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묘

 

1. 개요
2. 상세
3. 에도 시대
4. 메이지 유신 이후
5. 일과표


1. 개요


'''大名'''
중세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

2. 상세


다이묘라는 칭호는 본래 오오나누시(大名主)라는 단어가 변화하여 생겼다. 나누시란 말 그대로 '이름을 가진 자', 즉 봉건사회에서 제대로 된 성씨를 칭할 수 있는 한 마을의 실권자를 뜻하고, 여기에 크다는 의미가 붙어 규모가 커지면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는 호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1] 이것이 막부가 성립하고 무가사회가 되면서 많은 봉토와 부하를 거느리는 무사를 가리키는 의미가 되었다. 일정한 크기의 영토 이상을 소유하지 못한 작은 지역의 영주는 쇼묘(小名)라고 불렸다.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고쿠다카(石高) 1만 석 이상은 다이묘, 그 미만은 하타모토(旗本)로 부르기가 정착했다.
히데요시가 1인자가 되어 처음 일본 전국의 생산량을 조사했을 때 일본 전역의 고쿠다카 총합은 대략 1850만 석이었다고 한다. 또 전력을 다해 병력을 끌어 모으면 대략 30~40석당 병사 한 명이 나왔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대한민국 국군 수준으로 병력밀도가 높아져 생업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100석당 병사 한 명 선을 유지했다.[2]
무로마치 막부는 개개의 쿠니[3]를 막부에서 임명한 슈고 다이묘에게 찢어 주고 먼 지역의 광역을 통솔하는 탄다이(探題)를 두었다. 또 중앙에는 쇼군 다음가는 간레이를 두고 관동에는 쇼군 대신 관동을 다스리는 간토쇼군[4]을 두고 그 다음가는 간토 간레이로 보좌하게 했다. 바쿠후의 통치능력이 쇠퇴함에 따라 이들 슈고쇼쿠(守護職)를 부하인 대리인인 슈고다이(守護代)나 여타 다른 이유로 그 지방에서 힘을 얻은 세력이 힘으로 쳐 없애거나 실권이 없는 괴뢰를 옹립했다가 자기가 센고쿠(戦国) 다이묘에 오르는 이른바 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
센코쿠 다이묘의 루트를 대략 분류하자면,
● 슈고 다이묘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
- 다케다 가문(가이 국), 시마즈 가문(사츠마 국), 오우치 가문(스오 국), 우에스기 가문[5], 이마가와 가문(스루가 국) 등
● 슈고 다이묘의 가신이었던 슈고다이가 센고쿠 다이묘로 올라 선 경우
- 우에스기 가문(에치고 국)[6], 아마고 가문(이즈모 국), 오다 가문(오와리) 등
● 각지의 유력 무사(고쿠진)들이 동맹을 맺고 그중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다이묘가 된 경우
- 다테 가문(무츠 국), 모리 가문(아키 국), 사나다 가문(시나노 국), 마츠다이라 가문(미카와 국)[7]
● 전국시대에 가문을 새로 세워(가신이었다가 독립, 반역 후 가문을 차지)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경우
- 호조 가문(사가미 국), 사이토 가문(미노 국), 우키타 가문(비젠 국)
호조 우지야스의 할아버지 호조 소운은 간토쿠보가 둘로 분열하자 쇼군과 이마가와 집안의 도움을 받아 반 쇼군파 간토쿠보를 제거하고 세력을 쌓았고, 아버지 호조 우지쓰나 대에 이마가와 집안에서 독립하고 점차 세력을 키워갔으며, 마침내 호조 우지야스 대에 간토쿠보[8]간토 간레이[9]를 모두 몰락시켰다.
관동의 겐신은 원래 나가오 가문으로 에치고 슈고를 세습하는 우에스기 가문[10]의 슈고다이 집안인데, 아버지 나가오 다메카게가 주인 우에스기 후사요시를 쳐 없애고 우에스기 사다자네를 허수아비로 세워 센고쿠 다이묘화했다. 나중에 멸망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가 망명해오자 겐신이 그의 양자로 들어가서 우에스기 성을 쓴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원래 주군 가문 우에스기와는 무관하다.
