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대학교/역사
1. 개요
명지대학교는 1948년에 개교하였다. 1963년에 지금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었으며, 1979년 용인에 자연캠퍼스를 완공시킴으로써, 종합대학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태동기(1948~1963)
2.1. 서울고등가정학교
명지대 역사의 시작은 1948년 재단법인 무궁학원을 인가받아 서울고등가정학교로 설립된 것으로 보고있다.
서울고등가정학교는 본과와 전수과를 두었으며, 초대 교장으로 김재준 박사가 취임했다. 가정학과, 국문학과, 영문학과를 보유하고 있었다.
서울고등가정학교는 1950년 2월, 2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1] 그 이후 학교가 초급대학으로 승급될 때까지의 졸업생에 대한 기록은 없다.
2.2. 근화여자초급대학
서울고등가정학교는 이후 1952년 한 단계 더 승급되어 근화여자초급대학이 되었고[2] 이듬해 제1회 졸업생 12명을 배출한다.[3] 이때 존재했던 학과로는, 전문 학원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정학과 이외에도, 국문학과와 영문학과 등이 있었다고 한다.[4] 54년 졸업생은 가정과 기준 73명이 되었다.[5]
2.3. 서울여자초급대학
서울여자초급대학은 80명의 졸업생(가정과 기준)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6] 이 시절 초급대학교였던 현 4년제로는 경희대학교와 충북대학교가 있다.[7]
서울여자초급대학은 1년만에 2년제 서울문리사범대학으로 바뀌게 된다.
2.4. 서울문리사범대학
2대 이사장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가 물러나고 유상근이 3대 이사장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1956년 서울여자초급대학은 기존의 초급 대학 과정을 폐지하고 2년제 사범대를 설립하였으며[8] 동시에 교명을 서울문리사범대학으로 개칭하여 남녀공학으로 개편했다.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총 716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1회 졸업생은 가정과, 국어과, 영어과에서 총 150여명이 나왔으며, 이후, 사회생활과(누적 졸업생 1100명), 수학과(누적 졸업생 314명), 과학과(누적졸업생 323명) 등이 생겨났고, 가정과에선 1968년까지 1309명, 국어과에선 1298명, 영어과에선 879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2.5. 서울문리실과대학
5.16 군사쿠데타의 영향으로 서울문리사범대는 2년제 일반대학으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이 서울문리실과대학이다. 당시 보유학과는 행정, 경영, 상과, 무역, 전기, 가정, 식품영양, 화공 이었다고 전해진다. 출처
서울문리실과대학은 전환 1년만에 다시 4년제 명지대학으로 전환하게 된다.
3. 명지대학(1963~1983)
현재 명지대학교의 실질적인 전신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학이다.
1963년 서울 문리사범대학이 현재의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이름도 명지대학으로 개칭되었다. 서울 문리 실과 대학이 1962년 신설했던 국어국문학과, 경영학과, 행정학과, 전기공학과 이른바 명지대 원조 4대 학과에서 명지대학 제1회 졸업생으로 각각 18명, 14명, 10명, 18명을 배출했다(1966년). 또한, 국내최초로 무역학과(현재 국제통상학과), 영양식품학과(영양), 영양식품학과(가정)를 개설하였다. 이외에도 명지공대의 주축학과인 토목공학과, 건축공학과, 화학공학과 등이 탄생한다.
67년에는 대학원이 탄생하며 진정한 종합대학다운 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3.1. 인문캠퍼스 건립
69년부터는 기존에 있던 중구 서소문캠퍼스에서 현재 인문캠퍼스의 위치인 남가좌동으로 캠퍼스 이전을 시작한다.
이후, 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사학과, 경제학과, 수학과 등이 마저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허나 정부의 수도권 개발정책으로 종합대학승격 및 신입생증원에 어려움을 겪게되고, 서울캠퍼스 부지자체도 좁아 한계에 봉착하자, 주간학과 전체를 용인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하고 1979년부터 용인캠퍼스를 착공한다.
3.2. 자연캠퍼스 건립
현 자연캠퍼스를 완공하고 1983년에 주간학과와 본부를 완전히 용인으로 이전한다. 이 시기 명지대 야간, 명지전문대, 국제대학(현 서경대)가 현 명지대 인문캠안에 공존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교육부로부터 198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승인을 받고 현재의 종합대학 명지대학교가 되었다. 1983년 종합 대학으로서의 명지대학교가 출범하기 전까지 총 14,0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과계열이 현재 전부 서울에 있고 자연계열만 용인에 있는 현재 상황에서는 의아할 수 있으나 이 시기에는 용인캠퍼스에 인문사회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4. 명지대학교(1983~)
용인캠퍼스로 주간학과를 옮긴 명지대학교는 1983년 드디어 현재의 4년제 종합대학 인가를 받는다.
당시 4년제 대학교는 대학규모에 따라 2개로 분류하였다. 일정규모에 따라 대학, 대학교로 분류하였으며, 2010년대 초까지 대학이라 부르던 2년제 전문대학은 "초급대학"이라고 불렸다.
4.1. 이원화와 그 이후
1983년부터 1989년까지 주간학과는 전부 용인에서 운영되던 명지대는 용인에 있는 명지대 인문계열학생들을 전부 서울캠퍼스로 소환하면서 현재의 이원화캠퍼스 체제를 완성하게 된다.
당시 서울캠퍼스 주간화를 놓고 용인캠퍼스학생들의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만약 서울 캠퍼스의 주간화를 진행할 경우 본교로 입학한 용인캠퍼스학생들이 분교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부는 용인으로 유지한다는 조건으로 인문계열을 서울로 소환할 수 있게 되었고,현재 명지대학교는 완전한 계열별 이원화캠퍼스가 되었다.
1991년 강경대 구타치사 사건으로 명지대 경제학과에 재학중이던 강경대가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학생들의 연쇄 분신등 6공을 위기로 몰아넣은 시위정국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서울시장, 국무총리,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했던 고건이 94년부터 97년까지 총장을 역임했던 대학이기도 하다. 명지대는 국무총리2명을 포함해서 최고위직 인사들이 총장을 많이 역임한 대학이기도 하다.
97년 명지대는 현재 사용하는 명지나무 로고로 교표를 전면 교체하였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이전의 로고가 더 좋다고 다시 바꾸길 원하는 학생들도 있는 반면, 오히려 학교 외부에서는 명지나무가 예쁜 대학로고 상위권 단골로 꼽히며 모순적인(...)상황을 낳고 있다. 명지 나무 교표는 중간에 한번 리뉴얼을 거쳐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21세기 명지대는 2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채플관, 구조모형을 검퓨터기기와 연동시켜 실시간으로 해석해내는 최첨단 시설로 건설실험을 가능케하는 구조실험센터, 국내 최초의 유비쿼터스형 도서관인 방목학술정보관과 최첨단 문화, 교육시설인 교육복합시설을 개관하였다.
2021년 현재 명지대는 11개 단과대학과 16개 학부, 43개의 학과, 17개의 전공의 학사 과정을 밟을 수 있는 재적학생 2여만명 규모의 대형 사학으로 발전하였다.
5. 세부연혁
[1] http://ibook.mju.ac.kr/Viewer/PKXUX3GYWWQY, 890쪽[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2071000329202012[3]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305170032920202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4031400329203011[4]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55032400329203020[5] 위와 같음[6] 위와 같음[7] 4년제로 승격하지 못한 학교들은 이후 법 개정으로 1979년부터 전문학교와 함께 전문대학으로 재분류되었다.[8] 당시 초등학교 교사는 전문 고등학교를 나오면 할 수 있었고, 중등교사는 2년제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