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종지도
'''三從之道'''
《공자가어》에 나오는 여자가 따라야 할 3개의 도리.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어서는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말한다. 《공자가어》라는 책은 공자의 후손들이 공자의 남은 말을 적어서 보관한 것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실제로 공자가 했던 말인지는 논란이 많은 책임을 유의해야 한다. 최근 고고학적 발견을 통하여 《공자가어》의 몇몇 구절은 그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모든 구절이 공자가 직접했던 글이라고 볼 수 없으며, 특히 '삼종지도'에 관련해서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전형으로 비판받는 부분이기에 공자에 대한 평가에 이 구절을 사용함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구절을 인용하여 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시대 숙종이후로[1] , 여자를 집 안으로 구속시키고 밥짓는 존재로 격하시켰던 역사는, 반성하고 없애야 할 잔재임이 분명하다.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는 남편이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공자를 키우기 위해 남편없이 혼자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당시 아들인 공자의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아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심지어 안징재가 그의 남편 숙량흘과 만났을 때 야합(野合)[6] 을 했었다는 것은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자가 집안일만 해야 된다'거나 '집 밖에 나가면 안 된다'거나 '낮에 뜰에 나가 놀지 않는다'는 삼종지도의 내용은 공자가 했던 말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이 공자의 권위를 빌려서 추가한 문장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공자는 그의 저술에서 '여자'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다만 《논어》에서 "오직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이라는 구절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에 대한 부분에서만, '여자'를 비하하는 언급을 하기 때문에, 최근 학자들은 이 말이 실제 공자의 말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상황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고단했던 것은 사실이며, 여자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을 것이다. 여자의 삶을 '집 안'으로 제약을 가했던 것은 당시 극도로 혼란했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밖으로 나다니면 위험한데, 밖으로 나가서 놀아라는 부모는 없다. 현대에 들어 여자들의 '통금' 역시 마찬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는데,[7] 하지만 이러한 행동의 제약은 그만한 시대상황에 기반한 것임을 이해하여야 하고, 비교적 안전한 현대의 상황에서 이를 적용시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더군다나 미성년 시기를 지나 다 큰 성인에게도 '행동과 직업의 제약'을 가한 것은 특수성을 잘못 보편화시킨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숙종 이후로 유교적 통제를 강화하였을 때, 이 삼종지도 구절을 들어 여자를 구속하였다. 유교가 조선시대의 전근대적 문화로 비판받는 주된 이유에 이 '삼종지도'가 있기에, 유교계 역시 여기에 대한 많은 반성을 해오고 있으며 또한 문화적으로 전래된 나쁜 습관에 대한 청산도 진행되고 있다.
1. 개요
《공자가어》에 나오는 여자가 따라야 할 3개의 도리.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어서는 아들을 따르는 도리를 말한다. 《공자가어》라는 책은 공자의 후손들이 공자의 남은 말을 적어서 보관한 것이나, 학자들 사이에서도 실제로 공자가 했던 말인지는 논란이 많은 책임을 유의해야 한다. 최근 고고학적 발견을 통하여 《공자가어》의 몇몇 구절은 그 시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모든 구절이 공자가 직접했던 글이라고 볼 수 없으며, 특히 '삼종지도'에 관련해서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전형으로 비판받는 부분이기에 공자에 대한 평가에 이 구절을 사용함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구절을 인용하여 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조선시대 숙종이후로[1] , 여자를 집 안으로 구속시키고 밥짓는 존재로 격하시켰던 역사는, 반성하고 없애야 할 잔재임이 분명하다.
2. 상세
女子者 順男子之教 而長其理者也.
여자는 남자의 가르침을 따라서, 그 이치를 길러 주는 자입니다.
是故無專制[2]
之義 而有三從之道이 때문에 혼자서 결정하는 뜻이 없으며, 그래서 '''삼종(三從)의 도(道)'''가 있는 것입니다.
幼從父兄 旣嫁從夫 夫死從子
'''어려서는 아버지와 형을 따르고, 시집을 가서는 남편을 따르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자식을 따르는 것이니'''
言無再醮之端
두 번 시집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敎令不出于閨門
가르치고 명령하기를, 규문(閨門)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事在供酒食而已[3]
하는 일은 술과 식사를 제공하는 것에 있을 뿐이며
無閫外之非儀也
문 밖에서의 잘못된 거동이 없어야 합니다.
不越境而奔喪[4]
(부모님이 죽었다하더라도) 상(喪)을 치르려고 급하게 지역을 벗어나서 친정을 가지 않으며
事無擅[5]
爲 行無獨成일은 제멋대로 하지 않고, 행동도 홀로 결정하지 않아서
參知而後動 可驗而後言
(남편과) 같이 참여해서 알고 난 후에 행동하고, 경험한 뒤에 말하며
晝不游庭 夜行以火
낮에는 뜰에 나가 놀지 않으며, 밤에는 불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所以效匹婦之德也
이것이 한사람의 여자로서 덕을 본받는 바입니다.
