서 이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순자의 주장에 따르면 증자-자사학파의 계승자인 맹자 또한 아내를 쫓아낸 전력이 있다고 한다. 『순자荀子』「해폐解蔽[119] 」편의 이야기에 나오는데, 애초에 해당 편에서 이 말이 언급된 이유가 맹자를 아니꼽게 여기던 순자가 맹자를 깔 껀덕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이유가 이유인 만큼, 카더라일 가능성이 높다. 여담으로, 맹자가 이혼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도 카더라로 존재한다.
공자가 여성을 특별히 나누어 말한 기록이 드문데, '''여자와 소인[120] 만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불손해지고 멀리 하면 원한을 품는다.'''[121] 라고 말한 적은 있다. 여기서 여자의 의미에 대해 국가를 막론하고 논란이 분분한데, 공자는 이 문장 빼곤 여성을 차별하는 언동을 보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그냥 여성 전체를 가리켰단 의견, 특별히 철없는 여성을 찝어 말했단 의견, 딸(女)과 아들(子), 남(女)의 자식(子) 등 수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122]어느 날 맹자가 자기 방에 문 열고 들어갔는데, 마누라가 방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는(!)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된다. 이에 기가 찬 맹자가 당장 어머니한테 달려가서 '''"엄마, 나 이런 무례한 애랑은 못 살겠어요!"'''라고 외쳤는데, 어머님 하시는 말씀이 '''"아니, 노크도 안 하고 귀신마냥 들이닥친 네 잘못인데 왜 우리 아가한테 성질이냐? 그리고 평소에 편안하게 쉬지도 못할 거면 방은 왜 만들어 놨겠니? 무례하기는 네가 제일 무례하다!"''' 이 가르침으로 인해 맹자는 근본적인 잘못이 자신에게 있었음을 깨닫고 이후 평생 마누라랑 알콩달콩 잘 살았다고…
10.4. 역대 왕조가 내린 작위
한무제가 유학을 본격적으로 진흥하기 시작한 이래 공자는 중국의 역대 왕조들이 만세의 스승으로 하늘같이 떠받들었다. 일단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할 때 공자를 제후와 동급인 세가 문서에 서술했고, 이러한 융숭한 대접은 공자의 후손들 중에서도 공자의 직계 가문에게 계속 이어졌는데, 후(侯)나 공(公)의 작위를 내리고 대대로 공자의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공자 직계 혈통에 대한 대우는 날이 갈수록 후해졌기 때문에 오랜 세월 축적된 부와 명예가 대단했는지라 곡부의 공부(孔府)를 가리켜 '''성부(聖府)'''라고 존칭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명나라 때는 자금성에만 허용되던 황금빛 기와지붕과 자금성에도 없다는 용을 아로새긴 대리석 기둥을 공부의 대성전에 세우도록 할 정도였다. 청나라때에는 만주족과 한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관례 편법을 써서 회피하는 식으로 연성공을 부마로 삼기도했다. 또한 연성공의 지위를 얻기 위해 공자의 후손들끼리 서로 싸운 기록도 보인다.
이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면적만으로도 공자 이하 유교 성현들의 사당인 공묘(孔廟)는 13만 제곱미터에 건물 466칸, 공자 후손들의 저택인 공부(孔府)는 16만 제곱미터에 건물 480칸, 공자 일족의 묘역인 공림(孔林)은 200만 제곱미터라는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한다.
====# 공자 조상들의 작위 #====
공자 덕분에 사후에 작위를 얻는 영광을 누린 사람 중에는 공자의 조상도 예외가 될 수 없어서, 공자의 아버지부터 6대조까지가 왕(王)으로 추봉되었다.
====# 공자의 작위 #====
공자 본인에게 추봉된 작위도 어마어마해서 후, 공, 왕을 거친 뒤 급기야 (서하의 경우지만) '''황제'''로까지 격상되기에 이른다.[128] 최종적으로는 대성지성선사. 나중에 '선사'로 올린 이유는 이전까지 군주로 봉했던 게 성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는 지적이 나와 그냥 군주가 아닌 옛날의 큰 스승으로서 존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공자 후손의 작위 #====
공자의 아들 공리부터 시작해서 그의 직계 자손들이 역대 왕조로부터 수여받은 작위는 아래와 같다. 이 세습 제도 자체는 1935년, 중화민국 정부가 작위의 이름을 연성공(衍聖公)에서 대성지성선사봉사관(大成至聖先師奉祀官)이라고 바꾸기만 했을 뿐 '''지금도 존속중이다.''' 명칭을 바꾼 이유는 공화제 국가인 중화민국에서 '연성공'이란 귀족 작위의 형태로 인정하기는 곤란했기 때문이다.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은 중화민국의 세습 공직으로,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받드는 봉사관(奉祀官) 중 아성봉사관, 복성봉사관, 종성봉사관, 술성봉사관은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는 반면 대성지성선사봉사관만 그 지위가 특임관(장관급)에 준한다.
