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노기남 대주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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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제3대 천주교 춘천교구장'''
'''제5대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노기남 바오로'''
'''盧基南''' | '''Paul Marie Kinam Ro'''
[image]
'''출생'''
1902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무진동[1]
'''선종'''
1984년 6월 25일(향년 82세)
'''국적'''
대한민국 [image]
'''재임기간'''
서울대교구
1942년 ~ 1967년
춘천교구
1945년 ~ 1966년[A]
대구대교구
1948년[A]
[image]
1. 소개
2. 생애
3. 정치 활동
4. 친일 행적
5.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
6. 정리

[image]
'''동상'''

1. 소개


최초의 한국인 가톨릭 주교. 세례명은 바오로. 본관은 장연(長淵).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무진동에서 출생. 부모가 모두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1917년 용산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2]에 입학한 뒤 대신학교 신학부[3]를 졸업하고, 1930년 10월 사제서품을 받아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활동하였다.
비록 사회문제에 대해서 그의 후임자인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에 비해 활발하게 대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 평신도들을 통해 당시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교구장직에서 은퇴한 후 나병 환자를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 당시 나병의 치료약이 발명되었지만 나병 환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매우 열악하였다. 노기남 대주교가 그의 여생을 나환자촌에서 보내려고 한 것은 보통 대인배가 아니고서는 생각하기 힘들었으리라.

2. 생애


12남매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15살 나이로 1917년 서울 용산예수성심신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1월 18일 신부로 서품, 명동성당 보좌신부가 되었다. 서울대교구장(당시에는 경성대목구)이던 1942년, 한국 가톨릭 사상 첫 '''한국인 주교'''로 서품되었다.[4][5]
1962년 대주교로 승품하였으며,[6] 1967년 3월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에 이어 우리나라와 이탈리아에서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10여 차례 바티칸 회의에 참석하였으며 육영수 추모사업회에도 참여하였다.[7]
그가 기고한 중앙일보 칼럼제64화 명동성당 - (1)「뾰족당집」에 의하면 명동성당은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 한다.

이러한 명동성당에서 나는 35년 동안을 살았다.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신부가 되어 명동성당에서 12년 남짓을 봉직해왔고, 그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주교 임명을 받아 25년간을 교구장으로서 일해온 곳도 명동성당 구내였다. 모두 37년 동안을 명동성당 구내에서 살아온 셈인데 그 37년은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시기인 것이고, 내 인생은 그곳에서 시작하여 그곳에서 은퇴를 맞이했으니 나에게 있어서는 명동성당이야말로 「내 인생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명동성당과 관련해서 하고싶은 이야기가 참으로 많다. 그 가운데는 이미 세상에 알려진 것도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은 남겨두어 다음 세대를 위한 증언으로 하고 싶은 마음이 큰 것이다.

칼럼에 의하면, 3.1 운동 당시 그를 가르쳤던 장면은 같이 만세를 부르고 싶어했으나 마찰을 우려한 학교 때문에 결국 못했지만 대신 3.1 운동은 하늘의 뜻이란 걸 가르쳐주기로 했다 한다.
1967년에 은퇴했지만, 1980년 기사에 의하면 나환자를 찾아다니면서 일을 많이 했다.

노 대주교가 현재 온 힘을 기울이고 있는 일은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오전리[8]

에 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9]에서 벌이고 있는 구라[10] 활동. 구라 사업은 이경재 알렉산데르[11] 신부가 실무를 맡고 있으나 노 대주교가 은퇴 전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을 때부터 관심을 쏟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 마을 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임은 물론 주안을 두고 돌보고 있다.

노기남 : 내가 살고 있는 곳의 맞은 편에 100명의 양성 환자가 살고 있어요. 또 마을 입구 정착촌에는 100여 가구, 4~500명이 자활의 꿈을 키워놓고 있지요. 이른바 천형(하늘의 벌)이라는 나병이지만, 그럴수록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위안입니다. (중략) 이같은 일 이외에 1주일에 평균 한 번씩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서울 마포구에 있는 국제한국연구원에 출근한다. 동경한국연구원장(원장 최서면)의 본부로 평소 아들처럼 여기는 최 원장을 돕는 일이라고 말했다.

