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1. 소개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주교.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장연(長淵).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무진동에서 출생. 부모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17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2] 에 입학한 뒤 대신학교 신학부[3] 를 졸업하고, 1930년 10월 사제서품을 받아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활동하였다.
비록 사회문제에 대해서 그의 후임자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 비해 활발하게 대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 평신도들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교구장직에서 은퇴한 후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 당시 나병의 치료약이 발명되었지만 나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열악하였다. 노기남 대주교가 그의 여생을 나환자촌에서 보내려고 한 것은 보통 대인배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힘들었으리라.
2. 생애
12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15살 나이로 1917년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월 18일 신부로 서품,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되었다. 서울대교구장(당시에는 경성대목구)이던 1942년, 한국 가톨릭 사상 첫 '''한국인 주교'''로 서품되었다.[4][5]
1962년 대주교로 승품하였으며,[6] 1967년 3월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에 이어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에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0여 차례 바티칸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육영수 추모사업회에도 참여하였다.[7]
그가 기고한 중앙일보 칼럼제64화 명동성당 - (1)「뾰족당집」에 의하면 명동성당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 한다.
칼럼에 의하면, 3.1 운동 당시 그를 가르쳤던 장면은 같이 만세를 부르고 싶어했으나 마찰을 우려한 학교 때문에 결국 못했지만 대신 3.1 운동은 하늘의 뜻이란 걸 가르쳐주기로 했다 한다.이러한 명동성당에서 나는 35년 동안을 살았다.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12년 남짓을 봉직해왔고, 그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 임명을 받아 25년간을 교구장으로서 일해온 곳도 명동성당 구내였다. 모두 37년 동안을 명동성당 구내에서 살아온 셈인데 그 37년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시기인 것이고, 내 인생은 그곳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맞이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명동성당이야말로 「내 인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동성당과 관련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남겨두어 다음 세대를 위한 증언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다.
1967년에 은퇴했지만, 1980년 기사에 의하면 나환자를 찾아다니면서 일을 많이 했다.
노 대주교가 현재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8]
에 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9] 에서 벌이고 있는 구라[10] 활동. 구라 사업은 이경재 알렉산데르[11] 신부가 실무를 맡고 있으나 노 대주교가 은퇴 전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을 때부터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주안을 두고 돌보고 있다.
1984년에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교황을 알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해에 선종했다. 향년 82세. 경기도 용인시의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5년 후인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그의 곁에 안장되었다.노기남 :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맞은 편에 100명의 양성 환자가 살고 있어요. 또 마을 입구 정착촌에는 100여 가구, 4~500명이 자활의 꿈을 키워놓고 있지요. 이른바 천형(하늘의 벌)이라는 나병이지만, 그럴수록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위안입니다. (중략) 이같은 일 이외에 1주일에 평균 한 번씩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출근한다. 동경한국연구원장(원장 최서면)의 본부로 평소 아들처럼 여기는 최 원장을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3. 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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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과 찍은 사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전前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12][1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굉장히 낯뜨거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다. 또한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에 도움이 될 후보 = 즉, 이승만 및 우파계열 당의 후보를 찍을 것을 권고했다.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시절 은사이기도 한 장면을 찾아 정계입문을 권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계 정치인들이 야당 성향을 띠게 되자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승만은 노기남에 대해 노골적으로 '정치 주교'라고 부름으로써 반감을 드러내 보였다. 이승만과 노기남 사이의 갈등은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노기남은 천주교인이였던 장면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박정희 정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쿠데타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는 커녕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군사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힘을 썼다. 노기남 대주교는 사회 사업을 통해서 안면을 트게 된 육영수 여사와 가톨릭계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 정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10월 유신의 시작인 비상사태선언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노기남 대주교와 박정희, 전두환과의 관계는 매우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범인 은닉사건에 연루된 성직자를 비난하는 인터뷰를 함으로서 권력과 유착된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비난도 받았다.
