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
1. 개요
일본 전국시대 다이묘이자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던 전국시대에도 견줄 만한 이가 없던 명장. 통칭 '''가이의 호랑이(甲斐の虎)'''[2] . 일본에서 센고쿠 시대 '전국 3영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장이다. 우에스기 겐신과의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며, 손자병법에서 따온 풍림화산의 깃발을 들고 전장을 누빈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통은 4남 다케다 카츠요리.[3]
2. 이름
아명은 다케다 다로(武田太郞). 성인이 되어 당시의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하루(足利義晴)의 이름을 받아 다케다 하루노부(武田晴信)가 된다. 훗날 신겐이 불가에(형식적으로) 입문하면서 법명을 신겐으로 하게 되어, 다케다 신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4][5]
이런 연고로 정식 이름은 상당히 복잡한데, 다케다 다이젠다이부 하루노부(武田大膳大夫晴信) 또는 다케다 뉴도 신겐(武田入道信玄). 뉴도는 출가하여 법명을 얻은 무사에게 붙이는 별칭이고, 다이젠다이부는 관직명.[6]
3. 다이묘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
본래 아버지 노부토라와의 가독 승계 문제로 다투던 끝에 손을 써서 무혈 쿠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의 지위를 빼앗은 뒤, 아버지를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로 보내버린 후[7] 젊은 나이에 가이(甲斐, 현재의 야마나시현)의 다이묘의 자리에 올랐다. 신겐 측에서 보는 자료들에는 노부토라의 학정이나 악행 등 가혹한 행동에 반항한 신겐의 행동이었다고 하는 얘기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과대평가되었을 뿐 시나노·카이의 호족들에게 끌려다닌 신겐이 옹립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견도 있다.
4. 판도 확장
이후 가이의 내외부를 평정하고 북부의 시나노에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 스와[8] , 운노[9] 등 유력한 지방 호족들을 격파하고 카이, 시나노에 걸쳐 패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최후의 장애물이었던 북시나노의 호족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에게 원군을 요청하면서 승승장구하던 그의 인생에 최대 호적수를 만나게 된다.
이후 둘은 카와나카지마(川中島)란 지역을 두고 다섯 차례에 걸쳐 북시나노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대부분 지리한 대치로 직접적 충돌 없이 마무리되었으나 네 번째 전투에서는 쌍방의 생사를 걸고 크게 맞부딪쳐 서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보통 카와나카지마 전투라고 하면 이 네 번째 전투(하치만바라(八幡原) 전투라고도 한다.)를 일컫는다.
후호조씨의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해 쫓긴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막부에 청을 넣어 우에스기 겐신에게[10] 우에스기 일족을 계승하게 하고 간토 칸레이(關東管領) 직을 물려준다.[11]
이후 켄신에게 맹공을 받은 호조 우지야스는 이마가와 씨와 삼국동맹을 맺은 바 있는 오랜 맹우 신겐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신겐은 북시나노로 북상해서 켄신의 뒤를 치려고 한다. 물론 이는 호조와 대치하던 켄신에게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켄신은 시나노에서 신겐 측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카이즈 성을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에치고를 출발하고, 양군은 카와나카지마의 하치만바라에서 대치하게 된다.
전투의 상세 경위는 카와나카지마 전투 참조.
이 전투의 결과로 다케다 신겐은 엄청난 손실과 함께 유력한 중신들을 다수 잃었으나 결국 목표했던 카와나카지마의 패권을 장악했으므로 일단은 승리라 할 수 있다.하지만 시나노 북쪽은 결국 우에스기로부터 빼앗지 못하고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으며, 아들 카츠요리 대에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밀어주는 조건으로 얻게 된다.
이후 이마가와의 상경이 오다 노부나가와 오케하자마 전투를 치름으로써 좌절되면서 약화된 이마가와에 손을 뻗친 신겐은 이때다 하고 스루가를 손에 넣는다. 하지만 동맹인 이마가와를 배신한 것으로 인해 본래 삼국동맹 관계였던 호조와 동맹이 깨져 적대하게 된 데다 오랜 기간에 걸쳐 혼인관계를 맺어 온 맹우인 이마가와가 궁지에 처하자마자 배반해 뒷통수를 친 행동은 말할 것도 없이 저열한 배신행위였으므로 많은 다이묘들에게 다케다 가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이라는 평판을 얻는 등 신겐은 이 선택으로 인해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대신 그가 염원하던 바다에 면한 대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12]
후계자였던 다케다 요시노부가 후계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유폐된 뒤 얼마 안 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자살했다고도 하고 병사했다고도 한다. 이를 이마가와와의 전통적 동맹관계 단절과 연관시켜, 아내가 이마가와 가문 출신이었던 요시노부가 이끄는 친 이마가와 파와 이마가와 공격을 주장하는 反이마가와 파의 파벌 다툼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13]
5. 교토를 노리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축적해온 힘을 바탕으로 다이묘들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상경(上洛 조라쿠)에 도전하였는데, 교토로 가는 진로를 가로막고 있으며 빠르게 거대 세력으로 성장해 중앙에서 힘을 키워온 오다 노부나가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저지선에 봉착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군의 잔당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고, 신겐의 세력이 막강했기에 비록 노부나가의 동원 가능 병력이 신겐의 2배는 넘는 규모였지만, 절묘하게 구성된 포위망 때문에 그에 대해 섣불리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없었다. 신겐이 없더라도 사방에 적을 두고 싸우는 중이었던 판에, 신겐이 그 허를 찌르고 들어온다면 속절없이 망하는 상태. 문제는 다케다 가는 오다 가와 나름 우호적이었고 결혼동맹도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런 행동은 뒤통수를 치는 배신행위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14]
다케다 신겐은 형식상 동맹을 유지하던 노부나가에게 우호적인 서찰을 보내가며 도쿠가와의 영지 미카와를 침공했다. 물론 반쯤 오다의 가신이나 마찬가지였던 도쿠가와를 친 것은 오다를 친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으로, 사실상의 전쟁 발발이었다. 오다는 주력이 다 발이 묶여 있어서 몇천 안 되는 지원군밖에 보낼 수 없었고, 곧이어 미카타가하라 전투가 발발한다. 간략한 전개는 다음과 같다.[15]
- 1570년 음력 6월 8일. 아네가와 전투 발발.
노부나가-도쿠가와는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물리쳤다. 노부나가는 아사이 군을 맡아 고전했으나 이에야스는 아사쿠라를 무난히 격퇴하고 노부나가를 도왔다. 이는 노부나가의 가신 비슷한 분위기로 전국에 받아들여지던 이에야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력 구도상으로 보자면, 교토를 틀어잡고 전국을 손에 쥐고자 한 오다-도쿠가와 군과 그에 반발해 쇼군을 중심으로 오다에 반기를 든 세력의 연합이라 할 수 있다.
- 1572년 음력 10월 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하기 위해 코후에서 출발. 전군 3만 중 3천을 아키야마 노부토모에게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본군은 후호조 가의 원군 2천이 가세한 2만 2천으로 휘하 가신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아호구즈레 고개로부터 도토미로 공격해 들어감.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이끄는 5천 병력은 미카와(도쿠가와 영지) 공격. 현 시점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으로, 아사쿠라-아사이 동맹군, 아시카가 쇼군과 그 세력, 여기저기에서 지독하게 괴롭히는 잇코, 종도에 포위당해 손발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신겐의 대군 강림.[16]
- 1572년 음력 10월 13일.
신겐이 이끄는 본대가 다다라이 성, 아마카타 성, 이치노야 성, 이이다 성, 가쿠와 성, 무사카 성 등 도쿠가와의 성을 하루 만에 접수한다.
- 다케다 신겐이 교토를 침공하기 위해선 미카와, 오와리를 경유해야 했고,[17] 따라서 도쿠가와 측이 다케다와의 일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케다의 편에 붙는 것뿐이었다. 규모상으로도 약 세 배 가까이 차이나는 다케다 신겐은 도쿠가와가 항복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도쿠가와는 오다에 신의를 지켰다.
- 1572년 음력 10월 14일. 히토코토자카 전투 발발.
도토미에서 도쿠가와군과 신겐군의 전투 발발. 도쿠가와 군의 패주.
