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 노부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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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
[image]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화[1]
'''출생'''
1534년 6월 23일
오와리(尾張) 쇼바타 성(勝幡城)
'''사망'''
1582년 6월 21일 (49세)
야마시로(山城) 혼노지(本能寺)
'''국적'''
[image] 일본
'''신체'''
170cm
1. 개요
2. 행적
2.1. 탄생에서 가독계승까지
2.2. 오와리 통일
2.2.1. 오케하자마 전투
2.3. 미노 진공
2.4. 키나이 진공: 상락
2.4.1. 히사히데와의 연락
2.4.2. 미요시 가문과의 전쟁
2.4.3. 이세 진공
2.5.1. 아사쿠라와 아자이의 동향
2.5.2. 미요시의 동향
2.5.3. 쇼군의 거병
2.6. 키나이 평정
2.6.1. 본격적인 이시야마 합전 개막
2.6.2. 쵸소카베 가문과의 접촉
2.7. 동방 진공
2.7.2. 카츠이에의 호쿠리쿠 원정
2.8. 서방 진공
2.8.1. 히데요시의 주고쿠 원정
2.8.2. 시코쿠 원정 계획
2.9. 혼노지
2.10. 이후의 이야기
3. 능력
4. 오다 정권
4.1. 본거지 오와리
4.2. 키나이 일대
4.3. 시코쿠 주변
4.4. 덴노와의 관계
4.5. 종교 정책
4.6. 해외에 대한 관점
4.7. 내정
5. 가족관계
6. 여담 및 일화들
7. 참고 서적
8. 대중문화에서


1. 개요


일본 전국시대다이묘(大名). 오와리 오다 가문의 당주. 무로마치 막부를 종결시키고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남자이기에, 이 남자를 빼고 전국 시대의 역사를 논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이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한복판에 서있었던 인간이며, 당대에 많은 파격을 불러왔고 혼노지의 변으로 인해 비극적으로 죽은 점 등으로 인해 후대의 작가들에게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일반인에게도 인기가 매우 좋다. 한국에서 악명높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주군이기도 했다.

2. 행적



2.1. 탄생에서 가독계승까지


1534년 음력 5월 12일.[2] 오와리[3]의 다이묘 오다 노부히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2살 때 나고야 성(名古野城)[4]의 성주가 되었다. 아명은 킷포시(吉法師). 참고로 노부나가의 집안은 오다 단조노츄(弾正忠)로, 오와리 지방의 슈고(尾張守護)인 시바(斯波) 가문의 신하이며 오와리의 하 4군의 슈고다이(守護代)인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또는 키요스 오다 가문)의 가신인 키요스 삼 봉행의 한 가문이었다. 노부나가가 탄생했을 즈음의 오다 가문은 오와리 슈고인 시바 가를 괴뢰로 만들고 정권을 잡은 센고쿠 다이묘였으며, 통상적으로 협조를 얻을 명분이 부족한 하극상 세력이 그러하듯이 내부 분열로 인해 아버지 노부히데가 속한 오다 단조노츄 가,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 그리고 오와리의 상 4군의 슈고다이인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또는 이와쿠라 오다 가문) 등 3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1548년에는 오다 노부히데와 사이토 도산 간의 정략결혼에 합의, 그의 딸 노히메와 혼례를 올린다.

2.2. 오와리 통일


부친이 사망하자 평소 노부나가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하야시 히데사다, 하야시 미치토모, 시바타 카츠이에는 노부나가의 친동생 오다 노부유키를 옹립하려 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장례식 때 노부나가는 아버지의 시신에 향을 한사발 뿌리고 그대로 불을 붙여 화장을 시켜버렸는데 당시 화장보단 매장을 했던 일본 문화권 입장에선 경악할 일이 었다. 이 사건 때문에 가신 중 한명은 할복을 하였다. 다만 이건 전통적인것을 꺼려하는 오다의 성향이기도 하고 이 부분이 그의 세력을 확장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아투튼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없애기 위해 노부나가는 사쿠마 노부모리, 모리 요시나리 등을 끌어들여 대립한다.
당시 어린 노부나가는 아직 위험했고 친족들과 동네 패싸움급 작은 싸움을 하면서 실력을 기른다. 당시 오다 가문의 내분으로 1500명의 군세를 이끌고 3000명과 이겨내기도 하면서 친척들과 싸우면서 실력을 길러 나간다.
1556년 4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장남인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싸움으로 사망한다. 노부유키 파는 노부나가가 도산의 지지를 잃게 된 것을 호기로 여겨 같은 해 8월 24일 군사를 일으켜 노부나가와 전투를 벌이지만 패배, 스에모리 성(末森城)에 틀어박혀 있었으나 어머니 도타 고젠의 중재로 노부유키와 카츠이에 등을 사면한다.
1557년 오와리의 통치자였던 오다 노부토모[5]의 지지로 노부유키가 다시금 모반을 꾀하나 카츠이에의 밀고로 모반이 발각되어 노부유키는 살해당한다. 이후 오와리의 명목상 최고 통치자로서 노부토모와 일을 같이 하던 시바 요시무네(斯波義統)가 노부토모의 음모를 노부나가에게 밀고하였고, 분노한 노부토모가 시바 요시무네를 살해하자 노부나가가 주가 살해의 죄를 물어 다시 노부토모를 살해하여 오다 야마토노카미 가문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1559년에는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의 거성 이와쿠라 성을 함락해 오다 이세노카미 가문도 멸망시켰다. 이로서 방계 혈통이던 노부나가가 오다 가의 당주가 되었다.[6]

2.2.1. 오케하자마 전투


가문의 주인이 된 후 스루가, 미카와, 토토우미[7] 토카이 3국의 태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와리를 침공한다. 당시 노부나가는 삼천의 군대를 이끌고 오케하자마 전투(桶狭間)에서 이마가와 요시모토군을 기습하여 격파, 결국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을 벤다.

2.3. 미노 진공


이후에 처조카 사이토 타츠오키[8] 사이토 가문을 격파, 미노를 수중에 넣고, 당시 교토로 가는 통로인 오우미의 중견 영주였던 아자이 카타마사에게 여동생 오이치를 주었다.

2.4. 키나이 진공: 상락


한 편, 노부나가가 미노에서 사투를 벌일 당시, 키나이에선 미요시 요시츠구에 의해 1565년 5월에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사망하여 무로마치 막부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났다.[9]에이로쿠 정변에서 요시테루의 유력 친족들은 절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지만, 야마토에 기거하고 있던 요시테루의 동생들 중 한 명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는 것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야마토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은 요시아키는 아사쿠라 가문과의 교섭을 통해 야마토를 탈출, 이후 노부나가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10]
노부나가는 아직 미노 전체를 수중에 넣은 상태가 아님에도 요시아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고, 미노를 평정하게 되자 천하포무(天下布武)의 기치를 걸며, 다음 목표를 기나이로 정하게 되었다. 1568년 7월 즈음부터 요시아키와 함께 상락의 채비를 시작한 노부나가는 '''9월 7일, 군사를 이끌고 미노의 기후현에서 출발했다'''. 이에 노부나가의 출병 소식을 들은 기나이의 여러 세력들은 노부나가에게 저항하기 위해, 지금껏 자신들을 지원해준 미요시 가문의 편에 붙어 군사활동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한다. 미요시 가문이 강한 영향력을 뻗혔던 사카이는 해자를 파고 망루를 세워 군사방어 시설을 구축했으며[11], 에고슈(会合衆) 또한 이즈미의 동맹세력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방비를 구축해가는 상태였던 것이다.[12]
하지만 자그마치 동월 25일에 반 노부나가 세력에 속한 롯카쿠 요시카타오우미 칸논지 성을 무력으로 통과, 26일부터 다시 진군을 시작해 미요시 산닌슈 세력의 중요한 거점이 속하는 야마시로셋츠 일대에 도달하는 것에 성공했다. 야마시로 쇼류지 성에 있던 이와나리 토모미치는 밀려오는 노부나가의 군세와 맞서 싸웠으나, 열세가 계속되자 29일, 노부나가에게 항복하고야 말았다.[13] 동쪽의 중요 거점이 떨어졌다는 보고를 들은 미요시 가문의 기둥격인 미요시 나가야스는 싸우기 보단 후퇴를 결정, 셋츠 아쿠타가와야마 성에서 칸레이 격에 위치했던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데리고 아와로 도망쳤다. 심지어 노부나가의 군세는 미요시 가문에 의해 새로 옹립된 쇼군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거처하고, 미요시 가문에 의해 보호되던 지역인 톤다 후몬지(普門寺) 또한 공격하는 기염을 토하는 지경에 달했다.[14] 결국 요시히데 또한 아와로 물러났으나, 본인은 10월 20일에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15]
미요시 세력을 한번에 물리친 노부나가는 30일날 그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던 아쿠타가와야마 성에 입성해, 잠시동안 자신의 거성으로 삼았다. 상락 이후에 노부나가에 대한 축하 및 인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 것을 생각해보면 미요시 가문의 옛 거성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는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 노부나가의 아쿠타가와야마 성 체재는 10월 14일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후임은 와다 코레마사에게 맡겨졌다.[16]
이렇게 노부나가는 결국 키나이의 세력을 물리치고 교토에의 입성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노부나가는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게 됐지만, 원래의 명분대로 14대 쇼군 요시히데를 부정하고 요시아키를 새로운 15대 쇼군으로 세워 무로마치 막부의 존속에 진력하게 된다. 또한 이번 키나이 원정에서 활약한 키나이의 세력들에게도 각자 보상을 분배해주었다. 요시츠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히사히데에게는 야마토를, 하타케야마 타카마사에게는 카와치의 반을, 이타미 치카오키, 이케다 카츠마사, 코레마사 세 명에게 셋츠의 치교권을 부여해 키나이의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에 머물도록 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17]

2.4.1. 히사히데와의 연락


에이로쿠의 변 이후 키나이에서 어찌저찌 통치를 해나가던 미요시 가문이었지만, 1565년 10월에 미요시 산닌슈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내분이 터지자, 가문이 두 쪽나게 된다. 히사히데는 이후 명확한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계속 밀려나는 모양새였으며, 당주 미요시 요시츠구가 자신의 편으로 전향했음에도 좀처럼 세력을 회복할 수 없었다. 이에 요시츠구와 히사히데는 자신들과 인연이 있는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하고 상락의 준비를 보이는 노부나가에게 연락을 취하게 된다.
1567년 8월부터 이들은 통교를 시작한다.[18]

2.4.2. 미요시 가문과의 전쟁


노부나가에 의해 키나이는 평정된 듯이 보였지만, 아시카가 요시아키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미요시 가문의 반공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곧 아직 키나이가 완전히 진정된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 요시아키는 모리 모토나리오토모 소린의 사이, 다케다 신겐우에스기 겐신의 사이를 조율하며, 분쟁 상태에 놓인 열도의 다이묘들을 통합시키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화친의 고나이쇼에 "아슈의 흉도들을 퇴치해줄 것"이라는 내용의 문장을 활용하고 있으니, 요시아키가 당시에 염두해두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다.[19]
과연 요시아키의 걱정은 딱 맞아 떨어져, 키나이는 미요시 가문을 필두로한 여러 반 노부나가 세력과의 다툼에 시달리게 된다. 1568년 12월 28일에 산닌슈 세력은 키나이에 상륙해 요시츠구의 성들을 떨어트리며, 1569년 1월 5일에 요시아키가 거처하는 혼코쿠지(本圀寺)를 습격했다. 기세에 밀리게 된 요시아키였지만, 요시츠구 등의 다이묘들이 혼코쿠지 습격 소식을 듣고 바로 지원군으로 달려온데다,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가 10일날 교토로 복귀했기에 산닌슈의 세력은 마땅한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아와로 다시 철퇴하게 되었다.[20] 이렇게 미요시 가문을 물리친 노부나가는, 그들에게 병량미를 제공해주고 같은 편에 섰던 야와타(八幡)를 공격하거나[21] 아마가사키에 불을 놓는 등[22], 후환을 제거해나갔다.
1570년이 되자 이번엔 노부나가가 셋츠의 치교권을 준 이케타 가문에서 6월 19일에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 이케다 카츠마사의 일족 이케다 토모마사아라키 무라시게, 미요시 나가야스와 협력해서 카츠마사를 이케다 성에서 추방시킨 것이다.[23] 특히 후세의 군키모노가타리에선 토모마사의 배반에 나가야스가 끼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읊고 있으니, 미요시 가문은 기나이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렸어도 노부나가와 싸워 옛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필사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2.4.3. 이세 진공


1569년 8월, 노부나가는 이세의 키타바타케 토모노리[24]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 이전, 즉 상락 이전에도 노부나가는 오와리 침공의 경로가 될 수 있는 이세에 대한 제압 작전을 실시하였지만, 그 때 주로 상대하였던 것은 북이세의 칸베 씨와 나가노 씨였다. 그 칸베 씨는 노부나가의 삼남 오다 노부타카를 후계자로 삼기로 하며 노부나가에게 굴복한 상태였고, 나가노 씨 역시 노부나가에게 축출되었기에, 키타바타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할 때 북이세는 오다의 영역이었다. 이 오다의 북이세 장악, 특히 키타바타케 가의 분가가 되어 있었던 나가노 가의 축출이 키타바타케의 반발을 불렀고, 양자의 적대를 심화시켜, 노부나가의 대대적 이세 침공을 불러왔다고 할 수 있다.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노부나가는 키타바타케의 거성이었던 오카와치 성을 포위하고 키타바타케 군과 교전하였다.

