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호
1. 산청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규호
박규호는 1850년 9월 3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박동필(朴東弼)이고, 부친은 박수덕(朴受悳)이며, 어머니는 강성 문씨(江城文氏)다. 그는 유학자 김진호(金鎭祜)와 곽종석을 스승으로 삼고 한학을 수학했으며, 1876년 한주학의 시조인 이진상(李震相)을 만나보고 이진상의 아들인 이승희와 함께 한주학에 대해 강론했다. 이후 이진상을 모시고 인근의 선비들과 강학을 하면서 학문의 대의와 성리학에 대해 토론했다.
1882년 증광시에서 합격했고 이듬해 성균관에 입학했지만, 과거가 극도로 문란한 현실을 목도한 뒤 출세를 포기했고, 이진상이 세상을 떠난 뒤 허유(許愈)를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에 정진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1910년 한일병합 때는 일제로부터 은사금을 받았지만 이를 물리쳤다.
이후 1919년 곽종석, 김창숙 등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결의하고 서명을 받아낼 때, 그 역시 서명했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면서 관계자들이 체포될 때 그 또한 체포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유림이 한국인의 존경을 받는 인물들이니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일이 커질 것을 우려해 사건을 묻어두기로 했고, 박규호는 그 덕분에 훈방 조치되었다. 이후 그는 바깥 출입을 삼가면서도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1930년 2월 1일에 자택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규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2. 만주 방면 독립운동가, 박규호
박규호는 1877년생으로 추정되지만 태어난 장소와 경력은 알 수 없다. 그는 중국 훈춘현 대토천자(大吐川子)에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항일 활동을 했지만 1920년 10월 25일 일본군에게 체포된 직 후 총살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박규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