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요시나리

 

森可成
1523~1570년 10월 19일

1. 소개


모리 요시나리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그의 아들 모리 란마루 역시 노부나가의 측근이었다.
창을 굉장히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 때문에 '산자'라는 이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노부나가가 별볼일없는 청년 시절이었을 때부터 오다 가문을 섬긴 중신이다. 그 시바타 카츠이에보다도 선배일 정도. 그래서 무용을 발휘하는 것 외에도 가문의 대소사에 여러 가지로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2. 생애


모리 요시유키의 아들로 오와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미노 국에서 토키 가를 섬겼는데, 이후 사이토 도산이 토키 가를 패배시키고 멸하자 오다 가를 섬기게 된다. 오다 가에 들어간 이후 노부나가의 측근이 되어 충성을 바친다.
이 당시에 노부나가는 뭐 하나 부각되는 것이 없는 인물이었음에도 모리 요시나리는 노부나가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섬길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노부나가가 오다 가를 계승하자, 요시나리는 오와리 통일에 큰 공을 세우고 키요스 성에서 오다 노부토모를 토벌한다. 이후 미노에서 정변이 일어나자, 사이토 도산을 돕기 위해 출정, 그를 구원했다. 같은 시기에 노부나가의 동생 노부유키가 배신하자, 이노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로도 노부나가의 굵직굵직한 싸움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우키노 전투, 오케하자마 전투에도 참여했다. 노부나가는 요시나리의 공을 기려 카네야마의 성주로 삼는다. 노부나가가 상경할 때에는 후배 시바타 카츠이에와 함께 선봉으로 출진하였다. 아네가와 전투에서도 참전하여, 이소노 카즈마사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노부나가를 향해 돌격해오자 그를 저지했다.
노부나가가 서쪽을 정벌하러 떠났을 때 요시나리는 우사야마 성에 남아 있었는데, 이 곳은 쿄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노부나가 포위가 결성되고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의 연합군이 쿄를 향해 진격하자 사카모토의 길목을 막고 버틴다. 이때 천 명의 군사로 싸워 3만 대군을 물러나게 하여 연합군을 주춤하게 했다. 연합군이 다시 침공해오자 마찬가지로 나가서 맞아싸웠다.[1] 결국 연합군의 총공세에 패배하여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하루와 함께 음력 9월 20일에 전사했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8세였다.
노부나가는 요시나리의 죽음을 알고는 매우 슬퍼했다고 한다. 이후에 아자이 가와 아사쿠라 가에 혹독하게 보복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당시 요시나리가 맞아 싸웠던 연합군에 히에이잔 승병들이 참전했다는 것을 알고는 히에이잔을 불태워버렸다고 한다.[2]

3. 여담


정실부인으로 에이를 두고 있었고,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자식으로 6남 3녀를 보았고, 이 중에 모리 나가요시, 모리 나리토시도 있다.
애용한 창은 날의 모양이 십자 모양이었고 그래서 '쥬몬지'라는 별명도 있었다. 평범한 창은 한 번 찌르고 나면 당겨서 가져오는 동안 공격력이 떨어지는데, 십자창은 당기면서도 벨 수 있었으므로 유용했다고 전해진다.
[image]
[image]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1] 요시나리의 목적은 진군을 저지하는 것인데, 우사야마 성 안에서 농성하는 것만으로는 진군을 막을 수 없었다.[2] 히에이잔은 영험한 산으로 익히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래서 노부나가는 한 번 엔랴쿠지에 사람을 보내 "우리편을 들거나 아니면 중립이라도 지켜라" 하고 언질을 줬으나 엔랴쿠지에서는 무시했다. 그 결과는 초대형 산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