2.5. 노부나가 포위망


키나이를 손에 넣게 된 노부나가는 곧 도시를 보호하고 장악하기 위해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사카이에 대관을 놓거나 아마가사키의 소츄(惣中)를 동원하여 죠온지(長遠寺) 등을 조성해나간 것이 대표적이다. 세력 관계에도 관심을 쏟아, 동세토내해를 끼고 대립하는 미요시 가문과 그들의 지원을 받는 혼간지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아와지에서 수군을 이끄는 아타기 진타로에게 소령을 안도해주며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25]

2.5.1. 아사쿠라와 아자이의 동향


1570년 4월이 되자 에치젠아사쿠라 요시카게롯카쿠 요시카타가 본격적으로 거병하여 노부나가와 적대하기 시작하였다. 노부나가는 동맹 관계의 도쿠가와를 끌어들이는 한편, 롯카쿠 세력을 격파하고 사사건건 대립 했던 에치젠아사쿠라 가문을 멸하기 위해서 에치젠에 출병하지만, 아사쿠라 가와 동맹이었던 아자이 가의 나가마사가 노부나가를 배신하게 된다(가네가사키 전투). 이후 아자이, 아사쿠라 동맹과 오다, 도쿠가와 동맹 사이에 큰 교전은 그 해 6월에 벌어졌다. 두 세력은 오우미 아네가와(姉川)에서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의 승자는 노부나가였고,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은 타격을 입었다.(아네가와 전투).
크나큰 타격을 입은 것 같던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이지만, 9월에 혼간지 세력을 끌여들여 노부나가에게 대항하는 세력을 늘려나갔으며, 이들의 군사 활동이 활발해지자 다시 오우미로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20일에는 남오우미를 전전하며 노부나가에게 소속된 성을 떨어뜨리거나 사카모토에 진을 놓고 야마시나고(山科郷)를 불태우고 다니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를 괴롭히게 된다. 이 과정중 노부나가는 요시카게에게 속했던 사사세력인 엔랴쿠지를 불태우기도 했다.

2.5.2. 미요시의 동향


셋츠에서의 공작에 성공한 미요시 산닌슈 세력은 1570년 7월에 노부나가에 대한 병사를 일으켰다. 노부나가는 이 상황에 대처하며 친선 관계에 있던 모리 테루모토에게 "셋슈에서 착란이 발생했기에 4일날 상락하였습니다. 로닌들은 무사히 소멸하여 하향하고 있으나 각별한 주의를"이라는 내용이 포함된 서장을 7월 10일날 보내어 다시 기나이를 평정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26]
하지만 셋츠의 미요시 세력은 소멸되는 일 없이 오히려 세력을 더욱 불려나가게 된다. 먼저 8월에 거점을 노다(野田)와 후쿠시마(福島)로 지정하여 셋츠에 뿌리를 내렸으며, 9월이 되자 혼간지 세력과 연계하여 그들을 노부나가 포위망에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더욱이 산닌슈 세력은 아와에 남아있던 미요시 가문의 당주 미요시 나가하루와 그의 측근 시노하라 나가후사를 위시로 하여 9월 27일 쯤 시코쿠군을 키나이 상륙시키게 된다. 특히 혼간지 세력과 혼척 관계에 있던 나가후사에겐 혼간지 켄뇨의 맹약 서장이 9월 19일에 한 번, 10월 1일에 한 번 보내지기까지 하여, 아와의 2만과 합쳐 약 3만의 군세를 규합하는 것에 성공한 미요시 가문은 셋츠의 카와라바야시 성이나 이바라키 성을 공략하고 교토를 목전에 둔 상태가 되었으니[27], 미요시 가문이 이번 노부나가 포위망에서 이시야마 혼간지와 함께 당당히 서쪽의 주력을 맡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28]
이런 혼간지와 미요시의 대세력에 가로막힌 노부나가는 오우미로 출병을 계속하는 아사쿠라 - 아자이 동맹을 직접 막기 위해, 동월 22일에 미요시 요시츠구마츠나가 히사히데에게 노다, 후쿠시마 성의 포위를 맡기고 사카모토로 떠났다. 이후 셋츠의 전선은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고, 주력 세력 중 하나였던 켄뇨는 10월 30일에 소렌인(清蓮院)의 몬제키(門跡) 손쵸 호신노(尊朝法親王)의 중개를 받아들여 노부나가와 강화를 맺게 되었다. 미요시 가문 또한 1달 정도를 버틴 11월 21일에 나가후사가 히사히데를 중개로한 강화를 받아들였기에, 노부나가는 서쪽의 전선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에 성공했다.[29] 이번 중재의 결과, 노부나가는 히사히데의 딸을 양녀로 받아들여 나가하루와의 혼인을 성사시켰기에, 미요시 가문과는 혼척 관계가 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미요시 가문은 노부나가를 상대로 옛 영향력을 어느정도 회복시키는 것엔 성공했지만, 노부나가 측의 강화를 수락함으로써 당분간 노부나가 측에 강경한 공격을 걸어오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30]
반면 나가후사는 1571년 5월에 오다 가문과 동맹상태에 있던 모리 가문의 영지인 비젠 코지마로 공격을 감행했기에, 노부나가는 잠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31] 비젠의 사태가 좀 진정된 동월 26일날 테루모토와 함께 수명에 간당간당한 '''모리 모토나리'''가 연서한 서장이 노부나가의 앞으로 보내진 것은 모리 가중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요소가 아닐까(...)[32] 아무튼 이런 서장을 받은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내용을 전달해, 각각 6월 20일 모리 조손 앞에, 6월 12일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앞에 시코쿠 세력의 평정 명령이나 강화 사실에 대한 변명을 하는 내용이 담긴 서장을 써내게 된다. [33]

2.5.3. 쇼군의 거병


한 편 적대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새로운 영지를 갉아먹는 와중, 노부나가와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관계는 점점 험악해져갔다. 결국 요시아키는 우에스기, 다케다, 호조 등의 세력에 고나이쇼를 보내며 자신 또한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으로 참전할 것을 결의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34]
이로서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막부의 마지막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적대하게 된다.
노부나가의 군세에 의해 친 노부나가 세력에 복속되어있던 미요시 요시츠구마츠나가 히사히데 또한 쇼군의 움직임에 빠르게 반응해나갔다. 이들은 5년에 걸쳐 적대해온 미요시 산닌슈 세력과 강화를 맺어 자신들이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 참전한다는 것을 알렸으며, 히사히데 부자가 1571년 5월 6일, 요시츠구가 6월 11일에 거병하여 카와치의 하타케야마 가문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완전히 노부나가를 져버리고 쇼군의 편에 선다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이들은 7월 4일에 야마토, 15일에 셋츠 타카츠키 성와다 코레마사, 8월 4일에 츠츠이 준케이, 10월 15일에 아와 세력의 원조를 받으며 야마토를, 11월 14일엔 다시 카와치를 공격하는 엄청난 활동을 보여주며, 노부나가의 새로운 골칫거리로 떠오르게 된다. 더욱이 비젠의 전선에서 군사를 물리고 돌아온 시노하라 나가후사 또한 요시츠구, 히사히데와 동맹을 맺고 7월 12일날 즈음엔 키나이에서의 행적이 보일정도로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었다.[35] 기껏 안정시켜놓았던 서부전선이 급속히 무너져내린 것이다.
11월 8일에는 나가후사, 요시츠구, 히사히데, 미요시 야스나가 등이 타카야 성을 포위하고, 츠케지로(付城)를 쌓는 등의 군사활동을 보이면서 노부나가를 더욱 압박했다.[36] 이 키나이의 미요시 연맹은 신부이자 예수회 일본포교장이었던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카브랄(フランシスコ·カブラル)이 인도 관구장(パードン·アントニオ·デ·フアドウロ)에게 보내는 1572년 9월 23일 서간에 "근처에서 아와 및 하나의 쿠니의 주인인 시노하라공이 쿠보님을 살해한 미요시공과, 단죠공 또한 함께 군사를 이끌고 쿠보 측의 성들을 포위하고 있습니다."고 나타나있으니, 미요시 세력이 얼마나 격하게 노부나가의 영역을 들이치고 있었는지 쉬이 알 수 있다.[37]
이 와중에 동부 전선에서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자이 연합과 일진일퇴를 벌이다가 1572년 아자이 나가마사의 본성인 오다니성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572년 10월 드디어 다케다 신겐이 대군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순히 전력을 비교하면 노부나가의 전력이 신겐의 전력보다 거대했지만,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기에 노부나가는 군대를 더 모아 신겐을 막을 여력이 충분하지 못했다. 다케다 신겐은 음력 12월 22일 노부나가의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격파한다. 그러나 아사쿠라 요시카게는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면서 적설을 핑계로 군을 물리기도 했다.
이윽고 1573년 2월이 되자 노부나가와 요시아키의 악화된 관계는 표면화되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자 '''요시아키는 3월에 직접 거병''', 본격적으로 노부나가와 맞서 싸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1573년 5월 다케다 신겐이 사망하면서 다케다 군이 퇴각하고 이제 한시름 놓은 노부나가는 '''재빨리 이 모두를 일축하기 시작한다.'''
1573년 8월엔 호소카와 후지타카요도 성이와나리 토모미치를 전사시켰고, 11월에는 사쿠마 노부모리에게 카와치 와카에 성의 공격을 명해 요시츠구를 자결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로써 약 5년 동안 노부나가의 뒷통수를 노리던 미요시 가문의 수뇌부는 키나이에서 대부분 축출되었다.
전황이 최악의 끝을 달리자 미요시 나가하루는, 동년 4월에 이미 자신의 동생인 소고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요시츠구를 공격할 것을 진언하기도 하였고[38], 주전파인 나가후사를 축출하며[39] 내부세력을 어느정도 추스렀다고 생각해서 노부나가와 친선을 맺으려는 시도를 행했지만, 노부나가는 손쉽게 거절했다(...)[40] 나가하루는 추후에도 친선의 서장을 보냈지만 노부나가가 그를 허용하는 일은 일체 없었고[41], 사이카슈의 보고에 따르면, 계속해서 반 노부나가 세력에 남아있을 것을 표명하여 여전히 노부나가의 적으로서 시코쿠에 주둔하는 상태에 머물렀다.[42]
동쪽에서도 1573년 9월 아사쿠라 요시카게와 아자이 나가마사가 나란히 붕괴되었다. 요시아키는 모리 테루모토에 의지해 주고쿠로 달아났다.

2.6. 키나이 평정


노부나가 포위망을 일소시킨 노부나가는 다시 한 번 키나이를 평정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된다.
1574년 4월이 되자 강화로 물러나있던 혼간지의 세력들이 노부나가의 움직임에 맞춰 다시 거병하였다.
1575년에 들어서자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서 이즈미에서 할거하던 소고 가문이, 4월에 니이보리 성이 함락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잃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미요시 가문의 세력이 쇠하자 카와치에서 할거를 계속하던 미요시 야스나가 또한 결국 1575년 4월 8일을 기점으로 타카야 성에서 항복을 표명하게 된다. 노부나가는 이런 야스나가를 자신의 세력으로 맞이해주었다.[43] 이로써 노부나가는 키나이에서 활동하는 미요시 세력의 평정을 끝마치게 된다.
키나이의 미요시 세력을 꿇린 노부나가는 즉각 미요시 가문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키나이의 평정에 박차를 가해갔다. 이에 혼간지는 자신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야스나가와 노부나가의 중요 외교관 중 한 명인 마츠이 유칸을 통해 10월 중 노부나가와의 강화에 들어가게 되어 12월에 강화를 확정지었다.[44]

2.6.1. 본격적인 이시야마 합전 개막


1576년 2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모리 테루모토를 의지해 빈고 토모로 하향했다. 요시아키와 적대관계를 명확히 한 노부나가 또한 이 일을 들었기 때문에, 에이로쿠 말년에서 이어진 오다 가문과 모리 가문의 관계는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1570년부터 꾸준히 노부나가에게 적대해온 혼간지 세력 또한 두 번의 강화를 맺었음에도 반 노부나가 세력으로서의 거동을 멈추지 않았다. 요시아키또한 자신의 곁을 떠나 테루모토에게 떠난 시점에서, 혼간지 세력에 예의주시하던 노부나가는 1576년이 되자 혼간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모리 가문이 혼간지를 지원해주기 시작하며 서쪽 전선의 구도는 모리vs오다로 흘러가는 모양새를 갖추기도 하였다. 특히 세토내해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혼간지 세력에 병량미를 가져다 주는 모리 가문에게 대적하기 위해, 5월 23일의 노부나가 주인장에 보이듯이 아와지에서 수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아타기 진고로와 친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모리 가문의 해상전력을 막기휘한 활동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45]
이윽고 노부나가는 혼간지 세력을 지원해주는 모리 가문을 막기 위해 7월의 키즈가와구치에서 이들과 전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2.6.2. 쵸소카베 가문과의 접촉


노부나가는 시코쿠에 본거를 두고 계속해서 자신에게 공격을 가해온 미요시 나가하루를 토벌하기 위해 시코쿠에 관해서도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시코쿠 각지의 슈고(守護)를 맡았던 호소카와 가문의 당주 호소카와 노부요시를 통해, 미요시 가문에게 항전하는 카가와 노부카게 등의 사누키 호족들에게 미요시 가문의 영지인 사누키 동부나 아와 서부를 수여해준다는 서장을 1574년에 보내며 지방의 호족 및 공권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46]
특히 노부나가가 눈독을 들이던 사내는 호소카와 가문에 사관했던 무사 집안의 당주이자, 호소카와 가문의 주요 통자인 모토(元)를 쓰며, 1575년에 토사#s-3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쵸소카베 모토치카였다.[47]
이러한 노부나가는 아와로의 출병을 결의하는 모토치카에게 아와에서의 군사활동을 보증해주며[48], 아케치 미츠히데를 전담 외교관으로 붙여주었고, 그의 장남에겐 자신의 통자인 노부(信)를 주어 노부치카(信親)로 이름을 정할 것을 추천하기도 하였다.

