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동북 3성
3시 1맹 (내몽골 자치구, 중국)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 (러시아)
한반도
일본 열도쿠릴 열도, 사할린

[image] 자세한 사항은 범위 문단 참조.
영어
Manchuria
러시아어
Маньчжурия
중국어
滿洲(번체자)/满洲(간체자)
일본어
満州
시버어, 만주어
Manju(ᠮᠠᠨᠵᡠ)[1]
1. 개요
2. 인구와 현황
3. 민족
4. 기원
4.1. 어원
5. 범위
5.1. 동북 3성(둥베이 3성)
5.2. 3시1맹
5.3.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
5.4. 구성 지역
6. 지정학
7. 대외관계
7.1. 대한민국과의 관계
7.2. 몽골과의 관계
7.3. 북한과의 관계
7.4. 일본과의 관계
7.5. 기타 나라, 지역들과의 관계
8.1.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정권들
9. 지리
9.1. 자연
9.2. 기후
9.3. 도시
9.3.1. 선양(묵던, 심양, 봉천)
9.3.2. 창춘(장춘)
9.3.3. 하얼빈[2](하르빈[3], 할빈[4], 합이빈[5])
10. 동북지방 사람들의 기질
11. 의식주와 문화
12. 관련 문서


1. 개요


만주(滿洲, 满洲, Маньчжурия)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동북 3성네이멍구 자치구의 3시1맹(三市一盟) 지역(구 만주국)을 일컫는 외래지명(exonym).[6] 관점에 따라 의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 지역, 사할린, 한반도, 일본 열도 등을 포함한다. 옛날에는 '''관동'''(關東/关东, '''관둥''')[7]이라고도 불렀는데 산해관 동쪽 지역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2. 인구와 현황


매우 추운 지역이지만 만주의 인구는 약 1억 이상인데, 2010년 인구 센서스 기준으로 동북 3성의 인구는 세계 12위에 해당하며, 일본 전체 인구와 유사한 수준이다. 동북 3성에 3시1맹, 청더시, 화이러우구, 아무르 주, 하바롭스크 지방 남부, 연해주, 유대인 자치주의 인구를 모두 더하면 1억 2,887만명 정도가 나온다. 그중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북 3성의 인구는 1억 900만 명 정도다. 어쨌든 많다. 더불어 각종 자원도 풍부하다. 이 덕분에 변방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중국에서 산업화가 가장 빨리 마무리된 지역 중 하나. 중국의 경제 중심축이 동중국해 해안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 경제의 중추였고 요즘도 무시못할 지역이다. 물론 그래도 지리적으로 해안 지역에 비해 불리한 건 사실이다. 중국 정부의 북방 지역 밀어주기가 없었다면 더 차이가 심하게 났을 가능성도 있다.[8]
21세기 들어서는 중국에서 산아제한이 엄격하게 시행된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대도시 지역과 더불어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인구도 급속하게 감소하고 있다.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출산율 2.1명이 붕괴되었고 1990년대에는 출산율 1.5명대를 기록했으며 2000년대 이후로는 이보다 더욱 낮아져서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5명대고, 합계 출산율은 0.8명대'''로[9] 저출산 국가인 일본, 한국보다도 낮다. 게다가 단순히 출산율만 낮은 게 아니라 인구유출도 심해서 청년층들은 주요 대도시와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고, 한국과 러시아로 가서 일하는 경우도 많으며, 청년층들뿐만 아니라 은퇴한 노인들도 남부지역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라 1년에 수십만명씩 인구가 줄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며, 이는 노인 인구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고 인구는 비슷한 일본보다도 인구 감소 속도가 훨씬 가파르다.[10] 한 예로 인구 4,300만이라는 랴오닝성의 연 출생아수는 20만명대에 불과하고, 지린성이나 헤이룽장성도 마찬가지로 출생아수가 10만명대~20만명대인 수준이다. 동북 3성 일대의 출생아수를 다 합쳐도 60만명대도 안 된다는 충격과 공포의 결과가 나온다. 덕택에 오래 지나지 않아 인구가 1억명에 훨씬 못 미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중국 당국에서도 젊은 인재들을 동북 지방에 배치시키는 식으로 대응하려하고 있지만 동북 지역의 소득수준이 동남부 지방에 비해 낮은지라 상황은 여의치가 않다. 헤이룽장성의 경우 출산율이 중국 내 최하위이며 전 세계 '''압도적 최하위''' 이다.
산업으로는 일본이 대륙 침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쓰려고 했기 때문에 중화학 공업이 매우 발달했으며, 중국 내에서 허베이성과 더불어 철도가 가장 많이 설치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카베 마키오(岡部牧夫)의 만주국의 탄생과 유산에 따르면 일본이 만주에 투자한 금액은 일본 전체 해외 자산의 42%를 차지했다. 1945년 시점 즈음해서 만주의 인구는 중국 전체의 8% 정도였으나 생산력은 중국 본토를 크게 능가했다. 특히 철강과 석탄, 시멘트 등의 자원이 풍부하여 철강 및 기계공업 등 중공업 생산량이 중국대륙 전체의 90%를 웃도는 비중을 차지했다. 이렇듯 만주의 공업 인프라는 그 자체로 전략적 가치가 막대했다. 소련이 만주에 진입하고 일본이 패망한 직후에 국민당 정부, 중국 공산당, 소련 간에 만주의 막대한 공업 인프라를 두고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는 국공내전의 발발과 전개양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도 개혁개방 이전까지 중국 최대의 공업 지대로서 산업을 이끌었다.[11] 80년대 까지만 해도 소련,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중요도까지 더해 중국 제일의 산업지대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구권이 붕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실시하면서 동북지방은 개발에 뒤쳐지게 됐다. 현재는 산업 시설의 노후화, 부실한 금융 대출 등으로 개발에서 뒤쳐지는 바람에 극심한 저출산과 인구 유출을 겪고 있어서 동북병이라 불리는 경기 침체를 앓고 있다. 동베이 지역의 인구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일본보다도 가파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는 중이다.