오다씨는 본래 에치젠 지방의 신관 가문 출신[11]으로 오와리와 에치젠을 다스리던 슈고다이묘 시바 씨의 당주가 당대 신관의 아들을 가신으로 삼아 오와리 지방의 슈고다이를 맡겼다. 이후 그 자손들은 여러 계통으로 쪼개져 자기들끼리 싸우면서도 슈고인 시바 씨의 실권을 빼앗고 괴뢰로 만든 뒤 오와리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 시바 씨의 슈고다이 출신으로 에치젠을 빼앗은 게 아사쿠라 요시카게로 유명한 아사쿠라 가문. 이쪽은 일찌감치 오닌의 난 때 동군과 에치젠 슈고직을 대가로 배반하는 약속을 맺은 것을 바탕으로 아예 에치젠 슈고직을 탈취했기 때문에 슈고다이묘로도 취급된다.
이외에 아예 모반하여 주군을 쳐 없애고 그 자리에 올라앉는 것을 게코쿠죠(하극상)라고 하는데, 이것으로 유명한 자가 사이토 도산마츠나가 히사히데 등의 다이묘들이다. 또한 이들 센고쿠 다이묘 중 상당수는 지방의 이름없는 호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정통파로 취급되는 겐지, 헤이케 등의 족보를 거짓으로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겐지나 헤이케도 무사는 무사 집안이지만, 나름 헤이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덴노가와도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권위가 엄청 붙기 때문이다.[12] 반면 명문 세이와 겐지 출신인 다케다 신겐[13]이나 시바 씨, 키라 씨 등과 함께 무로마치 막부의 3대 가문 중 하나[14]였던 이마가와 요시모토, 고레무네 가의 후손으로 가마쿠라 막부 때부터 휴가 슈고직을 지낸 시마즈 씨[15] 등은 전통적인 권위가 있는 슈고이다.
가이 다케다 가문은 전통적인 권위 있는 슈고였지만 오닌의 난 전후 무렵에 슈고였던 당시의 당주가 비명횡사하는 바람에 한때 호족들에게 주도권을 뺏겨 바지사장으로 전락했다가 신겐의 아버지 노부토라의 대에 주도권을 되찾으며 권위와 실권을 회복했다. 그래서 신겐은 라이벌인 겐신이 주인을 쳐 없앤 센고쿠 다이묘인 주제에 막부에게서 권위를 인정받아 슈고의 상위 직책인 간레이로 임명되자 자존심이 상해서 평생 우에스기 성씨(본래 간레이인 우에스기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로 부르지 않고 계속 본성인 나가오로 불렀다고 할 정도이며, 이마가와가 정권 획득을 위해 교토로 대군을 이끌고 진공한 것은 이마가와가 아시카가 쇼군가의 분가 중 하나로서 쇼군 계승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이러한 다이묘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는지 조선왕조실록에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선 다이묘를 거추(巨酋)라 기록하였고 이들이 보낸 사신을 거추사(巨酋使)라고 기록했다.

3. 에도 시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중앙집권 권력을 강화하고, '막번 체제'를 만들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고쿠다카가 1만 석 이상인 봉지가 있고[16] 쇼군으로부터 직접 영지를 하사받는다는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세력이 큰 다이묘의 가신 중에는 다이묘로부터 하사받은 봉지가 1만 석 이상이 될 수도 있지만[17] 쇼군에게 직접 하사받은 게 아니라 다이묘가 재분배한 것이기 때문에 다이묘라고 하지 않는다.[18] 쇼군에게 직접 봉지를 받았지만, 영지가 만 석 미만인 자들은 하타모토(旗本)라고 한다. 이들은 쇼군의 직속가신[19]이며, 쇼군을 직접 알현할 자격이 있었다. 하타모토 밑에는 고케닌(御家人)이라는 계급이 있었다.
다이묘의 영지를 가리키는 비공식적인 용어로 이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에도 막부 시절 대부분에는 통칭에 머물러 쇼군은 번이 아닌 다이묘 본인이나 다이묘 가문에 명령을 내렸지만, 판적봉환-폐번치현 사이의 2년 동안에는 공식적인 용어가 되었다.
