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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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19대 임금이자 경종, 영조, 연령군의 아버지. 휘는 '순(焞)'이다.[8] 조선왕조에서 대대로 이어지던 장남의 수난이라는 불운을 깨부순 유일한 임금이다.[9]
몸이 병약했던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다.[10] 당시 모후인 명성왕후, 계증조모 자의대비[11] 가 생존 상태였기 때문에 수렴청정이 가능했지만 숙종은 즉위하자마자 수렴청정을 건너뛰고 곧바로 권력을 장악하여 친정을 했다. 이는 조선 왕사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12] 숙종의 성격은 다혈질이고 냉혹했으며, 장장 46년에 이르는 치세 동안 무수한 환국 정치를 통해 매우 강력한 왕권을 향유한 군주이다.
숙종은 왕비를 네 번 들였고, 이 중 두 번째 왕비가 인현왕후 민씨, 세 번째가 장희빈이다. 집권 동안 정사에 빠져 희빈 장씨를 비롯한 많은 여인을 탐닉했던 국왕이라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실제 숙종은 후궁의 수가 다른 조선의 임금에 비해서 적었으며 자식도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숙종이 여자와 관련한 문제가 가득한 임금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그가 다른 국왕과 달리 정치 문제에 자신의 부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13]
2. 강력한 왕권의 원동력
아버지인 현종도 할아버지인 효종의 외아들이었고, 자신도 정실 부인 소생의 고명아들이었으며 딱히 외척에 관련한 트러블도 없어 정통성에서는 꿀리는 게 전혀 없는 왕이었다. 꿀리기는커녕, 부계와 모계 정통성이 모두 완벽한 조선조 정통성의 끝판왕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세조 같이 왕위를 찬탈할 백숙부도 당시에 없었고, 연산군 때의 중종처럼 폐위시키고 세울 대군도 없었다. 2대독자였기에 태어난 기준 가장 가까운 왕족은 '''당숙''', 즉 소현세자나 인평대군의 자손들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소현세자의 자식들은 귀양과 석방을 되풀이하면서 종친으로서의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시피했고, 인평대군의 후손들은 현종-숙종과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14] 이 때문에 사실상 그 누구도 숙종을 견제할 수조차 없었다. 이 때문에 14세라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렴청정을 받지도 않고 바로 친정에 나섰다.[15]
'''왕비나 세자빈 소생의 왕의 장남 또는 장손으로 출생, 원자(원손) - 세자 - 왕''' 순서로 정상적으로 왕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기준) 장수하기까지 한 왕이다. 역대 조선 왕조의 적장자들은 단명, 숙청, 폐위 등 유난스러울 정도로 풍파에 시달렸으나 숙종만큼은 이런 풍파를 무난히 피해갔다. 숙종의 성깔은 어머니(명성왕후 김씨)에게서 유전된 것도 있으나 이처럼 귀한 아들(현종의 아들이라곤 숙종 혼자다.)인 탓도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어머니도 세자빈 - 왕비 - 대비 테크를 제대로 밟았다. 추가로 친증조모는 아니었지만 대왕대비까지 있었으니 수양대군 같은 야심 많은 종친이 있었다고 쳐도 계유정난 같은 쿠데타는 아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수양대군이 개념인으로 보일 만큼 엄청나게 막나가는 종친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나 다행히도 그런 종친은 당시에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16]
문종과 인종과 헌종[17] 은 왕위에 올라 단명한데다, 정확히 말해 문종은 원손으로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18] 상기된 최초의 '''금지옥엽 + 정통성 + 상왕'''까지 올랐던 단종[19] 은 3년만에 수양대군에게 반강제적으로 양위당하고,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왕위에서 축출되었다. 원손 - 세손 - 왕의 절차를 밟은 정조의 경우 호적상으로는 효장세자의 아들이지만 어쨌든 생부 사도세자의 문제가 있었다.[20] 비슷한 예로 아버지 현종이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현종이 태어날 때의 세자는 소현세자이니 원손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고, 세자 교체와 관련한 효종의 원죄가 남아 예송논쟁이 발생하고 현종 자신 또한 비교적 요절한지라 조금 '격'이 딸린다. 아들인 경종도 장희빈이 중전에서 폐위되어 사사당했으므로 적자라고 보기에는 애매하다. 순종 황제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즉, 숙종의 막강한 왕권은 '''왕위에 오를 때 어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완벽한 정통성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통과 질서를 강조하는 조선 왕조에서도 정말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 정통성 면에서 꿀릴게 전혀 없는지라 왕권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었고, 이 양반 시절에 신하들을 손바닥 안에서 가지고 노는 환국(換局)이 그렇게 많이 일어난 것도 이런 정통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3. 불 같은 성미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했지만, 성미는 매우 불같아[21] 궁녀들이 머릴 빗겨주거나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결국 머리 빗겨 주는 것은 어머니가 직접 했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못 참아 투정을 부리자 빗 등으로 머리를 때려가면서 빗겼다고 한다. 그래서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22] 도 아들을 평하기를
어쨌거나 명성왕후는 며느리인 인현왕후에게 이런 언급도 하였다."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 할 수가 없다 하였다."[23]
조선왕조실록은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 숙종의 건강 상태를 이렇게 전한다. 전형적인 화병 증세다."(인현왕후가 출궁당한 장희빈을 불러들이자고 주청하자[24]
) 아직 내전이 그 사람(희빈 장씨)을 보지 못하여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그 간교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소. '''주상께서는 평소에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불길처럼 일어나시는데''' 간악한 사람이 그것을 옆에서 부채질한다면 그것은 큰 재앙이 될 것이오."
