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옥사
1. 개요
광해군 4년(1612년)에 벌어진 옥사, 김직재의 옥이라고도 한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별것도 아닌 일을 억지로 대형 옥사로 확대시킨 사건이다.
2. 사건의 발단
황해도 봉산에서 김제세라는 이가 군역 면제를 위해 자신이 전 훈도였다는 문서를 엉터리로 만들어 대낮에 관아 앞에 던졌는데 문제는 '''너무나도 엉터리여서 쉽게 간파되었다.''' 그래서 김제세를 잡아들였더니만 김제세가 뜬금없이 '''고변을 한다.''' 자신과 자신의 동생은 역모에 가담했는데 팔도에 모두 대장,별장을 둔 거대 조직이라고 밝혔다.
이런 뜬금없고 황당한 고변은 당시 봉산 군수가 '''악명이 높았기 때문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당시의 봉산군수는 바로 신율, 남이 지은 글로 과거에 급제해 동류들 사이에서는 왕따 신세였지만 출세의 야심이 대단해서 평소 좀도둑을 잡아도 혹독한 고문으로 큰 도둑으로 만들곤 하던 인물이었다.
어쨌든 이런 역모 고변에 신율은 김제세의 동생도 잡아왔고 김제세의 동생은 좀 더 구체적으로 진술해 총대장은 김백함 모책은 최군 경상도 대장은 얼굴이 검고 수염이 많은 이라는 식으로 고변하는데 문제는 '''다시 물으니까 앞과 다른 얘기가 나오는 등 오락가락했다.'''[1] 이에 신율은 사적으로 유팽석을 만나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냐고 했고 유팽석은 그래도 역모 고변이니 위에 보고를 해야할것 같다고 말했고 이에 신율은 진짜로 보고를 했다.
물론 별것도 아닌 내용인지라 황해 병사, 황해 감사에게도 넘어갔으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조정에 보고(2월 13일)했다. '''그런데...'''
3. 사건의 전개
광해군은 즉시 '''궁궐 수비를 강화하고 추국을 시작했다.''' 그리고 '''옥사가 시작된다.''' 팔도 대장으로 거론된 김백함은 잡혀와서 그가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했는듯하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곤장 14대를 맞고는 '''마음에 안들던 50여명을 끌어들였다.''' 각 도 대장의 이름등 서로의 진술이 제각각이었지만 어쨌든 역모 혐의를 인정한 자는 즉각 형이 집행되어 김백함, 김직재, 황보신 등은 모두 복주[2] 되었다.[3] 아무튼 이런식의 진술로 굴비엮듯 줄줄이 잡혀왔고 광해군은 매일같이 직접 국문했다.
한편 신율은 유팽석을 꼬드겨 사건이 잘 해결되면 우리 둘 다 일등공신이 되겠지만 아직 좀 부족하다며 지금 나온 이름중에서 너랑 비슷한 이름이 있어 곧 체포되겠지만 내가 말한대로만 대답하면 풀려나는건 물론 공신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로 유팽석은 체포되어 국문받게 되었고 유팽석은 신율이 시킨대로 말하긴 했는데 내용이 문제였다. 유팽석은 3년 전 심원사에서 공부할적에[4] 우연히 두명의 중이 불온한 말을 나누는걸 들었다며 그 대화중에 거론된 이름들은 황혁, 정경세, 정인홍, 김직재, 유영경의 자제였는데 문제는 '''유영경과 정인홍''' 유영경은 탁소북[5] 의 영수 정인홍은 대북의 영수인지라 사이가 극명하게 좋지 않았고 선조 41년에만[6] 해도 서로 물고 뜯었다. 이런 원수같은 사이끼리 사이좋게 역모를 꾀했다는건 말이 안되건만 광해군은 그걸 거의 다 믿어 정인홍 등 확실히 믿는 이들만 빼고 죄다 끌고오게 했다. 결국 황혁은 형장을 맞다 죽었고 정경세는 삭탈관직되었고 유팽석도 죽었다.(...)[7]
4. 사건의 끝
여튼 이런식으로 사건은 커지고 커져 많은 사람들이 끌려나오고 고문으로 죽었고 심지어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끌려나와 고문당했다.''' 보통은 남편/아버지가 승복하면 처나 첩등은 국문하지 않고 종으로 삼는게 법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이때는 여자고 아이고 다 무자비하게 고문당했다.
결국 옥사는 7개월을 끌었고 이 시기 '''340명이 끌려나왔고 100여 집안이 파멸했다.'''