1984년에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당시 교황을 알현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 해에 선종했다. 향년 82세. 경기도 용인시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5년 후인 2009년 선종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그의 곁에 안장되었다.

3. 정치 활동


[image]
'''김수환 추기경과 찍은 사진''' 가운데 있는 사람은 전前 천주교 광주대교구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빅토리노 대주교[12][13]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담에 반발, 강력한 반탁운동을 추진하자 12월 30일 결성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당시 신문을 찾아보면 굉장히 낯뜨거울 정도로 노골적으로 이승만을 지지했다. 또한 신자들에게 가톨릭 교회에 도움이 될 후보 = 즉, 이승만 및 우파계열 당의 후보를 찍을 것을 권고했다.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시절 은사이기도 한 장면을 찾아 정계입문을 권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과도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장면을 비롯한 가톨릭계 정치인들이 야당 성향을 띠게 되자 둘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승만은 노기남에 대해 노골적으로 '정치 주교'라고 부름으로써 반감을 드러내 보였다. 이승만과 노기남 사이의 갈등은 경향신문 폐간 사건으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노기남은 천주교인이였던 장면의 든든한 후원자였지만, 박정희 정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5.16 군사 쿠데타 직후 쿠데타를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는 커녕 이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군사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힘을 썼다. 노기남 대주교는 사회 사업을 통해서 안면을 트게 된 육영수 여사와 가톨릭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박근혜를 통해 박정희 정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수환 추기경은 1971년 10월 유신의 시작인 비상사태선언 이후 관계가 악화되었지만, 노기남 대주교와 박정희, 전두환과의 관계는 매우 원만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범인 은닉사건에 연루된 성직자를 비난하는 인터뷰를 함으로서 권력과 유착된 성직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비난도 받았다.

4. 친일 행적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기 책임 수행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중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그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런 신자를 요구한다. 우리 모든 이가 열심한 가톨릭자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에 이런 태도로써 나선다면 이보다 더 나은 종교보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든 이가 정성으로써 교회유지와 발전에 임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있을 리 없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커다란 책임을 실행함에 있어 본직은 별다른 새로운 실천사항을 지시치 않는다. 다만 무언복종과 일치협력, 이 두 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니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천 6백여 년 역사가 밟아오고 가톨릭 근 2천년 연륜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복종하라. 누구보다 당국에서 앞 뒤 정세와 그에 대하여 국민이 밟아야만 할 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복종하라.[14]

- 경성교구장 노기남(盧基南, 오카모토 가네하루)의 취임사.

사실상 한국 가톨릭흑역사. 김수환 추기경은 당시에 본인을 포함한 누구나 살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고, 한 종교 단체의 장이 단체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 가톨릭 발전에 공헌을 많이 하고, 당시 일본인 대주교밖에 없던 한국(조선)에서 서울에서나마 한국인 대주교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다행이라고 쉴드를 쳐줬지만, 이 사람은 '''아예 주교가 되기 전부터 친일 행적이 명백하다.''' 명동성당 보좌신부 시절부터 '황군에 대한 무운장구 및 국위선양 기도회’에 참석해 고문신부로서 시국강연을 하고, 친일 전쟁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할 때는 이사를 맡고 1940년 11월 국민총력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으로 개편할 때도 이사장을 맡았다. 경향잡지(現 경향신문)을 통해 ‘대동아전쟁 기구’라는 기도문을 게재했는데, 이 기도문을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각 가정에서는 아침기도나 저녁기도 끝에 바치도록 각 본당에 명령했다. 이로 인해 노기남 주교의 친일 논란이 불거졌다.