3. 민족


내만주 지역은 한족, 만주족, 몽골족 등이 살고 있다. 원래는 만주족의 영역이었으나 한족의 영역이 되고 원주민들의 유출로 인해 현재 내만주에서 한족 비율은 90%가 넘는다. 만주의 중심인 헤이룽장성의 한족 비율은 96%이다. 일부 지역에서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으나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한족이 절대 다수이다. 한국계 중국인이 극소수 있다. 흥안령의 옛 동4맹 지역의 경우 다우르족, 몽골족 등이 거주한다.
외만주 지역은 다수의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과 극소수의 퉁구스계 민족 니브흐족, 윌타족, 오로치족, 울치족 등이 거주한다. 본래는 외만주와 같이 북방 민족들의 영역이었으나 러시아 제국이 외만주를 중국으로부터 획득하면서 이 지역은 표트르 스톨리핀의 러시아인 이주 장려로 러시아인들이 유입되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원주민들이 상당수 '''강제이주''' 되면서 인종 구성이 바뀌었다. 고려인들도 연해주에 많았지만 강제이주 정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서 일부만 연해주, 사할린 등에 남아 있다.
따라서 현재도 원주민이 꽤 많이 살고 있는 시베리아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의 강제이주는 더욱 심하여 현재 러시아인의 비율이 90%을 넘어간다. 외만주에서 북방계 황인은 원주민 지역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이 때문에 생각보다 찾아보기가 어렵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내만주와 외만주 양측에 걸쳐있는 민족들은 에벤키족(어원커족), 나나이족이 대표적이며 나나이족은 중국에서 허저족이라고 부르며, 연해주에 대부분 거주하는 우데게족들도 일부는 중국에 있으며, 이들은 허저족과 만주족으로 분류된다. 헤이룽장성 북부에는 어룬춘족도 거주하는데, 일부 어룬춘족 역시 러시아에 거주하기도 하며, 러시아에서는 오로치족으로 분류하여 오로치족에 포함시킨다.
내만주·외만주 모두 과거 이 지역의 주민들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였으며 현재는 중국러시아의 주류민족인 한족러시아인이 이 지역에서 주류를 점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서만주의 일부인 내몽골 동부의 흥4맹도 마찬가지로 비슷하게 현재는 모두 소수민족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중국인(한족)과 러시아인이 제일 많으며, 그 다음으로 조선족,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고려인 등이 있다. 만주족을 비롯한 퉁구스 제족들, 만주의 기타 민족들 등 다양한 수많은 민족들이 살고 있지만 이들의 인구 수는 적다.
기타 이주민족으로는 후이족, 유대인 등이 있다.

4.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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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통지(盛京通志)》 〈성경여지전도(盛京地輿全圖)〉, 이 지도에서는 성경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외흥안령, 남쪽으로는 동해(남해), 동쪽으로는 오호츠크 해동해(동해),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른다고 서술하였다.
청은 동북 지역을 성경(盛京, Mukden)·닝구타(Ningguta)·기린(Girin)·사하랸 우라(黑龍江, Sahaliyan ula) 등 각기의 지명을 사용했으며, 옹정 ~ 건륭기에 이르러 성경, 닝구타, 사하랸 우라 즉, 삼장군이 관할하는 세 지방을 직성에 준하여 비공식적으로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라 통칭했다. 이외에도 성경이나 동북방(東北方, dergi amargi ergi), 관외(關外, furdan-i tule)라는 지명들이 사용됐다.[12]
만주라는 지명은 1747년부터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의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아시아 지도와 같은 일부 초기 지도에 지역 종족적 지명으로 나타났다.[13][14] 그 이전 17세기 ~ 18세기 유럽에서는 이 지역 일대를 여진(Niucehé)이나 숭덕제몽골어 존호인 복다(boɣda)를 딴 보그도이(Bogdoi)로 부르거나, 중국 타타르(Chinese Tatary), 동타타르(Tartarie Orientale)의 일부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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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조지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왕립 제도사가 된 고유한 명성을 얻은 웨일스 지도 제작자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 1693 ~ 1767)이 1747년 런던에서 간행한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확대 부분.
1782년 해상 조난 후 러시아로 갔다가 1792년 귀국한 이세국(伊勢国)의 뱃사공들의 체험을 난학자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청취 후 작성하여 1794년에 간행한 《북사분략(北槎聞略)》의 〈지구전도(地球全図)〉의 확대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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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상관의(商館醫)으로서 1823~29년 까지 일본에 체류하였던 독일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 ~ 1866)가 귀국하여 1832~52년 간행한 《NIPPON》 1권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 그와 교류하며 일본변계략도 등을 제공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는 지볼트의 귀국 과정에서 지도의 존재가 들통나면서 옥사했다.[15]
아마도 청 예수회 지도 프랑스 사본에 기초한 러시아 지도 또는 1751년부터의 네덜란드 지도 등에게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쓰라가와 호슈의 1794년 《아시아전도(亜細亜全図)》및 《지구전도(地球全図)》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1809년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난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도 만슈(满洲)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16], 이는 필립 폰 지볼트(Philipp von Siebold)에 의해 '만주리아'로 번역되어 네덜란드로 다시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에게 확산됐다.[17] 프랑스에 기반을 둔 지리학자 콘라드 말트 브룬(Conrad Malte-Brun)와 애댐 멘텔(Edme Mentelle)은 1804년 《Ge'ographie mathe'matique, physique etpoIitique de toutes les parties du monde》에서 타타르보다 더 정밀한 용어로 몽골리아, 칼미키아 등과 함께 만주리아라는 용어를 장려했다.
1931년 선양 사변을 일으키고 이듬해 만주국를 건설한 이시와라 간지 등 기획자들은 만주와 몽골(만몽)을 중국과 인종적, 종족적 계통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는 동양사학자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만주국 건국 이후에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시라토리 구리키치(白鳥庫吉), 야노 진이치(矢野仁一) 등의 사학자들은 더욱 팽창주의적으로 만몽을 중국(중원)과 분리하여 만주인과 몽골인의 땅으로, 동북지방의 한인들은 그들에게 침략자가 불과하다는 인식을 상기하며, 조선과 일본을 만몽과 역사적, 인종적으로 엮고자 하였다.[18]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서구 학계에서는 지명으로서 만주는 논란이 되고 있다.[19] 빌 시웰(Bill Sewell)은 만주가 유럽인들에 의해 사용된 외래지명임을 지적하며, "진정한 지리적 용어가 아니다"라고 했으며,[20] 개번 맥코맥(Gavan McCormack)은 만주가 근대적인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문제인식에 동의하며, 만주라는 용어는 일본이 중국과의 분리를 촉진하기 위해 장려한,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인 명칭이라고 비판했다.[21] 만주국사 연구자 마리코 아사노 다마노이(Mariko Asano Tamanoi)는 만주를 거론할 때 따옴표로 그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22] 여진사 연구자 채드 D. 가르시아(Chad D. Garcia)는 만주라는 용어의 사용이 "작금의 학구적 실천(current scholarly practice)"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만주를 대체하여 특정 지리적 특성이나 '북동부(the northeast)'라는 용어를 사용했다.[23]
1930년대 이래 중국 또한 이 지역을 '만주'라고 부르는 걸 굉장히 꺼리는데, 1930년대 중국 사학자들은 동북지방을 중국에서 떼어 놓으려는 일본 동양사학자들의 시각에 대응하여 동북지방을 역사적으로 항상 중국이었던 것으로 규정하고자 동북지방에서 흥기했던 나라들을 인종적, 종족적으로 한족과 엮었었으며, 이는 한중 수교 이후 비화된 간도조선족 문제에 따른 2000년대 동북공정의 초석이 되었다. 물론 한국 등에서는 '둥베이'라는 단어가 중국 입장에서 치우친 용어라고 반박하지만 그렇다고 '만주'라고 부르자니 만주족만 사는 지역이 아니기에 만주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기에도 다소 어색하다는 주장도 있다. 비슷한 사례로는 자바이칼 지방을 다우르족들도 살았던 이유로 '다우리아(dauria)'라고 부르고, 시베리아 중북부 에벤키족 등 퉁구스 제족들이 사는 곳들을 '퉁구스카(tunguska)'라고 부르지만 자바이칼에는 다우르족만 살았던 곳은 아니었고, 퉁구스카 역시 퉁구스인들만 사는 지역은 아니다. 그래서 중국이 둥베이를 만주라 부르는 데 꺼려하는 것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던 간에 국제적으로 사용에 있어 외래지명의 사용을 최소화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만주라는 명칭은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성시(李成市)는 중국과 전후 일본에서 기피, 회피된 만주라는 지명이 한국에서는 구애 받고 있지 않는 것은 고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면서, 10세기 이후 한반도 북부나 압록강 이북의 주민에 대한 멸시와 무관심과 어떠한 연관성이 있는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4]

