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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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블라디미르 다비도비치 아시케나지[1]
이름(로마자/키릴)
Vladimir Davidovich Ashkenazy
Влади́мир Дави́дович Ашкена́зи
출생지
소련 고르키
생몰년도
1937년 7월 6일 ~
수상 경력
1962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콩쿨 1위
1955년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2위
공식 사이트
링크
1. 개요
2. 연주
3. 여담



1. 개요


소련 출생의 아이슬란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2]
1937년 구 소련의 고리키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1955년에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쇼팽 콩쿠르에서 2위를 차지했고, 1956년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와 1962년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3] 이후 아슈케나지는 공산국가인 자신의 조국을 떠나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으며 연주회와 레코딩 양쪽에서 모두 주목받는 젊은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다. 그는 피아노 독주 연주자를 넘어 실내악 연주자로도 활발하게 활동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지휘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아슈케나지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지휘자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어 로열 필하모닉의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와 독일 교향악단의 수석 객원지휘자, 베를린 심포니의 음악감독을 역임했다. 1987년에는 앙드레 프레빈의 뒤를 이어서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및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이 때 러시아/소련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에 대한 탁월한 해석을 보여주었다.[예시] 하지만 로열 필이 재정난으로 휘청이자 1994년에 로열 필 지휘자(& 음악감독)를 사임하였으며 1998년에는 체코 필의 수석지휘자로 취임해서 2003년까지 활동하였다.
일반적인 피아니스트 출신 지휘자들이 대부분 지휘 활동에 전념하는 것에 반해 최근까지도 아쉬케나지는 앨범을 내는 등 피아니스트로의 활동도 멈추지 않고 있다. 2020년 1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음악계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2. 연주




바흐, 파르티타 BWV 829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13


쇼팽, 에튀드 Op.25 No.6
쇼팽, 발라드 Op.23


리스트, 도깨비불
차이콥스키, 뱃노래


라흐마니노프, 에튀드 Op.39 No.2
쇼스타코비치, 전주곡과 푸가 Op.87 No.7

3. 여담


  • 사실 체격이 작은 편인 피아니스트였다.[4] 그때문인지 손도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섬세한 연주 스타일을 갖고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큰 스케일을 보여준 에밀 길렐스의 키도 170cm에 미치지 못했다.
  • 실력은 두 말 할것도 없고, 인간성 또한 매우 훌륭한 연주자로써 국내 팬들에게도 특히 인기가 높다. IMF 시절 내한했을때 한국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개런티를 20%만 받아간 것은 유명한 일화.
  • 국내 피아노 조율 명장 이종열씨의 회고에 의하면,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악기에 까탈스럽고 민감해서 진땀을 뺄 때가 많이 있는데, 아쉬케나지는 역시 피아니스트인 아들과 내한했을때 리허설을 마치고 본인이 다시 무대 위 피아노를 점검하고 있었는데, 아쉬케나지가 갑자기 무대로 걸어나오길래 또 무슨 엄청난 요구사항이 있겠구나 생각했지만, 아쉬케나지는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좋은 피아노를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다시 들어갔다고 한다.

[1] 종종 '아쉬케나지'나 '아슈케나지'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러시아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서 '아시케나지'가 올바른 표기이다.[2] 본래 소련 국적이었다가 1961년에 아이슬란드인 여성과 결혼한 후 1972년에 아이슬란드 국적을 취득하였다.[3] 차이코스프키 콩쿨은 공동 우승인데 이때 공동우승자는 영국 출신의 동갑내기 존 오그돈(John Ogdon).[예시] 라흐마니노프 악흥의 순간 1번, A-B-A' 중 A' 부분 대부분의 타 피아니스트들이 여기서 작곡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카덴차처럼 흘려버리는 파트를 아슈케나지는 메인 테마를 잘 살려서 연주했다.루간스키와 비교해보자. [4] 대략적으로 168cm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