- 1572년 음력 11월까지,
신겐 휘하의 장수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도쿠가와군의 영지 카키모토 성, 이다이라 성 접수하고 신겐의 본대와 합류. 아키야마 노부토모군은 음력 11월까지 히가시 미노의 요충지인 이와무라 성을 함락시킴. 이때 노부나가는 아자이 나가마사, 아사쿠라 요시카게,[18][19] 이시야마 혼간지의 잇코 종도 등과 대립하고 있었기에 도쿠가와에게 겨우 3천의 원군만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1572년 음력 12월 19일. 도쿠가와군 영지 도토미의 요충지인 후타마타 성 함락.
도쿠가와는 하마마츠에서 농성을 생각하지만, 다케다군의 움직임을 보고 병사 1만 1천을 이끌고 출진.
- 1572년 음력 12월 22일. 미카타가하라 전투 발발.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군과 다케다군의 회전이 발발. 애초에 숫자로도 전술적으로도 이길 가망이 없었는데도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전을 명하고... 결과는 도쿠가와 군 궤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바지에 똥을 지리며 도주하고,[20] 신겐 군 압도적 승리로 피해 전무. 다케다군이 약 200인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해, 도쿠가와 군은 2천의 사망자를 내고 오다 측 지원군은 사령관까지 사망. 이 전투로 사방을 적에게 포위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오다 군의 뒤통수를 신겐이 후려치는 것을 막을 자는 없어진 상태.
...여기까진 그야말로 '''오다-도쿠가와군의 사망 플래그'''였다.6. 죽음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격파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겐 자신이 병으로 쓰러지면서 상경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사실상 오다-도쿠가와 연합의 붕괴가 눈 앞에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오다 노부나가의 '''운 빨'''도 참으로 대단하다. 역시 건강이 보배. 이때 노부나가는 한동안 잠을 못 이루다가[21] 신겐의 죽음을 듣고 '''3일 밤낮'''을 잠만 잤다고 한다. 그 정도로 노부나가에게 위협이 되었다는 소리.[22]
사세구로는 다음의 시를 남겼다.
근데 이 사세구의 해석은 일본에서도 여러 가지로 갈리고 있다고 한다. <노부나가의 야망 13: 천도>에서는 저 사세구를 '''"뒤는 남은 자들에게 맡긴다. 꾸미지 않아도 빛나는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게..."'''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후 다케다군은 스와를 거쳐 코후로 퇴각했다.'''"大ていは地に任せて肌骨好し 紅粉を塗らず自ら風流"'''
"대부분 땅에 맡겼으니 몸을 쉬고 싶다. 꾸밀 것 없이 내 인생은 풍류였도다."
워낙 중요한 타이밍의 미스테리한 죽음이었던 탓에 여러 소문과 전설, 학설이 분분한데, 여러 픽션으로 가장 일반에 잘 알려진 것이 "진군 중 노다 성에서 도쿠가와의 병사에게 저격당했다"라는 것이지만 당시의 조총은 그렇게 먼 거리에서의 저격이 불가능했다.
가장 신뢰성 높은 학설은 신겐의 시의였던 미슈쿠 켄모츠[23] 의 기술에서 유래한 병사설로, 신겐은 애초에 결핵에 걸려 건강이 극히 나쁜 상황이었고, 오다 세력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호령할 호기를 놓칠 수 없어 출전을 강행했다가 도중에 숨졌다는 것. 《갑양군감》은 신겐의 다른 시의였던 이타사카 호인이 현장에서 신겐의 병세를 살핀 걸 기록하고 있는데, 군감에 따르면 위암이라고도 한다.[24] 이렇듯 너무나 아쉽게 급사한 신겐의 사인은 현재에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갑양군감》에 따르면 신겐은 5년 전부터 자신의 병이 불치병일 것을 예측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 매우 구체적인 작전 지침을 남겼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적들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할 테니 최소한 3년간은 자신의 죽음을 숨기고 살아 있는 것으로 가장할 것, 자신의 유해를 스와 호에 갑옷을 입혀 가라앉힐 것(취소되고 불교식 장례식이 치러졌다), 후계자인 카츠요리에게는 호전적인 태도를 철저히 삼가고 전투를 가급적 피할 것을 주문했다. 또한 다케다 노부카도에게 자신의 신분상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자가 근신 이외에는 그리 많지 않았을 테니[25] 자신으로 위장해서 코후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게다가 자신이 살아서 팔팔하게 정사를 보고 있는 것으로 위장하기 위해 '''미리 자신의 서명과 인장을 쓴 백지를 3년치 준비해 놨다.'''
또한 《군감》은 한 가지 현재까지도 논란이 되는 기록을 해 놨는데, 신겐이 자신의 아들 다케다 카츠요리를 공식 당주로 인정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카츠요리의 아들 다케다 노부카츠가 공식 당주이며, 카츠요리는 노부카츠가 성장할 때까지의 후견인이자 대리에 불과한 위치로 공언했다는 것. 그 유명한 풍림화산[26] 이나 기타 여러 당주가 사용하는 깃발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손자 노부카츠가 16살이 되면 가독을 물려주라고 명령했다. 이 부분이 여러 모로 논란이 되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 없고''' 카츠요리가 공식 당주로 활발히 활동했다는 게 지배적 학설.[27][28]
심지어는 근본주의 성격 때문에 자주 음모론의 대상이 되는 예수회를 범인으로 지목해, 그들이 기독교에 우호적인 노부나가에게 교세를 불리려는 목적으로 접근하여 독약을 이용해 밀정을 시켜 신겐을 독살했다는 음모론스런 주장까지 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신겐의 숙적인 켄신도 우메보시를 먹다가 죽었다는 일반적인 설명과는 달리 노부나가에 의해 독살된 거라고 한다. 이유인즉 예수회가 대부분 독실한 불교 신자들인 노부나가의 적들을 제거해주고 노부나가를 통해 기독교를 퍼뜨리려 했다는 설. 사실 신겐이나 켄신이나 죽은 타이밍이 매우 절묘해서 이 주장은 그럴듯 해보이지만 음모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노부나가의 밀정이 일본 전국 시대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신겐과 켄신에게 독을 먹이는 게 가능했을까?(덤으로 예수회는 혼노지의 변에도 배후로 언급되곤 하는데, 물론 근거 없는 음모론)
7. 인물됨과 일화
평소 손자병법에 심취하여 '''풍림화산'''의 기를 전장에 나설 때 항상 내걸었다. 정확히는 『손자』 「군쟁」편에 나오는 구절로 "기질여풍, 기서여림, 침략여화, 부동여산(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이다. '신속함이 바람과 같고, 고요함이 숲과 같고, 쳐들어감이 불과 같고, 움직이지 않음이 산과 같아야 한다'라는 뜻이다.
신앙심이 깊으면서 때로는 잔혹한 모습을 보이는 등 이중적인 인물이었다. 에이 산 소각사건 당시에도 승려들을 적극 보호하는가 하면 본인도 출가해 신겐을 칭했고 <프로이스 일본사>등에서는 평소에도 전장에 승려들을 대동했다고도 하며, 켄신과의 격전지가 된 카와나카지마 근처의 사찰과 승려들을 보호하려고 카이로 옮겨오기도 했다.('신앙'이라는 이미지는 라이벌인 켄신에게 빼앗겨서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신겐도 상당히 독실한 신자) 그런가 하면 때로는 잔혹한 행위도 서슴치 않았는데, 시가 성 공략전에서는 포로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해 천여 개의 수급을 성에 잘 보이게 전시해서 성병을 공포에 떨게 하고 카사하라 키요시게 이하 성병을 모두 학살한 일화가 유명하다.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신겐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주로 무능해진 기존의 슈고 다이묘들을 신흥세력인 센고쿠 다이묘들이 하극상을 일으켜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센고쿠 시대의 특징인데, 다케다 가문은 특이하게도 슈고 가문으로, 상실돼가는 카이 슈고 다케다 가문의 권위를 아버지 노부토라와 신겐의 대에 재건한 것이다. 신겐은 다른 센고쿠 중-후반기 다이묘들이 그렇듯이 자신의 대에 폭발적인 영역 확장을 이뤘는데, 신겐의 개인적 카리스마로 느슨한 호족 연합체 조직을 이끄는 형태였기 때문에 중앙집권화가 진행되지 않았고 외교 실책 등 멸망의 원인이 생긴 것 역시도 신겐 대이기에, 신겐의 업적에는 명백히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한계가 존재한다. 픽션에서는 주로 아들인 카츠요리의 실책과 무능 탓으로 돌리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버지 대에 누적된 모순점들을 아들이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부하가 조금이라도 실패를 하면 바로 그를 죽여 없애버린다. 손실을 거의 내지 않고 적국을 정복하는 등 전술에 뛰어나며, 유구르타[29]
와 비슷하다. 매일같이 우상[30] 에 기도를 올리며, 승복을 즐겨 입고 전장에도 수백 명의 승려를 대동하는 등 신앙이 독실해 보이지만, '''사실 그 신앙은 타국을 정복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31] 스스로 '천태종 좌주 사문 신겐'[32] 이라고 칭한다.
