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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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 독립유공자 대우의 현실
3.2.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4.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5. 누가 독립유공자인가
6. 외국인 독립유공자들 (91인)
7. 테러리스트와의 차이
8. 기타
9. 관련 문서


1. 개요


'''순국선열(殉國先烈)''':
일제의 국권침탈(1895년)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하다가 그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
'''애국지사(愛國志士)''':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표창을 받은 자
'''독립유공자'''()는 일본제국조선보호국화-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국권 수복을 위하여 여러 민족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독립운동가'''()라는 말도 많이 쓴다.[1]
이들은 게릴라, 요인 암살, 파괴 공작 등의 무력 투쟁 뿐만 아니라, 문학, 외교, 사회 운동 등의 비폭력 투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일제는 식민지배에 방해가 되는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는 데 열중하여 끔찍한 고문과 형벌, 흉계를 서슴치 않았으며 실제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목숨을 잃거나 건강과 재산을 잃고 비참한 인생을 살았다. 더러는 견디지 못하여 은둔, 절필하거나 친일파로 변절하기도 했으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의 투지를 굽히지 않고 투쟁을 이어가다 희생됐다.
마침내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이루어지자 당연하게도 남북한 모두 독립운동가들의 업적과 노력을 대대적으로 인정하고 칭송했다. 지금까지도 두 국가 모두 독립운동가들의 정신과 단체를 계승하는 정통 국가임을 천명하는 것은 물론이고[2] 국가유공자로서 독립운동가들을 대우한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독립운동가들과 독립운동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져 지금까지 어렵게 사는 후손들, 가짜 독립유공자 등 아직 독립운동가들에게 보이기엔 부끄러운 현실이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양반 집안이 많았다는 썰이 있으나 고위직들만 양반 비율이 높고 대부분은 천한 사람들이었다. ## 일본군, 헌병, 경찰이 조사한 의병장 및 부장 430명 중 직업과 신분이 분명한 사람이 255명으로, 255명 중에서 유생·양반이 64명(25%), 농업이 49명(19%), 士兵이 35명(14%), 무직 및 火賊이 30명(12%)으로 되어 있으며, 기타 포군(13명), 광부(12명), 主事·서기(9명), 장교(7명), 군수·면장(6명), 상인의 순으로 되어 있다. 또한 1908년에 귀순하거나 투항한 의병장 및 부장 28명 중 8명(28%)이 양반 출신이고 나머지 21명(72%)이 평민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의 경우에는 2,198명 중 양반이 겨우 57명(2.7%)인데 비하여 평민이 2,141명(97.3%)이다. 그나마 독립운동을 벌인 양반들도 대다수가 지방 출신이었지, 원래 기득권이던 중앙의 고위 유림들은 왕족들을 포함하여 은거하거나 일제에 부역하였으며, 실질적으로 거의 전부가 일제에 백성을 담보로 팔아넘기는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귀족이 되었다. 참고로, 이 조선귀족들과 양반들은 일제의 요청에 의해 사회구조적 수탈에도 적극 협조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다. 사실상 친일조선왕조 시즌2였던 셈이다.

