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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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철희(朴喆熙)
'''국적'''
대한민국[image]
'''생몰년도'''
1933년~2016년 4월 2일(향년 82세)
1. 소개
2. 생애


1. 소개


태권도택견 양쪽 모두에 중요한 역할을 한 노사다.

2. 생애


1946년에 문을 연 윤병인 선생의 YMCA 권법부에서 권법을 배웠으며[1] 열심히 익혀 6.25 전쟁 직전까지 무술시범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포병장교로 복무했으며[2] 그의 무술실력에 깊은 인상을 받은 군 관계자들이 후일 육사 태권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태수도협회가[3] 설립된 후에는 전무이사를 역임하였다.
육사 교관시절 전두환을 지도한 적도 있으며, 이후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무도 사범을 역임하고, 강덕원 초대관장을 지냈다. 강덕원은 광복 초기 태권도 주요 9무관 중 하나로, 특히 앞차기, 안다리걸어차기, 손기술 활용법을 연구해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타격 순간에 힘을 줄 것을 강조했으며, 실전에서 쓸 수 있도록 팔을 뒤로 빼는 예비동작 없이 바로 뻗는 주먹 또는 수도와, 역시 예비동작이 생략된 빠른 앞차기가 이곳에서 연구한 결과물이다.[4]
전쟁 당시 윤병인 선생이 북한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다른 선배들에게도 무술을 배웠는데 당시에 배웠던 권법들은 팔기권, 토조산, 단권, 장권, 태조권, 태극권[5] 등이며, ‘삼보대타(三步對打)’, ‘칠본대타(七本對打)’ 등도 수련하여 터득한 것들을 후학들에게 전하였다. 1971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태권도를 알렸며, 30여 년 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태권도를 알리고 보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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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기현 회장과 대타 시범 中
택견 역사를 언급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송덕기의 첫번째 제자였다. 박철희는 1959년에 이승만 대통령의 생일을 기념해 열리는 ‘전국무술개인선수권대회(全國武術個人選手權大會)’에 시연자로 오게 되면서 송덕기와 만나게 되었고[6] 송덕기를 경무대에 자주 초청[7]하여 인연이 이어지게 되었다. 박철희 사범은 전통무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어디에 누가 무슨 무술을 한다 하면 득달같이 달려가곤 했으며 이리[8]역 앞에 택견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었고 그 사람이 장심 단련을 하기 위해 나무에다 새끼를 감아놓고 그것을 밟고 지나가는 수련을 많이 했다는 증언도 했다. 또 서울 답십리에도 정노인이라는 80대 노인이 택견을 하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송덕기를 만나기 전에도 택견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송덕기는 박철희 사범을 매우 아꼈고 잘 가르쳤으며 박철희 사범도 택견을 좋아해서 사단법인 택견무도회를 결성하려 했으나 당시 기득권이 세던 수박도 협회[9]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미국행을 택한다.
이 때 박철희 사범이 송덕기 에게 들었던 증언들은 다음과 같다.
  • 지금의 을지로에 위차한 국립의료원이 위치한 곳은 구한말 훈련원이 있던 자리인데 모래밭에서 택견 경기를 했다.
  • 택견 경기는 '결련' 이라고 칭했다.
  • 손이 땅에 닿으면 진다.
  •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택견 기술은 발바닥으로 차는 것이다.
  • 손은 주먹을 사용해 치는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 아랫대와 윗대는 누상동과 누하동을 일컫는 말로 누상동이 윗대, 누하동이 아랫대이다.
미국행에서 돌아와 도기현 회장과 만남을 가졌고 도기현 회장의 택견 몸동작을 보고 자신이 보았던 송덕기의 택견 모습과 같다는 말을 했다. 택견 협회가 분열되어 있는 모습을 안타까워 하며 이에 대해서도 노력하고 있어서 대외적으로 택견이 큰 분란은 없이 가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최초의 제자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니 그 아래야 말 들어야 하는게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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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견 대표자들
무카스와의 영상 인터뷰에서도 송덕기와 가장 닮은 모습의 택견이 어느쪽이냐는 질문에 '도기현 씨' 라고 하기도 했으니 역시 남은 자료로나 증언으로나 결련택견협회의 기본 택견 동작이 송덕기와 가장 닮기는 닮은 모양이다. 다만 그 발언을 한 장소가 결련택견협회 사무실이었기 때문에 립서비스가 아닌가 하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박철희 사범이 수련한 팔기권, 토조산 등의 대타 방식은 이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배우기도 했으며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956년에는 파사권법(破邪拳法)이라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1] YMCA권법부는 6.25 전쟁 이후 김순배, 이남석이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2] 1.4 후퇴 당시 우연히 중공군 포대와 조우했는데, 다행히 아랫쪽에 있는 우리 군 일행을 포병들이 보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제압을 완료하고 포의 주요 부품을 빼내 도주했다는 무용담을 말씀하신 적도 있다고 한다.[3] 태권도협회의 옛 이름중 하나, 초기 태권도 시절엔 태수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4] 티우 월남 대통령을 경호한 장교 안낙순 씨가 이 강덕원 출신이며, 예비동작없는 빠른 주먹을 수련한 분 중에는 권투로 전향해 성과를 거두신 분도 나왔다고 한다.[5] 현재의 태극권과는 관련이 없다.[6] 당시 송덕기는 김성한과 짝을 이뤄 시범을 보였는데, 알코올 중독으로 거의 폐인이 되어 있던 김성한을 송덕기가 겨우 설득해서 함께 연습했다고 한다. 김성한이 무슨 연유로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시범이 끝난 후 김성한 씨는 이승만에게 받은 격려금으로 또 술을 마셨고, 결국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만약 김성한이 생존했다면 태껸에 대한 송덕기의 증언을 보증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7] 당시 경무대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박철희 사범이 가진 무술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8]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9] 현재의 수박도 협회와는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