에도 막부의 다이묘는 세 가지 구분이 있었다.
  • 미토, 마츠다이라 등 도쿠가와 직계에 속하며 군사적 요충지를 영지로 장악한 신판(親藩) 다이묘.[20]

  • 세키가하라 이전부터 도쿠가와에 속했거나, 신판도 도자마도 아닌 다이묘였던 후다이(譜代) 다이묘.
후다이 다이묘들은 영지 자체가 크지는 않았지만[21] 막부의 고위 관료직인 로주 자리를 자주 차지하는 등 막부 실무를 책임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위험분자들을 중앙에서 멀리 떼어놓아 혹시 모를 반란에 대비할 시간을 벌자는 의도라는 해석도 있지만 정작 조슈의 모리, 사츠마의 시마즈 등은 그냥 원래의 본거지를 지킨 것이라 이에 해당되지는 않으며 시마즈 같은 경우 오히려 너무 멀어서 군사적 압박 대신 세력권을 인정해주는 선에서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명목상 서군 총대장이었던 모리 가문은 아예 개역당할 뻔 했고 최종적으로는 120만석이 30만석으로 1/4로 깎이는 처벌을 받았는데, 이는 조슈 번이 막말 토막파의 선봉에 서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모든 도자마 다이묘가 사츠마나 조슈처럼 박한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고,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에 서는 등 대놓고 도쿠가와를 적대한 적이 없는 도자마 다이묘들은 준 후다이, 신판 취급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카가, 100만 석으로 유명한 마에다 가문이나 다테 마사무네의 다테 가문.
주로 규슈를 비롯한 서남부나 도호쿠 등 에도와 먼 곳에 자리잡은 도자마 다이묘들은 이미 개발된 간토나 키나이 등 막부 직할령, 신판/후다이 다이묘령에 비해 명목상 석고는 낮았지만 큰 개발 잠재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조슈 번은 명목상 30만 석 정도였다가 모리 가문의 지속적인 개발로 막말에는 실질 100만석의 강력한 번으로 성장했으며, 다테 마사무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100만 석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센다이 번을 실질 100만석으로 키워내기도 했다. 막부에서도 이를 좌시하지는 않고 중규모 영주에 대해서는 개역이나 전봉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하여 견제했으며[22],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들은 영지가 에도로부터 멀긴했지만 에도성 방문 때 별도로 특별대우를 받는 등 표면상으로는 막부 내내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고키시치도에서 율령국 하나를 통째로 영지를 가진 다이묘들을 고쿠슈(국주, 国主) 또는 혼쿠니모치(본국지, 本国持), 율령국 하나를 지배하지는 않지만 고쿠슈와 비슷한 힘을 가진 다이묘들을 타이신 쿠니모치(대신국지, 大身国持), 고쿠슈에 준하는 격의 10만석 수준의 다이묘들을 준쿠니모치(準国持) 또는 준고쿠슈(準国主)로 따로 예우하기도 했다. 마에다, 시마즈, 모리 등 고쿠슈 10~12가문[23], 다테, 호소카와, 나베시마 등 타이신 쿠니모치 10가문, 타치바나, 니와 등 준쿠니모치 3가문이 있었으며 일부 마쓰다이라 가문들을 제외하면 모두 도자마 다이묘에 해당했다[24]. 이들은 최소 10만석, 보통 20만 석 이상을 석고로 가졌고 고쿠슈-준고쿠슈-성주(城主)-성주격(格)-무성(無城)으로 이어지는 에도 막부 다이묘 서열에서 최고위에 위치하는 대가문들이었다.
하지만 지방 번들이 점점 강해지고 상대적으로 막부는 약해지자 다이묘들에게 강경책을 쓰기는 점점 어려워졌고[25],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감시하기에도 불리해지는 역효과가 있었다. 결국 막부 말기로 가면 다이묘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참근교대 등의 규제도 완화하는 식으로 타협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막말의 시마즈, 야마우치 등 도자마 다이묘들은 정작 친 막부 성향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사쓰마의 시마즈 가문은 이미 도쿠가와 쇼군가와의 혼맥으로 막부에서도 권세가 있는 가문이었고 다이묘들의 본가는 이미 오랫동안 에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다이묘 자리를 물려받으면 일정기간씩 영지로 내려가서 집무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번의 하급무사들과는 인식의 차이가 상당히 있었다.