그의 휘하에 있던 야마가타 마사카게, 나이토 마사토요, 악귀 미노 바바 노부후사, 코사카 마사노부등 네 명의 장수를 다케다 4명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화장실을 '산(山)'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한 가신이 "주군께서는 왜 뒷간을 산이라고 부르십니까?"라고 묻자 신겐은 "산에는 항상 초목(草木)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본어로 풀과 나무를 뜻하는 '초목(草木)'과 '악취(臭き)'는 둘 다 쿠사키(くさき)라고 발음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말장난.[33]
카이의 병사들은 강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그 힘은 오다 군의 네 다섯배에 달한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에 맞물려 카이의 지형 자체가 방어하기에 대단히 유리한 산악 지형이었다. 신겐은 생전 영토 확장과 공격전으로 일관하는데, "사람이 성이고 성벽이고 해자다"라며 카이 내에 방어용 성채를 쌓지 않았던 데에는 그러한 자부심이 있었던 것. 그러나 그 구심점에 있었던 카리스마적인 다케다 신겐의 죽음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카츠요리의 외교/정치적 실책이 겹치면서 부하 호족 다이묘들이 차례차례 이탈해버리고, 신겐의 죽음으로 재빨리 주변 적들을 정리하고 힘을 키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신겐 사후 다케다 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군소 세력의 몸으로 성장하면서 미노·키나이의 군소 세력들과 격전을 벌이던 노부나가에게 있어서 생전의 신겐은 위협적인 위치에 자리한 거대 세력이자 가장 공포스러운 가상 적국이었기 때문에, 노부나가는 신겐 생전에 신겐의 침공을 방지하려고 신겐에게 수시로 각종 선물, 공물을 바치며 기분을 맞추는가 하면 양녀 유키히메 등을 보내 결혼 동맹을 맺기도 했다. 노부나가가 보낸 선물을 담은 옻칠 상자의 옻칠을 면밀히 분석해서, 그것이 옻을 여러 번 칠하고 말린 고급스러운 칠기인 점을 알아내 "오다 가문의 우리에 대한 정성은 대단한 것이다"라고 판단해내는 등 신겐은 사소한 점도 놓치지 않으며 몹시 용의주도하고 세심한 눈매를 가진 인물이었음을 전하는 일화가 많다.
사타케 요시시게와 누가 신라사부로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新羅三郎源義光)[34] 의 적류인지 키배를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텐모쿠산 전투로 다케다 가가 멸망하면서 오다 가에 의해 다케다 일문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래도 가문이 단절되진 않았다. 차남 운노 노부치카 가계가 현재 카이 다케다 가 종가로 인정받고 있다. 노부치카는 다케다 가 멸망때 자살했지만 그의 아들인 노부미치와 노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보호를 받는다. 하지만 후에 오쿠보 나카치카 사건에 연루되어 먼 섬으로 유배된다. 이후 유배가 풀렸을 때 노부미치는 사망하고 20대의 노부마사는 70대 할아버지가 된 상태였다. 이 노부마사는 결혼하여 아들 노부오키를 얻었으며 후에 다이쇼 덴노 때 노부치카 가계를 카이 다케다 가 종가로 인정하였다. 그외에 7남 다케다 노부키요는 누나의 남편인 우에스기 카게가츠에게 도망쳐서 살아남아 요네자와 다케다 가를 이루었다.[35]
신겐과 역대 다케다 가문의 영주들이 성 대신 살던 저택인 츠츠지가사키 저택은 현재 다케다 신사가 되어서 참배객과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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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나시현 고후시에 있는 동상. 코후역에서 내리면 볼 수 있다. 고후시는 옛 다케다 가문의 본거지가 있던 곳으로 지금도 이곳에 가면 다케다 가문의 흔적이 시 곳곳에 남아 있다. 센다이가 다테 마사무네를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것처럼, 아예 이 지역에서는 다케다 가의 슈퍼스타나 다름없는 신겐을 지역의 '마스코트'로 활용하는 듯. [36][37]
야마나시현을 넘어서 일본의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전국시대 다이묘이고 각종 만화나 게임, 소설 등에서는 강력한 포스를 지닌 거물로 등장하지만 실상을 보면 결국 죽을 때까지 지방영주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이는 다케다 가 영주가 지방 호족들간의 연합 맹주 격에 불과했던 탓도 있고 결정적으로 다 이긴 전쟁에서 신겐이 허무하게 급사한 것도 있다. 신겐이 급사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카게무샤를 즐겨 사용했는데, 다케다 노부시게 이외에도 측근들조차 구분을 못할 만큼 닮았다는 동생 다케다 노부카도가 카게무샤 역을 자주 수행했다고 한다.
《갑양군감》은 모리 모토나리,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우에스기 켄신은 일본 최고의 4대 무장이며 이에 비견할 만한 무장은 중국을 뒤져봐도 없다고 극찬했는데, 이 뒤에 '''그런데 신겐은 그런 얘들보다 좀 더 잘났다'''라고 은근히 돌려서 신겐 신격화를 펼치고 있다.
8.1. 권력 장악
노부토라 대에는 많은 호족들을 숙청하는 등 카이의 슈고 가문이었던 다케다 가문의 지위는 그다지 공고하지 못했다. 신겐은 이것을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했는데, 우선 신세력들에게 대가 끊긴 명가를 계승하게 하는 방식으로 능력 있는 자의 신분을 올려 적극적으로 발탁했다.[38] 그리고 시나노 정복 사업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세워서 느슨한 호족 연합체에 불과하던 카이의 호족들을 다케다 가문 밑에 단결한 가신단으로 만들었고, 사나다씨 등 시나노 지방의 호족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이 과정에서 신겐은 다케다 가문의 권위나 인망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내인 산죠노카타를 통하여 중앙 정계에 줄을 대는가 하면, 스와 가문의 스와고료닌을 측실로 맞이하여 스와 지방의 민심을 사는 등 혼맥과 각종 뒷공작으로 최대한 정치적인 권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신겐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합체라는 한계를 극복하거나 중앙집권화를 이루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신겐이 죽자마자 가문의 단결력은 엉망이 되어 적 세력으로 돌아서는 가신들이 줄을 잇게 된다.
8.2. 금광 개발
코슈(카이) 지방의 금은 본래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신겐은 보다 발전된 제련 기술의 도입과 활발한 새 금광 개발을 통해 순도가 높고 막대한 양의 금을 확보하였고, 이들은 코슈킨(甲州金)이라고 불리며 신겐의 중요한 자산이자 무기로 사용되었다.[39][40] 야마나시의 여러 산에는 아직 폐쇄된 갱도의 흔적이나 금을 채굴하던 장비들이 남아 있다.
거기에 더해 신겐은 금광 개발에 쓰인 기술을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동원하였다. 신겐이 하사한 감사장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카나야마슈(金山衆)라고 불리는 이들 채굴 기술자들은 단순히 금광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성전에 동원되어 공성 기술단으로 큰 공을 세우기도 한 일종의 복합적 토목공학자 집단임이 확인되고 있다.[41] 선진적이고 독특한 공법을 사용해 강물의 흐름을 돌리고 수해를 방지한 신겐 제방(신겐즈츠미) 등에도 이런 발전한 토목 기술력이 엿보인다.
8.3. 외교 및 전쟁
8.3.1. 부정적
한 편으로 신겐은 생애에 걸쳐서 수많은 전투를 벌였으며 그 결과 신겐이 죽을 무렵에는 주변에 있는 다이묘들이 온통 적이라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모처럼 개발해놓은 광산에서 채굴한 금도 전쟁에 사용되어 다케다가의 재정상태는 악화되어가고 있었고 이것은 후에 카츠요리가 호죠를 배신하는 원인 중에 하나가 된다.
