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춘실
朴春實'''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75년 10월 13일
전라북도 장수군 제북면 임평리
<color=#fff> '''사망'''
1914년 6월 3일
대구형무소
<color=#fff> '''본관'''
밀양 박씨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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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춘실은 1875년 10월 13일 전라북도 장수군 제북면 임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특하여 유학 경전을 통독했으며, 불의를 모르는 곧은 성품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무주, 장수, 진안, 용담 일대에 격문을 배부해 국가존망이 임박했으나 모두 분발하여 사심을 버리고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이 격문을 보고 모여든 의병 52명을 이끌고 용담군 구봉산에 주둔하여 일본군과 접전해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1906년 가을 문태수 의병장의 부대와 연합하여 장수 및 무주 일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1907년 무주 상창곡(商昌谷)에서 적과 교전하여 다시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무주 구천동에서 일군 헌병대와 교전하는 등 1909년 3월까지 5년 동안에 걸쳐 진안(鎭安) 천반산(天盤山), 성수산(聖壽山), 장수 덕유산(德裕山), 구천동 적상산(赤裳山), 토옥동(土沃洞) 문성어전(文城於田), 농수리(農水里), 양악(陽岳), 진도리(眞道里) 등지에서 60여 차례 교전하였다.
김성범(金聖凡)·문태서를 부장(部將)으로 하여 200∼700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경북과 전북을 무대로 하여 일병 3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400여 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다. 1909년 5월 6일 함양 수비대장 조사(鳥飼) 대위가 이끄는 토벌대 30명이 장계(長溪) 등지로 출동하였다. 8일 오후 박춘실은 130명의 동지와 더불어 유진하고 있던 문성(文城) 동북쪽에 떨어진 산중에 이르러, 이곳에서 적군과 교전하던 중 의병 13명이 전사하고 박춘실은 체포되었다.
1909년 7월 17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 복역하다가 1914년 탈옥하려다 실패했다. 이후 대구형무소로 이감되자 6월 3일 벽을 파괴하고 동지 100여 명을 탈출시킨 후 자신은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춘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8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