5. 친일행적에 대한 논란


● 표시는 재반론 혹은 보충설명을 의미한다.
친일 전쟁동원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의 이사를 맡았던 것에 대해, 김수환 추기경"그 단체의 책임을 진 사람은 그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노기남 대주교가 대표가 되고, 신자들의 대표로는 장면 박사가 됐습니다. 단순히 그런 것을 보고 친일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너무나 가볍습니다."라며 노기남 대주교가 당시 가졌던 상징성을 지적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였으니 일제가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 이 외에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 행동이 고의적이지 않고 한국 천주교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15] 언제나 조선총독부의 주장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저항도 했다는 것. 노기남 대주교의 친일논란 중 신사참배의 경우, 단순히 그의 탓으로 돌리기 힘든 면도 있다.
● 이 부분에 대해서 반박하자면 '최초의 한국 출신' 이라는 타이틀은 비단 노기남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모두 다 그와 같은 행보를 걸은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개신교에서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최초의 개신교 한국인 목사' 7인[16] 중 하나라는 타이틀을 가진 이기풍 목사의 경우 1938년에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호남 지역의 교회들을 결속하던 중 붙잡혔고 광주형무소로 보내지기 직전에 너무 심한 고문에 의거한 병보석 판정을 받았으나 결국 그 후유증으로 인해 4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물론 여타 목사 중 하나와 대주교장의 위치의 대-소 차이는 존재할 수 있으나 적어도 한 쪽은 저항, 또 다른 한 쪽은 친일에 동조함으로써 후대의 평가가 달라진 것이다.
1932년 『천주교요리』 등을 살펴보면 '''"신사참배에 대해 이단이 아니며 애국적인 목적에 한할 경우 가능하다."'''고 신사참배에 대한 상황을 결정지어 버렸다. 상황을 살펴보자면 애시당초 한국 천주교는 당초 신사참배에 대해 크게 반발하는 입장이었다. 1932년 메리놀회 선교사들은 분명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1932년 9월 20일부터 진행된 열흘 동안의 한국 천주교의 5개 교구 교리위원들의 교리문답회의에서도 논의 도중 신사참배는 용인되지 않았다. 베네딕토회의 연길교구장 역시 이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하면서 당시 신사참배에 동조해야 할 필요성을 밝힌 주일교황사절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원산교구 역시 판단을 유보했고, 대구대교구장인 프랑스인 드망즈(Demange) 주교는 신사참배가 종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판단했다.[17][18]
그런데 당시 주일 교황대사[19]가 일제와 천주교 사이의 마찰을 꺼린 데다가 교황청의 포교성성[20]에서 신사참배를 애국적인 것에 한할 경우 천주교 신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밝히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당시 한국 천주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선교회에 속해 있었는데, 메리놀 선교회 본부의 총장 입장에선 일본의 선교회는 신사 참배에 찬성을, 한국의 선교회가 신사 참배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자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이와 별도로 히로시마 교구장인 로스(Ross)는 '''"신사에서 거행되는 예식들이 종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종교적인 것에의 참여가 아니라 민족적인 것에의 참여만 요구한다면 충분히 참여할 수 있다"'''는 신학적인 견해를 내며 신사참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결국 이러한 여건들이 합해져서 1936년 한국 천주교에서 신사참배는 용인되었다.[21][22]
즉 노기남 대주교가 신사참배를 거절하기엔 이미 윗선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끝이 났던 셈이다. 히로시마 교구장인 로스의 주장 등을 받아들여, 결국 '''1936년 한국 천주교는 공식적으로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락했다.'''[23]