다케다가의 주변에는 이마가와, 호죠, 우에스기가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시대나 상황에 따라서 이들은 서로 동맹을 맺거나 성을 뺏고 빼앗겼다. 그러나 호죠측이 우에스기를 높게 산 것에 비해서 다케다가를 깎아내린 기록이나 우에스기 켄신이 다케다 신겐을 몹시 혐오했다는 기록등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케다 신겐은 생전에 깨트린 약속[42] 이 많았고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여겨졌다.
큰 배신만 해도 두 가지인데, 첫째로 호죠·이마가와 세력과 삼국동맹을 맺어 놓고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비명에 죽자 눈앞의 이득에 눈이 멀어 (눈앞에 이득이아니라 그전 이마가와 요시모토라는 거대 다이묘 라는 걸림돌이 있었고, 이것이 쿄토로가는 큰 걸림돌 중 하나였는데 그것이 자연스럽게 없어진것)이마가와를 공격했고, 그 결과 호죠까지도 다케다의 배신 행각을 혐오해 적으로 돌변해서 순식간에 안정적이던 외교가 파탄나 주위가 전부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상황이 되었고, 둘째로 오다 노부나가의 첫째 아들에게 딸을 시집 보내기로 하고 나서, 호죠와 우에스기라는 적이 있는 상황인데도 굳이 그 동맹인 도쿠가와를 공격하고 오다 노부나가 포위 음모를 꾸며 노부나가를 적으로 돌려 병가에서 가장 피하는 쌍방전쟁을 시작했고, 결국 노부나가에 의해 가문이 멸망하는 원인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즉, 굳이 악행이나 배신 행위를 할 이유도 없고 그런 행위가 독이 되는 상황에서 굳이 수차례나 근시안적인 배신 행각을 벌여 파멸을 자초한 것.
이 때문에 외교에서의 신용이 거의 없다시피 하여 카츠요리 대에 우에스기와 동맹을 맺으려 하자 이 점을 지적받기도 했으며 또한 뒷날 카츠요리대에 오다군의 공격에 대해 호죠 측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호죠 우지마사는 오타테의 난(御館の乱, 우에스기 켄신 사후의 가문 내 권력 투쟁)[43] 에서 다케다 가문이 신의 없게 행동했던 옛 일을 끄집어내어 도와주질 않았다. 그동안 카이에서는 다케다 사냥이 벌어져 다케다 가의 유신이나 피붙이들은 싹쓸이를 당하고 말았다.
8.3.2. 긍정적
우선 이마가와가에 대한 공격으로 삼국동맹이 공중분해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의 주변 국가 즉 오다나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는 결혼을 통해 인척관계를 맺는 등 그 이후 오히려 개선되었다. 물론 나중에 깨지기는 했지만, 이 역시 쇼군을 비롯하여 더 많은 가문들과의 동맹이 엮여 있었으며, 결코 신겐 생전에는 배신 행각을 지적 당해 외교 관계가 파탄나는 일 같은 건 없었고, 심지어 호조가와의 동맹 역시 결국 복구되었다. 또한 다케다 가의 멸망 시 호조가 다케다를 돕지 않은 것은 위에도 언급된 우에스기에 대한 내분 개입이 주 원인이며 이는 신겐 대의 일이 아니다. 기록으로 전해내려오는 전국시대 무장들의 배신에 대한 변명을 살펴보면 정말 별의별 희한한 이유가 다 나올 정도로 센고쿠 시대는 동지였던 가문이나 섬기던 다이묘의 뒤통수를 맛깔나게 후리는 배신과 하극상이 성행하던 시대였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신겐의 배신 행각 역시 다른 센고쿠 다이묘들에 비해 특출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찌보면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를 굴복시키고 노부나가 포위망을 통해 오다 가의 병탄을 노릴 수 있는 상황에서 수명이 다한 탓에 결과적으로는 거듭된 통수에도 딱히 얻은 것도 없이 무리하게 양면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의 길로 들어선 통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불운의 다이묘.[44]
다케다 군의 전투력은 최강으로 칭송받았으며, 무라카미 요시키요와의 두 전투를 제외하면 대체로 신겐의 승률은 엄청나게 높았고 전술 이외에도 전략과 정치 양면에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카이의 지리적, 정치적 조건상 신겐은 카이 영내에 적을 들이지 않고 늘 쳐들어가는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것을 두고 (실제 저자인지는 불분명하나) 《갑양군감》의 저자인 코사카 마사노부는 "신겐 공은 단 한번도 적을 영내에 들인 적이 없으며, 늘 쳐들어가서 적과 싸웠다."라고 극찬했다. 전쟁이 영내에서 벌어지면 물적, 인적 생산 기반이 파괴되는데 카이에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카이의 보잘것없는 농업 생산력을 그나마 온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대단한 성과다. 실제로 카이병사의 전투력은 그 용감하다는 미카와보다도 한 수 위로 평가를 받았는데 이러한 평가와 다케다 신겐의 지휘력이 무관한 것은 아니다.
즉 신겐은 아무리 주변에 적이 많다해도 '''전부 무찔러버리면 그만'''이라는 마인드였고, 이는 신겐이 살아있을때는 유효했으나, 신겐이 병으로 급사하면서 드러난 패착이었다는 것.
다만 야전에서의 지휘능력은 명성과 실적에 비해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카이 병사의 용맹함과 다케다 군의 우수한 중간 지휘관들과는 별개로, 막상 전투에서는 훨씬 약세였던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완패(...)했던데다가, 박빙이었다는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도 겐신보다 전력적 우위를 점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신들이 전사하는 등 다소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대승을 거두었던 여러 전투에서는 상대보다 항상 압도적인 전력적 우위[45] 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신겐의 특기는 전술과 야전지휘관으로의 면모보다 전략과 외교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외교 면에서 《군감》은 지극히 무사다운 마초적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바로 타 세력에게 굴욕적으로 인질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 많은 다이묘들이 세력이 커지고 나서도 막내를 다른 다이묘에게 굴욕적으로 인질로 보내곤 했는데 신겐은 인질을 보내서 평화를 구걸한 적이 없다는 게 코사카 마사노부의 평가다. 그러나 사실 신겐도 자식을 보내서 인질 겸 결혼 동맹을 맺은 적은 얼마든지 있다. 그게 특별히 적의 세력을 두려워한 결과가 아니라는 게 《군감》의 주장이지만 잘 따져보면 실제로는 이마가와 가문에는 꽤나 저자세였다는 평가도 많고, 호죠가에게도 그렇게까지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합당하다. 물론 이마가와와 호죠 모두 전성기 기준으로 보면, 석고에서 다케다가를 압도하는 대가문이긴 하지만 《군감》의 평가가 맞지는 않다는 것. 극도의 실용주의자에 가까운 것이 외교에서의 신겐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타당하다.
8.4. 냉혹성
먼저 쿠데타를 일으켜서 아버지인 노부토라를 내치고 다케다 가의 두령이 되었는데, 다케다 가의 기록에서는 신겐이 아버지 노부토라를 추방한 원인을 노부토라의 학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지만 여러 기록들을 대조해서 살펴보면 그 근거가 부족하다.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노부토라 추방이 신겐의 독단이 아니라 가신단의 주도나 동의하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원인에 대해서는 노부토라의 학정, 노부토라가 장남인 신겐을 미워하고 차남을 편애했다는 점 등이 추정되지만 노부토라는 신겐 측에서 남긴 기록만큼 문제가 있는 정치를 했던 것은 아니고 호전성 면에 있어서는 신겐도 노부토라에 뒤처지지 않았다.
그러나 추방했다고는 해도 신겐은 노부토라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마가와 측에 은거료를 지불하고 노부토라의 신병을 맡겼다.[46] 어쨌거나 노부토라는 이마가와측의 보살핌을 받으며 측실까지 불러들였고 아이까지 얻었고, 이로 미루어 보아 꽤 괜찮은 생활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살해가 전국시대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음을 감안할 때, 신겐이 아주 부모나 친족을 죽여 없앤 일부 다이묘보다는 그나마 괜찮은 인간성을 지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장남인 요시노부를 자신의 암살을 꾀했다는 이유로 은폐시키고 죽게 만든 것도 유명한데, 이마가와의 몰락 이후 가문이 친 이마가와와 反이마가와로 나뉘어지자, 이마가와의 뒤통수를 치려던 신겐이 친 이마가와파의 필두[47] 였던 요시노부를 숙청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 진상은 어쨌거나 집안이 워낙 콩가루 집안인지라 인간성이 의심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인 듯.