하지만 유력 다이묘들은 막부 전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는 정치적 야심을 표출하게 되었고, 이들의 힘이 미토학으로 대표되는 존황양이 이념의 세례를 받은 조슈, 사쓰마, 도사 같은 대형 도자마 번의 하급 무사들(下士)들과 결합하여 결과적으로 이들은 후일 에도 막부 타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하지만 결국 메이지 신정부는 하급 무사들이 장악했다는 점에서 죽 쒀서 개 준 꼴로도 볼 수 있다. 신정부에서는 판적봉환 이후까지 다이묘들이 갖고 있던 각 번의 지사직을 폐번치현으로 몰수하고 도쿄로 소환했으며 대신 중앙에서 현령(후에 현지사로 바뀜)을 임명하게 되었다. 대신 옛 상관들에게 공작, 후작 등 화족 작위를 수여하는 등 어느 정도 대우는 해 주었고, 각 번의 빚은 중앙정부에서 탕감하고 구 번 수익의 일부(10%)를 구 다이묘들에게 인정해 주었다. 오히려 대형 번으로 공후백 급 상위 화족을 받은 가문들보다도, 지방에서 작지만 알짜배기 가업들을 대물림하며 지방 유지가 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방 토호로 잘 먹고 잘 사는 가문들도 많다.
영지의 삭감이나 개간으로 인해 구체적인 수치는 달라지지만, 에도 막부의 쇼군의 경우 대략 300~400만 석에 이르는 영지를 직할로 다스렸다. 게다가 수족과 같이 부릴 수 있는 하타모토들에게 나눠준 영지가 300만 석 정도였으니, 실질적으로는 600만 석 이상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 반면 가장 넓은 영지를 보유했던 몇몇 다이묘들의 영지는 100만 석 정도였으니[26] 일개 다이묘로서 쇼군에게 반항하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려웠던 것이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의심을 사면 영지를 몰수당하는 게 일상다반사[27]였는데 그나마 막부가 정착하면서부터는 죽이거나 평민으로 강등하지는 않고 영지 몰수 뒤 그대로 무사 지위를 유지하게 하는 게 일반적이며,[28] 운이 좋으면 조정으로 불러 하타모토로 삼았다.
또, 에도 막부는 도쿠가와 이에미츠 때부터 일종의 인질제도인 산킨코타이(참근교대)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수도에 다이묘의 가족을 모아놓아[29] 반란을 통제했고[30] 다이묘가 돈을 소모하며 영지와 수도를 오가게 하여 그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려고 한 것이다.[31] 이러한 경우 인질이라고 하더라도 높은 신분 간 거래에 가까웠기 때문에 인질의 취급이나 대우가 상당히 정중했고, 일정구역 안에서는 불편함 없이 살곤 하였다.

4. 메이지 유신 이후


다이묘들은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화족으로 편입되었으며, 현재도 상당수는 지역 토호로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아키타현의 사타케 노리히사 현지사. 아키타현 문서 참조. 사타케 가문은 히타치 54만 석을 다스리는 가문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서군에 참가, 패전 후 아키타현 20만 석으로 좌천되었고 무진전쟁 당시는 처음에는 막부군을 편들다가 나중에 정부군을 편들어 이후 화족이 되었고 현재는 지역의 유지이다.

5. 일과표


  • 다이묘를 비롯한 전국시대 무장들의 하루 일과표이다.
시간
업무가 있는 날
업무가 없는 날
오전 4시
기상
오전 4시 30분
순찰
오전 5시
간단하게 몸을 씻고 예불[32]
오전 5시 30분
몸단장을 하고 가신에게 업무를 지시한다.
오전 6시
출근한다.[33]
업무 내용이나 업무 시간은
직무, 신분에 따라 다양하다.[34]
출근하지 않는다
오전 8시
아침 식사
오전 9시
'''신분이 높은 무장'''
● 영지의 관리
● 잡무
● 초대 손님을 접대
'''신분이 낮은 무장'''
● 잡무
● 식량을 얻기 위한 부업
오후 2시
저녁 식사[35]
오후 6시
문을 닫고 방문객을 받지 않는다.