4.1. 어원


'만주’의 어원에 대한 추측은 청대부터 이루어졌는데, 건륭제는《흠정만주원류고》을 편찬하면서 만주라는 명칭이 문수보살(Mañjuśrī)에서 유래했다고 규정했으나 이는 1792년 《어제라마설(御製喇嘛說)》에서 건륭제의 발언에서 보이듯이 몽골을 안정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티베트 불교 겔룩파를 후원하며 스스로를 문수보살대황제 및 전륜성왕으로 묘사하고자 한 그의 의중이 반영됐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일각에서는 《신당서》 흑수말갈전에 언급되는 말갈의 수장을 호칭하는 "대막불만돌(大莫拂瞞咄)"을 만주의 어원으로 보는데, 추수(酋帥)·군장(君長)·수수(首帥) 등을 의미하는 대막불은 만주어 다 마파(Da Mafa)로, 만돌(瞞咄)은 수장이란 뜻으로 풀이하였다. # 실제로 사르후 전투 이후 후금에 억류됐던 강홍립이나 이민환 등은 누르하치를 만주(滿住)라 호칭했다고 기록해놓았으며, # 일찍이 오도일(吳道一, 1645 ~ 1703)은 《서파집(西坡集)》에서 "이른바 만주(满洲)란 옛날 노추(奴酋)[25] 중에 벌판에서 뛰어난 만주(满住)라는 자의 이름이 그대로 전습된 칭호를 말한다."라고,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만주를 언급하면서 "만주(滿住)라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곧 가한(可汗)의 호칭과 같은 것"이라고 주석을 단 바 있다.
일각에서는 만주가 만(man)과 주(ju)의 조합어라고 여기는데, man은 강경하다는 의미의 만주어 망아(Mangga), ju는 강한 활을 의미하는 주(ju)이다.[26] 또, 파저강의 별명인 마저강(馬猪江)의 '마저'의 변음 혹은 포주강(蒲州江)의 포(蒲)자가 만(滿) 자와 유사하여 이를 혼돈한 결과라는 설 등이 제기된다.[27]

5.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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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일본을 통해 서양에서 창출된 외래지명인 만주의 범위는 정치적 이유로 지속적으로 변해왔다. 만주라는 지명은 초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에 따라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의 성경·길림·흑룡강의 3개의 장군직(將軍職) 관할 지역을 가르켰으나, 1858년 아이훈 조약, 1860년 베이징 조약을 거치고 러시아의 남하와 한인의 대대적인 이주에 따라 1907년 3월부터 1914년 무렵까지 삼장군직과 지림맹(哲里木盟, Jirim ayimaɣ) 등을 폐지하여 봉천·길림·흑룡강의 3개의 성(省)이 설치되면서 그 범주는 크게 줄어갔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까지 지리공간적 지위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만주 북부나 내몽골의 어느 지역도 포함하지 않은 남만주 철도(SMR) 본선 이동의 남만주-한반도 지리를 묶은 지도나,[28] 러허성을 포함하지 않는 지도 등 매우 다양한 지도가 나왔다. 1932년 일본이 만주국을 건설한 이후에는 만주국 영토가 만주로 확립되어, 지금의 지린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3개 성과 네이멍구 자치구의 동부 3시 1맹을 가르키는 고정관념이 되었으며, 이러한 지리 인식은 집단 의식 속에 확립되어 중국인들조차 만주를 번역에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29]

5.1. 동북 3성(둥베이 3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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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3시1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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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둥스맹: 츠펑, 후룬베이얼, 퉁랴오, 싱안맹을 가리킨다. 이 문서 첫번째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칠해진 지역이 동북 3성이고 연한 빨강으로 칠해진 지역이 네이멍구 자치구의 동4맹이다.

5.3.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


프리모리예, 하바롭스크남부, 아무르주 대부분, 유대인자치주에 해당하는 영역을 근래 외만주나 외동북이라 부르는데, 중국 내에서는 회복해야 할 옛 땅으로 보는 여론이 있다. 당연히 러시아에서 중국 내의 이런 여론을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2008년 중국은 러시아로부터 하바롭스크헤이룽장성 자무쓰시의 경계에 있는 헤이샤쯔 섬(黑瞎子岛, о́стров Большо́й Уссури́йский)의 반절을 79년 만에 반환받았다.
사실 불평등 조약인 아이훈 조약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뺏어간 땅이라 홍콩처럼 반환을 요구할 명분은 있지만 청나라 멸망 후 중화민국 수립 이래 중국이 외동북 일대에 대해서는 영유권 주장을 한 적이 없고 홍콩과 달리 러시아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30] 때문에 명분도 약하며, 거기다 공동으로 미국에 대항하며 밀착하고 있는 현재의 중러관계를 고려하면 중국 정부가 갑자기 외동북 일대의 반환을 요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반환을 요구하는 순간부터 중러관계가 작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러시아인들 앞에서 외만주, 외동북 어쩌고 하면 절대 좋은 소리 듣지 못할 테니 주의. 이미 1973년에 연해주 일대의 중국어-만주어 기원 지명을 대거 청산해버렸다. 만주는 아니지만 비슷하게 러시아에게 빼앗겨 현재는 중국령이 아닌 중가리아 인근의 일리 지역(카자흐스탄 일리 강 일대)을 외서북이라고 부르는데 여기도 마찬가지로 외서북이라는 단어를 좋게 여기지 않으며 이곳의 중국어 지명들을 청산하여 러시아어식으로 바꾸거나 일부 위구르어 지명이나 카자흐어 지명 정도만 남겼다.[31]

5.4. 구성 지역


  • 현대 중국 동북지방(동북 3성).
  • 위 정의에 내몽골 자치구 중 다싱안링 산맥(大興安嶺山脈/大兴安岭山脉, 대흥안령 산맥)일대와 동쪽 지역(동4맹)을 포함.[32]
  • 위 정의에 허베이성 북부의 옛 러허성 지역[33]을 포함. (# 구 중화민국 지도 참조)
  • 그 외 만주 지방과 접하는 중국 청더시, 친황다오 동쪽 소수부분도 때때로 포함될 때도 있다. 또한 역사전통 및 문화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한반도, 일본열도, 쿠릴 열도도 포함될 때가 있다. [34]
오늘날 중국 내에서 흔히 쓰이는 동북 지방의 정의는 동북 3성 또는 동북 3성 + 네이멍구자치구 동부(동4맹)이다.