● 위에서 한국과 일본 교구의 예를 들며 길게 써놨지만 사실상 당시 교황이던 비오 11세[24]가 1936년 5월 26일 훈령을 통해 신사참배를 용인했고 그것이 포교성성을 통해 전달됨으로서 주춤하던 신사참배가 탄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시국강연이나 그가 지방 순시를 다니며 미사를 다닐 때 기미가요 등을 읊었던 사항들에 대해서도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해봐야 한다. 실제로 노 대주교가 지방 순시를 다닐 적에는 언제나 '''최소한 1달 전에는 총독부 치안국에 일정을 보고'''하고, 치안국은 이 사실을 일선 경찰서에 알려 노 대주교의 일정에 언제나 '''고등계 형사가 있어서''' 감시를 하였다. 따라서 노 대주교는 무사히 미사를 마치기 위해서는 기미가요를 부른다거나, 지방의 신사를 참배하거나, 해당 지역의 높으신 분들을 찾아뵈는 등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절차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 여간 수난을 당했던 모양.[25] 약간 아이러니한 점은 노 대주교는 1917년 9월,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예과 보통과에 입학해 당시 일본어와 영어를 가르치던 장면에게서 언어를 배웠지만[26] 회화에 능통하지 못해 부자연스럽게 구사하는 등 '''일본어를 비교적 잘 못해서''' 신자들에게 훈화를 하거나 혹은 계성보통학교[27] 운영을 맡았을 때 그냥 조선어를 썼다고 한다. 이에 대해 노 대주교는 일본어 회화도 어려웠지만 '''"일본말을 공공연히 쓰기 싫은 생리"'''가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28]
이와 관련된 증언 중 하나로 노기남 대주교가 황해도 사리원 본당을 방문했을 당시의 이야기가 있다. 노기남 대주교는 양덕환[29] 안드레아 신부, 임충신 마티아 신부, 박우철[30] 바오로 신부와 함께 신사 참배를 해야 했다. 당시 한국인은 그저 경례만 해야 했는데, '''박우철 신부가 갑자기 일본인마냥 손뼉을 3번 치는 것이었다.''' 양덕환 신부와 임충신 신부는 애써 웃음을 참아야 했고, 노기남 대주교만 신사의 제관들이 이러한 상황을 불경죄로 볼까 불안했는데, '''정작 별 일이 없었다.''' 나중에 양 신부와 임 신부가 박 신부에게 능청스런 장난을 탓하며 "'허식의 정성'을 그만두라."고 하자, 이에 박 신부는 '''"누구는 좋아서 그렇게 했나. 우리가 그래야 저 치들이 의혹도 안 품고 우리 일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한 거야."'''라고 했다고.[31]
● 노기남 대주교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노기남 대주교가 '일제의 감시'를 받았기 때문에 친일행각을 했다고 주장[32]하고 있으며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천주교 잡지이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인 경향잡지를 보면 그가 꾸준히 친일적인 논설을 냈음을 알 수 있다.[33] 더군다나 그가 기고를 시작한 것이 그가 천주교 경성(서울) 교구장에 임명된 1942년 1월[34]부터라는 점이다. 물론 노기남 본인은 일제의 감시를 받아서 했다고 토로하고 한국 천주교 또한 그 입장을 고수하지만 그것은 비단 천주교만의 문제가 아니며 개신교[35], 불교[36], 유교[37] 할 것 없이 친일에 동참했으며 다들 한국 천주교에서 내놓는 비슷한 변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엄연히 친일파 혹은 친일가담자로 분류되며 단지 '외압을 받았다'라는 것으로 노기남 대주교만이 면벌부를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천주교회사 연구자 중에서도 노기남에 대해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역사에 지워질 수 없고 비판적인 평가를 면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윤선자, 「한국 천주교회의 통치권 이동」,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인적 지배와 그리스도교계의 대응, 집문당, 2005, 108p.).
또한 언어에 있어서도 위에서 언급되어 있듯이 당시 한국은 식민지 상태인데다 천주교회의 한국 교황대사를 주일 교황대사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기남이 일본어에 능통하지 못했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민족말살통치기가 아닌 문화 통치 기간이라 한국어를 쓴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노기남의 친일행적이 더더욱 명백해진다. 저러한 친일적인 공개 발언을 민중들이 잘 알지 못하는 라틴어[38]일본어가 아닌 한국 민중들에게 파급력이 있는 한국어로 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 지는 것이다. 각 나라의 언어로 미사가 집전되도록 허가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부터다. 차라리 노기남이 라틴어로 친일적인 강론을 했으면 '그래도 민중들이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핑계라도 댈 수 있겠지만 엄연히 한국어로 전파했기 때문에 빼도박도 못하는 친일행각이 되는 것이다.