오후 7시
저택 내부를 순찰하고 불씨를 관리한다.
오후 8시
취침
다이묘들은 심하면 새벽 2시 30분 정도에 기상하는 경우가 있고 늦어도 새벽 5시 이전에는 무조건 기상하는 대신 취침시간이 매우 빨랐다. 그 이유인 즉 '''언제 야습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36] 휘하 아시가루들은 오늘날 현대인과 비슷한 일과시간을 보내지만, 사무라이 이상은 이렇게 취침시간과 수면시간을 아시가루들보다 앞당겼다.
사실 일본 다이묘들의 수면시간은 그 당시 기준으로는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동시기 조선에서도 임금은 보통 밤 11시에 자서 아침 5시쯤에 일어났으며, 선비들은 밤 9시쯤 자서 오전 2-3시에 일어났다. 농부들도 보통은 아침 4시쯤엔 일어나 활동을 했다. 그뿐 아니라 유럽수도자들도 빠르면 오전 2시, 늦으면 4시쯤 일어났고, 소작농들도 오전 3-4시쯤엔 일어났다.
현대보다 조명도 어둡고 밤을 보낼 만한 놀거리도 별로 없는 시대라 현대인들보다 훨씬 일찍 자서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 시절에는 기본이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말 그대로 사람들 활동하는 시간이었다. 다이묘들이 일찍 자는 것이 아니라 아시가루들이 늦게 잤다.[37]
[1] 본래 성씨란 중국, 한국과 같은 방식이었고, 헤이안 시대의 성씨들은 대개 겐지, 헤이케 하는 식으로 그저 성씨일 뿐이었지만, 봉건사회가 성립되면서 서양에서처럼 '''자신이 소유한 장원과 영토의 이름을 따서''' 성씨를 지었다. 본래 쓰이던 성씨가 씨(氏)라면 새로 등장한 봉건사회의 이름은 '묘지(苗字)'라고 불렸고, 이후 성씨는 아주 고상하게 이름을 부를 때나 사용했다. 가령 겐지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옛날스럽게 호칭하면 '미나모토노 이에야스'다. 일본인의 성씨에 밭田이나 들판原 같은 한자가 많은 것도 이렇게 지명에서 유래한 '묘지'이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홍길동이란 성명은 족보상이나 공식 석상에서나 쓰고 평소에는 본관을 성씨 대신 남양길동이라 불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2] 좀 더 세심하게 따져보면, 당시 일본에서 쌀 1석은 성인 남성 1명이 1년간 먹는 양에 해당하는 단위였으므로 고쿠다카 1석은 곧 인구 1명의 부양력이라고 봐도 큰 무리는 없다. 이 기준에서 보면 100석당 병사 한 명(인구의 1%) 선이던 평시의 병력 비율이야말로 대한민국 국군 수준과 비슷한 수준이고, 전력을 다해 30~40석당 한 명 기준으로 끌어모을 경우 병력 비율이 인구당 2~3% 수준으로 대한민국 국군의 병력밀도보다 훨씬 높고, 북한군의 병력밀도에 상당히 근접한다.[3] 国. 당시 일본에서의 이 글자의 용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주권국이 아닌 하나의 고을 정도의 의미에 가까웠다.[4] 간토쿠보, 가마쿠라 쇼군(쿠보)이라고도 한다.[5]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관동 관령직을 사실상 세습.[6] 원래는 나가오 가문.[7]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본가.[8] 무로마치 막부의 아시카가 가문[9]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10]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의 지류.[11] 후쿠이 현에 있는 츠루기 신사로 오늘날에도 존재한다.[12] 신적강하라고 해서, 덴노가의 인물이 결혼 등의 이유로 본적을 이탈하거나 일정 촌수 이상 덴노가에서 떨어진 방계가 되면 미나모토(겐지)나 다이라(헤이케) 등의 성씨를 택해서 가문을 차렸는데, 이래서 같은 겐지라도 세이와 겐지, 카와치 겐지 하는 식의 파벌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혈연은 상당히 멀어서, 사실상 덴노가와 인연이 있는 별개의 가문들. 