6. 지정학


일부에선 만주와 연해주 지역이야말로 세계의 화약고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라는 핵 보유국 3국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다 군사강국인 대한민국, 일본, 미국이 이해관계가 있고, 군사강국은 아니지만 중국에 이래저래 불만이 많은 몽골 또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날 경우 핵전쟁으로 비화될 위험성이 다른 분쟁 지역보다 높기 때문이라는 게 그 이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중러 양국은 현재 아주 가깝지는 않아도 크게 상충되지는 않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아야 하며[35] 북한과 몽골은 두 강대국에 맞설 수 있는 국력 자체가 없어서 사실상 무시해도 좋은 수준이긴 하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동양의 발칸 반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중국 혹은 러시아, 일본과 치열한 전투가 있긴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주/연해주의 소수 민족들이 내분을 일으키거나 아예 분리 독립을 이루어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면 모르겠으되 어차피 이 지역들의 주민들 대다수가 이주해 온 중국인들이며,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있어도 중국인들과 러시아인들만큼 그 세력이 크지는 않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강력하게 원하는 것도 아니며 사회주의 체제 시절의 영향으로 이들의 부족 문화 등이 세속화되면서 분쟁 가능성이 크게 완화된 상황이다. 만일 북한에서 내전, 쿠데타, 민중 봉기 등이 일어난다면 만주 지역의 불안정성도 높아질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북한의 불안정이라는 시나리오만큼은 결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입장이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도 그렇게 높다고는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부 정보가 새어 들어가고 있으므로 일시적으로나마 불안정하게 될 확률이 높다.

7. 대외관계




7.1. 대한민국과의 관계




7.2. 몽골과의 관계




7.3. 북한과의 관계




7.4. 일본과의 관계




7.5. 기타 나라, 지역들과의 관계







8. 역사



현재는 중국 영토이지만 한민족과 반농반렵 만주족, 유목 몽골족의 역사 무대이기도 하다. 동북아시아에서 정복왕조들이 많이 나온 곳이기도 하다. 선비족과 그 후손 관롱집단이 중세 중국을 지배하였고, 이 지역에서 발흥한 거란족요나라를 건국해 중앙아시아 일대로도 진출했으며, 요나라 멸망 이후에도 일부 거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도망가서 서요를 세웠고, 요동 지역에서 남아 있던 대부분의 거란족들은 동요와 후요를 세우기도 했었다. 여진족은 선조격인 금나라와 금에서 갈라진 동진국 및 그 외 동진국 내의 옛 금나라 호족들, 그리고 훗날 근세시대에 다시 통합해 대제국 청나라를 건국했다. 근대에는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이 이 지역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으며 러시아 내전 이후 백계(백군계열) 러시아인 난민 수십만명이 정착했던 적도 있었다.[36] 근방에 유대인 자치주가 세워지고 8월의 폭풍 작전 등, '''한국사의 시야를 벗어나 보면 굉장히 다채로운 역사를 지닌 지역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만주를 지배했던 세력들의 주요 민족만 해도 한족(한, 위, 서진, 북연, 수, 당, 명, 중화인민공화국), 한민족(고구려, 발해, 부여), 일본인(일본 제국), 퉁구스계(여진족의 금, 만주족의 청), 몽골계(선비족, 거란족의 요, 몽골족의 원), 러시아인(러시아 제국, 소련), 그 외(주, 연, 진, 전진) 등 다양하다. 퉁구스계 제족들이 현재까지도 전통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 살고 있어서 만주족을 연구하는데 많은 참고가 된다.

