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즈타 나오마사
1. 개요
일본의 재무 관료. 水田直昌. 1897년 아이치현 출생으로 1925년 1월부터 조선총독부 재무국 사무관으로서 경제 관료로서 일했고, 일제 패망 시기에는 총독부 재무국장이었다. 패전 후인 1947년에는 일본으로 무사히 넘어가 가쿠슈인의 상무이사가 되었다. 이후 옛 식민지 조선 관련인들의 모임인 동화협회(나중의 중앙일한협회)를 발족한다. 1985년 사망.
직급만 봐선 단순한 관료일 양반이지만, 이 쓰레기는 1945년 광복을 전후로 해 '''한국에 거한 똥을 싸놓고 간 경제사범이자 천하의 개쌍놈이다'''.
2. 광복 전
1945년, 조선총독부는 패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는 조선에서 물러나야할 때를 대비해 자신들이 장악한 조폐권과 은행 등을 이용해 퇴각 자금을 마련하여 안전한 귀환을 모색한다. 이 때 사용한 방법은 일단 소각해야할 지폐를 소각하지 않고 비축해두는 것. 당시 미즈타 나오마사는 이미 3월경 소각해야 될 지폐를 35억 원 가량 비축해 두었고, 전국 방방곡곡 어디라도 '''6시간 안에''' 현금이 배달될 수 있도록 예행 연습까지 마쳤다고 한다. 광복 당시 준비된 은행권은 40억 원 정도로 추산된다.
또한 대장성, 일본은행 측과 협의하여 새로운 은행권을 발행할 생각도 했지만, 이들 대다수는 전쟁이 확대되면서 인쇄국에 일본은행권은 물론이고 각종 식민지 은행권 발행 주문이 쇄도하여 인쇄 물량 확보가 어렵고, 또한 운송로가 길어 연합군에 의해 차단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취소된다.
3. 광복 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다곤 하지만 조선반도를 통치하던 행정기구가 완전히 그 영향력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나 소련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행정권을 넘겨받기까진 시간이 필요했고, 그 사이 미즈타 나오마사는 미리 일본으로 짐 쌀 준비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조폐권을 가진 것을 이용한 '''위폐 발행'''이다.
기존 조선에서 사용되던 조선 엔 화폐는 가장 높은 것이 갑 1000엔짜리였다. 그런데 이때 미즈타 나오마사가 새로 발행한 조선 엔은 무려 '''10만엔'''. 즉 100배짜리 뻥튀기 위폐를 만든 것이다.[1]
이 10만엔 짜리 위폐는 과정은 어쨌든 진짜로 조폐권자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은행은 이것을 진짜 돈으로 바꿔줬고, 이를 상기한 관공서, 기업체, 일본군 등의 퇴각 자금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주로 한반도 내 자원, 금괴, 문화재를 사들이기도 하고, 뒤를 튼튼히 하기 위해 친일파 기업인과 미군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 뿌린다.
그 결과는 '''물가 평균 30배 폭등의 초인플레이션'''. 이로 인해 한국은 건국하기도 전에 산업경제분야가 쑥대밭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패망 직후까지 한국에 거한 트롤링을 하고 간 것'''. 물론 이 때 경제교란죄로 잡히긴 했으나, 미군은 상기했듯 로비를 받았고 결국 풀어준다.
4. 여담
이후 이 경제사범은 상기한 대로 귀국한 뒤 잘 먹고 잘 살았다. 가쿠슈인의 입지를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사회 지도층으로서 유감 없는 명예를 누릴대로 누리고 간 것. 심지어 동화협회, 지금의 중앙일한협회 등을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와 함께 발족하면서 "일제의 조선 통치는 정당했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만들고, 이것이 그대로 일본 내 역사 교육 자료로 쓰이면서 한일간에 일제에 대한 막대한 시각차를 만들어놓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조선통치 방식은 너무 친절해서 그들(조선인)에게 성가신 인상을 준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어를 써서는 안 된다. 일본어를 사용하라. 메이지(明治) 신궁, 이세(伊勢) 신궁에 참배하라 하기도 하고, 백의(白衣)를 입지 말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선의(善意)’입니다만, 그들이 보면 참을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미즈타 나오마사가 1980년에 펴낸 회고록
[1] 이때 저 화폐를 만들기 위해 인쇄소를 전원 동원하였고, 그 화폐를 공수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과로로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