벧산

 

1. 개요
2. 역사


1. 개요


영어 : Beth Shan(벧산), Beisan(베이산)
히브리어 : בֵּית שְׁאָן
이스라엘 북동부의 도시. 이집트에서 사해를 넘어 다마스쿠스,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갈릴리 남방 22㎞ 지점의 길보아 산 동쪽 기슭의 벧산은 고고학에 따르면 무려 기원전 50세기 전부터 시작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태초의 시점이다. 요단 강과 하롯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최초의 정착민들은 하롯 강의 남쪽에서 자리잡은 것으로 보여진다. 고대에는 수풀이 우거진 지역으로 지금도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며, 사람이 자리잡은 이후로 강을 따라 자연스레 도로가 생겨 주변에서 가장 왕래가 편리한 지역으로 발전한다.
참고로 벧(Beth)은 '~집' 이라는 뜻으로, 벧산은 안락(Shan)의 집이다. 그러므로 베들레헴은 떡(Lehem) 집, 벧엘은 하느님(El)의 집, 벧세메스 태양(Shemesh)의 집, 벧세다 어부(Saida)의 집, 베데스다는 은혜(Esda)의 집 등으로 표현된다.

2. 역사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벧산은 가나안을 통치하던 고대 이집트 왕국의 행정 중심지였다. 이스라엘 왕정 시대에는 초대 왕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죽임을 당한 가슴 아픈 역사를 지닌 땅이며 후에 다윗이 점령한 뒤부터 이스라엘에 포함되었다. 이스라엘 분열 이후 벧산은 북 이스라엘에 속했고, 로마 시대에는 니사 스키토폴리스(Nysa-Scythopolis)로 불렸다. 당시 스키타이인들이 흘려들어 살고있었는데 그들은 포도주 신인 디오니소스를 숭배했으며, 디오니소스가 자신의 유모인 니사(Nysa)를 벧산에 매장했다고 믿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벧산 외곽에 성벽이 건설되었으며 수도원과 교회가 들어섰다. 640년 무슬림의 침략으로 쇠락하다 749년 지진으로 크게 황폐해졌다.
십자군 시대에 다시 주목을 받아 1099년에 탕크레디(Tancred)에 의해 점령되었다. 벧산은 갈릴리 지방과 가까운 위치에도 불구하고 갈릴레아 공작령에 귀속되지 않고 1101년 이후로 계속해서 예루살렘 왕실의 직접적인 권한이 미치던 지역이였다.
우트레메르의 혈통(Lignages d'Outremer)이라는 책에 의하면 첫번째 벧산의 영주는 로버트 드 베튄(Robert III de Béthune)의 어린 아들 아담(Adam)이다. 베튄 가문은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인 플랑드르 가문과 친밀했고, 자연스럽게 로버트의 막대 아들은 벧산의 영주가 될 수 있었다. 그 이후 아담은 가문의 이름을 베산(Bessan)으로 정했고, 아담 드 베산(Adam de Bessan)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