8.1. 만주에 존속했던 국가·정권들


  • 고조선 - 대릉하 유역, 요동, 송화강 유역, 한반도 서북부, 초기 중심지는 요동 반도였으며 기원전 4세기 연나라의 침입 이후 요서 대릉하 유역을 잃고 요동의 대부분을 상실, 이후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하다 위만조선전한의 침략으로 멸망.
  • 부여 - 송화강 유역 중심, 위만 조선이 멸망하기 이전인 기원전 2~3세기 무렵에 동명왕에 의해 건국되었다. 3세기 무렵에 동으로는 연해주 인근까지 접했고 북으로는 송화강과 흑룡강 하류 사이에 접했고 서쪽으로 요하 상류와 남쪽으로는 남만주 휘발하를 경계로 고구려와 접했다, 선비족의 침입으로 국가가 쇠약해져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다 동부여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정벌로 64성을 빼앗기고 멸망, 5세기 무렵에 북부여가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바침으로 멸망, 북부여의 일부 유민들이 송화강을 건너 두막루를 형성함.
  • 동호 - 흉노의 동쪽에 있던 유목민족. 후일 오환족, 선비족의 조상이 된다.
  • 고구려 - 주요 영역은 남만주, 송화강 이남, 한반도 북부, 고구려의 주몽이 엄리대수(송화강 상류)를 건너 만주 동가강 유역의 졸본(요녕성 환인현)에 정착하여 해당 지역의 소국인 졸본부여의 왕이 되어 고구려를 세웠다. 통일 제국 중국 수나라, 당나라의 침입에 맞서다 당나라와 신라의 공격, 그리고 연씨 가문의 내전이 겹쳐 멸망. 현대에는 이 나라를 고구려라고 부르지만 실제로는 장수왕 이후에 국호를 고려로 바꾼 것으로 추정된다. 왕건이 세운 고려와 혼동하지 말 것.
  • 고려 - 심양왕(심왕). 다만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고려 말인 1370년과 1388년에 요동 정벌이 시도되어 요동 지역에서 고려군이 활동하기도 했지만[37] 각각 군량 부족과 위화도 회군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 두막루 - 북만주 일대, 복식은 고구려와 같았음. 정치 제도는 부여의 사출도(마가, 우가, 구가, 저가)처럼 동물의 이름을 따서 관직명을 정했다. 지도자는 대군장이라고 불리었다. 언어는 본래 부여어를 썼으나 거란, 실위, 물길(말갈) 등의 북방 민족과 접하게 되면서 그 언어가 북방 민족의 언어와 유사해졌다.
  • 연나라 - 중국 화하인(한족의 조상 중 하나)의 국가. 허베이성 동북부와 난하 유역 중심.
  • 진(춘추전국시대) - 연나라를 멸망시키고 요서, 요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전한, 후한, 서진 - 요서, 요동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지배하였다.
  • 전진/전연 - 오호 십육국 시절 만주 일대를 차지했던 국가.
  • 요동 공손씨 정권 - 189년부터 238년까지 요동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 최비 세력 - 서진 멸망 이후 일시적으로 요동을 점거했지만 모용선비에게 밀려나 고구려로 망명했다.
  • 후연 - 선비계 국가. 난하와 대릉하 유역 중심.
  • 북연 - 고구려인이 세운 요서 대릉하 일대의 국가. 다만 고운 사후 한족 출신인 풍발에게 왕위가 넘어가면서 한족 정권화되었다.
  • 소고구려/소고려: 고구려부흥운동으로 일어난 정권.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이후 발해에 흡수.
  • 당나라: 고구려를 무너뜨리면서 일시 지배.
  • 발해 - 요동 반도, 송화강 유역, 연해주 일대, 한반도 북부 원산만 일대로 신라와 경계를 함. 흑룡강 이북에서도 성터와 유적 발견되고 있음.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
  • 요나라 - 거란족이 세운 국가. 지금의 요동 지역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중앙 아시아, 동으로 연해주 일대까지 대제국을 건설. 훗날 거란의 황족 중 일부였던 야율대석은 지금의 베이징에서 북요(北遼)를 세우다가, 북요 멸망 이후 투르키스탄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했다.
  • 발해부흥운동
    • 동란국: 발해부흥운동이 맞는지는 애매하다. 요의 괴뢰국으로 보기 때문.
    • 올야국 또는 오사국 후발해
    • 정안국
    • 연파국(燕頗國): 연파라는 장수가 세운 나라.
    • 흥료국
    • 대발해/대원국
    • 고욕국(古欲國): 한국사로 보기 애매하다. 고욕이 발해 유민이긴 한데, 발해의 옛 땅이 아닌 거란의 한 주에서 일어난 반란이었기 때문.
  • 금나라 - 여진족이 세운 국가, 요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북송을 멸망시켜 북중국을 접수. 이후 현재의 베이징으로 천도하고 몽골과의 항쟁 과정에서 만주가 떨어져나가서 이후의 금나라를 남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동요 - 거란족 출신 금나라 장수 야율유가가 요동에서 건국한 나라. 몽골의 칭기즈칸에 고개를 숙여 요왕에 봉해졌다. 칭기즈칸은 야율유가의 사후 야율유가의 아내에게 지배권을 인정해 그녀까지 2대만 존재했다.
  • 후요(後遼)/대요수국(大遼收國) - 동요의 야율유가가 몽골에 숙이자 거란족 일부가 반발하여 세운 정권. 이들이 동요에 의해 망하면서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 발생했다.
  • 동진/동하 - 금나라 장수 포선만노가 세웠던 나라. 처음엔 국호를 대진(大眞)이라고 해서 동진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후 대하(大夏)로 바꾸어서 당대에 있던 서하와 구분하기 위해 동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몽골이 포선만노를 정벌해서 멸망한다.
  • 몽골 제국/원나라 - 몽골족이 세운 국가, 금나라의 뒤를 이어 만주와 연해주를 장악하고 이후 중국에 진출해 중국을 통일하고 고려도 사실상 복속. 훗날에 나올 명나라(명 이전에도 한나라, 삼국시대 위나라와 서진 등도 요동까지 점령했었다)와 함께 1800년대 근대 후기 이전의 만주지역에서 기원하지 않은 세력, 국가[38]가 만주를 점령한 사례이다.[39]
  • 원나라 말기에 고려제1차 요동정벌로 일시적으로 요동성을 점령했었으나 곧 철수했다.[40]
  • 명나라 때는 여진족 지배자들이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벼슬을 받아 실질 지배하였다. 중국에서는 명나라 때 지도를 그릴 때 만주를 그냥 명나라 영토로 표시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 명나라가 만주를 지배했다고 보긴 어렵다. 그나마 요서와 요동 등 지금의 랴오닝 성에 해당되는 지역을 일부 가지긴 했다.
  • 후금/청나라 - 만주족이 세운 국가, 심양 일대가 발원지, 만주 세력을 통합하여 만주를 장악하여 서진하여 요동과 산해관 일대를 접수하고 이자성의 난을 틈타 중국 전역을 차지함, 전성기에 몽골 일대와 티베트 일대, 신강성 일대를 중국의 영토로 편입. 근세 후기, 근대시대 만주 지역의 유일한 마지막 왕조.
  • 만주국 - 일본 제국이 만주를 접수하면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세운 괴뢰 국가, 실질적인 통치 권한은 일본 제국에 있었다.
  • 러시아 제국/소련/러시아 연방 - 아이훈 조약베이징 조약으로 청나라에게서 외만주(연해주가 포함된다.)를 획득해 현대까지 지배 중. 제국주의 시대에는 부동항 뤼순을 차지하고 하얼빈 등의 만주 내륙 지역을 세력권에 넣기도 했다. 궁극적으로는 만주 전역을 비롯해서 내몽골, 신강 일대를 병탄하여 중국과의 경계를 만리장성으로 정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러일전쟁의 패전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러나 소련 시절, 만주 전체를 8개월 간 점령했던 적이 있다. 현재는 러시아령인 외만주를 가지고 있다.
  • 일본제국 관동주 - 일제의 조차지. 다롄과 뤼순 지역.
  • 봉천군벌 - 공식적으로 국가는 아니었지만 청나라 멸망 후 실질적으로 만주 대부분을 지배했던 세력. 일제에 의해 몰락하고 이후 괴뢰국인 만주국이 들어선다.
  • 중화민국(북양정부, 국민정부[41]) - 만주를 명목상 통치했던 국가. 하지만 실제론 봉천군벌이 지배하다가 일제 괴뢰국 만주국의 지배로 넘어가고 일제 패망 후에는 소련이 점령해 일시 통치했다. 그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고. 따라서 중화민국이 실질적으로 만주를 지배한 적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중화민국은 실질 영토가 대만과 그 주변으로 쪼그라든 현재도 명목상 헌법에 영토 안에 만주 일대를 포함시키고 있다(동북 9성).
  • 가오강 세력 - 만주가 명목상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초기에는 가오강의 독립 영지나 마찬가지였다. 가오강은 중국 공산당의 동북지구 최고 책임자이자 친소파였는데, 끝내 그는 만주를 소련에게 갖다 바치려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무시당하고 중국 공산당에 찍혀서 처형당한다. 이후 만주는 실질적으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가 된다.
  • 북한 - 아주 쬐끔이지만, 만주 끄트마리의 황금평비단섬을 소유하고 있어 약간이나마 만주에 지분이 있다.
  • 중화인민공화국 - 현재 내만주를 통치 중인 국가.

9. 지리



9.1. 자연


지리적으로는 춥고 황량한 허허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르 강(헤이룽강,흑룡강),쑹화강(송화강)이나 랴오허(요하) 같은 큰 이 흐르고 한카 호 같은 거대한 호수도 있으며 풍성한 삼림이 우거져 있다.[42] 그리고 몽골 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1900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다싱안링산맥을 비롯한 여러 산맥들도 자리 잡고 있으며 늪지도 많 [43]다. 남부에서 대략 한가운데 둥베이 평원이 자리잡고 있다.
농업의 경우는 겨울이 길기 때문에 논 농사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의지의 조선인들은 이주해서 논농사를 짓고야 만다. 하지만 남북 길이 약 1000km, 동서 너비 약 400km에 달하는 중국 최대의 평야 지대이자 전 세계에서도 비옥하기로 손꼽히는 둥베이 평원이 위치하고 있어서 옥수수, , , , 사탕무, 등을 재배하는 대규모의 밭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고대에 부여가 몹시 추운곳에 위치함에도 당시로써는 상당한 국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구려와 발해때도 둥베이 평원에서 농사를 지어서 국력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을 정도. 대두의 원산지 중 한 곳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1910년대에 유럽이 전화를 겪으면서 이 지역에서 재배된 대두와 곡물이 엄청나게 팔려나갔고, 중개무역를 한 일본 상인들도 돈을 많이 벌었다. 당시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 또한 이런 식으로 돈을 번 이들이 꽤 있다.
또한, 일본에 의해 중화학 단지로 육성될 만큼 천연 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고구려, 청의 강력한 기병은 만주의 풍부한 광석 덕택이란 이론도 있다. 심지어는 '''석유'''도 매장되어 있다. 1959년에 발견된 헤이룽장성 다칭시의 다칭유전이 개발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발해만과 라오허 일대를 중심으로 유전이 개발되어 있다.
동물은 한반도에 서식하는 생물의 90%와 비슷하며 10종에서 9종이 한반도와 같은 종류이다. 호랑이나 표범, 반달곰과 불곰등 포식 동물이 서식하며 늑대도 서식한다. 사슴이나 인삼 등 약용 생물이 살아가고 있다.
식물상 또한 한국 토착 식물의 80% 이상이 만주 지역에서도 서식하며[44] 어류 역시 상당수 일치 한다. 나머지 20%는 한국에서 희귀하거나 멸종위기 판정을 받은 월귤 같은 고산식물들이다. 특히 내만주 최북단 모허는 중국 유일의 야생 블루베리 산지이다.