2. 독립유공자 목록



3. 독립유공자 대우의 현실


독립유공자의 자녀 및 손자/녀[3]에게는 대학 등록금 면제 혜택이 주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후손들에 대한 대우는 썩 좋지 못하다.''' 일제시대가 35년간이나 이어졌으므로 광복 후 행정이나 관리 등 정부 관련 업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사실상 대부분 친일파들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관련 일자리에 많이 들어갔으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위해 집도 고향도 다 버리고 외국(특히 국부군)에 나가 투쟁하는 경우가 다반사라 관련 경험이 있는 사람도 적고 호적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건국 초부터 북한과 대치해야했고 남한 내에서도 공산 반란과 폭동이 수시로 일어났던데다가 6.25 전쟁까지 일어나서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렇게 건국 당시부터 공산 세력에 맞서 당장의 국가 존립을 걱정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운동을 했어도 좌익 쪽에서 했으면 목이 성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4] 거기에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주던 공무원 시험 가산점 10%가 위헌 판결을 받아 반으로 줄어든(5%) 일도 있다.
현재 독립유공자의 후손은 손자/녀까지 일부 혜택을 받을 수 있지만, 독립 운동 여부를 증명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닐뿐더러[5], 독립 후 70년이란 세월이 지나며 현재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후손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 초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의 경우 그 후손이 고손자 혹은 6대손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가 인정받은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서 설령 독립유공자로 힘들게 인정받았어도 그 후손이 조상의 행적에 대한 보상을 받은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이에 대해 유족의 범위를 증손까지 확대하고, 유공자로 지정될 당시 손자/녀도 생존해 있지 않다면 그 후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었으나 재정적 문제와 다른 국가유공자들과의 형평성 문제[6]로 3년이 넘도록 계류 중이다.
그래서 당시에 비교적 대우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후손들에게 얘기를 들어보면 '''차라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낫다'''[7]고 하거나, '''독립 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라고 한다.[8]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고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대학교에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독립유공자 전형[9]으로 온 친구들을 간혹 볼 수 있으니 먹을 것이라도 잘 사주자.[10]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오명도 있지만 의외로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 민족주의 우파계열 독립운동가들은 정치, 학계에서 높은 위치에 오른 경우가 많다. 초대 국무총리대한민국 국방부장관이범석 장군, 손정도 목사의 아들이자 초대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 5대 국방장관을 지낸 손원일 제독과 그의 동생, 대한민국 공군의 아버지이자 초대 국방차관, 2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최용덕 장군, 6대 대한민국 공군참모총장이었던 김신 장군을 비롯한 김구의 후손들[11], 안창호의 아들 안필립[12], 안중근 의사의 사촌이자 초대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안춘생 장군, 박정희 정부에서 외교관을 한 조카 안진생, 우당 이회영의 손자이자 더불어민주당의 원내대표였던 이종걸 의원, 조홍희 등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손자 윤주경은 독립기념관장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성공한 건 '''그냥 자기가 잘 해서 성공한 것'''이라서 국가의 보훈 정책과는 관계가 없고, 그마저도 독립운동가 후손의 비율 중에서는 소수다. [13]
또는 독립운동가나 그 가문들이 친일파 집안과 인맥으로 연결된 경우도 흔하다. 예를 들면 홍사익 중장이 지청천의 일가의 생계를 살펴줬다는 이야기, 김구 또한 해방 후에 최창학이라는 친일 광산 재벌의 정치 지원을 받았으며,[14] 그 아들인 김신 장군은 5·16 쿠데타에 가담하였고, 박정희의 지지를 받았다. 손원일 제독의 아버지인 손정도 목사는 윤치호 집안과 사돈을 맺었다. 사실 양반 출신[15][16]들끼리는 그런 게 흔했다. 일제 장교인 이응준은 장인 이갑이 독립운동가였고, 마찬가지로 김석원도 독립운동가인 이종혁이 수감을 마치고 백수가 되어 망하고 있을 때 다방면으로 도와줬다.
현재의 대한민국에는 친일파 후손들이 다 해 먹고 독립유공자들은 자수성가도 못하고 높은 위치에 오르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러나 친일파의 후손들이 슈퍼 엘리트로서 한국 사회를 좌지우지하고 있냐면 그건 현실과는 다른데 우선 뉴스타파의 조사에 따르면 친일파의 후손 중에 엘리트가 많은 건 사실이나 사회에 강한 영향력을 지닌, 즉 '''슈퍼 엘리트급의 존재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또한 현대 대한민국 사회는 친일파에 대한 반감이 강하다. 대놓고 과거 친일 행각에 대해 미화하거나 합리화가 마냥 쉽지 않다.[17] 실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선친이나 조부 때문에 사회적인 인지도를 날려버린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현재 시점에선 그냥 돈 많은 집의 2, 3세라고 볼 수 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친일파의 후손은 잘 살고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힘들다"라는 통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그러나 친일파 후손이 대놓고 이 사회를 흔들고 있냐면 그건 그렇지 않다는 쪽에 가깝다. 실제 논란이[18] 된 친일파 후손들만 해도 자기 조상이 애국적이었다느니, 시대의 비극적인 희생양이었다느니 어림없는 변명을 내놓았지만 씨도 먹히지 않았다.[19]
독립유공자들과 그들의 후손이 가난하게 된 이유는 어떻게 보면 현실적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1910년에는 초등학교 취학률도 4% 가량에 불과하였는데, 양반도 아니고 하찮은 신분인 사람들이 대다수인 독립유공자들이 학벌부터가 좋을 수가 없으니 독립운동 후에 돌아와도 성공하기 힘들었다.[20] 독립운동가 후손의 75%가 월 소득 200만 원 미만이고 심지어 100만 원 미만이 30%였다는 한국일보의 통계 자료가 있다.# 그 이유를 정부 수립 초기의 형편 없는 대우로 꼽고 있으며, 개선된 이후에도 자손들에게는 부모의 가난대물림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수립 초기에는 일부 권력형 친일 의혹이 있던 사람이 아니면 대부분 운이 좋은 사람들이 득세했지, 그 외에는 전부 가난 속에 살았다. 특히 전쟁 후에는 더더욱. 또한 친일 인명 사전에 등록된 1000여 명의 자손들을 조사한 결과 그들 대부분이 엘리트로서 부유한 삶을 살고 있다 한다.#
일제의 지원을 받았더라도 친일파에서 친미파나 애국자로 포지션을 전환함으로써 살아남은 친일파 후손들도 많았다.[21] 친일파들이 전쟁으로 망했다는 썰도 있으나 친일파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보면 북한군이 오기 전에 오히려 이미 대비가 되어있어서 서민들과 다르게 오히려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노덕술 같은 경우처럼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고 때려잡았던 악질 친일파들조차 대한민국 건국 후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22]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기 시작한 박정희 정부 때 대대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해 훈장을 수여하거나 그 후손을 독립유공자로 지정하는 작업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가 보훈 대상자에 대해서 신경 쓸 정도로 경제 기반을 이루어 낸 것이 1990년대부터였다. 개뿔도 없던 1960년대에는 국가 유공자라는 명패 하나 달랑 주고 끝냈다는 서글픈 이야기가 전해진다만 1960 ~ 70년대에도 자식이나 후손의 등록금 지원과 같은 최소한의 지원은 해줬다. 혜택을 받지 못한 정도는 아니다.
일단 그 대우가 적절한 수준이냐는 것과는 별개로 유공자들에 대한 대우는 나아지고는 있긴 하다. 2015년 6월에는 금전적인 지원도 6배까지 늘리고, 해외에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이 귀국해서 정착하는데 최대 7천만 원의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제대로 증명만 되면 누구든 혜택을 받는다. 2019년에는 서울시에서 독립유공자 후손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글을 보는 위키러들 중에 집안에 조부께서 유명한 독립운동가 모 씨와 교류한 편지가 있다거나, 독립군자금 얼마를 주어 고맙네 하는 답신이 발견되면 곧바로 보훈처에 연락하도록 하자.