6. 정리


이런 사항들을 고려해볼 때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일방적인 친일 주장은 다소 씁쓸하고 재고할 만한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회가 지적하는 것도 이러한 부분들이고. 그러나 있었던 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국 천주교를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39] 어쨌건 간에 친일은 한 것은 맞기 때문에(…)[40] 결국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고 말았다. 이에 대해 천주교 계에서 반발하기도 했다. 한국 천주교대부라고 불리지만, 동시에 흑역사라고도 불리니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이와 비슷한 인물로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가 거론되지만, 그 쪽은 노기남 대주교에 비해 워낙 넘사벽이셔서 흑역사로 굳혀진 모양. 당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항목만 가도 친일 행적 및 논란이 태반.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부터 시작해서 노기남까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의 흑역사이며, 현대 한국 천주교의 이미지를 한방에 박살낼 수 있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인 셈이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교회 지도부의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하였다.#

[1]북한 평양직할시 력포구역 용산리.[A] A B 서울대교구장 겸직[2] 가톨릭 신부를 양성하는 신학교 중, 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신학교를 소신학교라 한다. 한국 가톨릭에도 소신학교인 성신중학교성신고등학교가 있었으나, 성신중에 이어 성신고도 1983년 폐교되었다(성신중고의 시설은 동성중학교ㆍ동성고등학교에 흡수됨). 대신 교구마다 예비 신학생 모임을 만들어, 신부가 되려고 하는 남학생들 및 남자 청년들을 관리한다. 2010년대 들어 학교법인 가톨릭학원 소속의 동성고등학교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3] 대학ㆍ대학원 과정의 신학교를 대신학교라 한다. 신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하는데,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을 보면 중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한 분들이 많다. 현재 한국 가톨릭에는 총 7개의 대신학교가 있다(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수원가톨릭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전가톨릭대학교, 광주가톨릭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4] 당시 일본 식민 당국에서는 경성대목구장에 일본인을 앉히기 위해 여러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이에 노기남 주교의 전임자였던 아드리앙 조셉 라리보 주교는 오기선 요셉 신부 등 한국인 사제를 도쿄에 있는 교황대사에게 보내는 등 역공작을 펼쳐, 노기남 신부가 경성대목구장에 오를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5] 노기남 대주교의 주교 서품식 때 복사를 섰던 어린이 가운데 하나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었다. 노기남 대주교는 정진석 추기경이 받은 세례성사, 견진성사, 신품성사의 집전자였다.[6] 1962년 한국 가톨릭에 교계제도가 설정됨에 따라 서울대목구가 천주교 서울대교구로 개편되었다. 그에 따라 노기남 주교는 대주교가 되었다.[7] 육영수 여사는 노기남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과 각별한 사이였다. 박근혜에게 세례성사를 준 사람이 노기남 대주교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불교 수계도 받고, 개신교 신학대학원도 다니고, 결국 믿은 건 사이비 종교이니, 제대로 된 신자라 볼 수 없다.[8] 현재의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9] 원래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지금의 광명시)에 출범했으나 1951년에 의왕으로 이전했다.[10] 구라 문서의 1번 항목 참조.[11] 천주교 수원교구 소속. 1926-1998.[12] 사진 속의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노 대주교가 착용하고 있는 의복은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착용하지 않는 의전 망토인 페라이올로라 한다.[13] 노기남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한 후 윤공희 대주교(당시 수원교구장)가 1년간 서울대교구 임시관리자로 봉직한 일이 있었다. 당시 서울대교구의 부채가 너무 많아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후임자인 김수환 추기경이 윤 대주교의 노력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였다.[14] 무언복종(無言服從)이 무려 3번이나 강조되었다. 