9.2. 기후


만주의 위도는 북위 39~57도의 중-고위도로 서유럽과 비슷한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시베리아 동장군이 직빵으로 들어오는 만큼 강한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겨울이 매우 길고 춥다.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고 여름은 북만주 지역은 선선하나 랴오닝성 일대는 한국, 일본처럼 북태평양 기단의 영향을 받으므로 경악스럽게 덥다. 특히 차오양 시의 경우 여름 낮 최고 기온이 35도를 넘기는 경우가 잦으며 최고 43.3도를 기록하였다.즉, '''영하''' 50도와 '''영상''' 40도를 극과 극으로 오고가는 기후라고 보면 된다.
각 지역별로 어느 정도 기후 차이가 있다. 만주에서 가장 따뜻한 다롄(1월 평균 기온 -3.6℃)조차 냉대기후를 띠고 있다. 다만 지구 온난화에 따라 앞으로 온대 기후가 될 가능성이 높은 동네이지만(...). 그리고 선양(-10.4℃)만 해도 남한의 어느 곳보다도 추워진다. 하얼빈(-18.1℃)쯤 가면 개마고원이나 시베리아 남부와 비슷한 날씨가 되고, 북만주 끄트머리의 모허(漠河)쯤 가면 1월 평균 기온이 '''-30.9℃''''''까지 내려간다. 북극해 연안과 맞먹는 수준.'''[45] 그러나 냉대동계건조기후라서 눈은 잘 오지 않으며 '''매우 건조하다.'''[46] 북만주와 외만주 중 하바롭스크 지방,아무르스카야는 최한월 평균 기온이 -30℃ 정도이며 이는 시베리아와 전혀 다를 게 없는 기온이다. 북미로 치면 캐나다 옐로우나이프알래스카에서도 내륙과 비슷하다. 중~남부도 이보다는 따뜻하지만 여전히 춥다.
동위도에서 '''가장''' 추운 지역이며 겨울 기온만 놓고 보면 정말 북극이랑 다를 것이 없다.
만주 지역에서 기록된 역대 최저기온은 '''-58.0℃'''이며 역대 최고기온은 '''43.3℃''' 이다. 즉, 연교차가 '''101.3℃'''이다.
이곳도 고위도 특성상 한반도나 중국 중심부에 비해 여름에는 해가 일찍 떠서 늦게 지고 겨울에는 반대로 늦게 뜨고 일찍 진다.

9.3. 도시


랴오닝성의 성도인 선양, 지린성의 성도인 창춘, 헤이룽장성의 성도인 하얼빈이 크고 유명한 도시이다. 내몽골 자치구까지 포함하면 후허하오터[47], 그외 부성급시로 랴오닝 성 요동 반도 끝에 위치한 다롄(大連,대련) 시가 있다. 때때로 넓게 포함되기도 하는 러시아령 만주(외만주)의 경우,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그 외 하바로프스크, 블라고베셴스크 정도가 있다.[48]

9.3.1. 선양(묵던, 심양, 봉천)


선양(심양, 瀋陽)은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로서,만주어에서는 버드나무 울타리를 둘렀다는 뜻의 묵던(Mukden, 한자로는 봉천(奉天)으로 음차.)이라고 불리웠고 서양에서도 그렇게 부른다.
지금의 선양은 혼하(渾河)의 옛 이름인 심수(瀋水)에서 딴 이름이다. 강의 북쪽 땅을 양(陽), 남쪽 땅을 음(陰)이라하는데 심수의 북쪽에 있으므로 심수지양(瀋水之陽), 줄여서 심양 곧 선양이라 부르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서울한강의 북쪽이라 한양(漢陽), 중국의 낙양은 낙수의 북쪽에 있으므로 낙양이다.
선양 고궁, 청태조의 묘지 복릉(福陵)~東릉, 청태종의 묘지 소릉(昭陵) ~~北릉 등의 옛 만주족 유적들이 유명하다. 중국 내륙과 동북 3성, 한반도를 이어 주는 요충지이고 동북의 중심지이다.인구 2007년 기준으로 766만.

9.3.2. 창춘(장춘)


창춘(장춘, 長春)은 먼 옛날에는 부여의 중심지였고[49],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수도였던 도시로 당시에는 신징(신경, 新京, 신쿄)이라고 불렸고, 만주국 운영 후에 일본의 악명높은 731 부대를 세운 관동군의 중심 활동지였다. 만주 지구의 거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철도 교통의 요충지이다. 중국조선족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이다. 인구 2007년 기준 747만 명.

9.3.3. 하얼빈[50](하르빈[51], 할빈[52], 합이빈[53])


하얼빈(哈爾濱)은 이름부터가 만주어 '하르빈(Harbin)'에서 유래한 도시[54]로 북방색을 강하게 띠고 있다. 이 도시는 러시아 제국헤이룽장성을 점유하고 있을 때, 서양의 기술자들과 중국의 노동자들을 불러들여서 만든 도시이다. 당대에는 동양의 파리라고 홍보를 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화젯거리였다. 유명한 의거인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해당지역에서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었던 731부대가 여기에 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겨울엔 얼음이 한번 얼면 거의 안 녹을 정도로 매우 춥다. 하지만 이런 기후를 살려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얼음 축제를 열기도 한다. 인구가 2007년 기준 986만명으로 중국에서 10번째로 큰 도시. '''겨울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에 달하는 도시의 인구가 천만 명에 달하는 것이다!'''