2.7. 동방 진공



2.7.1. 나가시노 전투


1575년 다케다 신겐을 계승한 다케다 카츠요리가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충돌하자, 지난번에 노부나가 포위망이 조여들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아자이도 정리되었겠다. 직접 대군을 이끌고 나와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다케다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이로부터 다케다 군은 서서히 약해졌고 1582년 오다 노부타다를 총대장으로 다케다 토벌군이 편성되어 모리 나가요시에게 북시나노 방면, 타키가와 카즈마스에게 코즈케 방면으로 진공하게 하여 다케다를 소멸시키고, 이는 우에스기 세력에게도 커다란 압박이 되었다.

2.7.2. 카츠이에의 호쿠리쿠 원정


우에스기 겐신은 1577년 10월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오다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위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78년 4월 겐신마저 급사해 노부나가를 막을 수단은 사라졌다. 노부나가는 무로마치 시대의 막을 내리고 노부나가는 자신에 반대하는 영주들을 차례로 멸하여 맹위를 떨친다.
1582년, 시바타 카츠이에로 하여금 우에스기 씨를 밀어붙이게 하여 호쿠리쿠도야마 성 · 우오즈성(魚津城)을 치게 하고, 여기에 우에스기씨 내부에서 시바타 시게이에가 반란을 일으켜 우에스기씨는 안팎의 적을 막느라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진다.

2.8. 서방 진공


한 편 키즈가와구치 전투에서 노부나가에게 도움을 주었던 아타기 진고로는 1577년이 되자 노부나가 세력에서 이탈하는 사건이 발생했기에[49], 모리 가문에게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다시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여러번의 교섭을 직접 관리하기도 하였다.[50]
1578년 3월에는 하리마벳쇼 나가하루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
1578년 11월 6일 제2차 키즈가와 해전에서 구키 요시타카가 모리 수군을 격멸했고, 이로써 제해권을 장악한 오다 수군은 혼간지로의 보급을 끊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1579년 10월 아리오카 성이 함락되고 미즈키 성의 정세가 상당히 악화되어 혼간지 세력은 강화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강화협상이 시작됐다. 강화가 이뤄진 후 1580년 3월에 혼간지 세력이 오사카에서 퇴거했다. 8월에는 혼간지 켄뇨를 이어 오사카에서 잔존세력과 노부나가에게 항전을 계속하던 혼간지 쿄뇨도 오사카에서 물러나, 혼간지 세력을 사실상 평정했다.
1580년 8월 20일에는 시마즈 가문과 오토모 가문의 강화를 명했다.
1581년 11월 6일에는 노부나가에게 이탈했던 아타기 가문 등의 아외지 호족들이 다시 노부나가의 세력으로 포섭됐다.[51]

2.8.1. 히데요시의 주고쿠 원정


1580년 음력 3월이 되자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모리 가문을 공격하기 위한 주고쿠 원정을 명령하게 된다. 이 시점을 전후로 노부나가는 혼간지 세력과 강화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기에, 히데요시와 우키타 나오이에, 그리고 사누키이요 등의 세력을 이용해 모리 포위망을 구상했다고도 볼 여지도 있다.[52]
1580(1582?)년[53] 9월 즈음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미요시 가문의 시노하라 사네나가 등의 구원요청에 응해, 구로다 요시타카, 센고쿠 히데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을 통해 아와아와지에도 영향을 뻗히기 시작했다.
1581년 11월에는 아와지에 군세도 직접 파견하여 이와야 성을 공략하여 아와지를 노부나가의 세력하에 두는 것에도 성공한다.[54]

2.8.2. 시코쿠 원정 계획


노부나가가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을 표명한 미요시 나가하루는 1576년 12월, 상관격인 호소카와 사네유키에게 패해 사망해버렸다.[55] 이에 미요시 가문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지만, 소고 마사야스가 1578년 1월에 사카이에서 내려와 미요시 가문의 새로운 당주가 되었기에 미요시 가문의 혼란은 어느정도 수습됐다. 문제는 마사야스가 모리 가문의 최중요 인사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에게 축의를 받았단 사실이다(...)[56] 노부나가로서는 알아서 무너져갈 세력이 갑자기 되살아난 꼴. 어쨌든 미요시 가문이 다시 기능을 시작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친 노부나가 세력에 속하는 토사#s-3쵸소카베 모토치카는 본격적으로 미요시 가문의 영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1578년, 시코쿠아와에서 미요시 가문의 미요시 시키부노쇼(三好式部少輔)가 모토치카에게 항복했다.[57] 모토치카는 이 일에 대해 노부나가에게 보고했던듯, 노부나가는 6월 12일에 "시키부노쇼 등과 관련해서 뒷생각을 품고있진 않다. 아와 방면에선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고, 시키부노쇼와의 일은 그쪽에서 처리하길"이라는 주인장을 모토치카의 동생인 코소카베 치카야스에게 붙임과 동시에, 미요시 야스나가에게도 부장의 발급을 명하여, "노부나가의 주인장과 시키부노쇼에 관련된 일"이 적혀있는 6월 14일의 야스나가 서장 또한 치카야스의 앞으로 보내지게 되었다.[58][59]
이렇듯 노부나가는 쵸소카베 가문을 우군으로 생각함과 동시에, 그들이 아와를 공략하는데에 별 생각이 없어보이는 듯한 태도를 취해왔다. 신장공기에 따르면 1580년 6월 26일날 아케치 미츠히데를 중개로하여 설탕을 진상해왔다고 할 정도로.[60] 그런데 1581년 정월에 들어서며부터 이들 사이엔 이상한 기류가 형성되게 된다. 노부나가가 동월 23일에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보내는 서장의 내용 중에서 "미요시 야마시로노카미를 아와로 보냈다"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여태껏 시코쿠의 방침에 손을 대지않던 노부나가가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파견시킨 것이었다.[61]
야스나가가 속하는 미요시 가문은 아와에 본관을 두는 일족이었고, 쵸소카베 가문의 아와 진공에 강경한 관여를 보이지 않던 노부나가가 갑자기 지역적 연고가 존재하는 야스나가에게 시코쿠로의 도해를 명한 것은, 모토치카가 노부나가를 의심하기에 아주 충분한 조건이었다. 1580년으로 비정되는 11월 23일의 마츠이 유칸 서장에서 유칸이 노부나가가 야스나가에게 아와와 사누키를 내렸다는 부분을 보면 노부나가의 의도는 사실상 명백한 상황.[62][63] 더욱이 야스나가의 군세는 타라오, 이케다, 노마 등을 포함하는 카와치의 세력이자 미요시 요시츠구의 중신이었던 자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니[64], 노부나가가 키나이에 세력을 영유하던 미요시 가문을 배척하거나 떨어뜨려놓긴 커녕 중용했다는 사실 또한 간파할 수 있겠다.[65]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의 가세에 감사를 표하면서도, 이러한 노부나가의 행동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일련의 사건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는 서장을 1580년 11월 24일에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보내게 된다.[66] 이후 노부나가는 12월에 미츠히데의 중개를 통하여 모토치카에게 이요새매를 받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도 했으나[67] 상기된 대로 야스나가의 시코쿠 파견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다만 1581년에 노부나가의 적대세력이던 마사야스가 갈등을 맺던 호족들과 화했을 뿐, 야스나가가 시코쿠에서 어떤 활동을 보였는지, 심지어 도해가 확인되는 사료조차 전무하기에, 노부나가가 자신의 생각대로 시코쿠를 지배하는 일은 없었다.[68]
이렇게 불협화음을 내며 삐걱이던 관계는 1581년 11월까진 어찌저찌 유지됐지만, 곧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노부나가는 본격적인 시코쿠 원정을 실행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1582년 2월이 되자 정식으로 모토치카를 토벌하기 위해 야스나가를 시코쿠로 파견[69], 3월 가이#s-3 다케다 다이묘 가문을 멸망시킨 노부나가는 5월 7일이 되자 이세 칸베 가문의 양자로 가있는 자신의 삼남인 노부타카에게 하나의 주인장을 붙였다. 적혀있는 내용은 다름아닌 '''시코쿠의 국분'''에 대한 내용으로, 시코쿠로의 원정이 마무리된다면 "사누키를 노부타카에게", "아와를 야스나가에게", "남은 양국은 노부나가 자신이 아와지에 도착하면 정할 것", "야마시로노카미(야스나가)에 대해선 군신, 부모의 마음가짐으로 대할 것"이 주된 내용으로 적혀있다.[70] 즉, 당시의 노부나가는 확실히 시코쿠를 자신의 세력으로 밀어버릴 심산이었으며, 도사의 모토치카와 아와의 마사야스는 그의 국분계획에 포함되지 않았었다는 말이다. 또한 "우노몬도닛키" 6월 1일 조에 "산시치(노부타카)공이 야마시로노카미의 양자가 되었다"는 구절마저 있으니, 노부나가는 자신의 아들인 노부타카를 미요시 가문의 야스나가와 연결지어서 동시코쿠 일대를 자신의 친족들로 지배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다.[71][72]
이로써 노부나가는 모토치카를 통한 시코쿠 계획을 몽땅 처분하고, 야스나가를 중심으로한 미요시 가문을 통해 시코쿠를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야스나가에게 있어선 '''시코쿠 원정'''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는 일생일대의 대기회이기도 하였다.
6월이 되자 미요시 노부타카니와 나가히데, 하치야 요리타카 같은 노부나가의 중진, 중견 가신들을 이끌고 셋츠 스미요시에 진을 둔 다음, 쵸소카베 가문에게 저항의 태세를 계속하는 시노하라 사네나가에게 자신이 곧 시코쿠로 건너가겠다는 제찰(制札)을 '''1일'''에 보내었다.[73]

2.9. 혼노지


우에스기씨 공격이 좋은 진척을 보이고 있던 그 무렵인 5월 15일, 코슈 원정 전승을 축하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부나가가 머무는 아즈치 성을 방문했다. 이에야스를 대접하기 위해 노부나가는 아케치 미츠히데에게 이에야스 접대역을 맡겨 사흘에 걸쳐 이에야스를 대접하게 했다.
이 무렵 빗츄 타카마츠 성을 공략 중이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즈치 성으로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그러자 노부나가는 돌연 미츠히데의 접대 담당역을 해제하고 히데요시의 원군을 이끌고 지원에 나서도록 명한다.
5월 29일[74], 노부나가는 서방 원정을 위해 교토에 상락하여 혼노지라는 절에 본진을 차리고 머물러 있었다. 노부나가의 적장자 노부타다의 군대 또한 함께 상경해서 주둔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를 향해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주군 노부나가를 토벌하기로 결의하고 노부나가가 혼노지에 본진을 차리기 사흘 전인 5월 26일[75]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미츠히데는 영지 탄바에서의 거점인 카메야마 성에서 군대 1만 3천 명을 이끌고 출진, 수도 교토로 향했다.
밤을 넘겨 다음날 새벽 무렵 교토 경계인 카츠라가와 앞에 다다르자, 1만과 3천으로 병사를 나누고는 3천명만 데리고 카츠라가와를 건너 교토로 입성했다. 6월 1일(양력 6월 20일) 밤, 미츠히데의 접근 사실을 모르는 노부나가는 잠자리에 들었고, 미츠히데는 그 시각 교토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혼노지의 변'''의 개막이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 거처와 함께 불 속에 갇히자, 거처가 다 연소되기를 기다려 노부나가의 죽음을 확인한 미츠히데는 니조신고쇼(二条新御所)[76]로 피신해서 맞서 싸우던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와 무라이 사다카츠를 공격했다. 노부타다는 세 번에 걸쳐 안으로 들어오는 아케치군을 물리쳤으나, 아케치군이 자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쓰러뜨리자 무라이 사다카츠 등과 함께 자결했다.[77]

2.10. 이후의 이야기


그 이후 노부나가의 복수전을 대의로 내세운 하시바 히데요시가 뒷수습을 하였으며, 미츠히데를 야마자키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명실공히 노부나가를 이은 최고 권력자로서 자리매김한다. 패한 미츠히데는 도망가다 부하들과 함께 농민들에게 살해당했다.[78]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후계자 지명을 위한 회의가 열리는데, 이것이 '키요스 회의'이다. 그의 장남이자 당초 후계자였던 오다 노부타다는 이미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던 터라 새로운 후계자를 급히 뽑아야 했다. 여기에서 그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츠는 미래의 권력자인 히데요시의 후원을, 3남인 오다 노부타카는 그의 또 다른 충복인 시바타 카츠이에의 후원을 받았다. 그러던 도중 히데요시가 카츠이에의 편에 섰던 니와 나가히데와 협상을 벌여서 장남 노부타다의 어린 아들인 오다 히데노부(당시 3세)를 후보로 바꾸었고, 결국 오다 히데노부가 후계자로 채택된다. 4남인 히데카츠(秀勝)는 이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가 있어서 후계자 후보에선 논외였다.
이로써 후계자 히데노부의 후견인이 된 히데요시가 권력을 틀어쥐게 되었고, 오다 가문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져 갔다.