그리고 일반 유공자도 마찬가지지만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검증이 되어야 하는 게 현실이다. 이 때문에 안중근이나 윤봉길 급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별 문제 없이 혜택을 받지만, 임시정부에서 군자금 운송하고, 연락책 노릇을 했던 분들의 후손들은 제대로 검증 받기 힘들다. 독립운동의 특성상 보안이 남다를 수 밖에 없으니. 그나마 잡혀서 처벌받고 투옥된 기록이 있으면 낫지만, 007급의 활약으로 고생 없이 깔끔하게 해방을 맞이하신 분들은 안습이 될 수밖에 없다. 당연히 후손들 입장에서도 조상님의 업적을 밝히기 몹시 힘들어진다.
안타깝지만 '''검증을 제대로 해야 하는 이유가 '가짜'가 혜택을 받아선 곤란하기 때문이다.''' 실제 독립운동가라고 서훈을 받았다가 나중에 친일로 전향한 게 밝혀져 서훈이 취소된 사례[23]도 존재한다. 또한 친일파 후손들 만큼이나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조상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가 적다. 실제 가수 송대관이나 신해철, 서태지, 하이트진로 사장인 양인집, 국방부장관 한민구 등은 본인들이 자수성가해서 그 사실이 나중에 알려진 경우다.
심지어 "조부는 그 정도인데, 너는 왜 그것밖에 못하냐?", "조부 만큼 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소리를 들어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일도 많다. 실제 김구의 증손자인 김용만 씨는 어릴 때 이 때문에 부담이 많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혜택을 받아도 "조상 덕에 잘나가는 놈"이라고 비아냥 거리는 부류들 때문에 피곤한 게 현실이다. 정말 그런 놈들이 있는지 일반인들은 체감하지 못하겠지만, 실제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이 문제 때문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입으로는 나라를 위해 애쓴 분들 챙겨주자고 하지만, 정작 눈앞에서 조상 잘 둬서 혜택 받고 꿀 빠는 사람을 보면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물론 대놓고 욕은 안 하지만, 대학 등록금 면제나 군복무 몇 달 방위/공익 등으로 간단히 해결 받는 것[24]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당사자를 아싸로 만들거나 뒷담화하는 경우가 흔하다. 아예 당사자 앞에서 '니 할아버지(or 아버지)가 잘난 거지, 니가 잘난 거냐?'며 날 선 소리를 부류들도 있다.
실제로 윤봉길 의사 장손녀인 윤주경 씨는 '''할아버지 팔아먹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자기 입으로 자랑한 적은 없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해방되고 다들 어렵게 지내던 시절에 윤 의사의 미망인이 쥐꼬리 만큼의 도움을 받은 것조차도 남편 뼈를 팔아 먹고 산다고 수근거린 인간들이 있다고. 거기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공짜나 바라며 사는 사람들 취급하는 인간들도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며 토로하기도 했다.## 가장 잘 알려진 독립유공자라 할 수 있는 윤봉길 의사 후손들이 이런 일을 겪었을 정도니, 후방 지원이나 좌파 계열같이 여러 가지 이유로 잘 알려지지 못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어땠을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25]
가장 가관인 것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대우를 잘해주자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관계나 행보가 틀리다 싶으면 가차 없이 좋지 않게 취급을 하는 점이다. 김구 손자들처럼 뇌물을 받았다가 쇠고랑을 찬 것이라면 모를까.[26]
위의 일련의 일로 고통을 받지 않았더라도 조상 후광 안 보고 열심히 사는 게 옳다고 보고 조상 이야기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활동한 것이 아닌, 순수한 신념에서 활동한 것이기 때문.[27] 이에 후손들 역시 자수성가 하거나 그냥 말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분들은 보상 문제가 언급되면 '''"금전 따위로 선조의 업적을 평가하려 들지 마라"'''며 불쾌하게 여기기도 한다. 괜히 윤주경 씨가 친일파 후손 돈 삥뜯어서 독립운동가 후손들 도와주자는 일각의 주장에 회의적인 것이 아니다.