그렇잖아도 방계라서 분가하는 터라 이렇게 덴노가에 연원하는 가문이더라도 몇 대가 내려가면 조정에서의 위치는 꽤나 내려갔다.[13] 다케다 가는 카와치 겐지의 2대 당주 요리요시의 3남 미나모토노 요시미츠, 일명 신라사부로 요시미츠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중세에 이르러 벼락출세한 무사 가문이 아니라 원래부터 이름있는 귀족 출신이었다. 다케다 가의 분파가 주고쿠 지방에도 따로 존재할 정도다. 여담이지만 간토 히타치의 다이묘인 사타케 가문 또한 다케다와 같은 요시미츠를 조상으로 둔 가문으로 서로 자기들이 요시미츠의 정통 후계자라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기도 했는데 굳이 족보를 따지자면 사타케는 요시미츠의 장남의 후손, 다케다는 3남의 후손이 세운 가문이다.[14] 아시카가 일족에 후계자가 없다면 이 세 가문에서 쇼군 후계자를 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막부와 인연이 깊다. 정확히는 막부 성립 이전의 당주였던 4대 야스우지의 두 형제가 각각 미카와 키라 씨와 오슈 키라 씨로 분가를 이루었는데, 이마가와는 이 중 미카와 키라씨의 초대 당주였던 키라 나가우지의 차남인 쿠니우지의 대에서 시작하는 가문이다. 사실상 야스우지의 아들 대에서 분기한 시바 씨나 잇시키 씨 등을 제외하면 무로마치 3관령가의 일원이자 마찬가지로 아시카가의 분가였던 호소카와나 하타케야마보다도 아시카가 종가(쇼군가)에 가까운 일족이었다.[15] 겐지나 다이라, 후지와라 등에 비하면 다소 밀리긴 하지만 고레무네 역시 그 역사와 전통은 남들에게 밀리지 않는 헤이안 시대부터의 명문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이쪽도 근원은 세이와 겐지로 올라간다.[16]고쿠다카가 0인 다이묘가 하나 있었다. 홋카이도 남부 마츠마에 번(松前藩)을 다스린 마츠마에 씨로, 기후 특성상 쌀이 자라지 못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재는 고쿠다카는 無였다. 그러나 아이누들과의 교역으로 수익을 냈기 때문에 1만 석 격(格)의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그 외에도 쓰시마 섬을 다스리는 소(宗)씨도 실제로는 쓰시마가 원체 험한 산지라 고쿠다카가 1만 석보다 훨씬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조선과의 무역을 사실상 독점했기 때문에 다이묘로 인정받았다. 또한 키츠레가와(喜連川) 번을 다스렸던 아시카가씨는 5천석에 불과해 하타모토급이었지만, 막부에서 옛 무로마치 쇼군에 대한 예우로 10만석 격 다이묘로 인정해주었다.[17] 다이묘마다 제각각이긴 하지만 다이묘의 영지 내에서도 다이묘가 직할하는 경지는 전체의 20%에서 아주 많아야 50% 미만이었다.[18] 더욱이 다이묘의 가신들이 아무리 봉지로 받은 땅이 많다고 하더라도, 고쿠다카는 불과 20~30석이지만 극존대를 받는 일부 하타모토보다도 원칙적으로는 낮은 신분이었다. 아무리 적은 고쿠다카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엄연히 쇼군이 직접 임명한 영주이기 때문이다.[19] 다이묘도 형식상으론 쇼군의 가신이다. 쇼군을 대통령이라고 놓고 본다면, 각부에 장관들을 임명하여 보내듯 다이묘들이 각자 맡은 영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반면 대통령의 업무를 직속 보좌하기 위한 청와대 수석들이 있듯, 하타모토들이 쇼군을 곁에서 보좌한다. 대외적으로는 장관(=다이묘)들의 명망과 지위가 훨씬 높으나, 주요 업무 수석(=쇼군 직속 하타모토)들이 권력 최측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듯, 서로 동렬에 놓고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20] 신판 다이묘 중에서도 특히 중요성이 높은 다이묘들이 이른바 고산케로, 쇼군의 후계자를 정할 수 없을 때에 후계자를 낼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21] 가장 강력한 후다이 다이묘였던 이이 가문의 히코네 번이 20만 석 남짓이었다.