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계

 



'''송(宋)나라 초대 국군
미자 계
微子 啓
'''
''''''
자(子)
''''''
송(宋)
''''''
계(啟)
'''아버지'''
덕왕(德王) 제을(帝乙) 자선(子羡)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년
1. 개요
2. 제후가 되기까지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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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나라(은나라)의 왕자로 이름은 계(啟), 주로 미자계라고 한다. 미(微)는 영지의 이름으로 아버지는 상나라 제29대 왕 제을이며 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의 이복형이 된다. 현명하고 올바른 사람이었으나, 정실 소생이 아니라서 이복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다.

2. 제후가 되기까지


주왕이 달기를 끼고 폭정을 다하자 주왕의 아저씨뻘 되는 기자는 간언하다가 노여움을 타서 미친 척하며 다니다 투옥되고, 비간처형되었다. 이에 미자계는 상나라에 천명이 떠난 것을 알고 무왕(주)의 편을 든다. 이때 미자는 그냥 가지 않고 상의 종묘에 들어 가서 '''왕실의 제기(祭器)를 가지고 나왔는데''', 전근대에 제사라는 의식은 의식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단합 대회로써의 성격도 지녔을 뿐더러, 제사의 목적도 신에게 단순히 풍요를 기원하는 것 외에도 국가에 재앙이 있을 때는 그 재앙에 대해 왕이 직접 나서서 하늘에 사죄하는 의식으로써의 성격도 있었다. 더욱이 제정 일치 사회로 중요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일이 제사를 지내고 점을 쳐서 결정했던 상 왕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데 하늘에 고하는 국가예식절차에 차질이 생길 뿐더러 제사라는 구성원들의 회합과 단결을 기대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는 하늘에 국가의 풍요를 빌 수도 없고 천재지변에 대한 왕의 잘못을 하늘에 고하고 사죄해 노여움을 풀라고 빌 수도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건 그냥 '''나라 문 닫으라'''는 저주에 가깝다.
주나라군은 목야 대전에서 상나라에 승리하고, 주왕은 스스로 궁궐에서 분신 자살했다. 미자계는 무왕에게 상나라의 사직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이 은나라를 계속 이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상나라가 다시 부활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형제인 관숙(管叔) 선, 채숙(蔡叔) 도, 곽숙(霍叔) 처[1]를 감시자로 보냈다. 이들을 3인의 감시자라는 하여 삼감(三監)이라고 부른다.
주 무왕이 죽고 어린 성왕(주)가 즉위하자 주공단[2]이 섭정했다. 무경은 이 틈을 노려 상나라 부활을 시도했고 삼감은 주공단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므로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져 이들은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미자계는 여기서도 주공단의 편을 들어서 삼감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무경과 관숙은 처형되었으며 채숙과 곽숙은 추방되었다. 그래서 미자는 무경이 다스리던 지역의 제후로 봉해졌는데 이 지역을 (宋)이라고 한다.
이 후 미자가 죽었는데 후사가 없어 동생 미중연(微仲衍)이 제후직을 이어받아 이 곳을 다스리게 되었고 이 후 송나라 제후는 미중연의 후손들이 세습하게 된다.

3. 여담


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개(開)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다.

[1] 관숙, 채숙, 곽숙은 각각 관, , 곽의 제후라는 뜻으로 각각의 이름은 선(鮮), 도(度), 처(處)이다.[2] (魯)나라 제후로 이름은 단(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