중간에 계승자가 남종과 북종으로 나뉘어 양쪽 모두가 연성공 작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는데, 남송이 중화로서의 정통성을 이민족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연성공 공단우를 데려가 저장성 취저우에 새로운 공묘를 세우자 금나라도 곡부에 남아 있던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를 연성공으로 봉해 맞섰던 것. 결국 남송과 금나라를 전부 때려잡고 분단상태를 끝낸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 칸이 남종의 종손인 공수에게 곡부로 돌아가도록 명했는데, 공수가 '이미 구주에도 5대째 선영을 모신 상태라서 이제 와서 곡부에 돌아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북종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을 양보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를 공수가 작위를 양보했다는 뜻의 '공수양작(孔洙讓爵)'이라고 부른다. 현실적으로도 그 난리통에 공단조와 그 후예들이 목숨을 걸고 곡부에 남아서 공자 사당과 묘지를 지킨 공로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종은 연성공 작위를 양보한 이후 일개 민간 가문이 되어서 공자에 대한 제사와 유교 교육에 힘썼다. 이 때문에 취저우에도 공묘가 남아 있으며, 남종 역시 공자의 직계라는 사실은 공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명나라 정덕제 때부터 남종의 직계 후손에게 정8품에 해당하는 한림원 오경박사(翰林院五經博士)를 세습하도록 해 명청 대까지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중화민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한림원 오경박사를 대성지성선사남종봉사관(大成至聖先師南宗奉祀官)으로 바꾸고 그 지위는 간임관(차관급)에 준하도록 했다. 75대손 공상해(孔祥楷)가 1947년 대성지성선사남종봉사관을 세습했지만 국부천대 때 타이완으로 따라가지 않아 1949년 세습이 중단되었다. 장제스가 남종 후손까지 챙겨가지는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남종의 후손은 대륙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는 훗날 국공내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패배해 타이완으로 옮겨간 중화민국과 장제스가 대성지성선사봉사관 쿵더청을 같이 데려가 또다시 재현될 뻔 했으나, 대륙을 지배한 공산당이 새로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을 임명하지 않아 분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설령 임명하고 싶어도 쿵더청이 외아들이라 본토에는 누나 공덕무밖에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공자 가문의 직계 남성을 세울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쿵더청은 생전에 단 한 번도 곡부를 방문하지 않아 누나 공덕무와도 도쿄에서나 겨우 만났고, 대륙에서 공부의 대표들이 공부가주를 전하면서 '꼭 한번 와주셨으면 합니다'라고 청할 때에도 '''"우리 가문에는 이런 술이 없다"'''고 내쳐버렸다. 공부의 적통이 정말로 공부가주를 몰라봐서 그런 게 아니라, '조상님들의 사당과 묘들이 그런 만행을 당했는데 내가 어찌 이 술을 인정하고 곡부에 다녀올 수 있겠나?'라는 항의에 가깝다. 쿵더청의 묘마저도 곡부가 아닌 타이완에 남아 있다. 공자 제사인 석전대제 역시 타이베이 공묘에서 계속 행하고 있다.
1998년 대성지성선사봉사관부가 폐지되고 2008년에는 공자 가문의 동의를 얻어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무보수직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여성도 대성지성선사봉사관이 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단, 여계로의 승계는 불가).
====# 공자 가문 계보도 #====
[143]
10.5. 후계자
맹자는 요-순-탕-문왕-무왕-주공-공자로 이어지는 라인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자부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도통론(道統論)이 된다. 공자-증자-자사-맹자까지 라인이 이어지고, 단절되었다가 송나라 때 다시 복구되었다는 식의 설명. 그런데 사실 맹자는 공자의 아티스트적인 측면을 생각해보면 공자의 최대의 이단일 수도 있다. 맹자가 공자의 후계자로 인정된 것도 송나라 때 성리학이 체계화된 이후.[144]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맹자를 매우 싫어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왜 그런지는 맹자 문서로 가보면 안다.