《공자가어》 제육권(第六卷) 26편 본명해(本命解) 中에서..
3. 평가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는 남편이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공자를 키우기 위해 남편없이 혼자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당시 아들인 공자의 나이가 매우 어렸기 때문에 아들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심지어 안징재가 그의 남편 숙량흘과 만났을 때 야합(野合)[6] 을 했었다는 것은 정사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자가 집안일만 해야 된다'거나 '집 밖에 나가면 안 된다'거나 '낮에 뜰에 나가 놀지 않는다'는 삼종지도의 내용은 공자가 했던 말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이 공자의 권위를 빌려서 추가한 문장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공자는 그의 저술에서 '여자'에 관한 얘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다만 《논어》에서 "오직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려우니, 가까이 하면 겸손하지 않고, 멀리 하면 원망하느니라"이라는 구절과 《공자가어》의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에 대한 부분에서만, '여자'를 비하하는 언급을 하기 때문에, 최근 학자들은 이 말이 실제 공자의 말이 아니라 후대에 첨가된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당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했던 상황에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고단했던 것은 사실이며, 여자라고 예외가 될 순 없었을 것이다. 여자의 삶을 '집 안'으로 제약을 가했던 것은 당시 극도로 혼란했던 시대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밖으로 나다니면 위험한데, 밖으로 나가서 놀아라는 부모는 없다. 현대에 들어 여자들의 '통금' 역시 마찬가지 이유라고 볼 수 있는데,[7] 하지만 이러한 행동의 제약은 그만한 시대상황에 기반한 것임을 이해하여야 하고, 비교적 안전한 현대의 상황에서 이를 적용시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더군다나 미성년 시기를 지나 다 큰 성인에게도 '행동과 직업의 제약'을 가한 것은 특수성을 잘못 보편화시킨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숙종 이후로 유교적 통제를 강화하였을 때, 이 삼종지도 구절을 들어 여자를 구속하였다. 유교가 조선시대의 전근대적 문화로 비판받는 주된 이유에 이 '삼종지도'가 있기에, 유교계 역시 여기에 대한 많은 반성을 해오고 있으며 또한 문화적으로 전래된 나쁜 습관에 대한 청산도 진행되고 있다.
4. 여담
- 종종 삼종지도는 칠거지악과 같이 언급된다.
- 삼종지도는 혼란했던 시기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여자의 자유를 구속했던 전근대적 문화습관에 해당한다. 이 문제는 과거시대에 여자는, 남자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남자없이는 안전을 보장받지 못했기 때문이며, 또한 여자 혼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해결은 여자의 안정과 신변을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과 여자의 경제적 독립, 아이를 혼자 낳고 키움에 있어서 사회적 인정과 이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자의 어머니인 안징재 역시 남편없이 공자를 홀로 키웠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굳이 유교적 문화에서 이 삼종지도를 남겨두려고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페미니즘에서는 유교사회의 이러한 문제가 경제적 독립 뿐만 아니라, 남자에 대한 '감정적 독립'을 하지않았기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남자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감정'에서 독립하자는 것이 주된 요지이며, 이는 어떤 힘든 경우에도 생활할 수 있다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온다. 최근에는 힘든 노동직에도 여자의 사회진출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국사회는 이를 도와주고 권장하여야 하지 이상한 눈으로 보고선 '여자가 그래서 어떻게 살려고 그러니...' 등으로 걱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도전에 대한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전에 대한 응원을 해야 한다. 걱정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가 담겨있기에, 이는 도와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행동을 방해하고 억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에는 여자의 사회 진출에 대한 편견없고 적극적인 사회문화적 인정이 요구된다.
- 남자와 여자의 위치를 바꾸어서 말하는 '신(新) 삼종지도' 라는 말이 최근 들어서는 이야기된다. 남자가 어려서는 어머니의 뜻에 따르고, 결혼하면 아내 말을 잘 듣고, 아내를 사별하면 딸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동일하게 성별을 잣대로 한 성별을 미성숙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므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따라서 지양해야 할 표현.
[1] 같은 조선시대라 하더라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에서의 여자의 사회적 위치는 달랐다. 숙종 이전에는 여자의 상속도 공평하게 배분되었으며, 여자의 재혼도 역시 상당히 자유로웠다.[2] 專制: 혼자서 결정하다.[3] 而已: ~일 뿐이다.[4] 奔喪(분상): 먼 곳에서 부모님의 죽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달려와서 상(喪)을 치르는 것을 말함.[5] 擅: 멋대로 하다.[6] 야합(野合): 들판에서 부부관계를 맺었다는 뜻. 또는 정식 혼례를 치르지 않고 부부가 되는 것.[7] 최근에는 이러한 통금문화자체도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