3.1. 호부견손


또 한 가지 문제는 조상은 항일을 했는데 후손이 친일한 경우이다. 본인이 독립운동을 했더라도 변절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이런 케이스가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겉으로는 일제에 순응했다 하여 이들이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아니겠지만, 정말로 호부견자에 해당하는 케이스가 있다면 공정성이나 형평성 논란이 있을 수 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인데 아버지가 친일한 경우, 손자에게 혜택을 준다면 결과적으론 친일파 후손이 덕을 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 또한 형제 중에 애국자와 반역자가 있어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즉 한 집안에 호부호자와 호부견자가 존재하는 경우인데, 훌륭한 아버지를 둔 덕분에 애국자 아들과 반역자 아들이 모두 혜택을 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는 독립유공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유공자 가족들에게 해당되는 딜레마인데, 이런 시선을 의식하여 자녀를 올바르게 교육하는 집안도 물론 있지만, 생활고로 인해 가정이 해체되고 불우한 환경을 비관해 나쁜 길에 빠진 사람도 물론 있기 때문이다.
최태민의 아들 최재석의 증언에 따르면 최태민의 아버지는 공인된 독립유공자로 자신이 혜택을 보고 있을 정도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일제가 최태민을 학력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순사로 임용했다고 한다. 일제가 독립유공자들의 자손을 일부러 호부견자로 만들기 위해 수를 썼다는 것이다.

3.2.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는 의견이 많다. 독립 운동가들의 숭고한 뜻과 희생 정신은 존경 받아 마땅하고, 그들의 피땀 어린 활동이 대외적으로 주목 받은 것은 사실이나, 결국 한국은 일본을 물리친 미국과 소련의 힘으로 독립되었다.[28] 즉, 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른 길보다는 당시 국제 정세에 맞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애꿎게도 38선으로 분단된 한반도에는 미소 대결 국면으로 인한 냉전의 기운이 감돌았고, 한국(당시 표현으로는 남조선)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부득이 친일파들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 세력의 손에 국가 권력이 쥐어졌는데, 이들을 청산한다는 목표는 당연히 눈 가리고 아웅이 될 수밖에 없었다. 김구가 불가능에 가까운 한국광복군 손으로[29] 독립을 이뤄내는걸 못했다고 한탄한 것은 다 이런 까닭이었다.[30] 물론 냉전이 끝나고 제법 나라 꼴을 갖춘 후에도 독립운동가들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을 대접할 절호의 기회는 이미 날아간 지 오래다.
한편으로 '''우리 손으로 독립을 이뤄냈어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표적인 예로 폴란드가 있다. 폴란드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 되자 국외로 탈출한 자유 폴란드군 25만[31]과 수십 만의 국내 저항군 조직이 나치를 상대로 싸웠다.[32] 자유 폴란드군들은 전후에 서방 진영이 폴란드 공산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며 철저히 배신당했고, 귀국한 장병들도 서방 끄나풀이라며 푸대접받았다. 특히 소련은 친소파를 뽑는 데 과거를 크게 따지지 않았고, 실제 나치 완장 차다가 빨간 완장으로 갈아탄 기회주의자들도 상당히 많았다.[33] 이런 기회주의자들이 애국 지사들을 반동으로 때려잡고 감시했기 때문에 귀국을 후회한 장병들도 많고, 연합군의 푸대접에 불구하고 귀국을 포기한 폴란드인들도 많았다.실제 폴란드 망명 정부는 바웬사 집권으로 민주화가 되기 전까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과적으로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이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 건 권력자와 그 지지자들의 '''정치적 논리''' 때문이다. 친일파, 그것도 비교적 젊은 층들이 해방 이후 기용될 수 있었던 것은 서둘러 정부를 수립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입각한 미 군정과 이승만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선택 때문이었다.# 오히려 독립운동가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이다. 건군 초기 국군에서 만주군이나 일본군 출신 친일파들이 입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범석 장군이 "젊은 놈들은 늙은 것들에 비해 일제에 물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판단에 기용된 것이다. 김석원이 경력이 새파란 채병덕 같은 부류와 알력을 벌였던 것도 다 그 때문.[34] 조만식도 만주군이나 관동군 출신의 청년들을 데리고 다녔다. 대표적인 인물이 백선엽이다. 독립운동가들은 극심한 좌우 대립 속에서 좌익이든 우익이든 자신의 위치를 잡은 후 친일 경력이 있는 이들을 어찌 되었든 나라 일에 끌어들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절대 이상에만 빠진 이상주의자나 신념에만 빠져 현실을 못 보는 사람들이 결코 아니었고, 국가 기틀 잡기나 국제 정세의 쓴맛을 아주 깊이 맛본 사람들이었다. 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특히 임시정부 관계의 인물들의 경우, 나라 자체가 없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광복 후 나라의 치안과 국방을 우선으로 여겼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였던 손원일 제독은 해병대 창설을 위해 신현준, 김석범과 같은 일본 해군, 만주군 출신들을 기용할 수 밖에 없었으며, 역시 공군의 아버지인 최용덕 장군 또한 공군 창설을 위해 김정렬과 같은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치논리에 의한 것은 수십년 후의 정권들에도 마찬가지다. 노무현은 대대적인 친일파 단죄 및 재산 환수에 나섰지만, 정작 여당 열린우리당에 친일 잔재(...)가 있는 게 알려지면서 후폭풍이 일었고, 친일 청산도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더구나 이 때 청산 시도가 한나라당과 박근혜를 표적으로 할 의도였다는 주장이 있을 만큼, 친일파 선정 기준도 말이 많았다.[35][36][37]이런 정치적인 잣대에 의한 평가는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근래 일부에서 백범 김구에 대해 비판이 일고 있는데###, 좌파 일각에서는 친일파 박정희와 손잡은 김신 때문에 과대평가 되었다고 주장하고,[38] 이승만의 외교 투쟁을 호평 하는 우파 일각에서는 김구의 무장 투쟁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4.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


