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남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종남'''
'''朴鍾南'''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98년 3월 24일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금곡리
<color=#fff> '''사망'''
몰년 미상
사망지 미상
<color=#fff>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
2. 생애
3. 그 외 다른 인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종남은 1898년 3월 24일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4일 황해도 연백군 유곡면 금곡리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장순영(張順英)[1]·주시향(朱時鄕) 등 주민들과 함께 참가하여 순종이 순행할 때 환영하기 위해 제작했던 태극기 30여 매를 들고 나와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이에 불복,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는 상고 취지에서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조선인은 고대 문명을 발전 승화시켜 온 민족으로 유사 이래 4천 3백년에 걸쳐 타 민족의 기반 압제를 받은 사실이 없던 차에 구사고책(舊思古策)해 온 일본침략주의의 희생이 되어 국가의 원수 및 국민이 원하지 않는 이른바 보호정책·합방정책에 노략질 당하고 조종세업(祖宗世業)은 한낱 일본의 식민지로 화하고 우리 조선 문화민족은 야만인 대우를 받기에 이르러 생존권조차 박탈당해 왔다.

그러나 세운이 순환하여 인류의 양심에 따라 세계를 개조하려는 오늘날, 정의와 인도 및 자유 평등을 목표로 하는 강화회의에서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적어도 스스로 원치 않는 통치하에서 압제받기를 거부하고 정당한 처분을 요구할 경우, 이를 무력으로써 진압하려 들지 말고 공명정대하게 피지배 민족의 대표를 강화회의에 파견토록 협력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10년간의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런 합방을 당해 오랜 세월을 고통으로 신음해 왔던 만큼 이제야말로 독립을 기하여 자결주의에 따라 민족대표를 강화회의에 파견함과 동시에 3월 1일을 기해 경향 각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것이다.

(중략)

살피건대 정의 인도에 입각하여 민족자결이 부르짖어지는 오늘날 제 나라의 독립운동을 함에 무슨 비리가 있을 것이요, 충정으로 국가 장래를 축원함은 이 아니 의무이랴. 이 어찌 시대의 양심이라 하지 않을손가.(후략)"

그러나 결국 1919년 5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박종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3. 그 외 다른 인물


한국의 판사. 2010년 보수협박 노조탄압 중단요구 1인시위를 하였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장순영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