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춘
1. 음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장경춘
장경춘은 1880년 10월 8일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정운경(鄭雲慶) 의병장의 부관이 되어 박달재 전투와 단양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1907년 9월 13일 괴산군 죽산면 백암시장에서 3백 명의 의병을 통솔하던 강한조(姜漢祚) 의병장에게 가담해 십장(什長)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천에서 일본 순사 한 명을 사살한 뒤 그가 가지고 있떤 5연발 권총을 차고 의병 70명과 함께 이천, 진천, 음성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07년 9월 25일 민가에 투숙하던 중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28일 경기재판소에서 종신 유배형에 처해졌다. 1908년 1월 21일 평리원에서 15년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서도(西島)에 유배되었고, 1910년 8월에 풀려났다. 그 후 만주 관전현으로 망명해 유인석 의병장 휘하에서 1916년까지 활동했다가 귀국했고, 1923년 5월 9일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장경춘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익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장경춘
장경춘은 1877년경 전라북도 익산군 오산면 남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4일 문용기(文鏞祺)·박도현(朴道賢) 등과 함께 이리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날 정오 천여 명의 시위대가 이리 장터에 모이자, 그는 이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때 일본 헌병대 보병부대가 출동해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해산하려 했지만 군중이 이에 불복했다. 그러자 일제는 수백명의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까지 동원해 총, 창검, 곤봉, 갈구리 등을 휘둘러 군중을 해산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해산하지 않자, 결국 일본 헌병대는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때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장경춘은 현장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경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