3. 능력


오다 노부나가는 전형적인 센고쿠 다이묘다. 아버지 노부히데는 오다 가문을 통일했지만 방계였기 때문에 집안에 적을 많이 만들어둔 상태로 죽었고 가독 계승 당시 노부나가는 인망이 없었다. 그런 불리한 조건에서 오다라는 약소 세력을 전국통일 목전에까지 이끌어낸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렇게 지방의 한 소규모 다이묘에서 천하인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보니 그 능력은 대단히 비범하게 평가된다.
노부나가의 성격이 급하고 잔혹하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그의 전략 및 전술은 매우 신중한 편이었다. 자신에게 계속 시비를 거는 다케다 신겐에게 성급히 맞서싸우지 않고 끝까지 외교적 방책을 찾았을 정도. 물론 무적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의 기병을 상대함에 있어선 피하는 게 당연했지만. 그러다가 신겐이 죽은 뒤에 벌어진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완전한 우위에 서게된다. 일반적인 다이묘라면 군세가 완전히 무너져버린 다케다를 바로 조지러 갔을테지만 일단은 다시 때를 기다렸다. 그 후 동안 타케다는 경제적, 외교적인 실책으로 자멸에 가까운 지경에 이를 때가 되자 그제서야 타케다에 총공세를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나가시노 전투의 승리 후 7년 동안의 기다림 끝에 타케다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호죠가 아군이 되었으며 그리고 우에스기는 내분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그야말로 관동공략을 위한 최적의 상황으로 나타났다. 이런 점을 봤을때 몇십수 앞을 내다보는 참을성은 가히 경이롭다.
다만 노부나가의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 당대 최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흔히 노부나가보다 타케다 신겐이나 우에스기 켄신을 높게 보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나 노부나가 공기 및 갑양군감 같은 역사적 사료에도 노부나가가 직접 군을 이끌었다가 패퇴하는 경우가 기술되어있다(주로 타케다 군의 무장에게 패퇴). 허나 노부나가의 전술 능력이 비록 당대 최고는 아닐지는 몰라도, 충분히 비범한 건 사실이다. 최고 지휘관의 몸으로 직접 말을 타고 선두에 달려 적을 격퇴한 적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오케하자마 전투이며, 아사쿠라 가문을 멸문시킬 때도 직접 선두에서 말을 몰았다.
노부나가 군의 최대 장점으로 꼽는 건 바로 참호를 만드는 등의 진지 구축 능력이다. 이 부분의 능력은 단연 으뜸이었다 한다.
노부나가의 진정한 장점은 전술보다는 전략, 야전보다는 정치력에 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외국과의 무역,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79], 다른 다이묘들에겐 쓸모없다 여겨졌으나 총포를 독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카이를 독점한것, 쇼군을 이용한 외교전 등 그의 다채로운 전략은 괄목할 만 하다. 이러한 전략이 비록 노부나가만의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당장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이러한 전략을 구사했다), 하나의 세력을 이끄는 총 책임자로서의 능력은 확실히 뛰어났다. 오다 군이 꽤 큰 손실을 입고 패전한 적은 가끔 있지만, 항상 적보다 많은 병사를 이끌 수 있었다는 것은 전략적/정치적인 능력이 전술적인 실패를 언제나 메꿀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노부나가가 가독을 상속받았을 당시의 상황은 아버지 노부히데의 실패와 본인의 행실로 인해 가문 내의 분열에 더해 외부의 적들이 오와리를 노리고 있는 등 최악에 가까웠기 때문에 이런 불리한 상황에 묻히는 감도 있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오다 가문의 입지나 지정학적인 위치 등은 상당히 유리한 편이었다. 오와리의 발전한 상업은 아버지 노부히데 대에 이루어진 성과를 물려받은 부분도 부정할 수 없고, 미노를 점령한 뒤 노부나가는 노비 평야로 알려진 미노와 오와리의 매우 비옥한 지방을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으며[80], 오와리와 미노는 위치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나이와 교토, 그리고 상업의 중심지인 사카이로 뻗어나가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한 조건들이 노부나가의 능력을 깎아먹는 것은 아니지만 천하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재산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노부나가의 용인술은 매우 파격적인 편이다. 잔혹하고 용서가 없다는 이미지와는 달리,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배신자를 용서한 적도 많다. 다만 근무에 태만하고 별로 쓸모가 없는 인물이라 생각되면 아무리 중신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내쳐버렸다. 굉장히 실리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어떻게 보면 부하들 입장에선 언제 내쳐질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많은 다이묘 가문은 고평가되는 다이묘들조차도 대부분 겉은 급성장하면서 내실은 그에 걸맞는 체제를 미처 다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덩치는 전국구급이지만 지방 다이묘의 가신단 수준의 약한 단결력을 가져서 뒤늦게 내분이나 가신단의 이탈, 반란 등의 사태로 인해 발목을 잡히는 사례가 많았는데, 노부나가처럼 가신을 수하의 독립된 영주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노부나가라는 군주의 신하처럼 다루는 중앙집권적인 가신단을 구축한 사례는 거의 없었기에 매우 특이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루이스 프로이스는 노부나가의 행동이나 정책을 두고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고 특기했고, 이것은 분명 다른 다이묘들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노부나가의 이러한 선구적인 용인술은 어쩔 수 없이 봉건영주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아라키 무라시게,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반란처럼 많은 도전에 직면했음은 물론, 결국에 가서는 아케치 미츠히데가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일본 역사를 다루는 Samurai Archive의 팟캐스트에선 이런 노부나가를 두고 매니저와 중간 관리자에겐 최악의 보스, 그 밑의 평사원이나 알바들에겐 더없이 좋은 보스 타입이라고 얘기했다.
또한 노부나가는 매우 근면한 편이었다. 그 자신이 워낙 건강한 체질[81]이어서 가능했겠지만, 가신들 중에서도 노부나가의 근면함에 따라올 수 있는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아케치 미츠히데 정도였다. 어느정도 근면했느냐 하면, 타 가문에 보내는 의례품들을 스스로 일일이 검사했을 정도. 노부나가의 지위를 생각하면 이는 근면한 정도가 아니라 깐깐한 수준이었다.
다만 노부나가는 자기 자신이 워낙 근면하다보니 부하가 조금 태만하다 싶으면 곧장 벌을 내렸다. 더욱이 짬밥되는 노신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기에[82], 도요토미 히데요시 같은 근면한 자들은 오히려 출세할 기회가 많아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83]의 사람들은 노부나가를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었다. 현대의 한 연구에서 오히려 현대인보다 노동시간이 길지 않았다고 할 정도이던 당시에 이런 일중독자가 다이묘였으니 이 점도 반감을 살 하나의 요소였는지 모른다.
종합해서, 뛰어난 전략 능력과 결코 태만을 용서치 않는 근면함 등이 노부나가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노부나가의 이러한 장점이 기업 경영자의 마인드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1세기의 기업 경영을 전국시대 전쟁과 완전히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일본에도 "노부나가의 경영 비결!" 같은 책들은 굉장히 흔하고, 마케팅의 일환이긴 하지만 삼성전자 사장이 임원들에게 대망을 읽으라고 권했다고 할 정도로 혁신이 중요한 현대에 이 혁신적이었던 남자의 조직 경영법은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일본의 비효율적인 거대 조직이나 복지부동의 관료조직을 비판할 때 오래된 전통이라도 비효율적이라면 가차없이 개혁하던 노부나가의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조직 몸집 줄이기가 중요한 불황이라서 후다이도 서슴지 않고 정리해고를 했던 남자의 경영법이 주목받는지도 모른다.
이외에 노부나가가 마치 잘 안 쓰이던 조총에 눈독을 들인 첫 다이묘라도 되는 양 언급되고 특히 그 유명한 3단철포 설이 널리 퍼져 있는데, 노부나가 이전부터 이미 조총은 전장의 주력 무기 중 하나였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엄청난 경제력과 지역적 유리함, 쇼군을 이용한 정치적 술수로 사카이 지방을 지배하여 화약을 독점하는 것을 바탕으로 수천정에 이르는 철포부대를 운용했기에 여타 다이묘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압도적 화력을 구사할 수 있었다.
전국 중기 이후에 조총으로 인한 사상률은 40퍼센트 정도였으며, 그 외에 활이나 투석에 의한 사상률도 높은 편이었다.[84] 특히 다케다 가문은 조직적으로 투석대를 따로 두어 운용한 것으로 보인다. 3단 철포설이 나오는 것은 오제 호안이 쓴 '신장기'에 철포를 교대로 쏘게 했다는 문장이 한 줄 나온 이후에 널리 받아들여졌는데 신장기는 에도 초기에 나온 군기물[85]이다. 이를 메이지 시대에 '일본전사'를 편찬할 때 그대로 수록하였으며, 이후 영화, 소설 등을 통해 통설처럼 굳어진 것이다. 노부나가의 부하였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에는 3단 철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웃나라였던 중국, 조선의 기록을 보아도 연속사격술은 통상적인 전법으로서 활용되었던 것은 분명하나, 그것이 오다 노부나가 시기부터 사용된 전법이었는지는 보다 자세한 검증이 필요할 것이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가 3단 철포술을 사용했다고 해도, 그 것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창의력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는 해석도 있다. 철포 이전의 투사 무기인 활, 쇠뇌, 투석구 등 역시 발사 후 다음 발사를 준비하는 간격이 있었고, 이 간격을 극복하기 위해 인원을 교대해서 연속 사격하는 방법이 존재한지 오래였다. 즉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더라도 철포의 교대 사격이란 전술은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이라는 것. 혹은 아예 무역을 통해 접촉한 유럽인들에게 따로 교대 사격 전술을 전수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4. 오다 정권



4.1. 본거지 오와리


'잔혹무도하고 옛 세력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민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자신의 주가였던 시바 가문을 멸족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바 요시카네를 시바 가문의 당주로 후원해주고 양육해준 것은 물론, 오다 가문에서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딸을 동생 오다 노부카네와 혼인시켜 오다 일족으로 삼는 행동을 했을 지경이다. 호리 신(堀新) 씨는 '하극상이란 개념을 회피하기 위한 행위'라고 평할 정도. 이를 보면 노부나가 또한 그저 인간의 궤를 벗어난 파천황적 존재가 아닌, 당대의 정치적 요소를 하나하나 따져가며 열도를 지배한 위정자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적이라 할 수 있을 듯.[86]

4.2. 키나이 일대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한 노부나가가 단 한 달만에 키나이에 영향력을 뻗히는 것에 성공했기에, 당시 노부나가는 누구보다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평은 물론이고, 기나이의 세력들은 참된 인물이 없는 허수아비들이라며 깍아내리는 악평 일변도를 달렸었다. 하지만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각 세력들의 당시 상황이 어느정도 밝혀졌기에, 노부나가의 진격을 본인의 우월함만으로 평가하기 보단 각 세력들의 정치 상황과 그것을 이용하여 포위망을 구성해 단번에 들이닥친 노부나가의 수완을 중심으로 논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요시 가문을 예로 들자면 노부나가의 세력과 연대한 마츠나가 히사히데미요시 요시츠구 또한 기나이를 여전히 전전하는 상태였고, 모리 가문의 영지에 군사를 냈지만 확실한 우세를 가져가지 못한 채, 그들을 물리친 호소카와 미치다타노시마 무라카미 타케요시 등이 노부나가 세력과 확고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전선이 무너지기도 하여 본국 시코쿠로 철퇴했다는 식.[87]

