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도

 



'''평안도(관서)'''
平安道(關西) | Pyeongan Province(Gwanseo)

【한반도 전도에서 위치보기】

'''위치'''
대한민국(한반도) 서북부 / 북한 서북부
'''면적'''
43,400㎢
'''인구'''
약 1,200만 명 (추정)
'''도지사'''
이명우(평안남도), 오명찬(평안북도)
'''인구밀도'''
279.50명/㎢ (추정)
'''행정구역'''
[image] 평안북도
[image] 평안남도
'''최대도시'''
평양시
'''별칭'''
관서
1. 개요
2. 역사
3. 언어
4. 통일 후 전망
5. 둘러보기
6.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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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평양직할시, 평안남도, 평안북도, 자강도의 대부분[1], 량강도의 일부[2]를 포함하는 지역. 관서(關西) 또는 한국의 '''패'''강 '''서'''쪽에 있는 지방이라 패서(浿西)라고도 불리운다. '''관서'''는 철령'''관'''(鐵嶺關)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서북(西北)[3], 서토(西土) 등으로도 불렸다.
남북 평안도를 다 합친 넓이는 4만 3,400㎢, 인구는 1,200만 명 가량으로 추산된다. 특히 가장 큰 도시인 평양은 북부 지방 제1의 도시.
기원전에는 고조선 땅이었다가 낙랑군, 다시 고구려 땅이 되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일부는 신라 땅, 나머지는 당나라 땅이 됐다. 당나라 땅은 후에 발해가 차지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평안도 쪽 영토는 변방이었다.[4] 후삼국시대 초 평안남도의 남부를 궁예가 편입하였고, 왕건이 발해유민을 받아들이며 평안남도 대부분을 수복하는 등 점차 되찾아나가 북계(北界)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나라 간섭기에 북계가 최탄의 난으로 원나라에 넘어갔으나 결국 반환받았다. 조선 성립 당시 중강진을 중심으로 한 일부가 여진족 땅이었는데 세종대왕4군 6진을 개척하면서 조선 영토로 만들었다.
평안도라는 명칭의 어원인 평양안주는 둘 다 현재 평안남도에 속한다. 원래는 대동강, 청천강이 상류가 북쪽으로 뻗었기에 평안좌도, 우도로 구별했으며, 이 경우 대부분의 큰 도시들은 영변을 제외하고는 모두 좌도에 속하게 된다. 평안남북도는 1896년 이후의 구분이다. 선조 21년, 평양에서 최정보란 자가 맹인 신고함과 작당하여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의금부에서 친족살해가 일어난 평양을 전례에 따라 격하해야 하지만 솔직히 평안도에서 평양을 대체할 도시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이조에서 두번이나 평양을 격하하면 일개 현감이 도저히 평양같은 대도시를 다스릴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평양 격하를 반대하면서 평양의 지위가 유지되었다. 만약 평양을 격하했다면 조선시대 다른 도처럼 평안도도 한번 이름이 바뀔 뻔 했다.
관서 8경이라 함은 강계시의 인풍루(仁風樓), 의주군의 통군정(統軍亭), 선천군의 동림폭(東林瀑, 폭포), 안주시의 백상루(百祥樓), 평양직할시의 연광정(練光亭), 성천군의 강선루(降仙樓), 만포시의 세검정(洗劒亭), 영변군의 약산동대(藥山東臺)를 말한다.

2. 역사


조선왕조실록 -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 1월 5일 병인 2번째기사 1468년 성화(成化)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평안도3도로 나누고 각기 절도사를 임명하다'''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 이극배(李克培)에게 유시하기를,

이제 경(卿)을 평안중도 절도사(平安中道節度使)로 삼고, 김견수(金堅壽)를 평안서도 절도사(平安西道節度使)로 삼고, 황사윤(黃斯允)을 '''평안동도''' 절도사(平安東都節度使)로 삼으니, 이 동봉(同封)한 사목(事目)을 살펴서 시행함이 옳겠다.

'''본도(本道)를 이제 나누어 3도(三道)로 하고 각각 절도사(節度使)를 두는 것은, 본도의 도리(道理)가 막혀서 서로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 절도사로는 먼 데를 제어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함길도(咸吉道)도 또한 이 예(例)와 같이 이미 나누어 남도(南道)·북도(北道)로 하였는데, 지난번에 남도 절도사(南道節度使) 율원군(栗元君) 이종(李徖)이 도(道)를 나눈 본의(本意)를 알지 못하고 계달(啓達)하기를, ‘북도(北道)에 원거(元居)하는 군인의 수효가 남도(南道)의 갑절이 되니, 청컨대 '''남도군(南道軍)의 방수(防戍)를 북도(北道)에서 나눈 자로써 내지(內地)를 지키게 하소서.’ 하였다'''.