그나마 민족주의계열 활동가들은 국가의 서훈이라도 받은 경우가 많은데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해방이후 특히 1950년대 이후 조상의 흔적을 지우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빨갱이 집안 낙인으로부터 목숨을 지키느라. 따라서 국가 서훈은 꿈도 못꾸고 살았는데 그나마 2000년대 중반 경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어느정도 서훈을 받거나 공로를 인정받는 경우도 생겼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에게 서훈을 주거나 재조명할때에는 반대하는 세력이 엄청많다. 대표적으로 김원봉

5. 누가 독립유공자인가


독립유공자에 선정되려면 일제강점기 당시 형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필요하다. 세상이 좋아져서 그런 기록들은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가 판결문 목록#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조상이 독립운동가인데 아무도 몰라준다면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신청을 받아준다. 여기도 독립운동가에 대한 자료가 가득하다.#
허나 기록을 찾기 수월해졌어도 여전히 누구를 독립유공자로 선정하냐는 아주 곤란한 문제다. 독립유공자 중에서는 항일 투쟁을 했으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사람이나 애초부터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사람이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경우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므로 해결해야 할 사항이다.계간 역사비평 초기에 이 관련 문제로 논문이 올라왔는데 '''양 진영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동명이인인데 버젓이 올라와 있어서 한쪽은 취소해야 하는데 말이 많아지자 '''두 사람 다 그대로 두기도 했다.''' 같이 옥살이 했는데 연장자인 사람과 연소자인 사람이 유공자 등급 차이가 나기도 하며, 안중근, 유관순서재필이 동급인 이상한 등급 책정도 문제이며, 기간에 따른 등급 책정으로 인한 문제도 있다. 1945년에 있었던 대구 집단 탈영 사건의 경우, 방조죄로 '''주변에서 도와준 여자'''도 중형을 내렸고 중간에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장교 몇 명이 중재하지 않았으면 사형 직전까지도 갈 만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중형을 받고 3개월 뒤 해방이 되는 바람에 등급이 낮다.
그리고 선반일, 후친일의 같은 변절자에 대한 문제도 있다. 뭐, 처음에 반일한 거 인정해 주는 게 맞지 않겠냐는 말도 있고 그런 공이 실제로 있음은 인정해야겠지만, [39]또 반대로 선친일, 후항일도 문제가 된다. 만약이란 것은 없지만, 이완용이 만약 죽기 직전에 항일 운동을 했다면 이완용의 후손이 독립유공자의 후손이 될까?
거기다가 한국에서는 소외되어 외국에 있거나 외국에 있어 한국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은 유공자도 있다. 무관심 속에 잊혀진 이런 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에게는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독립유공자들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도 했다(중국군에서 복무한 사람들은 많았다.).
심지어는 안창호는 '''21세기가 될 때까지 한국 국적을 못 받았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호구조사를 기준으로 국적을 따지다 보니 한국인 독립투사가 한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사실 조선의 독립과는 전혀 관계없는 행동을 했는데도 독립유공자가 된 사례가 있다.[40] 독립유공자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것은 친일반민족 행위가 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에 대한 비판도 상당히 많다.
다만, 북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한민국이 선정한 독립운동가에서 제외된다. 그리하여 북한지도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후에 숙청된 김원봉이나 북한의 부총리를 맡았던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독립운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6.25 전쟁 당시 북한에서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전 시기에는 좌파 독립운동가 전부를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했으나, 김영삼 정부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지 않았으면 대한민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포상하고 있다. 예를 들면 김산이나 이동휘 등이 있다.
한편 문재인 정부 들어서 북한 정권에 부역한 독립운동가 출신 사람들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주려는 움직임이 있다. 손혜원 무소속[41] 국회의원의 부친 손용우 씨 또한 월북해서 북한에서 밀명을 받는 등 좌익 활동을 해서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6차례나 떨어졌는데, 문재인 정부의 피우진 보훈처장을 만나고 나서 규정이 개정되어 서훈을 받았다. 이를 두고 특혜 의혹이 있다.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의 경우에도 공과 과가 뚜렷해서, 2019년 현충일 추념사 이후 해당 문제를 둘러싼 좌우 대립이 심해졌다.

