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요시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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村上義清
1501년 3월 29일, 음력 3월 11일 ~ 1573년 2월 3일, 음력 1월 1일
일본 센고쿠 시대 다이묘로, 시나노 북부의 카쓰라오성의 영주이기도 하다. 1520년 아버지인 무라카미 아키쿠니에게서 가독을 상속받아 당주가 되었고 카이를 지배하고 있던 다케다 가문과 끝임없는 대립 끝에 다케다 신겐에 의해 세력권인 북시나노를 빼앗기고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탁한다. 이후 1573년 끝내 세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병사한다.
다케다 신겐의 진정한 숙적이라고 해도 좋을 맹장으로 신겐이 겪은 대패인 우에다하라 전투, 토이시쿠즈레가 모두 이 인물과의 전쟁에서 발생했고 신겐에 의해 북시나노를 빼앗긴 이후에도 제4차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 우에스기 겐신에 의탁해 있을 때 다케다 노부시게를 전사시켰다.
우에다하라에서는 당시 숙로였던 아마리 토라야스와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했는데 숙로라하면 가신들중 최고위직인 가로들 중에서도 특히 배분이 높은 직위였다. 가신들중 가장 짬이 높고 배분이 높은 무장들로서 아버지인 다케다 노부토라시절부터 가문의 기둥이었 두사람이 나란이 전사한 대패였던 것이었다.
도이시쿠즈레는 도이시성을 공략증 요코타 타카마츠를 위시한 가신들을 잃고 고전하다가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본대에게 급습을 당해 처참하게 박살난 사건으로 신겐 본인도 카게무샤를 희생해가며 겨우 살았다는 전설도 있을 정도의 대패였다.
천하의 다케다 신겐도 결국 야전으로는 견적이 안나오는 상대라고 판단하여 그 유명한 사나다 유키무라의 조부인 사나다 유키타카에게 지략으로 공략하라는 명을 내리고 이에 사나다 유키타카는 신겐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긴 난공불락의 토이시성을[1] 내통자를 만들어 함락시킴으로서 군사벨런스를 크게 흔들게 된다. 세력이 줄자 가신단이 흔들리고 신겐에 내통하여 반란이 일어나고 주요 가문들이 신겐에 투항해버리는등 사태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악화되어 본거지인 카스라오성을 탈출하여 도망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래도 당대의 맹장답게 근성으로 병력을 수습해 성을 재탈환 하지만 결국은 거기까지... 일시 물러난 신겐이 다시 정비해 공격해오자 더 이상은 버틸 여력이 없어 조상대대로의 땅을 떠나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탁하게 된다. 우에스기 겐신은 이때 그에게 영지를 되찾아줄 것을 약속하는데 이는 가와나카지마에서의 길고 지리한 대치의 도화전이 된다. 훗날 가와나카지마의 싸움에서 다케다 신겐의 오른팔 같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를 전사시켰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용맹을 떨치지만 결국은 고향땅을 다시는 밟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늘 선두에 서서 돌격하던 맹장답지 않게 장수한 73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불과 5개월 후에 숙적인 다케다 신겐이 사망했으니 몇달만 더 살았어도 숙적의 죽음을 보고 죽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케다 신겐과는 정말 서로간에 피맺힌 원한으로 조상 대대로의 영지를 빼앗은 대적과 소중한 가신들에 이어 가장 아끼던 동생의 목숨까지 앗아간 원수의 관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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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신장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북시나노의 다이묘로 등장. 전형적인 맹장형 무장. 전투력은 뛰어나지만 하필 옆동네의 다케다 신겐이 최고의 버프를 받고 이있는 최강캐중 하나니 특기인 야전으로도 승산이 희박하고 계략의 개념이 있는 시리즈면 역사대로 정말 싸워보지도 못하고 휘들리면서 가신단이 계략에 걸려 줄줄히 포섭되고 이탈하는 피눈물 나는 사태가 벌어진다.
[1] 戸石城이지만 숫돌 같은 암반위에 조성돼 있어서 砥石城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침공루트가 숫돌같은 암석으로 이뤄진 절벽뿐이라는천혜의 요새였다. 원래 사나다가문의 영지로서 무라카미에게 빼앗긴 원한이 있는 성이자 사나다가문의 신화가 시작되는 운명의 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