내가 ‘남·북도의 군마(軍馬)를 가지고 자타(自他)를 계교하지 말고, 전에 방수(防戍)하던 예(例)를 따라 성식(聲息)이 있으면, 2도(二道)의 절도사가 마땅히 합의하여 변란에 대처하라.’고 이미 유서(諭書)를 내렸으니, 경 등도 또한 이 뜻을 알고, '''3도가 합하여 한 몸이 되어, 항상 상산 사세(常山蛇勢) 와 같이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응하고, 그 꼬리를 치면 머리가 응하며, 그 가운데를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응하는 것이 옳다.'''

'''평양(平壤)·안주(安州)·정주(定州)·숙천(肅川)·성천(成川)·가산(嘉山)·순천(順川)·자산(慈山)·중화(中和)·상원(祥原)·덕천(德川)·개천(价川)·영유(永柔)·증산(甑山)·함종(咸從)·삼화(三和)·용강(龍崗)·강서(江西)·삼등(三登)·은산(殷山)·양덕(陽德)·맹산(孟山)·순안(順安)을 중도(中道)로 소속시키고,'''

'''영변(寧邊)·운산(雲山)·강계(江界)·위원(渭原)·벽동(碧潼)·박천(博川)·희천(熙川)·영원(寧遠)을 동도(東道)로 소속시키며, '''

'''의주(義州)·용천(龍川)·철산(鐵山)·선천(宣川)·곽산(郭山)·귀성(龜城)·삭주(朔州)·창성(昌城)·태천(泰川)을 서도(西道)로 '''소속시키게 하라.

하였다.

즉 이 기록에서 '''조선시대의 평안도는 3개의 도로 나뉘어 있음을 알수있다.'''
비교적 인구가 적은 이북 지역에 속해 있지만, 이북 인구가 평안도에 집중된 영향으로, 평야 지역에 한해서는 삼남 지방에는 많이 못미쳤지만 이북 지역에 한해서는 인구밀도가 높은 편에 속했다. 또한 면적이 42,000㎢에 달해, 18세기에는 경상도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었다.[5] 이는 비록 기후는 많이 춥지만 큰 강이 많아 식수와 농수를 얻기에 편리하고, 비옥한 평야 지대와 해안가를 갖추어 식량 생산 능력이 상당히 높기 때문이다.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요지에 위치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교통과 상업 역시 크게 발전했다.
한민족 역사상 최초 국가인 고조선의 중심지였으며 한사군이 들어섰기도 했고, 또한 고구려 중심지였고 이후 신라(통일신라)가 패강진 중심으로 개척하여 북진정책을 하였고, 사실상 고려의 제2 수도권 위치에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도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지역이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 지방관직 중에서도 평안 감사, 즉 평안도 관찰사 자리는 상당한 요직이자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평안 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까지 있을 정도였다.
조선 시대에 서북 지방의 사람들은 심한 차별을 받았다. 사실 이는 이성계의 "서북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라"는 유시 때문이었는데 이 이유로 이 지역은 유학이 강하게 뿌리내리지 못하였다. 유학을 국시로 삼는 조선 입장에서는 더더욱 질시를 삼게 되는 이유가 되었고, 임란 시기에 큰 의병이 없었다고 하여 더더욱 강한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 핵심 개국공신 중 하나이자 첫 영의정인 조준이 평양 출신이다. 무엇보다 서북 지방의 경우는 이전 묘청의 난의 경험도 있었고 허나 또 아이러니 한 것도 신진사대부들 중에서 묘청의 난을 말 그대로 반란으로 규정한 것도 핵심 공신이었던 조준이었다. 근데 조준은 평양출신이라는 것을 사대부들이 알았고 평양부원군으로 불렸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이 평양 출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서북 지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과거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 증가하였고 학문도 발전해서, 서울 다음으로 많은 과거 합격자를 배출했다.[6] 그러나 차별로 인해 이 지역 출신의 과거 급제자들은 당상관[7] 이상의 높은 관직이나 홍문관 등 요직에는 거의 진출하지 못했다. 실제 조선시대 이름난 정승이나 관료들 가운데 이북 지역 출신을 찾기 힘든 이유가 이 때문이다.
따라서 양반들은 벼슬길보다는 경제 활동에 전념해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고, 특히 의주임상옥거상으로 유명했다. 또 이들은 경제활동에 지장을 받지 않으려고 관리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도정치 시절에는 이들을 수탈하는 수령도 많았으며, 특히 평안감사가 정승 부럽지 않은 관직으로 유명했다. '평안감사도 제 싫으면 그만'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였다. 한번 제대로 긁어 모으면, 평생 놀고 먹어도 남을 만큼 재물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북 지방의 차별과 더불어 지방 향리들의 수탈도 가혹했고,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홍경래의 난 항목에 올라온 격문[8]을 참고하면 조선 후기 사회 전반에 평안도에 대한 괄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것은 대한민국/지역감정 항목을 참조. 홍경래의 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앙에서의 정치적 배제, 경제적 수탈로 기호지방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러한 적개심을 두려워하는 사료들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북쪽의 두 도(평안도, 함경도), 특히 평안도 사람들은 다른 조선 사람들보다 더 굳세고 더 미개하고 더 사납다. 그들 중에는 양반들이 매우 적고 따라서 벼슬아치들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그들을 왕정의 적이라고 믿고 있다. 정부는 그들을 조심히 다루면서도 엄중히 감시하고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지 노상 두려워하고 있는데 반란이 일어나는 날에는 진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샤를르 달레 신부 <조선 교회사>