10. 동북지방 사람들의 기질


만주, 즉 현대 동북 지방(동북 3성, 지린성·헤이룽장성·랴오닝성) 사람들의 특징이 몇 가지 있다.
  • 을 사랑한다. 일단, 날씨가 추우니 술을 마셔 몸을 데우는 게 당연할 테고, 술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인간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 덕분인지 하얼빈맥주로 유명하기도 하다. 동북지방는 아니지만 동북지방 접해있는 러시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역시 술을 잘 마신다.
  • 중국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우리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쓴다.
  • 의리를 중시한다. 그래서 친해지기 쉽다 카더라... 다만 사업적인 마인드를 중시하는 자본주의의 흐름에는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고.
  • 화끈하다. 그 덕에 둥베이 호랑이라는 영광스러운 별명까지 갖고있다.
  • 동북 지방은 경작이 잘되는데 겨울은 기니 사람들이 늘어져서 하릴없이 노는 시간이 길다.
  • 틈관동 때 산동 지방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삶을 어렵게 꾸려나간 탓에 큰 꿈을 품기보다는 현세적이고 소극적이다.
한국인의 기질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될 소지가 있다. 동북3성 인구 1억의 대부분이 한국과는 별 문화적 연고가 없는 산동 지방에서 이주한 한족[55]이기는 하지만, 산둥성이 바다 건너 한반도와 고대부터 상당히 교류가 밀접했으므로, 어느 정도 통하는 면이 있는 듯. 또한 200만 정도의 조선족은 구한말~일제강점기 때 올라간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민족적 기질은 쉽게 바뀌는 점은 아니라서 조선족 민족성도 한국인과 비슷한 면이 많다.
중국의 개방 이후 개발의 중심이 중공업이 발달되었던 동북 지방에서 동남 해안 지방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동북 지방의 경제적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좀 자포자기하는 분위기라고 한다. 한편 동북지방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잘 교육받았다고 한다. 외지인이나 농민공이 적은 편이어서 그런지 베이징, 상하이보다도 교통 질서를 잘 지키는 편.
만주 사람들은 교자(흔히 말하는 만두)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일본군만두#s-2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만주에서 복무하던 시절 먹던 교자를 잊지 못해서 나온 음식이라고 한다.
한편 중국어 표준어인 보통화는 사실 북방 관화에 기초하여 규정한 것인데, 수도 베이징의 토박이들이 쓰는 북경어[56] 말씨보다 동북 지방 사람들의 발음이 보통화의 표준 발음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평가된다.[57]
어째서인지 미녀가 많을 것 같다는 인식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실제로 만주를 가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는 미녀가 많다고 알려져 있고, 여성의 권한도 센 나라 중 하나이다. 또한 만주족 등 만주지역의 수렵채집민족들이나 일부 유목민족들 등 소수민족들 중에 미녀들도 있다는 인식도 적지 않으며 옛날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인식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여진족, 야인이라 불린 북방변경의 이민족들은 조선에 미녀들이 많다고 여겼고, 두만강 이북의 여러 민족들이 조선을 약탈할 때 이런 이유로 여성들도 납치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11. 의식주와 문화


만주 요리 참조. 만주족과 퉁구스족들을 포함한 만주의 여러 민족들 요리로 구성되었으며, 중국, 러시아와 러시아 소수민족들, 몽골, 일본, 티베트, 후이족과 신장의 이슬람 민족들, 한국의 영향도 받았다.
주거지의 경우, 내몽골 및 몽골과 가까운 곳은 유르트를 치며 살았고, 연해주 등 동만주 일대는 움집이나 땅 밑의 굴을 만들거나 건초나 나뭇가지로 쌓은 원시가옥 형태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의 영향으로 목조건축물을 짓는 경우도 나타났다. 외만주는 러시아의 영향으로 러시아 등 서양풍 건축물들과 도시가 생겨났다.
전통의상은 만주족의 치파오가 가장 유명하고, 만주족을 비롯하여 만주의 여러 제족들도 이와 비슷한 의상이다.
퉁구스 원주민들을 포함한 그 외 여러 민족들은 여러 민족들마다 잔신들만의 고유 샤머니즘이나 애니미즘, 토테미즘, 내몽골 동부와 가까운 서부 지역은 몽골인들이 텡그리교을 믿었지만,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이후 유교, 불교(대승불교티베트 불교), 도교의 영향도 받았다. 만주족과 다우르족, 어원커족, 나나이족 중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있다. 연해주와 하바로프스크, 사할린, 아무르 강 유역은 러시아 영토가 되면서 정교회 등 기독교 계열의 종교가 들어왔으며, 일부 유대교이슬람교도 있다. 다만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세속화되어 종교적 생활이 크지 않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이유로 지리적으로는 동북아시아지만 문화적으로는 동서양 문화 양쪽 모두 있는 지역이다.

