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영(1893)
박정주, 안성섭(安成燮) 등의 주도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고, 3월 22일에 반암면 노단리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에도 참가했다. 이후 1919년 8월경, 그는 서울에서 이충모(李忠模), 김형준(金炯俊), 양재명(楊在明) 등과 함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를 조직해 장수군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박기영은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장병준(張炳俊)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해 국내의 제반 정세를 보고하게 했고 상호 연락 체제를 갖추도록 했으며, 격문 수천 매를 등사해 서울의 요소에 살포하여 민중 봉기를 호소했다. 또한 1920년 3.1 운동 1주년 기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동지 유진상의 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한 뒤 격문 2만 매를 인쇄하여 대전, 대구, 마산, 목포 등지에 살포했다. 또 그해 4월 15일에는 임시정부 1주년 축하문을 만들어 동지 박승래(朴承來)와 함께 서울, 장수 등지에 살포했다.
1920년 8월 중순, 박기영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군자금 납입통지서를 국민회 전주지회로 보내어 장봉한(張鳳翰)[1] 으로부터 군자금 850원을 받아냈으며, 천도교 집회에 참석해 계몽 강연을 했다. 그러나 1922년 2월 15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지내다가 1938년 3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에 박기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기영은 1893년 2월 25일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옥율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장수군 산서면 동화리 장터에서 유생 박기영은 대한국민회 회장으로서 장병준(張炳俊)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해 국내의 제반 정세를 보고하게 했고 상호 연락 체제를 갖추도록 했으며, 격문 수천 매를 등사해 서울의 요소에 살포하여 민중 봉기를 호소했다. 또한 1920년 3.1 운동 1주년 기념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동지 유진상의 집에서 동료들과 함께 국권 회복을 위한 방안을 논의한 뒤 격문 2만 매를 인쇄하여 대전, 대구, 마산, 목포 등지에 살포했다. 또 그해 4월 15일에는 임시정부 1주년 축하문을 만들어 동지 박승래(朴承來)와 함께 서울, 장수 등지에 살포했다.
1920년 8월 중순, 박기영은 임시정부에서 보내온 군자금 납입통지서를 국민회 전주지회로 보내어 장봉한(張鳳翰)[1] 으로부터 군자금 850원을 받아냈으며, 천도교 집회에 참석해 계몽 강연을 했다. 그러나 1922년 2월 15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고향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으며 곤궁하게 지내다가 1938년 3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에 박기영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