여담이지만 신겐을 존경했다던 이에야스도 아버지 히로타다에게 버림받고, 맏아들은 자결시켰으며, 유우키 히데야스라든가 마츠다이라 타다테루 같은 아들들과 비슷한 갈등을 겪었다는 점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머니인 오오이노카타는 호족인 오오이 노부사토의 딸로 자신의 아버지를 패배시키고 반강제로 출가시킨 다케다 노부토라에게 인질에 가까운 비참한 형태로 시집 와 후계자인 신겐을 낳았는데, 아들인 신겐은 스와를 정복하고 스와의 당주 스와 요리시게를 죽인 뒤 그 딸인 스와고료닌을 약탈하듯이 첩으로 삼아 후계자인 카츠요리를 낳게 했다는 점이 섬뜩하게 닮았다. 대개의 창작물은 친아버지를 살해하거나 몰락시킨 원수와 반강제적으로 맺어지고 원수의 아이를 낳아야만했던 전국시대의 비참한 여성들의 실제 역사를 한번쯤은 짚고 넘어가는 편.
8.5. 내정
원래 카이 지방은 전답이 작아서 부유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에 따라서 신겐은 금광 개발을 하여 얻은 수익으로 치수 사업을 벌여서 전답을 늘렸으며, 이 당시 신겐이 쌓은 신겐 둑이 아직도 코후 시에 남아있다. 그러나 사실 곡식의 산출량이 국력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치수 사업 자체는 다른 다이묘들도 모두 다 중히 여겼으니 이것을 신겐이 특히 혜안이 있어서 그랬다고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또한 수확의 70%를 세금으로 내는 '칠공삼민'이 기본이던 전국시대에 오공오민을 유지했지만 이것은 선정을 베풀었다기보다는 잦은 전투로 전장에 끌려가는 등의 원인으로 인한 농민 봉기를 막으려는 의도가 컸다고 봐야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이후의 측량 사업에서 얻어지는 각 지방의 데이터를 참고해 보면, 가이 지방은 금의 산출지이기는 하지만 농업 생산력과 인구 부양력 자체는 타 지방에 비해 그리 높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신겐은 어떻게 해서든 각종 토목사업으로 가이 내의 얼마 되지 않는 소출을 더 짜내는 한편, 적극적으로 바깥에 눈을 돌려 비옥하면서도 소호족들로 분열되어 있어 침략이나 포섭이 비교적 용이했던 시나노 지방의 정복 사업에 매달려야 했다. 신겐은 시나노 정복 사업을 통해 막대한 토지를 얻는 한편 아직 단결력이 약한 카이의 호족들을 외부의 전쟁으로 동원해 단결력을 유지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8.6. 느슨한 결속력
신겐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는 열넷의 어린 나이에 가독을 물려받았으나, 20여년 동안 가주직을 두고 항쟁을 이어온 숙부 아부라카와 노부요시(油川信恵)를 불과 1년만에 패퇴시키며 다케다 종가를 통일하였다. 그 후엔 숙부측에 가담했던 국인중 오야마다 야타로(小山田弥太郎)를 전사시키고, 그 아들 노부아리(信有)에게 자신의 여동생을 시집보내며 사실상 가이 동부의 네임드 가문 오야마다씨를 굴복시켰다.
이후로도 가이 전역에 흩어진 유력한 국인중이나 가문들을 쉴새없이 정벌하면서, 집권 10년차를 넘어서는 가이 1국을 거의 통일하는 단계에 접어든다.본래 가이의 슈고쇼(守護所) 즉 일종의 치소(治所)라고 할 수 있는 곳은 이사와(石和)였지만 1518년 즈음에 고후(甲府)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엔 고후에 거성 츠츠기가사키 저택(躑躅ヶ崎館)의 건설을 시작하고 성하마을을 정비하며 가신들과 유력 국인중의 거주지를 집단적으로 이주시키는 등, 본격적인 센고쿠 다이묘로 전환하는 동시에 중앙 집권화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반독립적인 현상황을 고수하고픈 호족세력들을 크게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고, 결국 적지않은 호족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신겐이 노부토라를 추방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따라서 다케다 가문의 가신단은 다케다 가를 절대적인 주가로 모시고 대대로 절대복종하는 봉건주의적 집단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케다 신겐이라는 절대적 카리스마를 지닌 수장을 가진 여러 가신 집단의 협력 체제라 할 수 있다. 신겐 역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하나 주요사안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여러 가신들과의 합의를 거쳐야 했다. 때문에 신겐 역시도 호족들의 눈치를 볼 때가 있었고, 신겐이 죽자마자 가문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신겐 개인의 카리스마에 통제되던 다케다 가신단은 가문을 배신하거나 이탈하며 산산이 와해된다.[48]
아버지인 노부토라 추방의 건만 해도, 실제로는 신겐이 주도한 쿠데타가 아니라 가신단이 기획하여 주도하고 신겐을 '''옹립'''한 것으로 보는 설이 있을 정도. 그러나 지방 세력으로서의 한계를 타파하지 못하거나 중앙 집권화에 실패하여 몰락하는 것이 신겐이나 다케다 가문만의 문제점은 아니었고, 전국시대 중기~후기에 걸쳐 급격한 세력 확장을 한 다른 모든 다이묘 가문들의 공통적인 문제점이기도 했다.
8.7. 신격화
이마가와 가의 몰락 이후 이마가와의 영토를 나누어 병탄한 도쿠가와 가와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게 되어 직접적인 적국으로 돌변하였다. 따라서 도쿠가와 가문과 충돌한 일이 많았으며, 도쿠가와 가의 세력이 미미했던 신겐 생전에는 대부분의 경우 다케다가가 승리를 거두었고 이에야스 본인도 목숨까지 잃을 뻔한 적이 있다.
이후 이에야스는 신겐의 군제와 병법을 철저히 연구하거나 모방, 칭송하였으며 후세에 에도 막부가 성립되면서 이에야스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자 생전에 이에야스를 압박한 신겐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이미 죽어서 막부에 위협이 되는 세력도 아닌데다 다케다 가의 유신이 막부 근처의 지방에 봉토를 얻을 만큼[49] 막부에서 나름의 입지가 있었기도 한데다, 신인 이에야스를 이겼으니 신겐도 신이라는 식의 논리가 아니면 신격인 이에야스가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이후 에도 막부의 민간 무용담 등에서 신겐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막부의 묵인 하에 부풀려져서 전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신겐의 이미지가 형성되었고, 현대의 NHK대하 드라마등에서도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다.
노부나가 추종자들이 많은 비전문가가 대부분인 2ch 등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칭송하기 위하여 전국 과대사천왕으로 신겐을 깎아내린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신겐 미화는 신겐이 한참 인기 있던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도·메이지 시대의 대중문화에서 각종 봉건영주나 무사들의 무용담 등이 카부키, 풍속화 등의 소재로 유행하면서 과거의 장수들을 지나치게 미화하게 되고, 에도 시대의 군략가, 병법가, 무술가들이 앞다투어 이미 멸망해서 눈치 볼 것이 딱히 없는데다가 전설적인 무용으로 알려진 신겐이나 다케다 가문을 자신의 병법·무술 등 기술의 연원이라고 갖다붙여서 설명한 탓에 자연스레 다케다 가문에 대한 숭배 분위기가 조성된 것.
8.8. 보수성
전국시대에는 무로마치 막부측에서 임명한 지방관인 슈고(守護)가 무력화되고 그 밑의 가신들이 슈고를 쳐없애거나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현상인 하극상(게코쿠죠)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었다. 헌데 다케다 가문은 유서깊은 슈고 가문이었는데 당시의 대세와 정반대로 힘을 잃어가던 것을 노부토라와 신겐의 대에 회복시켰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다케다 신겐도 곤노다이쇼죠(대승정)을 자칭하기도 했을 만큼 불교를 철저히 보호하고 슈고로서 교토의 공가, 종교 세력과 연계하는 등 정치사회적으로는 보수적이라고 해석될 수 있는 행동을 즐겨 했으며, 특히 노부나가 포위망에 참여하면서 노부나가가 말살했던 불교 세력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오다 노부나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창작물 등에서는 구질서를 타파하는 혁명아 노부나가의 앞에 마지막으로 나타난 보수반동세력의 최종보스 격으로 해석되는 일이 많다.
