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근신

 

남성의 생식기로 상징되는 신령들의 총칭. 한국의 신들중 하나로 무속이나 관청에서 모셨던 부군신[1]과 혼동되거나 아예 동일시 하기도 한다.
예전에는 마을 인근 산이나 관아의 바깥 한 구석에 일반 백성들이나 하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정성을 드리는 굿당(堂)이있는데 이것을 부군당이라고 하며 그곳에 산도당 부군이 산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아기를 점지해주는일은 삼신할미가 하는일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부근신을 섬기는 것은 남자 쪽에서 아기를 못 갖는 이유가 있을 경우라고 생각해서 모셔진것이라고 한다. 또한 여성이 씨를 받았으나 양기가 아기를 잉태라는데 부족할 때, 남편이 못 준 부족한 양기를 부근신으로부터 얻는다고 한다.
원래 이 풍습은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것으로 처음에는 남성의 성기를 숭배였으나 후에는 여러가지 잡신(...)의 형태로 변했다고한다. 주로 출세와 재물에 관련된 신으로 여겨진듯 하다.
나중에 조선시대에 들어와 1517년(중종 12)에 부군당을 짓고 부근신을 모시는것에 관하여 사헌부에서 폐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괴력난신을 배제한 조선에는 유학자들의 동네북 신세로 전락했다. 어지간한 네임드 유학자의 에피소드에 사학을 배척하고 미신의 온상인 부군당을 박살냈다 류의 얘기가 꽤 많다.[2]

[1] 부군신은 남녀의 성생활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한다.[2] 어느 유학자는 엄청 강직하고 깐깐한 성격이였는데, 어느 마을에 부임하자 동헌 옆에 한 낡은 사당을 보게 된다. 궁금해서 관속들에게 물어보니 부근신을 모신 부군당인데 예전부터 고을에 부임하는 수령들이 이곳에 정성껏 절을 올리고 치성을 드리면 관운이 트여 여태 보존해왔다고 말했다. 이 유학자는 이런 세태를 볼 수 없어 말리는 관속들을 만류하고 사당을 파괴했고, 오직 선정에만 힘써 자기 스스로 높은 관직에 오르고 무병장수했다는 얘기다. 사실 절이나 서낭당도 조선시대때 혹세무민을 이유로 많이 파괴되곤 했다. 다만 이게 무조건적인 박해는 아니였고, 개중에는 마을 유지나 토호들이 기득권을 위해 서로 결탁해 미신조장은 물론 각종 부조리와 악습이 반복되는 바람에 서울에서 부임한 수령들이 앞장서서 타파한 경우가 많았고 그만큼 충돌이나 반발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