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쿠르 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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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3.2. 대륙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미국 독립 전쟁 시기인 1776년 10월 11일 미국 뉴욕 주 발쿠르 섬 주변 챔플레인 호수에서 영국 해군과 대륙군 해군이 맞붙은 전투. 전투 자체는 영국 해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전략적 이득은 대륙군이 챙겼다.

2. 배경


1775년 12월 31일 퀘벡 전투에서 패한 대륙군은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의 지휘하에 퀘벡 인근 아브라함 평원에서 퀘벡의 수비대와 대치했다. 그러나 1776년 5월 초 영국 증원군이 퀘벡 인근에 이르자, 아놀드는 어쩔 수 없이 몬트리올로 철수했다. 얼마 후 존 설리번 준장이 이끄는 대륙군이 몬트리올에서 아놀드와 합세했다. 설리번은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6월 8일 트루아 리비에르에서 영국군을 공격했으나 적병 10여 명을 사상시키는 동안 30~50명이 전사하고 240명 가량이 포로 신세로 전락하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아놀드는 병사들의 사기가 바닥에 떨어졌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더이상 캐나다에 있는 건 무리라고 판단하고 리슐리외 강 인근에서 계속 항전하려던 설리번을 설득시킨 후 몬트리올에서 철수해 챔플레인 호수의 서쪽 해안인 크라운 포인트로 이동했다. 아놀드는 후방 경비대를 지휘하면서 퇴각로 인근에 영국군에게 이득이 될만한 자원을 모두 파괴하게 했다.
전직 해상 상인이었던 아놀드는 챔플레인 호수가 뉴욕과 허드슨 강의 안전 확보에 매우 중요하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그는 부하들에게 스케네즈버러에서 재재소와 조선소를 건설하도록 했고 사용할 수 없는 모든 보트들을 분해하도록 했다. 이후 아놀드는 주변의 숲에 자라난 나무들을 대거 베어서 함선을 제작하게 했고, 바다에서 조금이라도 일한 경력이 있는 이들을 선원으로 고용했다. 그 사이 설리번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이 후임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한편 캐나다에서 물러난 대륙군을 추격하던 가이 칼튼 경은 챔플레인 호수를 장악한 뒤 허드슨 강으로 남하하여 뉴욕 주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영국군과 합세하려 했다. 그런 그에게 미군이 새로 제작한 10여 척의 배들은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칼튼 경은 이들을 격멸하기로 결심하고 20여 척의 배들을 새로 건조하게 했다. 그렇게 양측은 여름 내내 챔플레인 호수 인근에서 배를 건조하며 대치했다.
10월 1일, 아놀드는 적선이 자신이 지금까지 건조한 배들보다 훨씬 강력한 화력을 갖추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챔플레인 호수 공해상에서 해전을 치르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고 판단하고 모든 배들을 챔플레인 호수와 발쿠르 섬 사이의 좁고 바위투성이의 해안가로 옮겼다.
일부 선장들은 크라운 포인트 요새로 후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공해에서 싸우기를 원했지만, 아놀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영국군을 이길 수 없다면 함대의 1차적인 목적인 생존이 아니라 크라운포인트와 티콘데로가 요새에 대한 영국군의 진격을 다음 봄까지 지연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윽고 10월 11일 영국 해군이 발쿠르 섬으로 접근하면서 미국 독립 전쟁의 첫번째 해전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군


  • 지휘관: 캐나다 주지사 가이 칼튼 경, 토마스 핑글 대위
  • 병력: 전함 1척, 스쿠너[1] 2척, 무장 거룻배 1척, 곤돌라 1척, 포승선 22척, 선원 697명, 병사 1,000명, 인디언 650명

3.2. 대륙군


  • 지휘관: 베네딕트 아놀드 소장
  • 병력: 로우 갤리선 3척, 스쿠너 2척, 범선 2척, 곤돌라 8척, 선원 500명

4. 전투 경과


10월 11일, 영국 함대는 바람을 타고 남하하여 대륙군 전투선 앞 약 300야드에 배치되었으며, 5척의 주력 함대는 포승선 뒤로 50~100야드 떨어진 곳에 배치되었다. 이후 영국 해군은 5시간 동안 해안가에 정박해 있는 대륙군 전투선을 향해 포격을 퍼부었다. 대륙군 함선들은 최선을 다해 응사했지만 적의 압도적인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고 5시간 만에 대다수 선박들이 침몰하거나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영국 측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칼튼 경은 로얄 사비지 호에게 발쿠르 섬에 상륙시키려 했지만 로얄 사비지 호가 심한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자 철수 명령을 내렸다. 또한 포승선 한 척은 직격탄을 맡고 침몰했고, 다른 소형 포승선들도 대부분 타격을 입어 후방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아놀드는 영국 함대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함대에게 밤중에 영국 함대를 몰래 지나쳐서 챔플레인 호수의 남쪽 끝 크라운 포인트 요새로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 밤 악천후 때문에 대륙군 함대는 겨우 8마일만 항해했고, 영국 함대는 곧 적이 몰래 빠져나온 걸 눈치채고 그 뒤를 따라잡았다. 이후 벌어진 추격전에서 배 여러 척이 침몰했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배들은 아놀드의 지시에 따른 선원들에 의해 모조리 불태워졌다. 10월 13일 크라운 포인트에 도착한 아놀드는 병사들을 이끌고 티콘데로가 요새로 후퇴했다. 이리하여 발쿠르 섬 해전은 영국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5. 결과


대륙군은 발쿠르 섬 해전에서 80명의 사상자, 120명의 포로가 발생했고 배 11척을 잃었다. 반면 영국군은 4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포승선 3척을 잃었다. 이후 가이 칼튼 경은 아놀드가 버리고 떠난 크라운 포인트를 접수해 그곳에서 2주 동안 머물렀으나 10월 20일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 보급로 확보가 어려워지자 캐나다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발쿠르 섬 전투는 그 자체로만 보면 영국군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전략적 이득은 오히려 대륙군이 따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캐나다의 영국군이 1776년 내에 뉴저지로 남하해 숙영지를 세웠다면 이듬해엔 뉴욕의 영국군과 합세해 대륙군을 협공했을 것이고, 가뜩이나 수세에 몰려 있던 대륙군은 패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칼튼 경은 아놀드가 건조한 10여 척의 적선 제거에 골몰하느라 시간을 낭비해버렸고, 적선들을 해치우고 난 뒤엔 겨울이 찾아오면서 보급로 확보가 어려워졌기에 캐나다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듬해 캐나다의 영국군은 존 버고인 소장의 지휘하에 재차 남하하지만, 베네딕트 아놀드는 새러토가 전투에서 그들을 상대로 미국 독립 전쟁 사상 최고의 승리를 쟁취한다.
[1] 돛대가 2개 이상인 범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