6. 외국인 독립유공자들 (91인)


비단 한민족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고마운 외국인 독립유공자들도 존재한다. '''심지어는 일본인 독립유공자들도 있다.''' 2009년 2월 기준 외국인 독립유공자는 총 45명이었으며 2019년 2월 기준,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가네코 후미코까지 총 88명이다.[42] 1964년 12월 8일 건국훈장을 받고 태평양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미국인 트루먼, 맥아더와 독일인 에르하르트까지 포함하면 총 91명이다.
특히 일본인 독립유공자는 '''자국 일본 정부로부터 핍박 받으면서 조선인을 도와줬다.''' 독립유공자로는 추서되지 않았지만 조선의 문화를 연구, 발표하고 이를 보존시키기 위해 조선 민속 박물관을 세웠으며 일본의 광화문 철거를 반대한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吉)와 극우 세력의 일본인들에게 살인 협박까지 받으면서도 조선의 도자기와 민간 공예품을 수집, 조사한 아사카와 다쿠미(浅川 巧) 등의 유공자는 아니지만 한국의 독립에 공헌한 일본인들도 있다.[대신] 어찌 보면 남의 일일 텐데도 정의를 위해 성심껏 한국을 도와준 고마운 분들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전 세계에 알린 것으로 유명한 석호필이 있다.
IOM 이민정책 연구원에서 작성한 2017년 기준 외국인 독립유공자 87인 명단 PDF. [43]
이들 중 외국인 '''독립유공자 1급(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총 5명으로 중화민국손문(孫文,68), 장개석(蔣介石,53), 송미령(宋美齡,66), 진과부(陳果夫,66), 진기미(陳其美,68)이다.

7. 테러리스트와의 차이



  • 일본의 조선 병합 및 식민지배, 조선인 학대는 범죄행위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테러 행위이며, 이에 대한 저항은 정당하다: 일본의 조선 병합 자체가 '힘의 논리'에 따른 범죄행위였고, 그에 따른 정치적, 경제적 침탈, 무단 통치에 따른 조선인들의 희생 역시 불법적인 범죄행위이니, 이에 대한 저항은 분명 정당한 행위다. 이러한 논리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거 후 일본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동안, 자신의 행위가 테러리즘이 아니라 정부의 군인으로서[44] 적국의 정부 요인을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며, 따라서 자신을 '전쟁 포로'로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규군이 붕괴한 상황에서 전쟁 상황에서의 전투 행위로 보는 것.
  •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이 아니므로 테러리즘과는 다르다: "이들의 응징 대상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침략의 중심부인 일제의 주요 기관이나 핵심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서 의열 투쟁은 테러와는 차별성을 가지는 식민지 해방 투쟁이었다."디지털안동문화대전 다만 간접적으로 민간인이 휘말려 죽은 경우는 있었다. 뉴욕 시장의 딸, 1922년 의열 단원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이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려고 하다가 쏜 총에 영국인 여성이 맞아 숨진 일 등이다.[45]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현대의 테러리스트의 대표 주자인 알 카에다, ISIL, 탈레반과 같은 단체들은 민간인도 주로 노린다.



8. 기타


  • 태평양 전쟁 당시 막장스러운 지휘로 일본군을 패전으로 몰고 가 결과적으로는 한국 독립에 기여한 지휘관을 조롱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삼대오물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가 대표적이다. 근데 이 명칭은 무타구치 렌야를 비롯한 삼대오물이라는 불리는 지휘관들이 동시대 일본군보다 상대적으로 인간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들은 전범 행위에 가담하지 않고 "개소리 집어쳐!"를 시전한 자들이다. 정말로 인간성도 쓰레기면서 지휘 능력도 부족한 츠지 마사노부, 기무라 헤이타로 같은 인물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9. 관련 문서