4.3. 시코쿠 주변


본래 노부나가는 미요시 나가하루소고 마사야스 등의 제거를 우선 목표로하여, 쵸소카베 모토치카를 시작으로하는 시코쿠 국분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많은 변경이 가해지게 되었고, 결국 아와사누키미요시 야스나가오다 노부타카 부자가 영유하는 계획으로 변경되었다. 구세력인 미요시 가문의 중신에 자신의 아들이라는, 평소 생각되는 노부나가의 이미지와 비교해 고리타분해보이는 정책이지만, 노부나가는 이미 자신의 친족들을 키나이 주변에 배치해나가는 상황이었다. 특히 오남 오다 히데카츠주고쿠세토내해를 전전하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양자로 붙여주었고, 유모의 아들이었던 이케다 츠네오키셋츠 아마가사키 성에, 그리고 오다 노부즈미를 셋츠 오사카 성, 오다 노부하루이즈미 키시와다 성에 배치하는 등, 키나이의 통치에 있어선 혈연주의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의 정책을 펼쳤다.
또, 보면 알겠지만 이 노부나가의 일족들이 배치된 곳은 전부 세토내해를 끼는 지역이다. 여기에 더해 세토내해에 많은 해안선이 걸쳐진 시코쿠 동부마저 삼남 노부타카를 위시로 배치했으니, 노부나가는 중세에 상당한 경제력을 가지는 세토내해를 중심으로한 친족중심의 지배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시코쿠의 아와와 사누키는 칸레이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중요 거점이었으며 특히 아와는 미요시 가문 시대에 걸쳐 목재와 쪽(藍)으로 폭발적인 경제력을 확보했기에 이런 해운을 이용한 경제성을 보고 펼친 정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상 야스나가의 복귀를 명분으로 동세토내해를 차지하는 실리를 챙기려 했던 것으로 봐도 될 듯. 후에 히데요시가 아타기 진고로를 '''미요시 진고로'''로 부르거나 야스나가에게 양자를 맡기며 오사카에 군림한 것을 보면, 노부나가가 동세토내해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었는지 간단히 알 수 있지 않을까.[88]
반면 노부나가가 모토치카와 단교한 시점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확답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다. 시코쿠에 관련된 인물들에게 남아있는 사료들이 상당히 적은 편인데다 , 텐쇼 연간에 쓰여진 1차 사료들 중엔 연호가 기입되지 않은 것이 상당하기 때문이다.[89] 상술한 노부나가 주인장 - 야스나가 부장 또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을 알아보는 것에 큰 영향을 주는 사료임에도 연호가 기입되어있지 않기에, 사료의 연도 비정과 오다 - 쵸소카베 관계를 알아가는데에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주인장 - 부장의 발급 시점은 오다 - 쵸소카베 관계에 있어서의 터닝포인트 취급을 받는 일이 많아, 1578년, 1579년, 1580년, 1581년 등으로 많은 논의와 비정을 거치며 연구가 진행되었다.
노부나가가 모토치카와의 단교를 결정하게 된 요인 또한 명확하지 않다. 종래 명확한 원인으로써 취급되던 요인은 오다 가신 내부의 항쟁이었다. 자신의 가신이 모토치카와 혈연 관계에 있으며 모토치카와의 교섭에 이름을 많이 비추는 아케치 미츠히데와, 야스나가에게 자신의 조카를 양자로 주어 새롭게 모토치카의 교섭원으로 발탁된 히데요시가, 서로의 우위를 놓고 다투어 이윽고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90] 더욱이 이 두 명은 가까운 시일 야마자키 전투 등을 통해 극단적인 대립 상태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므로, 꽤나 보편적인 시각으로써 일반인들에게도 퍼지게 되었다.
반면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박사는 노부나가에게 적대하고 있던 미요시 가문에게도 한 자리를 내어, 반 노부나가 세력에 의해 모토치카의 아와의 통치가 안정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노부나가가 야스나가를 새롭게 시코쿠 동부로 파견하여, 하시바 - 우키타 - 미요시 야스나가 - 쵸소카베로 구성된 모리 - 미요시 마사야스 - 코노 포위망을 구성했지만, 야스나가 또한 시코쿠를 안정시키지 못한데다 갑자기 간섭을 받은 모토치카는 히데요시에게 노부나가의 진의를 대놓고 물어볼 정도로 노부나가를 의심하기 시작했기에, 양자의 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도 평하고 있다.[91] 이로써 노부나가가 구상했던 시코쿠 통치 계획은 전부 실패했다는 평가는 덤.
나카히라 케이스케(中平景介) 씨는 노부나가가 쵸소카베 가문을 대적하는 시기가 1581년의 말년까지 밀려난다는 것, 아와와 사누키에 모토치카에 의한 직접 지배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근거로,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은 '쵸소카베 가문에서 미요시 가문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반 노부나가 세력이었던 마사야스가 노부나가에게 복속됨에 따라 '적대세력이 없어지고 쵸소카베 가문과 맞닿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국분의 필요성이 생겨나 양자가 갈등하게 된 것'이라 평가하고 있다.[92]
노부나가가 모토치카를 왜 중히 생각했는지 또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때문에 아마노 타다유키 박사는 모토치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노부나가의 시코쿠 정책이라는 것에 회의감을 표하며, 오로지 모토치카만을 대우해주었단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주장한다.[93]

4.4. 덴노와의 관계


노부나가의 오다 정권과 덴노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만큼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노부나가와 덴노의 관계에 대한 학설은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노부나가 존왕설과 덴노 권위 압도설이다.
노부나가가 덴노를 옹립하고 그 권위를 상승시켰다는 것에 주목하여 노부나가를 전국시대의 혼란한 사회 속에 약화된 덴노의 권위를 되살린 존왕지사로 평가하는 덴노 존왕설은 전통적인 노부나가의 덴노 대우에 대한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들에서는 기존의 막부 세력들을 덴노 반대파, 또는 덴노에 대한 억압을 행한 자들로 규정하고, 노부나가와 그 후계자인 히데요시를 덴노를 존중한 존왕파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해석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존왕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에도 막부에 대한 폄하 작업이 진행되며 등장, 발전되었다.
한편 덴노 권위 압도설의 경우 오다 정권의 덴노, 조정과의 단절성, 또는 압도성을 강조하였고, 그를 통하여 오다 정권의 "근대적" 색채를 강조하였다. 대표적으로 아사오 나오히로(朝尾直弘)와 같은 학자들은 노부나가에 의한 무가신격화를 주장하며, 노부나가는 덴노의 권위를 초월하는 종교적 권위를 구축, 지상의 절대자로서 군림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설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존왕설의 주장과 같은 존왕주의자가 아닌 덴노의 권위를 극히 위태롭게 만든 찬탈 시도자였다.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 초 진행된 연구들에서는 위와 같은 기본 구도에 더해 새로운 논의 주제가 추가되어 더욱 복잡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 새로운 논의 주제는 전국시대의 덴노 권위, 덴노와 조정의 능동성 문제였다. 전국시대에 덴노가 완전히 무력한 존재였는가, 덴노의 권위는 정말로 전국시대에 상실된 것이었는가에 대한 이 새로운 논의는 노부나가를 중심으로 하여 그가 덴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던 기존의 연구와는 새로운 방면의 연구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전국시대의 덴노에 대한 기존의 학설과 가장 이질적인 학설은 덴노 권위 부상설이라고 할 수 있다. 와키타 하루코(脇田晴子), 이마타니 아키라(今谷明) 등의 학자들은 전국시대에 덴노와 조정의 권위가 약화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이묘의 영지 지배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전통적인 권위로서 작용하며 증대되었다는 덴노 권위 부상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쇼군과 막부가 유명무실해진 상황 속에서 이러한 설에 따른다면 오다 노부나가는 전국시대 동안 증대된 덴노의 권위를 존중하였고, 심지어는 덴노의 권위에 제압당하기도 하였다. 이 설의 가장 중요한 학자라 할 수 있는 이마타니의 경우 이러한 시각에 따라 오기마치 덴노를 노부나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제압한 노련하며 탁월한 정치가라고 평가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 역시 존재한다. 가장 핵심적인 반론은 "그렇게 덴노가 전국시대에 권위있는 존재였으면, 어째서 덴노 스스로 천하통일을 하지 못한 것인가?"이다. 이러한 반론에 의거하여 이마타니, 와키타와는 다른 설들을 제시하는 학자들의 의견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케 스스무(池享)는 노부나가의 상락 이전 경제적으로 몰락한 조정이 노부나가에게 의존하였던 상황에 집중하였다. 그는 상락 이후 노부나가가 덴노를 지원하면서 그에게 기대한 것은 전통적인 "신의 아이"로서의 전통, 종교적 업무 - 개원이나 관위 서임과 같은 것 - 뿐이며, 그러한 업무를 덴노에게 행하게 하여 덴노와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호리 신(堀新)은 공무결합왕권을 제시하며 전근대 무가 정권과 조정의 적대성은 허구적인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그 연장으로서 노부나가와 덴노의 상호 의존, 상호 결합성을 강조하였다. 이 설에 따르면 오다 정권과 덴노 조정의 관계는 한쪽이 한쪽을 압도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상호 이익을 위한 상호 결합이었다. 덴노 가의 빈약한 상황, 권위가 필요하였던 노부나가의 상황 모두를 살펴보면 양자의 사이는 적대가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이 설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이러한 노부나가와 덴노 간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고 있는 주제이다. 어느 주장도 과거의 것과 완전히 단절되지 않으나, 어느 주장도 새로운 것이 이 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는 이마타니의 덴노 권위 부상, 노부나가의 권리 압도설이 위축되고, 공무결합왕권과 같은 양자 협조설이 좀 더 학계에서 우위를 얻어가고 있다.

4.5. 종교 정책


오다 노부나가의 종교 정책에 대해 흔히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전통 종교 권위를 부정하고 파괴하려고 한 무신론자"이다. 히에이잔 엔랴쿠지에 대한 가열찬 공격, 이시야마 혼간지와의 장기간에 걸친 전쟁이 이러한 생각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노부나가의 종교 정책이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존재한다.
노부나가의 무가 신격화론을 제기한 아사오 나오히로는 그의 노부나가와 조정 관계에 대한 이론과 유사한 이론을 종교 정책에서 전개하였다. 즉, 노부나가는 전통의 종교 권위를 적대하고, 그를 능가하는 무가의 권위를 구축, 무사도의 권위를 종교와 같은 위치로 상승시키려고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언급된 것은 단연 엔랴쿠지 방화, 이세 나가시마 공격, 이시야마 전쟁이며, 노부나가가 사쿠마 노부모리를 숙청할 당시 내린 질책문에서 혼간지측의 신불과 노부나가의 무편을 반대되는 것으로 대비되는 것을 들며 무사의 길과 종교의 길은 다르다고 언급한 것을 들기도 하였다. 나오히로의 이러한 견해는 이후 노부나가의 "혁신가"적 면모를 강조하는 학자들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이 설을 따른다면, 노부나가는 "왕법"과 "불법" 모두를 부정하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근세로의 혁신가"라는 것이 된다.
하지만 현재는 이에 대하여 많은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4.6. 해외에 대한 관점


노부나가가 대륙을, 즉 중국 본토를 침공하는 것을 바랐는가에 대하여 프로이스는 긍정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표현한 것과 같은 대륙 공격과 분봉을 계획하였다는 서술을 그의 일본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지를 두고 일본 사학계에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는 프로이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며 노부나가의 대륙 침략 계획은 없었다는 의견이 우세하며, 그의 대륙에 대한 태도는 교류 확대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프로이스의 기록을 긍정하며 노부나가의 대륙침략 계획이 존재하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가장 대표적이며 극단적인 예인 호리 신 박사의 경우, 프로이스가 기록한 노부나가의 분할안은 꾸며냈다고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며 노부나가에게 대륙을 침략할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하였으며, 그것에서 더욱 나아가 노부나가가 추구한 최종 목표는 화이변화를 이루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어찌됐건 이런 노부나가의 사상이 히데요시의 대륙 침공 야욕에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해 보인다.

