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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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내영(朴來英)
생몰
1873년 2월 25일 ~ 1960년 10월 10일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동
사망지
경상북도 영천군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목사.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내영은 1873년 2월25일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했고, 경주 노동리교회에서 복사로 재임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8일, 그는 경산군 고산면의 기독교 목사 김기원(金基源)으로부터 대구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는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노동리교회의 영수 윤기효(尹琪涍), 박문홍 등과 협의하여 3월 13일 경주읍내 장날에 거사하기로 계획했다.
그들은 청년 신자 5, 6인을 포섭한 뒤 3월 11일과 12일 밤 두 차례에 걸쳐 노동리 교회에서 모임을 갖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했다. 이때 박문홍이 태극기를 자신의 집에서 3백여 개 인쇄했으며, 3월 13일 새벽에 각처에 배포했다. 그러나 이 일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경주경찰서는 3월 13일 새벽에 4대로 편성한 기동대를 투동해 만세주동자들을 체포했다. 결국 박내영은 거사를 시작하기 몇 시간 전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3월 13일 경주만세시위는 불발로 그쳤다. 하지만 3월 15일 읍내 작은 장날에 모인 수천여 명의 군중들은 어렵게 구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이고 경찰에게 박내영 등 애국지사들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박내영은 1919년 6월 14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1년여 간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경상도 일대에서 목회 활동을 계속하다가 1960년 10월 10일에 경상북도 영천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내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1996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