사실 공자는 자신의 후계자를 안회로 생각했던 듯하다. 하지만 안회는 요절하고 말았으니. 때문에 김용옥은 안회의 죽음으로 공자의 적통은 사실상 끝난다고 평한 바 있다.
10.6. 공자 한국인설?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들은 공자를 한국인라고 주장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 스제칭녠숴에서 이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다.
보면 알겠지만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반응이다. 얘기가 나오자마자 타 국적의 외국인 패널들은 마치 "방송에서 이런 민감한 얘기 꺼냈다가 싸움나는거 아냐?" 라는 식의 표정들과, 한국인 패널이 오해를 풀어주고 공자는 중국인이라고 말하자 '큰 결심했다는 듯이' 쏟아지는 박수갈채까지. 더 놀랍게도 해당 방송 후 웨이보나 바이두같은 중국 웹사이트에서 중국 네티즌들은 "'''이 방송을 계기로 오해가 풀렸다'''"는 반응이 많았다. 해당 방영분은 2018년 방송분이다.패널: 그래서 공자는 한국인이야 중국인이야? (시비거는 말투)
(일동 당황, 민감한 질문을 건드렸다고 생각하는 듯)
(한국인 패널만 어이없게 웃는다.)
한국인 패널 : 난 진짜 이게 어디서 나온 헛소리인지 모르겠어.
99.999999%의 한국인들은 다 공자가 중국인인 걸 알아.
그래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한국인들을 대표해서 명확하게 말할게.
공자는 중국인이야.
(전 패널들 민감한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줘서 고맙다는 듯이 한국인 패널에게 박수 갈채.)
당연한 소리지만 절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공자가 곧 중국인이라는데 한치의 이견이 없으며, 심지어 한국인들은 '조선은 공자왈 맹자왈 하다가 망했다'는 인식이 굉장히 커서 오히려 공자를 혐오하는 편에 가깝다.[145][146] 한국에서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이다.
공자 혐오 글을 쓰면, 중국인이 이런 댓글을 단다.那只能说明你们韩国的文化影响力不够强。
그것(공자 혐오)은 단지 당신들의 한국의 문화적 영향력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다.
원인을 따지자면 일본 또는 대만 혐한 네티즌들의 조작 자료로 인해 루머가 퍼졌다는 것.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오래된 오해지만, 한국인들 입장에선 '''관심조차 없었으므로''' 중국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면 굉장히 어이없어한다. 한편 일각에서는 중국 공산당의 전무후무한 대병크를 숨기기 위해 루머를 일부러 놔두고 키웠다는 근본적 원인설도 제기되고 있다. #
이 같은 헛소문의 근원은 일본 넷우익들이 공자 한국인설을 퍼뜨렸다는데 있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일본 혐한이 조작하기 이전에 실제로 공자가 한국인이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한국에도 존재했다. 바로 환단고기에 심취해있던 환빠. 이들은 공자는 상나라의 후손인 동이족이고, 동이족은 곧 한민족의 조상이니 공자는 한민족이었다라는 주장을 했었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90년대 후반 2000년대 중반까지 유행했던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은근히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역사가들은 당연히 거들떠보지도 않는 주장이었지만, 나름 스스로를 전문가라 지칭하는 이들부터 일반 네티즌들까지 다양한 이들이 이러한 내용을 믿고 인터넷에 글을 쓰고 퍼날랐었다.# # 해당 링크 외에도 네이버에 2000~2005년 기간으로 '공자 동이족'을 검색하면 공자가 한민족임을 주장하는 환빠들의 글이 수없이 나온다. 2000년대 초~중반 시기 이런 한국기원설이 일본 커뮤니티에서 굉장히 유행했으며 넷우익들이 번역한 이러한 한국기원설이 일부러 중국으로 재번역되어 흘러갔고 각종 오해의 근원이 되었다. 일본인들의 한국기원설 유포 작전
또한 중국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점점 증가하면서, 공자는 중국 사람이 아니라 노나라 사람이라는 우스갯소리 까지 나올 정도.