4.7. 내정


적 다이묘와 일향종 세력의 잇키, 부하들에게는 가혹했지만 영지인 오와리와 미노에는 선정을 베풀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도 노부나가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은 영민의 지지가 있어서였다. 연이어 발생한 전란으로 황폐해진 교토의 상공업자들도 엄정한 노부나가의 통치를 반겼다고 한다. 오다 군의 아시가루(足軽)가 길을 가고 있는 여성을 희롱하는 것을 본 노부나가가 교토의 치안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스스로의 손으로 즉결 처형한 삽화도 있다.
혼노지의 변 후, 아케치 미츠히데를 따르는 호족층이 적었던 점도 이를 반영한다. 혼노지의 변 이후 미쓰히데가 자신을 무왕, 노부나가를 주왕에 비교하자 노부나가의 통치를 환영하던 교토에서는 이를 어린아이들까지 비웃었다고 전해진다.
규제 없이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는 시장인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는 노부나가가 가장 먼저 행한 정책이라는 통념이 있지만, 실제는 오미 남부의 센고쿠 다이묘 롯카쿠 사다요리(六角定頼)가 행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노부나가는 라쿠이치라쿠자를 대규모로 시행하여 비와 호 등을 중심으로 한 유통에 따른 상업 발전에 눈을 돌리고 당시 전란으로 전시호황을 누리고 있던 자유무역항인 사카이를 점령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등, 한 발 앞선 내정을 펼쳤다(유통에 따른 상업정책은 에도 시대 후기에 와서 중시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전까지는 연공(쌀)이 중시되었다).
공공사업에서도 손을 뻗쳐, 길을 정비해 1리(4km)마다 나무를 심어 표석으로 삼았다. 이는 자군의 행군 속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주변의 관문도 폐지하여 주변과의 왕래를 쉽게 해 상업을 활성화하였다. 타 지역에서는 적군의 진군 속도를 고려해 그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도량형의 통일에도 힘써 되에 각각의 소인과 도장을 찍어 단위를 통일하였다. 또, 질 나쁜 화폐는 못 쓰게 하고, 질 좋은 화폐를 사용하도록 선전령(選銭令)을 반포했다.

5. 가족관계


오와리의 호랑이라 불리던 걸물이었지만 말년에는 사이토 도산과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사이에 껴서 곤란한 처지였다. 그래도 누부나가를 신뢰해서 그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오다 노부히데의 라이벌인 사이토 도산의 딸. 정략결혼이었고 아이를 낳지는 못했지만 사이는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생애 제일 사랑했다고 알려진 여자로, 오다 노부나가는 24명의 자식들 중 이코마 키츠노의 아들인 오다 노부타다오다 노부카츠에게만 군의 총대장 자리를 맡겼다.
아명은 키묘마루. 노부나가의 후계자였으나 혼노지에서 노부나가와 함께 죽었다. 유능한 편이라 만약 살아남았다면 오다 가가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듯.
아명은 자센마루. 키타바타케 가에 양자로 보내졌으나 노부나가 사후 돌아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했지만 멋대로 하시바 히데요시와 강화하면서 산통을 깨버렸고, 아버지의 본거지였던 아즈치 성을 홀라당 태워버린 전적도 있어서 호부견자로 유명하다.
아명은 산시치마로. 간베 가문에 양자로 보내졌다. 혼노지의 변 이후 시바타 카츠이에 등과 손잡고 하시바에 맞섰으나 힘이 미치지 못해 사망하였다.
통칭 간주로. 형인 노부나가와는 노부히데 사후 가독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예절에 밝아서 가신들에게 신망을 얻었지만 능력 면에서는 형에게 미치지 못했다.
정략결혼을 위해 아자이 나가마사와 결혼했으나 이후 아자이 가가 아시카가 쇼군가에 붙으면서 오다 가와는 결별하는 바람에 결국 오다 가로 돌려보내지게 되었다. 이후 오다 가의 가신인 시바타 카츠이에와 재혼했지만 시바타가 하시바 히데요시(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다투다 사망할 때 같이 자살했다. 그녀의 딸이 바로 히데요시의 후처인 요도도노이다.

6. 여담 및 일화들


키는 약 170cm 되는 당대 일본 기준 장신[94]이었다고 하며, 500m 밖에서도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했다고 한다.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고 자칭하거나 불교 꼴통들을 탄압하는 등 세상 평판 따위는 신경 안 쓸 것 같은데도 교토 귀족들의 일기에 따르면 의외로 평판을 중시하고 늘 스스로가 올바른 싸움이라는 것에 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천하포무(天下布武)를 훈독으로 읽으면 "하늘아래 무를 펼친다"(天の下、武を布く)로 읽힌다. 무력을 통해 천하를 취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근년에 들어서는 무가정권으로 천하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도 많다. 상기의 서술대로 노부나가는 미노를 공략한 후에 거처를 이노구치로 옮긴 후, 이노구치의 지명을 기후로 개명하였고, 이 무렵에 천하포무라는 직인을 사용하였다.
처음엔 후지와라 를 자칭하다 타이라 로 갈아탔다. 이는 겐페이교체 사상[95]에 따라 행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96]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처음에는 타이라를 사용했다 후지와라 씨족의 종가인 고노에의 양자가 되어 후지와라씨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덴노에게서 도요토미를 하사받아 도요토미씨가 되었다. 후지와라씨는 중앙귀족 아니냐는 말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헤이케모노가타리 시대에는 엄연히 도우지(藤氏)라고 하는 무가 후지와라씨들이 있었다.[97]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었다. 서민들과 함께 춤을 추거나 노동요를 부를 때에는 모습을 서민들 앞에 드러냈다. 오봉 때에는 마을 주민을 즐겁게 해주었고, 마츠리를 즐겼다. 이는 전통적인걸 그닥 좋아하지 않는 노무나가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서민들과 친하고 격려도 잘해준 덕분에 당시 전쟁에 징집된 농민군들이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하고 잘 싸우게 된 계기가 되엇고,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늘 소수의 병력으로 전투에서 승리 할 수 있었다.
상경 이후 조정 등의 귀족계급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교토 귀족 공가들과도 친교가 깊었다. 특히 고노에 마에히사(近衛前久)와는 애당초 적대 관계였지만, 취미 등이 같아 잘 어울렸다고 한다.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측실을 조금밖에 두지 않고 대신 많은 아이를 가졌다고 한다. 또 당대 상류층들이 으레 그렇듯 와카슈도에 손을 대기도 했다.
서양 물건 수용에 적극적이라서 교토에서 열린 관병식 때 벨벳으로 된 외투에 서양 모자를 쓰고 참가하거나 만년에 전장에 나갈 때 서양식 갑옷을 입기도 했다. 예수회에서 받은 지구의, 시계, 지도 등을 잘 이해했다고 하며, 사상도 개방적인 면이 있어서 예수회 선교사에게 지동설과 둥근 지구의 모양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는 "과연 그 이론이 타당하다"라고 흥미를 보였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아즈치 성을 그린 병풍도를 선물했고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인 1585년에 도착했지만, 현재 이 병풍도는 분실되었다.
하루는 삿사 나리마사의 성인 히라 성 근방의 한 연못을 비 오던 날에 홀로 지나가던 마타자에몬이라는 무사가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형상을 한 마물 구렁이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쳐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얘기하고 다녔다. 이 소문을 듣고 흥미가 동한 노부나가는 직접 마타자에몬을 불러서 경위를 조사한 뒤, 주변의 백성들과 부하들을 동원해 연못으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새벽부터 물을 퍼내다가 물이 어느 정도 이하로 줄지 않자 아예 자신이 직접 입에 와키자시를 문 채 물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구렁이를 찾아보고는 '구렁이 같은 건 없다!'라고 공언했을 뿐더러, 확실히 하기 위해 수영에 능한 부하 2명에게도 확인을 명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노부나가는 우연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원래 히라 성의 삿사 나리마사의 가신들이 모반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조만간 노부나가가 직접 히라 성을 시찰하러 올 예정이었다. 이 시찰 소식을 들은 히라 성의 무사 중 하나가 노부나가는 모반의 소문을 믿고 자기들에게 할복을 명하러 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노부나가를 암살할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 그런데 하필이면 노부나가가 갑작스럽게 스케줄을 바꿔 마물퇴치(...)를 하고 그 길로 히라 성에 들르지 않은 채 기요스 성으로 돌아가버려서 암살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98]
노부나가의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거지를 봤는데, 궁금해진 노부나가가 신변을 알아보니 근처 마을에서 따돌림을 받는 장애인이었다. 불쌍하게 생각한 노부나가는 후한 비용을 주며 거지가 거처할 만한 집을 지어 줄 것, 그리고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거지를 보살피고 먹여살려줄 것을 근처 마을의 촌장에게 부탁하고 떠났다.
카네가사키 퇴각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 아네가와 전투[99]로 매제인 아자이를 괴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동생인 오이치가 콩주머니의 양 끝을 묶어 아자이가의 배신으로 앞뒤로 포위 당했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후대의 창작으로 추정된다.[100]
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용이나 셋츠 국분, 미요시 야스나가를 위시로 한 시코쿠 국분계획에서 볼 수 있듯, 노부나가는 '''무조건 구태하고도 미련한 세력을 때려 부수고, 오로지 미래를 향해 나아갈 혁신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았었다. 해당 지방의 유력 일족을 파악해, 조그마한 영향력과 명분만을 가지는 구태 세력일지라도 봉토를 수여해 자신의 세력으로 이용하는 방식 또한 많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상술한 동세토내해를 둘러싼 양부 - 양자 관계가 좋은 예시.[101]
아자이, 아사쿠라 등을 정벌하고 나서 아자이 히사마사,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 3명의 해골에 금박을 입혀 바라보며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해골을 가지고 술잔을 만들었다는 부분은 창작이지만, 시체를 훼손하여 금박을 입히고 구경거리로 삼은 부분은 신장공기 7권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는 덴쇼 2년(1574년) 정월, 연회에서 해당 3명의 수급에 금박을 입혀 안주로 삼았고 이를 매우 즐거워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노부나가의 잔혹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화로 꼽히며 창작물에서도 그렇게 묘사되곤 하지만, 미야모토 요시미와 같은 일부 학자들은 전국시대에 전사자의 수급에 명복을 기리는 목적으로 백분 등의 화장품을 칠하는 풍습이 있었다는걸 근거로 해당 일화도 노부나가가 해당 적장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기리고 새로운 출발을 기원하는 의미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02]
아케치 미츠히데의 어머니가 하타노 하루미치의 가솔과 교환으로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적장의 가솔을 몰살해 버렸고, 결과적으로 미츠히데의 어머니를 끔찍하게 죽게 만들어 격노한 미츠히데가 모반을 꾸미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1702년 편찬된 "오다군키"에 있다. 이는 탄바의 민담으로 전해지다 글로 적혀졌다고 하나, 진위 여부는 불분명하다.[103]
노부나가가 공의(公儀)로서 일본 열도에 군림하게 된 시점은 1579년이다. 확인되는 문서중에서 1579년 이후에야 그를 공의로서 표현하고 있기 때문.[104] 그러나 노부나가는 자신의 권력, 정권을 일컫는 데 공의보다 천하라는 용어를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105]
노부나가가 성을 비우고 성지의 하나인 비와 호의 치쿠부시마에 참배하러 간 일이 있었는데, 왕복 30리 길이어서 시녀들은 노부나가가 아마 당일은 목적지 근처의 나가하마 성[106]에 묵을 것이라고 믿고 너도나도 제 자리를 비우거나 아예 성을 나가 근처의 절인 쿠와미노데라에 참배하러 가기도 했다. 문제는 노부나가가 사람들이 그 기력에 혀를 내두를 만큼 빠르게 예정을 끝내고 바람 같이 돌아와 버렸다는 것.
돌아온 노부나가는 시녀들이 무단으로 자리를 비운 것에 격노해서 일부를 묶어 놓고, 쿠와미노데라에 사자를 보내서 거기 있는 시녀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장로는 시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대신 사죄했는데, 노부나가는 장로까지 같은 죄를 물어 처형했다고 한다.[107] 단 이 문단에서 '처형'이라는 단어는 세이바이(成敗)라고 쓰여 있는데, 이 단어는 처형하다는 뜻 이외에도 엄하게 벌하거나 응징하다는 뜻까지 포함하는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어서 반드시 처형해버렸다고 단언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처벌의 수위는 여태까지 처형이었는지 엄중 처벌이었는지 확실하지가 않다.
그는 바둑과 코와카마이(幸若舞)[108]를 좋아하고 사루가쿠(猿楽)를 싫어했다. 스모(相撲)를 매우 좋아해서, 아즈치 성 등에서 대규모 스모 대회를 자주 열었다. 또, 스모 대회는 신분과 관계없이 노부나가의 측근과 서민들이 섞여 스모를 했다고 한다. 바둑에서 사용되는 명인(名人)이란 말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고와카마이의 아츠모리 중 인간세상 오십년 하천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 같구나, 한 번 태어나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 죽지 않을 자 그 누구인가(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라는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걸 좋아했고 그 밖에도 수영, 매사냥, 말타기, 활쏘기 등 신체와 무예를 닦았다.
사망하기 전날 삼패바둑이 무승부가 되는 경기를 관전하였다. 이에 따라 삼패를 바둑계에서 불길하게 여기고 있다.[109] 그런데 실은 이 대국의 기보가 남아있다.해당 기보 그리고 승부가 무승부인 건 맞지만, 기보상으로 보았을 때 삼패가 나올 만한 곳이 없다. 때문에 이런 야사가 흔히 그렇듯 후대에 창작된 이야기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미요시 가문을 제압한 뒤, 쓰보우치(坪内)라는 이름을 가진 미요시 가문의 요리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때, 노부나가는 쓰보우치에게 “요리를 잘하면, 죄를 사하고 요리사로 고용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쓰보우치가 만든 요리를 노부나가가 먹었지만, “음식이 싱겁다.”라며 쓰보우치를 처형하려 하였다. 그러나, 쓰보우치는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렇게 내놓은 2번째 요리의 맛을 본 노부나가는 “매우 맛있다.”라며 수긍하고, 고용하였다. 그 후, 쓰보우치는 “애초에 2번째 요리를 내왔으면 좋았잖아.”라는 물음에 “처음 요리는 교토의 고급 요리였고, 나중 것은 맛이 강한 시골 요리였을 뿐이다. 결국 노부나가님도 시골 사람이란 말이겠지요.”라고 대답하였다.[110] 후일 이 이야기를 들은 노부나가는 “나의 요리사로 고용된 이상은 나의 취향에 맞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먼저 노력하는 것이 가신 된 자의 본분이다. 그것을 게을리했다는 것은 단순히 무능했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오다 노부나가의 호위를 맡았던 야스케라는 사무라이가 있었는데, 모잠비크 출신이라 추정되는 흑인이었다. 일본 최초의 흑인 무사를 거느렸던 것. 일본에 노예로 팔려왔다가 노부나가를 섬기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예수회 선교사로 "일본사(日本史)"를 저술해 당시 다이묘들의 기록을 자세히 남긴 루이스 프로이스가 남긴 기록이 있다.