8.9. 결론
고슈 금광 개발, 치수와 같은 내정, 뛰어난 지휘력과 강력한 군대 육성. 뛰어난 부하들의 중용, 호조, 이미가와의 삼국 동맹이라는 외교적 업적, 척박한 가이에서 벗어나 풍족하나 당시 호족간의 다툼으로 분열된 시나노 일대로의 세력 확장을 꾀하는 전략적인 식견등 전체적인 행적들에서 알 수 있듯이 다케다 신겐의 능력은 전국시대 다이묘들 중에서도 수준급이였다.
다만 긍정적인 평가가 다소 지나쳐 지나친 신격화되어 지나치게 과장되는 면모들이 다소 있다.. 애초부터 시나노 일대로의 세력 확장은 부친인 다케다 노부토라시절부터 이미 추구하던 사업이였지 신겐 개인만의 특출한 선견지명은 아니였다.[50] 이는 당시 다케다 가문의 근거지였던 가이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가이국 동쪽의 호죠, 남쪽의 이마가와는 그 자체로 가이국의 석고를 아득히 뛰어넘는 강대국이었고, 따라서 양면전쟁을 피하면서 정복에 집중하려면 혼인 외교로 동맹을 맺어두는 것이 최선이었다. 남은 건 서쪽의 히다국과 북쪽의 시나노인데 마침 두 지방 모두 강대국 없이 군소영주들이 난립하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히다국은 기소산맥, 히다산맥이 존재하는, 개마고원처럼 일본 최고도의 고원지대라 공성도, 보급도 어려운 지형이었고 힘들게 점령해도 생산력 자체가 낮았다. 게다가 사이토, 오다와 국경을 맞대게 될 위험이 있었고 시나노보다 가이에서 멀기에 원군을 보내기도 쉽지 않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자연히 가깝고, 제3세력의 개입 리스크가 낮으며, 생산력/교통망 정비에서 메리트가 있는 시나노국을 침략하게 된 것.
경쟁자인 겐신과 비교해 그나마 반란으로 인해 골치는 덜 썩어서 가문과 영지내 지방 호족들을 결속시키고 안정화 시키는 능력이 더 높았다고 인식되기는 하나, 이것은 오해인데 이미 신겐 이전에 부친 다케다 노부토라가 다케다 가문내의 분쟁을 정리하고 가이를 통일하면서 다케다 가문의 지배와 군림에 대들고 저항할 지방 호족들과 지방 사무라이들을 이미 충분히 밞아버린 상태였다. 물론 신겐 시절에 다케다의 세력이 급격히 늘어난 이후에도 시나노를 안정화시키는데 성공하는등 신겐의 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거야 명백히 입증됐지만 이러한 것들도 본인이 다 처음부터 하나하나 직접 처리해야만 했던 겐신[51] 과 비교해 신겐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좀 불공평한 것이고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아들 카츠요리의 나가시노 전투의 패배에 대해 카츠요리의 멸시와 비하, 조롱과 더불어 신겐 본인에 대한 지나친 추앙과 만약 신겐이 있었다면 가정 또한 마찬가지인데 사실 신겐의 아들 카츠요리는 아버지의 외교적 행적들과 대 오다 포위망에 협공하는 모양새를 취한 부친 신겐의 뒷처리를 떠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나마 신겐이 병사하지 않고 오다 + 도쿠가와 동맹에 대한 배후 찌르기가 성공했다면 뛰어난 전략이고 신의 한수가 되었을 것이고 실제로도 오다, 도쿠가와 동맹은 신겐의 공세에 일방적으로 휘둘리며 아주 크게 당했다. 문제는 신겐 본인이 침공 도중에 병사해버려서 다케다 가문은 갈수록 강대해지는 오다 가문의 배후를 위협해버리면서 어그로를 대거 끌어버렸는데 정작 오다 가문을 끝장내지 못한 것. 진짜 모 아니면 도인 상황이였고 다케다측은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오는 등 아주 크게 일을 벌렸고 이정도로 판을 크게 벌렸다면 반드시 단기간 내에 끝장을 봐야 했는데[52] 이를 하지 못했기에 뒷감당과 대규모 침공을 저지른 대가를 카츠요리 시대에 가이 다케다 가문의 멸문으로 치룬 것이다.[53] 즉 신겐의 지나친 신격화 과정에서 신겐 본인이 대대적으로 벌린 일의 뒷감당을 후계자로서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처지였던 카츠요리가 일방적으로 성토되고 비난받은 케이스.
9. 창작물에서
- 다케다 신겐/기타 창작물 참고.
10. 초상화
[image]
흔히 신겐의 초상화로 알려진 "견본저색 다케다신겐 상(絹本著色武田信玄像)"은 신겐을 대표하는 초상화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신겐이 아닌 노토의 다이묘 하타케야마 요시츠구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겐의 초상화가 맞으며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초상화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이에 의하면 아사쿠라가의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최고 화가로 명성을 떨친 하세가와 토하쿠[54] 에게 그리게 했다고 한다면 소세력에 속하는 노토의 다이묘를 그린 그림일 확률은 낮다는 것.
그림을 보면 좀 기묘한 느낌이 있다. 일반적으로 초상화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는게 보통이나, 이 그림은 신겐이라고 알려진 인물 오른편에 '''매가 신겐을 바라보는 듯한''' 것을 그려놓았다. 학자들은 이 초상화가 만약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의뢰로 그려진 것이라면 고도의 정치적 메시지를 담았을 것이라고 본다. 신겐을 중심으로 오른편에 있는 매는 아사쿠라 요시카게 본인을 상징하는데, 기록에 의하면 아사쿠라 가문은 무로마치 시대에 '''교토에 매를 공납하는 역할을 맡았고''' 그때문에 아사쿠라 가문은 매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또한 신겐의 옷자락에는 작은 주머니가 달려있는데, 이것은 히가시노 혼간지를 의미하고, 신겐이 차고 있는 칼을 자세히 보면 신겐 가문의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이 들어있다. 그 문장은 바로 당시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의미한다는 것.
이렇게 본다면 신겐을 중심으로 아사쿠라-혼간지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 동맹은 바로 '''오다 노부나가를 포위하는 동맹'''이라는 것이다.
비록 이것이 매우 그럴듯한 추측이기는 하나 신겐이라고 전해지는 다른 초상화들과 얼굴이 달라서 여전히 논란이 있다.[55] 신겐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전해지는데, 얼굴이 험악하게 생긴 것, 매우 단정한 것, 소년 시절의 것 등 제각기 너무 달라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11. 심볼
다케다 신겐의 심볼이라 하면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풍림화산"으로 유명한 疾如風, 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의 글귀다. 손자 군쟁편의 故其疾如風, 其徐如林, 侵掠如火, 不動如山(군사를 움직일 때는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이, 그 조용하기가 숲 같이, 침략할 때는 거세게 번지는 것이 불 같이, 움직이지 않기를 산 같이 하라)는 말에서 딴 것. 일본어 발음으로는 후-린카잔(ふうりんかざん). 그리고 이 풍림화산 깃발은 다케다 가문 대대로 내려온 물품이 아니고 다케다 신겐이 자기가 쓰려고 만든 깃발이고 신겐만 사용했다.
두 번째 심볼은 스와 홋쇼의 투구(諏訪法性兜)인데, 이름은 신겐에 관한 에도 시대의 기록물인 코요군칸에서 왔다. 다케다 가문과도 혈연관계가 있던 스와 대사의 신주 가문인 모리야 가문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박물관에 기증했다는 듯. 에도 시대의 군담에 등장하며 일반에도 신겐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진품) 라이벌인 켄신이 두건을 쓴 승려 차림에 갑옷을 입은 특이한 이미지로 일반에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한 것은 후반생의 불과 몇 년 안되는 시간뿐인 것과 달리,[56] 신겐은 이 투구를 쓴 모습으로 널리 알려졌고 실제로도 그랬다고 볼 수 있다.