숙종이 평생을 두고 호소한 질병은 산증(疝症)이다. 산증은 아랫배에 병이 생겨서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증상이다. 현대 의학에선 '간질성방광염'으로, 방광 근육 내부의 궤양과 섬유화로 인해 방광 용적이 줄어들고, 하복부 통증이 만성화 되며 혈뇨가 나오는 등 사람을 굉장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질병이다. 동의보감은 이 병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전형적인 화병의 증상이다."이 때에 왕의 노여움이 폭발하고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이지 않았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다, 마음이 답답하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번뇌가 심했다."
숙종 본인도 자신의 이러한 성품을 인지한듯, 실제로 <숙종실록>을 보면 1704년(숙종 30년) 12월 11일자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대체로 성을 몹시 내면 간에서 화(火)가 생긴다. 화가 몰린 지 오래되면 내부가 습기로 차가워지며 통증이 심해진다."
이후 영조 또한 산증(疝症)에 시달렸던 것을 보면, 선대왕대부터 내려오던 지랄맞은 성격이 불러일으킨 스트레스성 질환이거나, 아니면 반대로 유전적인 요인으로 생겨난 방광의 이상으로 인한 통증의 만성화로 인격 자체가 신경질적으로 변했을 가능성도 있다."나의 화증(火症)이 뿌리 내린 지 이미 오래고 나이도 쇠해 날이 갈수록 깊은 고질(苦疾)이 되어 간다. 무릇 사람의 일시적 질환(疾患)은 고치기 쉽지만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것은 화증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일을 하면 화염(火炎)이 위로 올라 비록 한겨울이라도 손에서 부채를 놓을 수가 없다."
밑의 송시열과의 악연 문단에서 알 수 있듯이 모후인 명성왕후 김씨도 조선 왕비들 중에서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한 성질하는 왕비였다. 아버지 현종은 온화한 성격이었으니 그의 성격은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명성왕후는 1675년 '홍수의 변'[25]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는 상황이 아닌데도 대전까지 와서 통곡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는 명성왕후의 아버지 김우명이 홍수의 변 때 총대를 매고 삼복(복평군 형제들)을 탄핵했지만 결정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삼복과 반대 당파에게 무고죄로 위기에 몰린 상황이라서 이랬던 것. 신하들 역시 '이건 뭐 문정왕후가 또 나타났나요?'라고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
드라마 등의 영향으로 장희빈만 나쁜 년이고, 착한 숙종은 장희빈에게 홀려 조강지처를 저버리고 끌려다녔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숙종이 다혈질에 사리분별을 모르는 짓을 종종 했던 인간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숙종 14년(1688년)에 장희빈이 아들(훗날의 경종 이윤)을 출산하자 장희빈의 어머니가 가마를 타고 입궁한 적이 있다. 이 때 사헌부의 말단 직책인(심부름꾼 수준) 소유들이 장희빈 어머니의 가마를 보고는 이를 적발해 가마를 부쉈다. 그 가마는 옥교라는 지붕이 달린 여성용 가마로, 당시 법에 의하면 정 3품 이상 관리의 여자 가족이나 탈 수 있었다. 즉, 소유들이 원칙대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들은 숙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유를 전부 때려 죽이라'''고 명했다. 물론 신하들이 뒤늦게 말려 중단되기는 했지만, 결국 내수사에 끌려가서 심문당하던 소유 중 2명은 고문 중에 맞아 죽었다.
당시 상궁들도 가마를 타고 다니고 암묵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일이었으나 일단 엄격히 법을 적용하자면 장희빈의 어머니가 주제넘은 짓을 한 것이 맞다. 결국 신하들의 극심한 반발로 숙종도 물러서서 법대로 한 것뿐인 자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들에게 상을 내리고 이 일을 문제삼은 대간들을 칭찬하기도 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인 것도 특징. 위의 소유를 패대기친 것은 장희빈의 환심을 사려고 한 짓이며 장희빈을 이용해서 강적인 송시열(과 서인)의 끝을 보려했다는 시각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송시열이 죽고 난 이후에는 숙빈 최씨(영조의 생모)를 이용하면서 장희빈을 외면했단 것.