"그는 중간 정도 키에 가냘픈 체구였으며, 수염은 적고 목소리는 카랑카랑하였다. 전투를 매우 좋아하여 군사 훈련에 힘썼으며, 명예심이 충만하였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모욕을 당하면 반드시 응징하였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인정미와 자비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잠자는 시간이 짧아 아침 일찍 일어났으며 식탐은 없었다. 결심한 바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으며 전술을 쓸 때는 매우 노련하였다. 성질이 매우 급하여 격앙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지만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다. 가신의 충언을 따르지 않고 거의 무시하였으며 가신들은 그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술을 마시지 않았고 식사를 절제하였으며 사람을 다루는 데 매우 솔직하였고 자신의 견해를 주장할 때는 오만하였다. 일본의 모든 왕후(王侯)[111]

를 경멸하였으며 마치 부하를 대하듯이 그들을 내려 보며 말을 하였다. 또한 사람들은 절대 군주를 대하듯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는 전운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도 태연하였으며 인내심이 강하였다. 그는 이해력이 좋았으며 명석한 판단력을 가졌다. 신과 불에 대한 일체의 예배, 숭경, 모든 이교도적 점복과 미신적 관습을 경멸하였다. 당초에는 법화종에 속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지만 높은 관위를 받은 후에는 오만한 태도로 모든 불상을 멸시하였다. 하지만 약간은 선종의 견해를 쫓아 영혼의 불멸, 내세의 상벌 등은 없다고 여겼다. 자신의 저택에 있을 때는 매우 청결하였으며 모든 지시에 양심적이었다. 이야기할 때에 꾸물대거나 길게 전제를 다는 것을 싫어하였고 매우 비천한 자들과도 격의 없이 이야기하였다. 그가 각별히 좋아한 것은 유명한 차 도구, 좋은 말, 도검, 매 사냥이었고, 신분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자기 앞에서 나체로 씨름(스모)을 하게 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 누구든 무기를 휴대하고 그와 대면할 수는 없었다. 다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곤란한 일에 착수할 때는 매우 대담무쌍하여 사람들은 그의 말에 모두 복종하였다."[112]

라고 상당히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성격이 급하고 거만하다고는 하나 후대에 알려진 잔혹하다는 이미지와 달리, 그 근거는 대부분 창작되었거나 당시의 상식으로는 그닥 잔혹하다 욕할 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불교세력에 대한 탄압이 당시 사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불교도들을 자극해서 잔혹한 노부나가의 이미지가 유포되었고, 후일의 에도 시대 군담 등에서 적극적으로 그 설을 채용하여 노부나가의 캐릭터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프로이스는 그를 두고 '이상할 정도로 외경을 받고 있었다. 유럽의 절대군주처럼 행동했다. 자신의 명예에 대한 모욕은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했다.
도검 수집 매니아였다. 헤시키리 하세베,소우자 사몬지, 쇼쿠다이키리 미츠타다같은 검들이 오다 노부나가가 소장했던 도검. 또한 다기 콜렉터.
1578년 9월 30일 츠다 소규의 정에서 열린 다회가 노부나가의 대표적인 대규모 다회로 꼽히는데, 노부나가와 쿠게 고노에 사키히사가 같은 자리에 앉았으며, 사쿠마 노부모리, 타키가와 카즈마스, 호소카와 노부요시, 오다 노부즈미, 츠츠이 준케이, 호리 히데마사, 미요시 야스나가, 와카에 산닌슈 등이 모였던 참으로 쟁쟁한 모임이었다고 한다.[113]
자신의 부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처 네네(코다이인)가 남편이 너무 바람을 많이 피운다며 자신에게 하소연을 하자 친절하게 답서를 보내줬다는 기록이 있다.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114]

녀석이 그대(殿)[115]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

네네와 마에다 토시이에의 아내 마츠에게 보낸 편지에 봉토 운운하는 내용을 남기는 등 부하의 아내에게는 친절한 면이 있었다. 네네가 아이가 안 태어난다고 네네를 박대하는 걸 알고 하시바를 불러서 질책하기도 했다.
그의 일생을 다룬 사료 중 가장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는 책은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116]이다. 한 때 한일 양국 인터넷 회선을 달구던 노부나가 잔혹설의 근거와 노부나가 잔혹설에 반박할 근거가 모두 들어있는 신기한 책(...)이기도 하다.
교과서 등 대부분의 일반 서적에서는 전국시대 후기의 흐름은 오다 노부나가의 세력 확장을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교과서에서는 타네가시마 철포 전래 등 매우 중요한 사건을 빼놓고서는 거의 킨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노부나가-히데요시 연표'''수준이다. 전국시대의 끝은 노부나가를 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전국시대를 끝맺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치세를 따로 빼어 아즈치-모모야마[117] 시대 혹은 쇼쿠호[118] 시대로 부르기도 한다. 센고쿠 시대의 끝을 1615년 오사카 성 함락으로 보지 않을 경우는 보통 1573년의 무로마치 막부 멸망부터 1603년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쇼군 취임까지를 쇼쿠호 시대로 떼어서 취급한다.
2018년 현재도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이 생존해있으며 무려 18번째 당주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름은 오다 노부타카#s-3.
오다 노부나가의 후손들 중 일부는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에 편입되어서 자작 작위를 받는다.[119]
노부나가를 다룬 창작물에서 항상 나타나는 노부나가의 말버릇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바로 '데아루카(であるか)'. '그러한가', '그러냐?' 라는 의미다. 원래 이 당시의 표현으로는 '소-데아루카(そうであるか)'가 맞는 표현이지만[120] 소-(そう)를 빼고 자기 마음대로 줄인 표현이다. 이 표현은 신장공기에서 노부나가가 사이토 도산과 처음으로 대면할 때 사이토 가의 가신이 노부나가에게 '저분이 도산 공이십니다'라고 소개하자 노부나가가 '그런가(であるか)'라고 말한 것이 원 출처.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닌 기록이지만 이런 어법파괴(?)적인 표현도 가신들에게는 특이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전국무쌍이나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도 이 말버릇을 나타내고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17대손임을 주장하는 스케이트 선수 오다 노부나리음주운전에 적발되어 망신살을 샀다. 음주운전을 적발한 경관 이름도 하필이면 "아케치"라서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고 있다고...[121]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생존 중에 활약한 기록이 거의 없다.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가 집권했을 때,노부나가의 후계자라는 의미로 전임 관백(関白)이라는 호칭으로만 나온다. 본명에 대한 기록도 없다.[122] 따라서 전국 3영걸중 유일하게 본명이 조선왕조실록에 없는 인물. 조선왕조실록 고유명사 검색 서비스에서도 노부나가만 안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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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야마가타의 한 사찰(三宝寺)에 보관된 오다 노부나가의 초상이라고 하는데, 그 곳에서 설명하는대로 실제 오다 노부나가를 보고 그렸다고 믿기는 어렵다. 당대 예수회 선교사였던 Giovanni NIcolao의 작품이라 설명하지만 오다가 죽은 다음인 1583년에 일본으로 보내진 화가라 그가 작가가 맞더라도 오다를 직접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없다. 또한 이것이 16세기 유럽 회화나, Giovanni NIcolao의 작품이라고 소개된 그림과는 기술적인 면이나 화풍에서 이질적인 것을 보면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일본이 유럽식 회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근대나 그 이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

7. 참고 서적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 若松和三郎(2013年 10月 1日, 戎光祥出版)[123]
: 阿波三好氏 - 天野忠幸(2012年 10月 10日, 岩田書院)[124]
: 四国と戦国世界 - 四国中世史研究会 · 戦国史研究会(2013年 5月, 岩田書院)[125]
: 戦国史研究 第66号 - 戦国史研究会(2013年 8月 25日, 吉川弘文館 & 戦国史研究会)[126]

