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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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문용기(文鏞祺)
생몰
1878년 5월 19일 ~ 1919년 4월 4일
출생지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
사망지
전라북도 익산군 이리장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문용기는 1878년 5월 19일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6일 이래로 이리 일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일본의 보병 중대가 주둔해 전주, 군산, 익산 방면의 통행자를 일일이 검색하는 상황에서도 재차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박도현(朴道賢), 장경춘(張京春) 등 기독교계통의 인사들과 몰래 만나 이리 장날인 4월 4일에 재차 거사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4월 4일경, 이리 장터에 기독교인 등 3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 중에는 서울에 유학하던 중 귀향한 중동학교(中東學校) 학생 김종현(金宗鉉), 김철환(金鐵煥), 이시웅(李時雄), 박영문(朴泳文) 등도 합세했다.
당시 이리장터엔 일본군 헌병대와 보병부대가 배치되어 있었지만, 군중은 문용기의 지휘 하에 독립선언서를 나누어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시가를 행진했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 천여 명이 되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제지하려 했다. 하지만 여의치 않자, 보병대가 출동하여 총검을 휘둘렀지만 군중은 더욱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 수백명이 동원되어 창검과 총, 곤봉, 갈구리를 휘두르며 무력으로 진압하려 들었다.
이때 문용기가 오른 손에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나아가 헌병에게 더이상 무고한 이들을 살육하지 말라고 꾸짖으며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그러자 헌병이 칼을 휘둘러 그의 오른팔을 베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고 다시 왼 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헌병은 왼팔마저 베어버렸고, 문용기는 양팔 모두를 잃었지만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에 격분한 헌병은 문용기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난자했고, 문용기는 끝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피살되었다. 이 일로 분노한 익산군 주민들은 4월 5일 이후 한달여 동안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문용기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89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