[1] 독립운동가가 더 넓은 개념이다. 김원봉처럼 독립운동가이지만 독립유공자로까지의 인정과 서훈을 받지 못한 경우가 있다. 김일성이나 박헌영처럼 더욱 엄청난 악질이었지만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경력이 있긴 있는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2] 남한은 국호와 헌법 전문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함을 표방하며, 북한은 그들의 국부인 독립혁명가 김일성이 항일혁명투쟁을 지휘하여 조국광복의 역사적 위업을 달성했다고 북한 헌법 전문에 '''주장한다'''[3] 일반 국가 유공자는 자녀까지.[4] 무장 독립 투쟁의 전설로 불리던 약산 김원봉은 친일파였던 노덕술에게 잡혀 뺨을 맞는 등 심한 모욕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은 그런 노덕술을 '''반공 투사라며 극찬했다.''' 당시에는 경찰이 백색 테러를 비호하고, 공산주의 계열이나 좌파에 대한 탄압이 심했다. 군법 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사살당한 최능진의 경우에는 64년이 지난 2015년에 겨우 무죄를 선도 받기도 했다.기사[5] 후술하겠지만 독립 운동 자체가 비밀적으로 이뤄지다 보니 굵직한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면 명백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거나, 시간이 지나며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진 경우도 많다.[6] 현재 다른 국가유공자의 경우 혜택이 돌아가는 유족의 범위는 자녀까지이며 독립유공자만 3대까지 인정한다.[7] 사실 일제 때 지배층이 친일파에 붙어서 아무래도 친일이 겉으로는 자랑거리가 아니어도 근대적으로 증명된 증거 중 하나로 작용하기도 해서 내부적으로는 훈장처럼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친일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아도 부정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8]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생계 곤란으로 친일파가 된 이효석의 후손들은 예외로 '''엄청 빈곤하게 산다.''' 지금의 언론에서 친일파 후손의 재산 분쟁 때문에 가난해도 숨죽이고 살아야 했다. 물론 이 같은 경우는 극히 일부일 뿐이며, 대부분의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며 살고 있다.[9] 그런데 독립유공자 전형은 정원 외로 별도로 뽑는 것도 아니고 정원 내로 되어있다. 또한 수급자나 저소득층, 군인 자녀, 경찰, 소방관, 교사, 공무원 자녀 또는 다자녀나 다문화 가정과 같이 경쟁하기 때문에 그리 혜택을 받는다고 보기도 어렵다.[10] 물론 가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이 논란이 되긴 한다.[11] 김구 집안은 국내 재벌가와 연계되어 있을 정도로 빵빵하다. 이 때문에 손자 김진 씨는 주택공사 사장 시절에 비리를 저질렀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까방권 때문에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났지만. 다만 김구 집안이 빵빵한 이유는 국가에서 독립유공자인 김구 집안을 후원해줬기 때문이 아니라, 김구 자신이 해방 이후 유력 정치가였으며, 아들인 김신 장군 또한 공군 내부의 유력 인사였고 5·16 쿠데타 가담으로 줄을 잘 선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이승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박정희가 김구를 밀어준 점도 있다.[12] 보난자에 출연했는데, 당시에는 동양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서...[13] 대한민국 국군 창설 당시 광복군 출신자들도 대부분 건군에 참가했다. 물론 일본군 출신(특히 육군)이 워낙 많다 보니 수적으로는 미약했다. 다만, 해군의 경우 함선 근무 경력이 있는 일본군 출신자들이 전무하여 손원일 제독을 비롯한 민간 상선사관들이 창군의 주축이 되었으며, 공군의 경우 일본항공대, 중화민국 공군(광복군 출신자들 대부분이 중화민국 공군 소속이었다), 민간비행사 출신들이 골고루 분포해 있었다. 채병덕이 워낙 유명해서 6.25 초기 일본군 출신이 다 말아 먹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꽤 다양하게 섞여 있었고 삽질한 사람도 삽질하지 않은 사람도 일본군, 독립군, 팔로군/중국군 출신에 다 있었다. 전쟁 초기의 어이없는 패퇴에 대해서는 복잡한 분석이 있지만, 단순화하면, 중학교 1학년더러 고3이라고 하고 여름방학 끝나고 난데없이 수능 보게 한 셈이라고 하면 비슷하다.[14] 김구가 타계한 경교장의 원래 소유주가 최창학이다.[15] 심지어 독립 후에도 이들은 진짜 적폐였다. # [16] 이런 게 딱히 우리나라만의 특수성은 아니다. 다른 나라도 귀족이나 양반, 젠트리처럼 귀족에 가까운 경우는 평민 출신들보다 서로 사교적인 경우가 많다. [17] 해당 인물이 다른 공적을 세웠을지언정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견제 받는 일이 당연히 많다. 백선엽 등의 인물도 높은 지위와 군 내부적 명망을 얻었으나 친일 경력을 이유로 원수 추대에 실패했다.[18] 신기남의 아버지는 친일 순사임이 걸려서 당 의장직에서 물러났다.[19] 이들도 "우리 가문 친일파다"라고 떠들지 못하고, 변명을 한다는 거만 봐도 절대 명문 가문으로 통하지는 않는다.[20] 그리고 당연히 돈도 없고 인맥도 없었다. 애국의 대명사인 군대부터가 일본군 출신들의 기세가 대단했으니... 농담이 아니라 군사력도 친일파가 더 강해서 코웃음을 치던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보도연맹 학살에서도 김창룡처럼 독립운동을 분쇄하던 친일파들이 활약하기도 했다. #[21] 농담이 아니라 신기남, 김희선, 이미경, 김무성처럼 조상의 초창기 독립 운동을 강조하거나 친일 의혹을 회피하려다 걸린 사람들도 있다.[22] 사실 어떤 사람들에게 6.25나 건국 후 사회 혼란은 권선징악은커녕 오히려 천재일우였다. 난세에는 특히 악마, 간웅, 인간쓰레기들이 절대 다수의 사람들에게 정당한 영웅이나 위인으로 행세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법이다.[23] 윤치호의 사촌인 윤치영과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한 장지연, 고려대ㆍ동아일보의 창업주인 인촌 김성수 등이 취소되었다.[24] 이 문제와 관련해 이런 일도 있다. 