12. 어록
'''人は城、人は石垣、人は堀。情けは味方、仇は敵なり'''
사람은 성이자 성벽이며, 해자이니라. 인정은 아군이요, 원한은 적이다.[57]
'''為せば成る。為さねば成らぬ。成る業を成らぬと捨つる人のはかなさ'''
'''하면 된다.''' 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하면 될 일을 되지 않는다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小善は大悪に似たり、大善は非情に似たり。'''
작은 선은 큰 악과 흡사하고, 큰 선은 비정함과 흡사하다.[58]
[1] 문장의 유래는 다케다 가문의 가보인 '다테나시'라는 갑옷의 무늬다. 다테나시는 1100년대의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갑옷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아버지인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입었던 갑옷으로 알려져 있다. 다케다 신겐의 카이 다케다 가문 뿐만 아니라 주고쿠 지역의 아키 다케다 가문과 와카사 다케다 가문도 같은 문장을 사용한다.[2] 라이벌 겐신과 달리 딱히 호랑이를 연상시키는 행동은 안 했지만, 대구를 이루어 그렇게 불리었다. 가이가 산간 지방이기도 하다. 다만 일본은 호랑이가 서식하지 않은 나라라서(다만 호랑이로 추정되는 선사시대 무렵 화석이 발견된 적은 있다고 한다.) 전근대 일본에서 생태계 최강의 포식자로 여겨진 동물은 곰이었다. 호랑이를 실제로 보지는 않았어도 '사자'와 마찬가지로 '공포의 맹수'라는 개념은 존재해서 '호랑이'는 신겐 말고도 다른 무장들의 별명으로 쓰이기도 했다.[3] 본래 스와고료닌에게 얻은 4번째 아들이고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 외에 카츠요리 위로 자식이 둘 더 있었으나, 장남인 다케다 요시노부는 반란혐의에 연루되어 유폐당해 죽었고 둘째는 장님이었고 셋째는 요절했기에 카츠요리가 적통을 물려받을 수 있었다.[4] 이런 경우는 당시 무장들에게 흔한 경우였다. 나중에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일종의 보험같은 성격이 강했던 것이지, 정말로 한국이나 중국의 출가승처럼 불가에 귀의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 한자식 음을 가진 무사의 이름은 이런 케이스. 우에스기 켄신, 쿠로다 조스이 등이 좋은 예다.[5] 신겐이 형식적으로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케다 가문의 군기에서는 가신들이 설쳐대서 괴로워하던 신겐이 하도 일이 안 풀려서 점을 쳤더니 '''머리를 깎으라'''라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신겐은 그래서 머리를 깎고 불가에 입문한 뒤에 신겐이라는 법명을 얻은 후에 잘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6] 사실 이런 식으로 성+관직+이름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간소한 케이스다. 조정 공문서에 쓰는 이름은 훨씬 복잡다단하다.[7] 이 사건 이후로 교양이 높기로 유명한 신겐도 더 이상 《논어》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효도를 워낙 강조하기 때문이다.[8] 특히 스와씨의 스와 요리시게는 신겐의 4남이자 후계자인 카츠요리를 낳은 스와고료닌의 아버지였다.[9] 나중에 신겐이 장님이었던 자신의 둘째 아들을 이 가문에 양자로 보내 운노 가문을 잇게 한다.[10] 켄신은 여러 사정으로 평생 이름이 자주 바뀐 인물인데, 나가오 카게토라에서 이 당시 우에스기 성을 계승하고 곧이어 우에스기 마사토라로 이름을 바꾼다. 전투 당시의 이름은 우에스기 마사토라.[11] 칸레이 직은 당시 막부의 권위 실추로 유명무실한 직함이었으나, 여전히 한 지방을 통솔하는 슈고 다이묘들 여럿을 통솔하는 권위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일개 슈고에 불과했던 다케다 신겐은 라이벌이 자기 위에 서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아 죽을 때까지 켄신을 나가오 성으로 불렀다고 한다.[12] 바다와 해운의 중요성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겠지마는 특히 카이는 소금이 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소금의 무역 봉쇄령을 당해 괴로워했던 사건도 있었을 정도. 이때 숙적 신겐에게 소금을 공급해준 겐신의 이야기가 '적에게 소금을 보낸다'라는 고사가 되었다. 무사도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일화다.[13] 이때 요시노부의 스승이자 중신이던 오부 토라마사도 반역 의혹을 받고 할복당했는데 이 오부의 동생이 바로 반역자인 형 때문에 성을 바꾼 다케다의 명신 야마가타 마사카게이다. 오부는 붉은 색의 무구를 착용한 정예부대 '아카조나에'를 이끌고 있었는데, 반역 사건 후 아카조나에 부대는 동생 야마가타 마사카게가 인수해서 각국의 공포의 대상이 된다.[14] 이때 노부나가의 아들과 약혼했던 신겐의 딸 마츠는 임을 못 잊어 가문을 이탈해서 오다 가를 찾아가다가 길에서 병사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케다 가문의 배신을 다케다 가문의 씨말리기로 되돌려주고 있던 노부나가의 아들은 이를 불쌍하게 여겨서 몰래 시신을 정중히 묻어주고 명복을 빌었다고.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다른데, 마츠는 이후까지 살다가 다케다 멸망 때 도주해 살아남아 약혼자이던 노부나가의 아들에게 연락, 합류하려 했지만 약혼자가 얼마 뒤 죽어서 무산되었고, 마츠는 출가하여 약혼자의 명복을 빌었다. 참고로 그 약혼자의 이름은 오다 노부타다. 노부나가의 장남인 그 노부타다이다.[15] 이해를 돕기 위해 이전 전투인 아네가와 전투를 포함해 설명함.[16] 사실 신겐의 총 병력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3만 정도를 넘지 못한다. 반면 당시 오다의 병력은 다케다를 압도하는 상황으로, 최소한으로 잡아도 4~6만가량이었다. 이런 신겐 측이 오히려 대군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신겐이 교묘한 외교 공작으로 대연합군을 편성해 오다의 병력을 모두 기나이나 호쿠리쿠 지방에 붙들어둔 상태에서 자신은 올인한 병력을 가지고 전혀 무방비한 상태인 오다의 뒷통수를 쳤기 때문.[17] 미노를 거치는 길이 있긴 한데, 거기엔 오다 노부나가의 본성인 기후 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18] 이 양반은 12월 3일에 "병사들도 지쳤고 폭설 때문에 더는 못 싸운다"면서 병력 거두어 에치젠으로 퇴각해버렸다. 오다 포위망이 한창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판에 이랬으니 신겐으로써는 황당해하고 또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고,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 신겐은 승전을 알리며 "병사들 챙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오다 노부나가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아무 쓸모도 없고 도움도 안 되는 관용을 이 시점에 꼭 베풀어야겠냐. 부탁한다. 생각 잘 해라"는 문서를 보냈다. 아자이 나가마사나 요시카게의 사돈이기도 한 혼간지 켄뇨도 편지로 말렸지만 요시카게는 끝내 움직이지 않았다.[19] 영화 카게무샤에도 이 일이 언급되는데, 여기서는 아사쿠라 요시카게의 퇴각에 기막혀하면서 뭐 이런 놈이 다 있냐고 분노하는 신겐에게 가신이 대뜸 주군의 연세가 올해로 몇이시냐고 묻더니만 "사람이 자기 이익 좇아서 자기 편리할 대로 움직이는 것은 당연한 건데 뭘 그런 걸 갖고 그 나이 먹고 어린애마냥 투정 부리십니까? 주군이 무슨 원숭이도 아니고 체통 좀 지키시죠."라며 한소리하고 신겐은 그걸 피식 웃어넘긴다.[20] 그리고 자신을 경계하는 의미에서 똥을 지리고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며 앉아 있는 자신의 우거지상을 그리게 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도 그림이 남아 있는데.. 그 그림이 실제 패전후의 이에야스를 그렸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일본에서도 논란이 많은 상태다. [21] 이 무렵은 노부나가 일생일대의 위기상황이었다. 소위 '노부나가 포위망'에 갇혀서 아자이, 아사쿠라, 미요시, 혼간지 등 숱한 다이묘들의 집중 공격을 받던 상황이었다.[22] 아예 키나이(畿内) 방면을 포기하고 기후(岐阜)로 회군할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였다.[23] 무사의 신분으로 의학에 매우 뛰어나 신겐의 시의로 활약한 특이한 인물로, 후일 도쿠가와 가문에 임관한다.[24] 죽던 날 맥박이 빨라지고 이빨이 5~6개나 빠졌다는 무시무시한 묘사도 있다. 이것 때문에 죽음을 깨달았다고...