8. 대중문화에서



[1] 일본이건 해외이건 가장 유명한 노부나가의 초상이다. 사실상 노부나가의 아이덴티티로 봐도 될 정도. 원본은 아이치현 도요타시 조코지(長興寺)에 소장되어있다. - 三好一族と織田信長 p.11[2] 양력 6월 23일(天文3年5月12日)[3] 지금의 아이치현 서부[4] 현재의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한자는 다르지만 같은 곳.[5] 원래 오와리는 시바 가가 통치하던 곳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가신이었던 오다 가가 실권을 차지하였으며 이 시점에서는 다시 오다 가의 방계이자 가신이었던 오다 노부히데가 실권을 쥐고 있었다. 즉, 원래 오다 노부나가는 신분상 가신의 가신이었다. 당시 전국시대의 일본은 이런 하극상이 꽤 있었고 당장 오다 노부나가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도 다이묘 토키 가문을 내쫒고 그 자리를 차지했었다.[6] 그러나 이것이 곧 노부나가의 오와리 통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와리 동남부는 이마가와 가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노부나가가 오와리 통일에 8년 내지 10년이 걸렸다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7] 스루가, 토토우미는 지금의 시즈오카현, 미카와는 아이치현 동부[8] 장인이 사이토 도산, 그 아들이 요시타츠고 요시타츠의 아들이 타츠오키이므로 오다 노부나가에게는 처조카에 해당한다.[9] 오타 규이치신장공기에 "미요시 슈리노다이부(나가요시)에게 권력이 넘어가 이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기에 모반을 꾸몄다"고 (미요시 측에서 본)쇼군 요시테루가 사망한 이유를 적어놓고 있지만, 나가요시는 이미 1564년에 병몰하고 죽음이 감쳐진 뒤였다. 한 마디로 노부나가 세력은 요시테루가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셈(...) - 阿波三好氏 p.42[10] 반면 미요시 가문은 1565년 5월에 요시테루를 살해한 뒤, 미요시 산닌슈파와 마츠나가파로 이분되는 내란에 빠지게 되었다. 요시츠구 또한 이 난에 휘말려, 1년 동안 쇼군 후보가 없는 정치를 행했음에도 1566년 6월 11일에 아시카가 요시히데가 효고항에 쇼군 후보로서 상륙하는 등의 일을 거쳐, 그를 새로운 무로마치 쇼군으로서 인정하고 만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55[11] 己行記 永禄十一年九月二十四日条/天王寺屋茶会記 永禄十一年十月条 - 阿波三好氏 p.261[12] 末吉文書 会合衆等書状写 - 阿波三好氏 p.261[13]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 62[14] 言継卿記 永禄十一年九月三十日条 - 阿波三好氏 p.261[15] 公卿補任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62[16] 三好長慶(宮帯) - p.89[17]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16[18] 柳生文書 織田信長朱印状 (永禄十年)八月二十一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56[19] 吉川家文書/小早川文書, 후세 편찬서인 上杉年譜에도 잘나타나있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16[20]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64[21] 二条宴乗記 永禄十二年一月十一日条 - 阿波三好氏 p.261[22] 細川両家記 永禄十二年三月六日条 - 阿波三好氏 p.261[23] 言継卿記/多門院日記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17[24] 당시에는 가독을 아들 토모후사에게 양도하고 은거한 상태였지만, 토모노리가 가중 권력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기에, 가문의 실질적 수장은 토모노리였다.[25] 今井宗久書札留 今井宗久書状写 永禄十二年九月四日付 - 阿波三好氏 p.263[26] 毛利家文書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18[27] 三浦講中文書 下間頼総書状 (元亀元年)十月三日付 - 阿波三好氏 p.44[28]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20[29] 11월 12일부터 12월 22일까지 이어지는 나가후사와 히사히데의 인질 교환과 강화 결정은 코후쿠지의 진켄이 작성한 진켄키(尋憲記)에 잘 나타나있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21[30] 후속 부대로 도착한 나가하루와 나가후사는 시간이 좀 더 지난 1월 말에 아와로의 귀환을 이루었다 한다. 己行記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22[31] 노부나가에게 다케다, 우에스기, 롯카쿠, 아사쿠라, 사사, 미요시 등의 적대세력에 의한 포위망이 겐키 연간에 형성되었던 것 처럼, 모리 가문 또한 오토모, 아마고, 우라가미, 미요시 등이 연합한 포위망으로 인해 비슷한 시기에 골머릴 썩었다. 이에 양세력은 미요시 가문 등의 공통의 적을 상대하고 서로의 배후를 안전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쇼군 요시아키를 중심으로 친선 관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毛利家文書/益田家什書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30[32] 柳沢文書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42[33] 小早川文書/宍戸文書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43[34]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52[35] 尋憲記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53[36] 二篠宴乗日記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53[37]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54[38] 山崎文書 織田信長朱印状 (元亀四年)四月十九日付 - 阿波三好氏 p.263[39] 나가후사는 동년 5월 18일 이후 시작된 우에자쿠라 전투에서 주군 호소카와 사네유키&나가하루에 의해 토벌당하여 장남과 함께 전사했다. 松家家文書 (元亀四年)五月十五日付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166/阿波三好氏 p.46[40] 나가하루에게 직빵으로 보낸 서장은 확인되지 않고, 나가후사로 인해 난감한 상황을 겪었던 모리 가문에게 보낸 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吉川家文書 安国寺恵瓊書状 天正元年十二月十二日付 - 阿波三好氏 p.263[41] 畠山義昭氏所蔵文書 三好長治書状 (天正三年?)五月二十五日付 - 阿波三好氏 p.263[42] 龍谷旧図書館所蔵文書 雑賀年寄衆署状 (天正三年)七月十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38[43] 阿波三好氏 p.231[44] 龍谷大学図書館所蔵文書 三好康長·松井友閑連署起請文 天正三年十二月 - 戦国史研究 第66号 p.18[45] 阿波三好氏 p.232[46] 四国と戦国世界 p.138[47] 四国と戦国世界 p.138[48] 土佐国蠧簡集 織田信長書状写 十月二十六日 - 戦国史研究 第66号 p.21[49] 같은 아와지를 본거로 하는 칸 수군 또한 진고로와 같이 반 노부나가 전선에 가담하게 된다. 船越文書七号 小早川隆景書状写 (天正五年)正月十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39[50] 阿波三好氏 p.232[51] 吉田文書 織田黒印状写 (天正九年)十一月六日- 戦国史研究 第66号 p.25[52] 四国と戦国世界 p.148[53] '쿠로다케 몬죠(黒田家文書)'에 전하는 히데요시의 아와지 진공에 관한 문서는 대부분 연대가 기입돼있지 않다... 덕분에 학자들에 따라 연대의 비정이 다르게 나오기도 한다. 1580년은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박사의 9월 12일/9월 16일/9월 24일 문서와 11월 24일 모토치카 문서 사본을 통한 비정이다. - 四国と戦国世界 p.150[54] 戦国史研究 第66号 p.25[55] 편찬사료인 미요시 카후(三好家譜)에서는 사네유키가 노부나가 측의 명령으로 나가하루를 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노부나가가 호소카와 가문 일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을 생각해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 四国と戦国世界 p.139[56] 三原城城壁文書 小早川隆景書状 - 阿波三好氏 p.264[57] 후술될 시키부노쇼가 등장하는 노부나가 주인장과 야스나가 서장은 발급 연도가 적혀있지 않다. 따라서 이 일의 비정은 자연스럽게 2차 사료인 군키모노로 행하곤 하는데.... 성립 지역이 다른 모토치카키(元親記)와 무카시 아와모노가타리(昔阿波物語) 두 서적이 시키부노쇼의 항복을 1578년이라 기재해놓고 있긴 하다. - 阿波三好氏 p.234[58] 두 사료는 전부 香宗我部家伝証文 소속 - 戦国史研究 第66号 p.23[59] 아마노 타다유키(天野忠幸) 박사는 '11월 23일 마츠이 유칸 서장'을 이용하여 1580년이라 비정했다. - 四国と戦国世界 p.150[60] 四国と戦国世界 p.141[61] 阿波三好氏 p.236[62] 四国と戦国世界 p.149[63] 나카히라 케이스케(中平景介) 씨는 발급년도를 1581년으로 비정해 노부나가의 반 쵸소카베 태세를 좀 더 나중의 일로 주장하고 있다. - 戦国史研究 第66号 p.25[64] 士林証文 織田信長朱印状写 天正九年正月二十三日付 - 阿波三好氏 p.51[65] 더불어 치카야스에게 보내는 야스나가의 서장에서, 야스나가는 자신의 이름을 야스나가(康長)가 아닌 야스요시(康慶)로 적었다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중세 일본에서 이름을 바꾸는 개명행위는 정치적 요소가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돌이켜 본다면, 미요시 가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미요시 나가요시의 요시(慶)를 사용했던 당시의 야스나가의 정치적 위치와 자신의 의욕은 상당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 阿波三好氏 p.236[66] 훗날의 관계로 인해 모토치카와 히데요시의 사이가 언제나 극악이었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당시에는 여러번의 서장 교환이 있었을 정도로 표면적으론 양호한 관계였다. 모토치카의 새로운 담당 외교관이라 봐도 될 정도. 吉田文書 長宗我部元親書状写 (天正八年)十一月二十四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41[67] 土佐国蠧簡集 織田信長書状写 (天正八年)十二月十五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41[68] 四国と戦国世界 p.152[69] 信長公記 天正十年二月九日条 - 四国と戦国世界 p.152[70] 寺尾菊子氏所蔵文書 171번의 天正十年五月七日付け織田信長朱印状 - 阿波三好氏 p.238[71] 宇野主水日記 - 阿波三好氏 p.238[72] 군키모노인 세슈헤란키에서는, 노부타카의 양부이자 노부나가가 강제로 은거시킨 칸베 토모모리가 노부타카의 시코쿠 배령과 동시에 감시 및 제약이 해제되어 칸베 성으로 돌아왔다는 기술이 있다. 노부타카의 양부가 교체되었을 것이란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勢州兵乱記 - 阿波三好氏 p.239[73] 土佐国蠧簡集残編六 三好信孝書状 (天正十年)六月一日付 - 阿波三好氏 p.51[74] 양력 6월 19일[75] 양력 6월 16일[76] 현재 교토 지하철 카라스마오이케역 근처에 있던 노부나가의 저택. 오오기마치 덴노의 아들 사네히토 친왕이 이주하면서 고쇼가 되었다. 지금의 니조 성과는 다른 곳이다.[77] 노부나가 성격상 일단 눈앞에 일이 닥치면 최선을 다하고 적의 손에는 죽지 않으며 내가 갖지 못한다면 상대도 가지지 못한다 라는 데 이걸 최후까지 지켰다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실제 노부나가는 포기하지 않고 그냥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전해진다.[78] 일본의 농민들은 평화시기에는 얌전히 농사일에 종사하다 근처에 전쟁 직후 패한 쪽에서 패잔병이 생기면 이들을 사냥해서 무기 등 돈될만한 것을 챙겼다.[79] 기존 상인들이 형성한 동업자 조합인 이치자(市座)에 주어진 특혜를 폐지하고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경쟁을 할 수 있도록 한 시장이다.[80] 전국시대 지도를 보면 오다 가의 땅은 상당히 작아 보이지만 상술했다시피 매우 비옥한 땅이었기 때문에 고쿠다카로 치면 매우 알찬 땅이었다.[81] 사냥과 말달리기를 통해 늘 체력을 단련했다[82] 대표적인 예가 사쿠마 노부모리[83] 노부나가의 근면함을 따라올 자는 드물었다[84] 참고로 도검류에 의한 사상자는 3퍼센트 정도[85] 일종의 군담소설[86] 阿波三好氏 p.38[87] 四国と戦国世界 p.135[88] 阿波三好氏 p.265[89] 阿波三好氏 p.50[90] 阿波三好氏 p.50[91] 阿波三好氏 p.51[92] 戦国史研究 第66号 p.26[93] 모토치카가 이요 남부의 우와군(宇和郡)을 침공하자 사이온지 가문이 이를 노부나가에게 전달했고, 이를 받은 노부나가의 부교슈(奉行衆)가 사자(上使)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예. 土佐国蠧簡集/阿波国徴古雑抄 法花津前延書状 (天正八年)三月十八日付 - 四国と戦国世界 p.140[94] 현대 일본인 기준으로 치환하면 약 190cm에 달한다.[95] 겐지헤이케가 번갈아가면서 정권을 잡는 것이 무가의 형세라는 사상.[96] 박수철,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97] 대표적으로 우에스기씨가 후지와라 북가 카슈지계열이다.[98] 신장공기 1권 '뱀을 물리친 일' 조.[99] 1570년 6월 28일 아네가와姉川에서 노부나가군이 양동작전으로 아자이, 아사쿠라 연합군을 괴멸시킨 전투[100] 아니메 빙과 20화의 대하 드라마가 바로 이 이야기를 방영한 것이었고, 이를 밖에서 잠긴 창고에 갇혀있다는 힌트로 써먹는다.[101] 阿波三好氏 p.239[102] 宮本義己, 2010, 『誰も知らなかった江』, p. 61-62.[103] 구태훈 교수, "오다 노부나가"[104] 四国と戦国世界 p.148[105] 오다 도요토미 정권의 사사 지배와 천황[106] 당시 히데요시의 거성이다.[107] 신장공기 14권 텐쇼 9년 4월 10일조 기사.[108] 아츠모리 항목에서 볼 수 있는 일본 고전 무용 음악. 실제로 노부나가는 아츠모리를 좋아해 즐겨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109] 만화 히카루의 바둑의 번외편에 이 야사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110]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의 감각에서는 지방인 오와리 출신이며, 땀을 많이 흘리고 운동량이 많은 전장에서 영양분으로 삼기 위해 짠 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무사 계급 출신이었다. 반면 교토의 공가(公家)식 요리는 현재도 심심한 간에 은은한 귀족적 풍미가 특징이다. 사실 건강적으로는 전자가 더 좋은 게, 후자의 경우에는 나중에 몸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11] 다이묘를 말함.[112] 박수철 편역,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인물인가"에서 발췌. 해당 서적은 프로이스 일본사의 편역본이다.[113] 天王寺屋会記 - 阿波三好氏 p.228[114] 藤吉郞. 당시 히데요시의 이름.[115] 원문은 도노.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116] 히라이 카즈사(平井上総) 박사는 신장공기를 1차사료 (문서군) 쪽이 아닌 군키모노나 계도, 예수회 서간이나 실록 등의 편찬사료 쪽으로 분류하고 있다. - 長宗我部元親·盛親 p.270[117] 각각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 이름. 문화·예술사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118] 오다와 도요토미의 앞글자를 떼어 음독한 것.[119] 출처 일본어 위키피디아 #. 문서에 따르면 작위를 받은 오다씨는 4명인데, 2명은 노부나가의 동생 나가마스(長益)의 후손이고, 나머지 2명은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카츠(信雄)의 후손들인데, 메이지유신 당시 오다 노부토시(織田信敏)는 텐도(天童)번,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는 카이바라(柏原)번의 다이묘였던 이유로 자작을 받은 것.[120]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철자법인 역사적 가나 표기법으로는 さうであるか로 쓴다. 오늘날의 일본어 표현으로는 '소-카(そうか)'[121] 경관의 이름이 진짜 아케치인지는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루머에 불과하다. 또한 노부나리가 노부나가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는 정확한 구체적 증거가 아닌 노부나리의 증조부가 자칭한 것이 시초라서 정말로 그가 노부나가의 후손인지는 미스테리.[122] 사후에도 노부나가의 후손은 실록에 딱 2명 등장한다. 숙종시절에 사신으로 온 하타모토 오다 노부카도(織田信門)와, 구한말에 고종에게 훈장을 받은 화족 오다 노부치카(織田信親) 자작.[123] 내용 자체는 1989년에 와카마츠 씨가 출판한 『篠原長房』에 수정과 가필을 더한 서적이다. - 戦国三好氏と篠原長房 p.凡例/新版の刊行にあたって[124] 아마노 박사가 중심이 되어 70 ~ 10년대의 논고들을 묶은 서적이다.[125] 참조한 것은 아마노 박사 논고.[126] 참조한 것은 나카히라 씨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