11. 대중매체에서
11.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11에서는 고대무장 중 1명으로도 참전(본명인 '공구'로 등장). 특기는 '인정(소속 도시 무장들의 충성도가 떨어지지 않음)'. 능력치는 73/68/84/87/85로 유교의 창시자란 명성엔 걸맞지 않는편. 특히 정치력 부분이 논란이 컸는데, 공자가 행정가로서도 유능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묘한 부분이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거의 대부분은 자신이 이상으로 삼은 정치를 마음껏 펼치지 못했던 것도 일정부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무력이 문관치고는 꽤 높은 편인데 이는 그가 힘이 좋고 강궁을 능숙하게 쏜다는 고증이 반영되어 있다.
혐오무장은 법가의 신봉자였던 진시황 영정과 비슷하게 합리주의자로 포장되어 있는 조조. 전반적으로 이런 설정은 조조를 법가라고 의식하는 일본의 성향 때문인 듯도 한데[147] , 조조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법가라고 보기 힘들며 당장에 조조 자신부터가 당대의 지식인으로 공자의 말이나 유교 경전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애당초 한나라 이후 유가 사상은 함부로 배척할 수 없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는 걸 생각하면 좀 미묘한 부분.
삼국지ds2에서는 통솔 90이 넘고 무력도 처음부터 70이 넘는다. 그래서 군사,시중,장군이 다 되는 놀라운 사기 능력치.
삼국지 12에서는 유교의 창시자라고 재평가를 받았는지 능력치가 68/70/92/87로 지력이 대폭 상향되어 A급 책사 정도의 능력치가 되었고, 체격이 건장하고 무예에도 소질이 있었다는 걸 반영했는지 무력도 쩌리 잡무관보다 높은 70까지 올랐다. 전법은 오리지널에서는 진정. PK에서는 도발.
삼국지 13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다. 특기는 상업 3, 문화 '''9''', 순찰 5, 설파 6, 교섭 8, 언변 8, 인덕 '''9'''이며 일기는 없다. 전수특기는 문화이다. 공자가 배우기를 좋아해 다방면의 지식과 예술을 습득하고 제자를 많이 들여 가르쳤으며 그의 사상적 특징이 인(仁)으로 정리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적절한 특기선정. 병과적성은 창병 B에 기병과 궁병이 C이며 중신특성은 화기생재, 전법은 후방지원으로 아군의 사기↑(+10) / 부상병 회복↑(+10).
삼국지 14에서 능력치는 통 70/ 무 66/ 지 85/ 정 87/ 매 97 이다. 개성을 보면 그에 걸맞게 명성이나 학자 그리고 악주를 반영했다. 전법 또한 후방지원용으로 딱이다.
삼국지 인터넷에도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통솔력 89, 무력 80, 지력 99, 정치력 90, 매력 98.
전투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하고 외교용으로 사용하기도 애매한 어중간한 위치로 등장한다. 하지만 제갈량, 초선, 장각[148] 과 함께 낙뢰를 쓸 수 있는 장수이다. 낙뢰의 발동확률이 거지같아서 그렇지.
11.2. 기타
네이버 웹툰 덴마의 등장인물인 공자의 이름의 어원이 되었다. 특히나 <The knight>에서 이름이 밝혀진 후, 등장인물인 지로의 이름에 점 하나만 찍으면 공자의 애제자 자로가 되는 것에 주목하는 독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전국시대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등장하는데, 고우영 특유의 미소년 캐릭터로 등장시켰다. 일지매, 고우영 초한지의 한신 역을 한 캐릭터가 그 것.
공자가 주인공인 영화도 있다. 쌍권총 쓸 거 같은 공자님이 나오는 2010년 영화로 국내 개봉 제목은 '공자-춘추전국시대'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근엄한 군자인 공자와 그를 핍박하는 소인배들 구도라 그래서인지 영화 내용이 다큐멘터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건전한데, 이 건전성이 지나쳐 정말 '공자님 말씀'이다. 공자의 삶을 따르고 싶은 유학도나 위대한 조상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중국인이라면 모르겠지만, 해외의 관객이 즐겁게 보기엔 어려운 영화다. 오죽했으면 영화 평 중에선 '이 영화보다 논어를 읽는게 더 재밌을듯'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링컨의 집에서 살아남기에서는 리사 라우드가 링컨 라우드가 만든 엉망인 커피잔을 보고 공자를 닮았다고 말한다.
11.3. 애니메이션 〈공자전〉(1995)
한국과 대만 일본의 합작으로 제작이 된 애니메이션이 있다.
