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규(1914)
11월 1일 박용규 등 동지들은 11월 7일 러시아 혁명 기념일에 맹휴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스트라이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거사 당일인 11월 7일 아침 조회 시간에 김호배가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고, 박원지(朴源志)는 "광폭하고 무자비한 일본제국주의 자본가 지주의 충견(忠犬) 스파이를 박멸하자"라는 격문을 작성, 학생들에게 배포하기로 하는 한편, 김환기는 적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이들은 거사 이틀 전인 11월 5일 오후 12시 경 격문 20∼30여 매를 학교 근처 벽보에 부치는 등 거사계획을 진행시켰으나, 사전에 이를 탐지한 일경에 발각되어 계획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이후 1933년 7월 31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출판법, 가택침입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출소 후 밀양에서 조용히 지내다 2013년 8월 2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박용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다. 그리고 2013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