한편 이 옥사가 끝나갈 즈음 한 유생이 이딴 일이 일어난건 유영경을 제대로 벌주지 않아서이니[8] 추형[9] 하고 존호를 높이고 공신을 책봉하것을 주장했다. 이 일을 주도한게 대북인 만큼 대북을 어필하려는 생각이었는데 대간들이 이에 동조해 유영경의 추형, 존호 올리기, 공신 녹훈이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고 결국 모두 받아들여져 유영경과 그 심복들은 부관능지되고 광해군은 존호를 받았으며 공신도 책봉된다.(광해군 5년 3월 12일)[10] 이 과정에서 공신이 된 유희분, 박승종, 이이첨은 3창이라 불리게 되며[11] 이 사건을 강경하게 밀어붙인 이이첨은 핵심 실세가 된다.
5. 평가와 의의
보면 알겠지만 별거 아닌 사건이었다. 물론 역모 고변이니 가볍게 처리할 순 없으니 왕인 광해군까지 도달한거 자체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의 일 김제세 형제의 진술이 오락가락하는가 하면 각 도 대장의 이름도 엇갈리고 유팽석은 원수지간인 유영경과 정인홍이 손을 잡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 말도 안되는 일들이 벌어졌다. 여기에 기축옥사보다도 심한 사태가 벌어졌다. 기축옥사때도 이발의 어머니와 이발의 자식이 형장을 맞다 죽긴 했지만 그건 이발의 어머니와 이발의 자식뿐, 오죽하면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문으로 죽은 아이의 시체를 나르는 사람 두명이 "정여립의 옥사 떄도 이정도까진 아니었어", "마치 '''연산 시절'''을 보는듯하이", "'''이 어린게 뭘 안다고?'''" 라고 디스했을까? 여기에 더 큰 문제는 광해군은 진술이란 진술은 하나도 의심하지 않고 다 믿어버린것 본래 이런 일이 벌어졌을때는 '''기회는 이때다!''' 하고 자신이 마음에 안드는 사람 이름을 댈 수도 있는 등 역모 사건인 만큼 여러가지 이유로 마음에 안드는 사람을 역모 가담자로 불어서 죽여버릴 수 있는 상황이라 조심해야 했고 그래서 거짓 진술을 했을 시 반좌율에 의해서 '''사형도 처해지는데''' 광해군은 그걸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임해군의 옥사에서 이 점을 간파했던 이이첨은 별것도 아닌 사건을 과다하게 반응해 광해군의 신임을 샀다. 이후 일어난 사건들을 보면 봉산옥사는 그 사건들의 시작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허위 고변이 판을 쳤고 그 허위 고변을 계기로 대북은 계속 성장해갔다.[12]
6. 여담
- 이 사건을 일으킨 주범인 신율은 군수에서 순식간에 영풍군(永豊君)으로 봉군되어 판서급이 되었지만 그 영화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광해 5년(1613년) 9월 19일 신율은 아버지 신순일이 현령으로 있는 강서(江西)에 가서 내외에 잔치를 베풀어 부모를 대접했다. 그런데 술이 한차례 돌기 전에 갑자기 도망친 닭이 천막 안으로 날아와 신율의 연회상을 뒤집어버렸고, 신율은 얼굴빛이 바뀌어 벌떡 일어나 병풍 밖으로 나갔는데 갑자기 자빠져 죽었다. 봉산옥사 당시 큰 피해를 입은 양서(兩西)[13]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통쾌해 했으며, 흉악한 일을 한 업보라 여겼다고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기록했다.
[1] 당연한게 제대로 된 얘기라면 이렇게 오락가락할리가 없다. 즉 없는 얘기를 허위로 꾸며내다보니 내용이 계속 바뀌는 것[2] 형벌을 순순히 받아 죽음[3] 이때 김백함은 "나라가 내게 속았다!" 라고 외치고 죽었다. 그가 허위진술을 한것과 동시에 이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4] 유생들에게 절에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상사금지령이 있었지만 실효는 별로 없었다.[5] '''유'''당이라고도 한다.[6] 봉산옥사 약 3~4년전[7] 참고로 황혁과 정경세는 신율과 원수진 일이 있었다.[8] 유영경은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9] 벌을 더하는것[10] 규모가 상당한데 네가지 종류로 종류가 많은 영향이지만 숫자도 많아 위성공신(왜란때 분조, 무군사를 따라다닌 이들) 80명 익사공신(임해군의 옥사를 처리한 이들) 48명 정운공신(정인홍의 상소에 기여한 이들) 11명 형난공신(봉산옥사를 처리한 이들) 24명으로 총합 160여명이었다.[11] 광'''창'''부원군 이이첨 문'''창'''부원군 유희분 밀'''창'''부원군 박승종[12] 봉산옥사 이후로 조선 정치에도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영의정과 좌의정은 아직까지는 서인,남인,소북 등 야당들이 차지하고 있었지만 이 때 이후로 우의정은 여당인 대북세력에게 넘어간다.[13] 평안도와 황해도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