[25] 평민이라면 무사만 봐도 넙죽 엎드려야 하고, 다이묘를 회견할 때는 얼굴을 들라고 해야 얼굴을 들 수 있는 것이 보통.[26] 풍림화산은 근대에 생긴 말로, 당시에는 '손자의 깃발'이라고 불리고 있었다.[27] 《군감》을 실제 사료로 신뢰하는 학설은 이단이나 소수설 입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용하더라도 극히 일부만 철저히 교차검증과 연구를 거쳐서 한정적으로 써먹는 정도. 야마모토 칸스케의 실재가 확인되면서 지지 쪽에 좀더 무게가 실리기는 했다.[28] 영화 카게무샤는 저격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군감의 묘사에 근거해서 시나리오가 짜여져 있다. 카츠요리 대리설과 무능설, 노부카도를 카게무샤로 세운 후의 총 퇴각, 3년간의 죽음 은폐 명령 등.[29] 공화정 로마와 전쟁을 벌여 패배하고 죽은 누미디아의 왕. 로마인을 살육하는 등 잔인한 행동도 했고, 뭣보다 누미디아는 기병대로 유명했다. 신겐에 비교한 이유는 이 때문인 듯.[30] 불상을 의미. 프로이스는 선교사라서 불교나 다른 신앙에 극도로 적대적이다.[31] 실제로도 신앙을 여러 모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노부나가 포위망을 결성하기 위해 에이 산의 불교 세력과 동맹을 맺기도 했고, 혼간지 켄뇨와는 동서지간이었다.[32] 좌주는 불교의 강사, 사문은 수도자를 말한다.[33] 무쌍 오로치 2에서 다케다 신겐이 손견과의 회화에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34] 다케다 가문이 대대로 받들어 모시는 가문의 시조로, 겐지 중에서는 세이와 겐지 파에 속한다. 참고로 신라 이름이 들어가는 건 미나모토노 요시미츠가 오미 신라묘진(新羅明神) 앞에서 성인식을 행했기 때문으로 이 신사의 유래는 신라와 관련이 있지만 요시미츠 본인, 그리고 그 후손 다케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신라묘진에 대해서는 엔닌, 장보고 문서 참조[35] 다케다 연고자들의 친목 도모 및 기념 모임인 다케다 구온회에 의하면, 노부키요와 운노 노부치카의 가계 사이에서 어느 쪽을 카이 다케다가의 종가로 인정할 지를 놓고 다이쇼 연간에 치열한 일대 논쟁이 일었다고 하며, 결론적으로 운노 노부치카의 가계가 종가로 인정되었다고 한다. 격한 표현을 삼가는 일본인이 이렇게까지 표현했다는 것이 그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방증하는 셈.[36] 대부분의 유명한 지방 도시가 그 영주를 일종의 마스코트로써 활용한다.[37] 쇼군 2: 토탈 워에서도 다케다 가문 승리 시 이 동상이 나온다.[38] 바바씨나 운노씨 등, 아버지 대의 숙청이나 내부분열 등 모종의 사정으로 대가 끊어진 경우나 신겐과 싸우던 시나노 지방의 명문이 그 좋은 예시.[39] 인장이 굳게 찍힌 많은 코슈킨 금화의 유물이 현재도 전시되어 있는데, 액면가가 전부 다른 다양한 종류의 금화가 발견되었다.[40] 이 때문에 신겐을 다루는 많은 창작물에서 신겐이 코슈킨을 부하에게 후하게 뿌려줘서 눈을 휘둥그래지게 하거나, 적장에게 뇌물을 먹여 아군으로 포섭하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는 장면이 나온다.[41] 90년대 만화인 바람의 검심에서도 땅을 파는 능력을 가진 적의 일원이 이 카이 지방의 카나야마슈 출신이라는 설정이 있다.[42] 스와, 이마가와, 오다, 도쿠가와, 호죠 등.[43] 여색을 멀리해 아들이 없었던 켄신의 두 양자인 카게카츠와 카게토라가 켄신이 후계자를 분명히 정하지 않고 급사하자 가문의 두령 자리를 두고 대립한 사건. 카게토라는 호죠 우지야스의 아들로 켄신의 양자가 된 인물이었다. 당시 다케다와 호조는 동맹 관계였기에 다케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카게토라가 우세한 듯 했으나 재정이 궁했던 카츠요리는 카게카츠가 제시한 돈을 받고 참가하지 않았다. 결국 카케가츠가 승리하고 카게토라는 자결했다.[44]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의리의 화신으로 평가받았던 우에스기 겐신이야말로 생전에 중요한 배신을 많이 당했는데, 그중 압권은 그 겐신을 전국에서 가장 의리있는 인물로 평가한 호조 우지야스가 일방적으로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케다 신겐(...)과 연합한 사건이었다.[45] 호죠가와의 미마세 고개 전투 정도가 그럭저럭 비등한 전투였는데, 미마세 고개에서도 사실 전력적, 지형적으로 우위를 점한 상태였다.[46] 그러나 이마가와측에서 은거료를 독촉하는 문서가 남은 것을 보면 꼬박꼬박 지불했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47] 요시노부의 아내가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이다.[48] 비슷한 처지이던 우에스기 겐신의 경우 에치고(越後) 영내에서 국인중이나 가신들의 반란이 시도때도 없이 터져서 이를 정리하느라 국력을 꽤나 낭비했다. 그러나 겐신은 반란을 일으킨 세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신겐의 경우 아버지대에 워낙 지방의 유력자들을 철저히 밟아놔서 반란에 시달릴 일은 상대적으로 적었으나, 다케다 가문을 향한 반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차이는 멸문의 위기상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겐신 사후 우에스기 가문이 가게가쓰를 중심으로 가신단이 똘똘 뭉치며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가쓰요리 대의 다케다 가문은 그딴거 없이 다들 자기 살길 찾아가는 등 확연히 대비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49] 다케다 가 유신들에게는 주로 칸사이에서 칸토로 통하는 막부의 대문격 지방을 경비하는 업무가 맡겨졌다. 상당한 신뢰의 증거인 셈.[50] 이미 다케다 가문은 예전부터 노부토라에 의해 스와 가문과의 동맹을 맺어 시게노 일족(운노 가문, 모치즈키 가문, 사나다 가문 등)과 격돌, 이들을 시나노에서 축출하여 시나노 동부 지역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51] 겐신때 에치고 통일이 이뤄졌다. 이때 겐신의 나이가 22세. 다이묘가 된 나이는 19세였다.[52] 오다 가문은 무섭게 세력이 확장중이였고 오다 노부나가의 뛰어난 내정/상업 정책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기반이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이런 오다를 적수로 돌렸다면 오다 가문의 숨통을 끊어놓거나 하다못해 오다 가문을 크게 몰락시켜야만 했고, 최소한 도쿠가와를 멸망시켰어야 오다를 상대할만 했을 상황이었다.[53] 현재 남겨진 다케다 신겐의 후손들은 다케다 가문이 아닌 운노 가문을 이은 다케다 가문의 차남이다. 물론 다케다 신겐의 직계후손이기에 현재는 이들이 가이 다케다 가문의 후계자로 공인되었다.[54] 일본 역사상에서 최고로 꼽히는 화가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그의 그림 두개가 일본 국보로 지정될 정도.[55] 심지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다케다 신겐>에서는 이 얼굴이 결핵으로 핼쓱해져 가는 외모를 숨기기 위해 신겐이 남들 앞에 나갈 때는 솜을 양볼이 불룩하게 입에 물고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것처럼 분을 칠했기 때문에 남들 눈에는 뚱뚱해 보인다는 설정(...)[56] 출가한 뒤 몇 년 안돼서 죽었다. 생의 대부분은 다른 이름으로 보냈다.[57] 다케다 신겐을 대표하는 명언이다. 제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아도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는 뜻이다. 이와 더불어 신겐의 근거지였던 츠즈지가사키 저택이 센고쿠 시대의 일반적인 거성이 아니라 단순한 저택이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은 신겐이 대단히 인망이 있었고, 대하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바로 뒤에 요가이야마 성이 있었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숨을 수 있었다. 또 외교적으로는 연이은 배신으로 인해 전혀 신망이 없었으며, 내부적으로는 이 말을 어느정도 지키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가신단은 어디까지나 신겐을 중심으로 삼았을 뿐 단결이 느슨한 편이어서 신겐이 죽자 바로 와해되어 버렸다. [58] 선한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으며, 겉보기에는 비정해 보이는 행동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 보통은 대인관계에 대한 말로, 상냥하게만 구는 것이 상대를 위한 길이 되지 않는 반면 독하게 마음을 먹고 꾸짖거나 질타하는 것이 상대를 위한 길이 되곤 한다는 식으로 해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