12. 관련 문서



[1] 만주 지역의 여러 소수민족들 및 퉁구스계 민족들도 '만주(manju)'라고 부른다.[2]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3] 만주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표기.[4] 중국 조선족이 쓰는 표기.[5] 한국 한자음.[6] 공식어의 지위를 갖는 어떤 언어 지역 바깥에 위치한 지리적 실체(→geographical feature)에 대해, 그 지리적 실체가 위치한 지역의 공식 언어 또는 언어들로 일컬어지는 이름과 다른 형태로 그 특정 언어로 사용되는 이름 ... 유엔은 국제적으로 사용에 있어 외래지명의 사용을 최소화하라고 권유하고 있음. -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2012), 《지명 표준화를 위한 용어 사전(Glossary of Terms for the Standardization of Geographical Names)》, p. 14.[7] 당대에 쓰였던 우정식 병음으로는 Kwantung으로 적는다. 이 관동이라는 표현은 틈관동(闖關東/闯关东, 촹관둥: 청나라 말기 한족들의 만주 대량 이주) 같은 용어나 일본 제국이 조차한 지역인 관동주, 이곳 군대인 관동군 등에서 사용되었다.[8] 중국은 정치를 경제보다 중요시하는 나라고, 아무래도 북방인들의 정권이라 남방 지역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광둥성의 경우 중국인 글로벌 슈퍼리치 톱100 15명 중 10명을 배출하고, 200억원 이상의 자산을 보유한 억만장자가 다수 존재하고, 전국 31개 성급 지방정부 순위 가운데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지난 수십년간 광둥성 출신 정치국 상무위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9] 중국 전체 출생률은 1000명당 11~13명을 오가는 수준이고 합계 출산율은 1.6명대이다. 2015년에는 동북 3성 합계 출산율이 0.55명이었으나, 지금은 이보다 더 낮을 수 있다.[10] 러시아의 외만주 지역은 출산율이 러시아의 평균 수준이다.[11] 이 당시 동북지방의 별명은 '''공화국의 맏아들(共和国长子)'''. 중국 당국이 동북지방의 공업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지 알 수 있다.[12] 이훈(2013), "17-18세기 淸朝의 滿洲地域에 대한 政策과 認識 : 건륭기 만주족의 위기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13]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14] 사실 조선에서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닝구타 등지를 청의 발상지 내지는 고국으로 인식하면서 '만주(滿洲)'라 부르기도 하였으나, 오늘날 만주 지명과 연속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5] 지볼트의 행적에 관한 글[16] Mark C. Elliott(2000), "The Limits of Tartary: 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Vol. 59, No. 3;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35.[17] John Steinberg(2007),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Volume II》, p. 514.[18] 이병호(2008), "‘東北工程’ 前史 - 傅斯年의『東北史綱』비판", 《동북아역사논총》 20, p. 251~254.[19] Norman Smith(2012), 《Intoxicating Manchuria: Alcohol, Opium, and Culture in China's Northeast》, p. 219.[20] David W. Edgington(2003), 《Japan at the Millennium: Joining Past and Future》 p. 114.[21] Gavan McCormack(1977), 《Chang Tso-lin in Northeast China, 1911-1928》, p. 4.[22] Mariko Asano Tamanoi(2000), "Knowledge, Power, and Racial Classification: The "Japanese" in "Manchuria" ",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59, No. 2, p. 249.[23] Chad D. Garcia(2012), "Horsemen from the Edge of Empire: The Rise of the Jurchen Coalition", 워싱턴 대학교 박사학위논문, p. 15.[24] 이성시(2004), "동북아시아 변경의 역사 - 발해사의 배타적 점유를 둘러싸고",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 변경에 서서 역사를 바라보다》, p. 144.[25] 노추란 누르하치를 의미하지만 그 범주가 여진으로 확대됐다.[26] 2009,《族称manju词源探析》,长山作,刊载于《满语研究》, p. 1.[27] 陳鵬, 「“滿洲”名稱述考」, 『民族研究』, 2011, 제3기.[28] 세번째 지도로, 남만주철도 이동과 중국동부철도 이남을 만주로 표기하고 조선과 만주의 국경을 철도 노선보다 더 얇게 표시하여 남만주가 단지 물리적으로 조선과 인접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인접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29]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54~55, 92~94; 성근제(2011), "‘東北’인가, ‘滿洲’인가 - 근대 동북 지역연구과제 설정의 가능성 -", 《중국현대문학》 56.[30] 물론 화교들이 살고 있긴 하지만 조약 체결 무렵에 이 지역의 만주, 다우르, 한인들이 대거 학살당하면서 러시아 슬라브들에 비하면 아직 소수민족일 뿐이다. [31] KBS 어업기상통보에 나오는 연해주 지명인 테튜헤(Те́тюхе)는 이 때 달네고르스크(Дальнего́рск)라는 이름으로 바꿨다.[32] 동4맹(東四盟/东四盟)은 치펑시(赤峰市, 구 자오우다맹{昭烏達盟/昭乌达盟}), 퉁랴오시(通遼市/通辽市, 구 저리무맹{哲里木盟}), 후룬베이얼시(呼倫貝爾市/呼伦贝尔市, 구 후룬베이얼맹), 싱안맹(興安盟/兴安盟)을 한데 묶은 표현이다. 여기서 '맹'은 내몽골 자치구에만 있는 행정구역 단위인데, 현재는 행정 구역 개편이 되어 본래의 동4맹 중 3개가 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도 이 네 곳을 묶을 땐 예전 행정 구역을 따서 동4맹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만, 바뀐 행정 구역에 맞춰 3시 1맹(三市一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33] 과거 중화민국 시절의 행정 구역 중 하나였으며 중심지는 청더. 지금은 내몽골, 랴오닝, 허베이 성에 각자 흡수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오늘 날 내몽골 자치구의 츠펑을 포함한 시라무렌강 유역, 랴오닝 성의 요서 북쪽과 챠오양, 허베이 성의 청더 시가 해당된다. 역사적으로 선비족, 오환족, 거란족이 거주했던 지역이었다. 다만 청나라 때도 이곳을 내몽골의 일부로 간주한 적도 있었다.[34] 만주-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 44p.[35] 공동의 가상 적국인 '미국'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과거 중-소 이념 분쟁 사건도 실제로 있었던 만큼 매우 친밀한 것만도 아니며 지역 내 패권국으로서의 영향력을 서로 더 행사하려 들 가능성도 감안은 해야 한다.[36] 중국의 공산화 이후 대부분 미국이나 호주로 이주.[37] 후자의 경우에는 일부 고려군 선발대가 압록강을 넘어가기도 했다.[38] 물론 먼 조상격인 몽올실위는 만주지역에서 나왔던 민족이다. 다만 나중에 몽골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그래서 이후 칭기즈칸 시대에는 몽골지역에 있었다.[39] 한국의 고려, 조선은 후술하듯이 일시 점령하였으며, 간도 지배는 논란이 있는 편이다. 러시아의 경우 근대 후기인 1860년에 연해주 등 외만주 지역들이 러시아령이 되었고, 일본은 청일전쟁러일전쟁 이후라서 1800년대 이전이 아니므로 제외.[40] 제2차 요동정벌은 위화도 회군으로 파토가 나고 조선 초 제3차 요동정벌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파토가 난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 나선정벌 때 조선군이 요동보다 훨씬 더 북쪽인 흑룡강까지 가지만 이건 청나라를 지원하기 위한 파병이었으므로 지배와는 무관하다. 조선 말(대한제국)에 잠깐 간도 일부를 일시 점령해 관리사를 파견하여 지배했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논란이 많다. 간도 참조.[41] 동북역치 이후.[42] 둥베이 평원 혹은 만주 평원)이 있긴 한데 풀만 있는 동네 정도는 아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르강 유역이나 내몽골 동북부 지역에는 초원이나 벌판이 조금 있긴 하다.[43] 식량 확보를 위해서 많은 곳이 개간당했다.[44] 실제로 학명에 만주를 뜻하는 "mandshurica"가 붙은 식물 거의 대부분 한국에서도 서식한다.[45] 같은 위도(북위 53도)의 독일 함부르크, 네덜란드 프리슬란트 지방이나 잉글랜드 중부 지방의 1월 평균 기온은 '''영상 1~4도'''이다.[46] 12월부터 2월까지 겨울 강수량이 다 합쳐 20mm를 겨우 넘는다.[47] 내몽골 자치구의 중심 도시로 몽골 도시이지만 내몽골의 동부 흥안성 일대는 만주로도 간주해 편의상 넣었다. 후허하오터(呼和浩特)는 고전 몽골어로는 쾨케호타라고 읽으며 현대 몽골어로는 후흐허트(Хөх хот)라고 읽는다. 몽골어로 푸른 성 혹은 푸른 도시라는 의미이다. 16세기에 남몽골(투메드 몽골)의 알탄 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도(古都) 후허하오터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역사적인 도시이지만 현재 인구의 대부분은 한족이며, 티베트 불교 사원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몽골 특유의 요소는 별로 없다. 원래 한족의 영토가 아니었던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그래도 한족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대한민국과 관계가 깊은 재중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약 200만명 정도. 동북 3성부터 베이징까지 전체적으로 분포되어 있긴 하지만 주로 지린성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 참고로 국공 내전에 가장 먼저 협력하여 중국에서 최초로 생긴 자치주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래서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의 주요 활동 무대이기도 했다. 네이멍구 자치구(내몽골 자치구)도 이름과는 다르게 한족들이 전체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몽골인의 비중은 17% 정도. 그래도 '''몽골국 내 몽골인보다 내몽골인이 더 많다'''.[48] 사할린까지 포함될 경우 유즈노사할린스크도 있다.[49] 농안~장춘, 길림시 일대.[50] 중국어의 외래어 표기법.[51] 만주어 발음에 가깝게 적은 표기.[52] 중국 조선족이 쓰는 표기.[53] 한국 한자음.[54] 실제로 로마자를 쓰는 외국어(주로 영어)로 이곳의 이름을 표기할 때 한어병음식으로 Ha'erbin이 아닌 만주어식인 Harbin으로 표기한다.[55] 이정기의 제나라 등을 보면 문화적 연고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56] 북방 민족의 영향으로 얼 발음이 붙는다.[57] 특히 하얼빈 발음은 가장 깔끔한 보통화란 평이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