내용은 제자인 자공과 증삼이 스승 공자를 회상하는 식으로 전개되며 전체적으로 여러 에피소드들을 그럭저럭 잘 재연하고 있다. 공자가 나름대로 미중년(…)이고 곱게(?) 늙는 편. 공자의 문무겸비의 면모를 부각하려고 했는지 싸움 장면도 몇몇 등장한다. 가령 제나라와 노나라의 회담 때 등장하는 춤꾼들과 광대들은 본래 역사에서는 말로 쫒아냈지만 여기에선 직접 칼싸움을 해서 물리친다. 사실은 칼싸움 정도가 아니라 춤꾼과 광대들 중에 한 사람의 팔을 두부자르듯 자른다(…) 그런데 정작 자로와의 첫만남 때는 흔히 알려진 '참교육'이 아니라 설교로 감화시키는 모습으로 나온다. 공자의 한국판 성우는 유강진, 자공 역은 장세준.
12. 타 문화권에서
원나라 무렵에 유입되어 현지화된 중국 이슬람 신도들 중 일부는 공자를 신이 보낸 예언자 중 하나로 본다고 한다. 대충 예수급이랄까.
로코코 시대 무렵, 유럽의 귀족들은 당시 전해졌던 중국의 문물과 문화, 사상들에 동경심을 갖고 이를 부단히 수입하였다. 이를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고도 하는데, 특히 여러 계몽주의자들은 심지어 공자의 사상뿐 아니라 노장사상, 유교문화 및 과거 제도 등등이 서구권보다 훨씬 더 앞서 있었다고 극찬하기도 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볼테르는 공자를 두고 "공자는 어떠한 종교도 가르치지 않았고 어떤 종교적 기만도 쓰지 않았다. 그가 섬긴 황제에게 아부하지도 않았고 황제를 언급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의 경전 안에서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도덕을 보았다. 단 한명의 중국인만이 그를 부정했고, 그는 보편적 저주를 맛보았다."며 공자의 사상에 매우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였고,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였던 크리스티안 볼프 역시 "그는 그리스도가 유럽에서 받는 것과 똑같은 대우를 중국에서 받는다."라며 공자와 그의 사상이 중국에서 갖는 위상을 인정하는 발언을 한 바가 있다.
필리핀 마닐라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공원인 리잘 파크의 한켠에는 중국식 정원인 '차이나 가든(별도 요금 징수)'이 있는데 이곳에도 공자의 동상이 있다.(물론 필리핀 내 화교들이 세운 것일 테지만) #
13. 기념일
성균관대학교는 기원이 기원인지라 공자의 탄신일인 매년 9월 28일에 '''쉰다.''' 이 날을 '''공부자탄강일''' 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춤추고 노래 연주하고 술 마시는 일종의 공자 생일파티다. 진사식당에서 무료로 밥도 먹을 수 있고, 생일파티 때 공자에게 올린 술도 나누어준다. 종교단체로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문화적 영향력이 있어서인지 정계, 재계에서도 많이 참여하는 편. 팔일무(八佾舞)를 볼 수 있는데, 문무와 무무로 구성되어 있다. 춤이라고 하지만, 현재의 댄스와는 비교 불가. 아주 느리다. 대한민국에서는 유일하게 공자 생일에 쉬는 학교. 행정실도 연구실도 교수도 모두 쉰다. 이 날 에버랜드에 있는 대학생은 전부 성대생이라는 소문이 있다. 또한 입학식을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졸업식을 인문사회캠퍼스에서 거행하는데, 박사 학위 취득자와 졸업생 대표들이 성균관 대성전에서 제사를 지낸다. 대만에서는 공부자탄강일이 스승의 날로 지정되어있다.
14. 사당
공자의 고향 취푸(曲阜곡부)에 사당이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무시무시한 크기를 자랑하는 공묘(孔廟)가 바로 그것. 덧붙여 말하자면 공자의 무덤이 아니다. 공자의 무덤은 한자를 달리해서 공묘(孔墓)라고 쓰며, 공묘에 부속된 공림(孔林)의 안에 있다. 묘지에 수풀 림 자가 붙은 사람은 공자의 공림과 후한 말의 관우의 관림 외에는 전무하다.
한국에 있는 성균관이나 궐리사(厥里祠)[149] 도 공자의 사당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3대 공자 사당중 하나인 허베이성(河北省) 청더(承德) 러허원먀오(열하원묘)가 호텔로 개조되었다. 중국인들은 문화유적 훼손이라며 비난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