4. 친일 행적
사실상 한국 가톨릭의 흑역사.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에 본인을 포함한 누구나 살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고, 한 종교 단체의 장이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 가톨릭 발전에 공헌을 많이 하고, 당시 일본인 대주교밖에 없던 한국(조선)에서 서울에서나마 한국인 대주교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라고 쉴드를 쳐줬지만, 이 사람은 '''아예 주교가 되기 전부터 친일 행적이 명백하다.''' 명동성당 보좌신부 시절부터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에 참석해 고문신부로서 시국강연을 하고, 친일 전쟁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할 때는 이사를 맡고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할 때도 이사장을 맡았다. 경향잡지(現 경향신문)을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라는 기도문을 게재했는데, 이 기도문을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끝에 바치도록 각 본당에 명령했다. 이로 인해 노기남 주교의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기 책임 수행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중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그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런 신자를 요구한다. 우리 모든 이가 열심한 가톨릭자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에 이런 태도로써 나선다면 이보다 더 나은 종교보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든 이가 정성으로써 교회유지와 발전에 임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있을 리 없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커다란 책임을 실행함에 있어 본직은 별다른 새로운 실천사항을 지시치 않는다. 다만 무언복종과 일치협력, 이 두 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니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천 6백여 년 역사가 밟아오고 가톨릭 근 2천년 연륜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복종하라. 누구보다 당국에서 앞 뒤 정세와 그에 대하여 국민이 밟아야만 할 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복종하라.[14]
- 경성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오카모토 가네하루)의 취임사.
5.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
● 표시는 재반론 혹은 보충설명을 의미한다.
친일 전쟁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의 이사를 맡았던 것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은 "그 단체의 책임을 진 사람은 그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노기남 대주교가 대표가 되고, 신자들의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됐습니다.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볍습니다."라며 노기남 대주교가 당시 가졌던 상징성을 지적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으니 일제가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 이 외에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 행동이 고의적이지 않고 한국 천주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5] 언제나 조선총독부의 주장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저항도 했다는 것.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논란 중 신사참배의 경우, 단순히 그의 탓으로 돌리기 힘든 면도 있다.
그런데 당시 주일 교황대사[19] 가 일제와 천주교 사이의 마찰을 꺼린 데다가 교황청의 포교성성[20] 에서 신사참배를 애국적인 것에 한할 경우 천주교 신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밝히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 천주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메리놀 선교회 본부의 총장 입장에선 일본의 선교회는 신사 참배에 찬성을, 한국의 선교회가 신사 참배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자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히로시마 교구장인 로스(Ross)는 '''"신사에서 거행되는 예식들이 종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종교적인 것에의 참여가 아니라 민족적인 것에의 참여만 요구한다면 충분히 참여할 수 있다"'''는 신학적인 견해를 내며 신사참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결국 이러한 여건들이 합해져서 1936년 한국 천주교에서 신사참배는 용인되었다.[21][22]
즉 노기남 대주교가 신사참배를 거절하기엔 이미 윗선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끝이 났던 셈이다. 히로시마 교구장인 로스의 주장 등을 받아들여, 결국 '''1936년 한국 천주교는 공식적으로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락했다.'''[23]
이와 관련된 증언 중 하나로 노기남 대주교가 황해도 사리원 본당을 방문했을 당시의 이야기가 있다. 노기남 대주교는 양덕환[29] 안드레아 신부, 임충신 마티아 신부, 박우철[30] 바오로 신부와 함께 신사 참배를 해야 했다. 당시 한국인은 그저 경례만 해야 했는데, '''박우철 신부가 갑자기 일본인마냥 손뼉을 3번 치는 것이었다.''' 양덕환 신부와 임충신 신부는 애써 웃음을 참아야 했고, 노기남 대주교만 신사의 제관들이 이러한 상황을 불경죄로 볼까 불안했는데, '''정작 별 일이 없었다.''' 나중에 양 신부와 임 신부가 박 신부에게 능청스런 장난을 탓하며 "'허식의 정성'을 그만두라."고 하자, 이에 박 신부는 '''"누구는 좋아서 그렇게 했나. 우리가 그래야 저 치들이 의혹도 안 품고 우리 일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한 거야."'''라고 했다고.[31]
6. 정리
이런 사항들을 고려해볼 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일방적인 친일 주장은 다소 씁쓸하고 재고할 만한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회가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부분들이고. 그러나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 천주교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39] 어쨌건 간에 친일은 한 것은 맞기 때문에(…)[40]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천주교 계에서 반발하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의 대부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흑역사라고도 불리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이와 비슷한 인물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거론되지만, 그 쪽은 노기남 대주교에 비해 워낙 넘사벽이셔서 흑역사로 굳혀진 모양. 당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항목만 가도 친일 행적 및 논란이 태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부터 시작해서 노기남까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의 흑역사이며, 현대 한국 천주교의 이미지를 한방에 박살낼 수 있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교회 지도부의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