사실 평안도는 예로부터 북방 민족과의 투쟁이 잦은 지역이었고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만큼 함경도와 더불어 용맹한 지역성을 가진 지역으로 자주 인식되었다. 정도전은 평안도를 숲 속에서 나오는 사나운 호랑이라는 뜻으로 맹호출림(猛虎出林)이라고 평가했다.[9]
다마 이중환택리지에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다고 쓰여져 있어 진실하다는 평을 들은 경상도와 더불어 호평이 적혀 있다.
구한말에 평안도는 과거 합격자를 가장 많이 배출했지만 정작 양반 비율은 조선 8도 중에서 가장 적었다. 평안남도와 평안북도가 밑에서 1, 2위를 차지했다. 당시 사대부의 평안도에 대한 차별을 알 수 있는 부분.
해방 뒤에 월남해 국군에 입대한 인사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내의 파벌 싸움에서 경상도 파벌 인사들에 의해 제거되었다. 평안도 출신 군 인사들은 '텍사스'라는 암호명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해방 당시 미군제24군단이 한반도 8개 도 각각에 대해 붙인 작전암호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평안도가 지역이 넓고 인물도 많은 데다 '''싸움 잘하는 인간'''이 많다고 해서 마찬가지로 미국 내에서도 주먹 맵기로 유명한 텍사스에 비유한 것이라고.##
평안도는 관서 지방으로 분류되지만 북한에서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중심 지역이다. 1952년 평양 지진 기록이 있으며 규모 6.3으로 보면 된다. 만약 평양에 경주 지진이나 포항 지진과 같은 지표면에서 진도 7의 지진 진앙지가 지하 9km에 일어날 경우 포항보다 100배 더 심한 피해를 주며 가옥, 건물 등이 붕괴될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되고 평양은 아수라장이 되고 황해도는 진도 5.5~6급의 지진을, 백령도2003년 당시 상황과 거의 유사한 규모로 나갈 수도 있다.

3. 언어



방언은 서북 방언을 사용한다. 다만 동북쪽 끝인 후창군 지역은 동북 방언권에 가깝다.
서북 방언은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의 한국어 발음이 기록된 매체[10]를 현대인들이 접할 때 서북 방언의 억양이 서울 방언 억양과 유사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으나 이와 관련한 관련 연구 자료는 없다.

4. 통일 후 전망


일단 평안도는 대(對)중국 무역의 중심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과 남한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나름대로 중간기착지로써 쓸모가 있는데다가, 인프라 건설비를 지원받기에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경의선 연선 지역(평양직할시~안주시~정주시~신의주시) 및 남포시, 강계시 지역은 물론 크게 발전하겠지만 나머지 산간 지역은 음....
국방 면에서는 중국에서 어느 정도 완충지대로 두기를 원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중국에서 대놓고 침략하겠다고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이상, 군인을 수십만씩 배치해서 긴장관계를 조성하면서까지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으려고 자처할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수도권경상도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지역이라, 선거에서도 무시못할 지역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현재 북한의 막장같은 상황에서도 인구가 3번째로 많고 1,200만에 달하기 때문에 통일 뒤에는 경상도와 인구면에서 맞먹을 확률이 높다.
자강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강도의 대부분[11]평안북도에 흡수될 것이다.

5. 둘러보기




6. 세종실록지리지에서의 설명




[1] 랑림군 제외[2] 김형직군[3] 고려 후기의 서북면(西北面), 해방 직후의 서북청년단도 여기에서 유래. 종종 서북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를 통틀어 일컫는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https://ko.dict.naver.com/#/entry/koko/00947a73f9e747d1a55d24766e1ecda6[4] 북한의 국보 목록을 봐도 발해 관련 국보는 거의 없다. 발해 중심지는 고구려보다 훨씬 북쪽이다.[5] 경상도,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순이었다. 단 전라도가 평안도 면적의 절반도 안된다는 점, 그럼에도 18세기까지는 전라도 인구가 평안도 인구보다 내내 더 많았다는 점은 고려할 필요가 있다.[6]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사실상 전국에서 가장 많은 과거합격자를 배출했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당시 서울은 과거 응시에 가장 많은 인원을 배정받았기 때문에, 서울이 과거합격자가 가장 많은 것은 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7] 정3품 이상. 현대로 치면 1급 공무원, 차관보에 해당함.[8]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토(평안도)를 버림이 분토와 다름없다. 심지어 권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9] 참고로 정도전함경도는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와 같다고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 평가해서 이성계가 심히 언짢은 표정을 짓자 얼른 석전경우(石田耕牛)라고 재평가해서 이성계의 마음을 그나마 누그러뜨렸다고 한다.[10] 영화, 대담 등[11] 랑림군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