소위 하느님을 섬긴다는 이가 신도들에게 하느님이 아닌 일본 제국에 '아무 말 말고 시키는데로 따르라'는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한 것이다. 설령 의도적인 신성모독이 아니라고 해도 절대 복종의 대상으로서 하느님과 일본 제국을 동일시 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다.[15] 이장우, 「식민지시대 말기 조선 천주교회와 총독부의 종교 통제 - 노기남 주교의 대응을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제35집』,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16] 양전백, 서경조, 방기창, 송인서,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17] 尹善子, 「日本 軍國主義 宗敎政策과 朝鮮 天主敎會의 神社參拜」, 『韓國史硏究』 98, 한국사연구회, 1997 참고[18] 참고로 드망즈 주교는 대구대교구 설정 25주년 겸 한일합방 기념 25주년 행사에서 '천주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합법적인 정부에게 제4계의 의무를 알려주었으며 조선인들의 의중이 어떻든 간에 조선총독부는 합법적이다.' 이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19] 한국은 당시 식민지였기 때문에 주한 교황대사가 없고 주일 교황대사의 영향력 하에 속해 있었다.[20] 현재의 인류복음화성의 전신[21] 다만 어디까지나 '''"애국적인 목적'''"에서이며, 종교적인 목적일 경우 신사참배는 금지되었다.[22] 첨언하자면, 가톨릭이 신사참배를 허용한 걸 단순히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나 일제 눈치보기로 취급하기도 어렵다. 왜냐하면 이건 '동양식 제사의 허용 문제'도 엮여 있기 때문이다. 동양식 제사 역시도 신사참배와 같은 원리로 '종교성이 없을 시' 가톨릭 신자 역시도 가능한데, 신사참배 허용과 같은 시기에 허용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허용 논란은 명나라 시절부터 가톨릭 동양 선교의 최대 떡밥 중 하나였다.[23] 김수태, 「1930년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 『교회사연구』 29,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27p[24] 오늘날 바티칸 시국의 토대를 닦은 인물로서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라테란 조약을 맺어 과거 교황령을 포기하는 대신 바티칸의 주권독립을 성취했다.[25] 한 번은 미사 시작 전인데도 형사가 오지 않아 이런 절차를 약식으로 진행한 뒤 그냥 미사를 시작했는데, 뒤늦게 온 형사가 미사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으나 들은 척도 안 했다. 그 결과 형사가 노 대주교를 연행해 해당 경찰서의 경찰서장에게서 충남 순시를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가라는 둥의 온갖 욕설을 당했다고.[26] 출처: 장면 외교의 명․암 (1946-1952) - 홍순호(이화여대 교수,․국제정치학) 링크 참조[27] 現 계성초등학교. 오랫동안 명동성당 뒷편에 있다가, 2006년 서초구 반포동에 지은 새 건물로 이사했다. 옛 건물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청 별관으로 쓰이고 있다.[28] 노기남, 『나의 회상록』, 가톨릭출판사, 1969, 213~214p. ; 노기남, 『당신의 뜻대로』, 휘문출판사, 1978, 89~97p.[29] "양주선"이라고도 함.[30] 의친왕에게 세례성사를 준 신부이다.[31] 노기남, 앞의 책, 1969, 273~274p. ; 노기남, 앞의 책, 1978, 147p.[32] 이 부분에 대해서 '역사 해석에는 절제와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당시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당시엔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에 가까운 의견이다.참고[33] 현대어로 된 링크가 연결되지 않아서 읽기에 불편한 부분이 존재한다. 참고할 것.[34] 15페이지의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이사장 저)' 부분을 참조. 참고로 경성교구연맹이사장이 노기남이다.[35] 일본군을 위한 기도회부터 모금활동, 학도병 지원 독려운동 등 다채로운 활동을 벌였다.[36] 이 쪽은 조선총독부 제령(制令) 제7호 「사찰령(寺刹令)」에 의해 통폐합 된 후 꼭두각시가 되었고 중일전쟁이 터지자 시국극복 무운장구 기원제를 거하게 열었다.[37] 일제에 의해 종교의 영역에서 쫓겨나 사회교육기관으로 분류되었는데 대동학회, 유도진흥회 등의 유림단체가 친일행각을 벌였다.[38] 로마 교황의 훈령 등은 대개 라틴어로 작성이 된 후 각 국가 교구의 언어로 번역되어 전파된다.[39] 그런데 일부 연구에 따르면 오히려 한국 천주교가 친일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신자들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윤선자의 연구 및 천주교 관련 서적을 참고할 것. 그러나 윤선자 연구 역시 논리적 허점이 있다는 지적들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일방적, 감정적 주장은 지양해야 한다.[40]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 시각 교회가 풍비박산 나던 분들도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