[22] 가문 총 영지가 수십만 석에 달하는 대형 번의 경우 상속 시 형제간의 다툼 방지, 혹은 번 행정 합리화 등을 목적으로 가문 내에서 분할상속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중앙에서 쇼군은 이를 용인하였다가 나중에 꼬투리를 잡아 영지를 조금씩 뜯어가며 대형 도자마 가문들을 견제하기 일쑤였다.[23] 에도 시대를 거쳐 도도 다카토라의 후손인 츠 번 도도 가문, 마쓰에 마쓰다이라 가문 등 2가문이 추가되었다.[24] 이들 중 대부분이 명예 칭호로 마쓰다이라 성씨를 수여받았다.[25] 오히려 후기로 갈수록 도자마 다이묘들은 막부가 먼 지방을 통치하는데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게 된다. 막부에 저항한 조슈 번(長州藩)을 토벌했다고해서 여러 세대동안 에도에 거주하고 친막부 성향에 지방을 통제 가능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모리 가문을 가이에키 한다는 것을 막부가 상상하기 힘든 입장이 된다.[26] 명목상 석고는 마에다 가문의 카가 번이 유일하게 102만 석으로 100만 석을 넘었고, 친번, 도자마, 후다이를 안 가리고 나머지는 모두 75만 석을 넘지 못했다. 메이지 시대에 측정된 실제 석고로 따져도 카가 번과 다테 가의 센다이 번, 모리 가의 조슈 번 셋만이 100만 석 규모였다. 그나마 이에 준할 만한 번도 시마즈 가의 사츠마 번, 고산케의 일원인 오와리 도쿠가와 가의 오와리 번, 나베시마 가의 사가 번 정도고 나머지는 50만 석은 커녕 10-20만 석인 번도 태반이었다. 다만 재미있는 점은 유력 도자마 다이묘의 경우 친번이나 후다이보다 세력이 큰 데다 영향력도 강한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주로 큐슈 등 에도에서 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이 해당되었다.[27] 그것은 비교적 세력이 작으면서 에도와 근기로부터 멀지않은 지역의 다이묘들 이야기이고 막부 극초기를 제외하고 20만 석 이상의 도자마 다이묘가 전봉되거나 가이에키된 사례 자체가 없다.[28] 이 경우도 당사자는 할복해야 했다. 보통 끌고 와서 참수하고는 그냥 서류에만 할복으로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고 한다.[29] 따라서 막부 시절 초기 다이묘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이묘들의 고향은 '에도'였다.[30] 조선에서는 상수리제도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31] 물론 괴롭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전국으로 물자가 돌기 때문에 그만큼 지역 불평등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었다.[32] 종교가 가톨릭인 다이묘(예로 고니시 유키나가)는 예불 대신 미사를 본다.[33] 이 때문에 업무가 있는 날 다이묘는 항상 도시락을 싸갖고 출근해야 했으며 이것만 전담하는 전속 요리사를 두는 다이묘도 있었다.[34] 오봉행 같은 중앙 관직은 중앙에 출근해서 일본 전체에서 자신의 분야에 해당되는 업무를 담당한다.[35] 이게 왜 점심이 아니라 저녁식사이냐 하면 당시 다이묘를 비롯한 무장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유는 후술.[36] 암살도 두려워했기 때문에 잠자리가 매일 바꿨다. 가장 신임하는 부하가 아니면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고, 부하가 잠자리를 마련해도 갑자기 다른 방에서 자는 등 극단적으로 정보를 차단했다.[37] 다만 아마도 오후 2시에 저녁을 먹는 지배층들은 세계적으로 다이묘들 외엔 없었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에서 임금은 왕은 하루 5끼를 먹었는데 이른 점심, 저녁을 정식 수라로, 그 전후 및 사이 3끼는 간단히 먹었고 보통 사람들은 아침과 저녁 2끼를 먹든지 우리가 먹는 패턴대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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