훈련소에서 공익들 훈련 맡은 조교가 공익들 4주 훈련 끝내고 집에 가는 게 탐탁지 않게 여겨졌는지, 멀쑥하게 생긴 훈련병더러 "넌 무슨 병신이라서 공익으로 빠졌나?"라며 빈정거렸다. 공익으로 빠지는 게 대개 신검에서 떨어지거나, 아니면 전과 있거나 하기 때문. 열 받은 훈련병이 "우리 아버지 국가유공잡니다!"라고 쏘아붙였고 할 말 없어진 조교는 데꿀멍. 솔직히 데꿀멍했으면 양심 있는 것이다. 그런 아버지를 뒀으니 더더욱 현역에 가서 나라에 애국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우기지 않은 게 다행이다.[25] 대표적인 좌파계열 독립운동가인 김원봉의 친인척들은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에 연루되어 사망한 친인척의 시신을 수습했단 이유로 옥고를 치른 사람도 있다.[26] 당장 위에 윤주경만 해도 대선 때 박근혜를 지지했다고 특정 지지자들이 비판했고, 최능진의 아들 최필립도 정수장학회 이사장 맡았다고 욕 먹었다.[27] 해평 이재현의 경우 ‘투사는 지분을 요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28] 카이로 선언 당시만 해도 루즈벨트는 한국 독립에 대해서 시큰둥 한 편이였다. 회담 자체가 승전 후에도 영토를 확장하지 말자는 합의를 위한 것이었는데, 장제스의 한국 독립 주장은 세력권 확보라는 의도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최종안에서는 '적절한 시일 안에'라는 토가 붙었고,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소련이 남하하면서 본의아니게 남북분단으로 이어지게 된다.[29] 광복군의 서울 진공 작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광복군만으론 절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30] 나치 부역자 청산을 이뤄냈다고 평가받는 프랑스조차 자력(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으로 나치를 몰아낸 것이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의 연합군이 도와준 덕에 가능했다. 그나마 같이 독일을 상대했던 나라라고 겨우 승전국 반열에 들긴 했지만, 필사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한 까닭도 강대국 재진입을 위함이었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프랑스 역시 나치 부역자와 비시정부 관료들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힘없는 사람들만 독일군에게 빵 팔았다', '독일 병정과 잤다'하면서 모진 수난을 당했고, 이들을 처벌한 재판관들의 상당수가 비시정부의 법관들이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도 이런 청산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31] 당장 드 골의 자유 프랑스군보다 규모가 컸다.[32] 그 외에 소련군 소속으로 독일과 싸운 폴란드 동부군도 있었는데, 이들은 폴란드가 공산화되자 폴란드 공산군의 기간세력이 된다.[33] 소련은 동독군을 조직할 때도 나치 출신을 배제하지 않았다. 한 예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피아니스트를 보면 주인공을 돕는 유대인 나치 부역자가 나오는데 실제로 이사람은 전후에도 살아남았고, 재빠르게 폴란드에 진주한 소련군 편에 들어가서 소련군 앞잡이가 되었다고 한다.[34] 실제 창군 초기 사단장 등 고위 간부의 경우 지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나이가 젊다. 그만큼 인재가 부족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최대한 구세대를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35] 박정희가 만주군 중위 신분이었다고 친일파로 분류되었는데, 정작 해방 직후 반민특위에선 이 정도 이력은 처벌 대상도 아니었다.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가 된 건 집권 후 외교·경제적인 이유로 일본 전범 출신 정치인들과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이다.[36] 오히려 직접적으로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고 고문하며 악명을 떨친 건 하이드라들의 애비들이었으니...[37] 단, 현재는 한나라당에선 당시 한나라당 의원 전부가 반대한 것만 기억하는 국민들이 더 많아져서인지, 한나라당 입장에선 조금 억울할 수도 있다.[38] 사실 이전에는 진보 측에서 이승만을 깎아내리기 위해 김구를 추앙하는 성향을 보였었다. 근래의 김구 비판은 최근 연구에서 김구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 사이의 갈등이 부각되면서부터이다.[39] 물론 이용구는 반일이 아닌 그냥 종교적인 이유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크다.[40] 독립유공자 정도로 대접 받지 않지만, 전두환의 부친 전상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노름꾼 빚 보증을 서다가 문제가 생겨서 합천 주재소 순사부장이랑 소환을 받았는데, 응하지 않다가 마을 근처 낭떠러지에서 마주쳤다. 그리고 순사부장을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고 만주로 튀었다(…). 1982년 5월 출판하려다 포기했던 전두환의 자서전 <촛불>에 따르면 "그(아버지)는 유도 3단의 시즈오카 순사부장을 100길의 낭떠러지로 내던진 애국자였다"는 대목이 나온다(...).[41] 더불어민주당 탈당.[42] 10년 사이 공적이 발굴되어 인정받은 독립유공자가 두배로 부쩍 늘었다.[대신] 대한민국 정부는 1984년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서했다.[43] 1964년 12월 8일 건국훈장을 받은 미국인 트루먼, 맥아더와 독일인 에르하르트, 2018년에 유공자로 인정된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 총 4명이 빠져있다.[44]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안중근 의사의 직함은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다.[45] 다만 이 피해 여성의 남편은 교도소에 있던 이종암에게 편지를 보내 실수라는 것을 이해하며 조국을 위한 일이라는 것도 알겠다고 말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