생각해보라. 계비인 인현왕후까지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행동을 트집잡아 폐서인으로 만들고 장희빈을 중전으로 삼아줬다. 하지만 장희빈의 이용 가치가 사라졌고 다시 인현왕후를 왕비로 삼았다.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지만 폐위됐을 때 얻은 병이 악화되어 결국 복위된지 7년만에 사망했다. 이에 숙종은 그 죽음을 희빈 장씨의 저주 탓으로 돌려 그녀를 사사시켜 죽였다. 즉, 숙종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안가리는 인물이자 권모술수의 달인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다르게 말하자면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가차없이 죽이고 두 여자를 갖고 놀며 자기의 아들의 인생도 엉망으로 만드는 짓을 많이 저질렀다는 애기도 된다. 일단 인현왕후는 5년이라는 길고 열악한 폐비 생활이 사망에 영향을 많이 끼쳤고, 장희빈은 저주를 했다는 증거도 고문으로 인한 궁녀들의 자백뿐인데다 세자(이윤)의 어머니인데다 남인 세력도 씨를 매우 많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귀양이고 뭐고 가차없이 죽여버렸다. 거기다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릴 당시 세자는 완전 어린 나이도 아니고 14살이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피를 많이 흘린 태종도 적어도 충신들이나 왕비인 원경왕후나 후궁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숙종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 수 있다.
숙종의 이런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극단적인 피해를 본 사람이 많은 건 부왕인 현종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숙종과 달리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면 다음 왕 때부터 부작용이 나타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남인에게도 힘을 실었고 사약 같은 극단적인 수단은 쓰지 않았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현종 실록 대에 정치적으로 피바람이 불었다는 등의 묘사가 없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양육적인 측면과 결합해서 보면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부터가 독선적이었는데, 조선 시대 왕의 스케줄이 워낙 살인적이었으므로, 중전이자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세자인 숙종의 주 양육자로서 성격적인 측면을 비롯해서 숙종에게 많은 영향을 줬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아버지인 현종이나 친할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웃어른 인선왕후[26] 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숙종도 이들의 영향으로 잔혹한 수단들이 다소 완화되거나 최소한 이들이 살아있을 때까지는 왕권을 독단적으로 행사하기 힘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4. 환국(換局) 정치
인조반정 이후 현종 때까지의 정국이 붕당 간의 적절한 견제와 균형으로 이루어졌다면, 숙종 즉위 후 기사환국 이후부터는 한 당파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는 '''"너 죽고 너 다시 한 번 더 죽자"'''는 식으로 전개되었다.
여기서 왕실 종친들은 즉, 숙종의 적당숙인 복평군과 복선군, 복녕군은 아버지인 인평대군(인조의 3남)이 서인에게 탄핵을 받고 외척들인 서인과 사이가 안 좋아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서종조인 숭선군과[27] 서당숙인 동평군 또한 장희빈과 남인편을 들어주었다.
서인은 주로 외척이 중추였는데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이고 외조부인 김우명도 서인이었고 어머니의 사촌오빠인 김석주도 서인이었다. 숙종의 첫째 왕비의 아버지이고 장인인 김만기와 처숙부인 김만중도 서인이었고 둘째 부인인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오빠인 민진후, 민진원, 처숙부인 민정중도 서인이였다. 또 숙종의 증조할머니인 장렬왕후의 친척인 조사석도 서인이었다.[28] 게다가 숙종의 매제인 오태주도 서인 중진인 오두인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도 김수항, 김수흥 가문의 종질녀였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남인과 서인의 싸움은 종친과 외척의 대리전과 다름 없었다.
간단하게 임금이 남인을 선택하면 서인이 죽어나갔고, 서인을 선택하면 남인이 죽었다. 붕당이 처음 일어난 선조 시절에 붕당간에 정철과 정여립의 난으로 대표되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혈투를 벌인 것과 비슷했다.[29] 이로 인해 집권 당파가 바뀔 때마다 보복성 숙청으로 피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적절히''' 이용해 환국을 일으켰다. 보통 조선 역사를 배울 때 이러한 숙청 시기를 환국으로 표현한다. 대표적인 환국과 그에 준하는 정국 뒤집기로는...
- 재위 27년(1701년), 신사의 옥으로 남인 잔존세력들마저도 쓸어버림. 그리고 소론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이 강해지는데 일조함.[36][37] 이건 어찌보면 갑술환국의 속편이라고 볼 수 있다.[38]
- 재위 31~32년(1705년~1706년), 임부의 옥사와 이잠의 옥사로 이미 재기불능에 빠진 남인들을 또 한번 대거 숙청함. 이 사건들로 인하여 소론의 영향력은 더욱 약화되고 노론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됨.[39]
- 재위 36년(1710년), 예기유편 편찬에서 불거진 논란이 확산되고 게다가 당시 편찬자였던 최석정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면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고 거기에 대해 당시 영의정이자 내의원도제조였던 최석정이 임금의 병환에 시약을 잘못했다는 의혹까지 확산되면서 이에 분노한 숙종은 소론인 최석정에게 영의정 관직을 삭직하고 노론인 이여에게 영의정으로 제수를 하는데, 이로 인해 노론의 영향력은 계속 강화되고 소론의 영향력은 계속 약화되는데 일조함.
- 이미 숙종 즉위 이전, 분명해지기로는 전자로는 경신환국 이후로, 중자로는 기사환국 이후로, 후자로는 갑술환국 이후로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자, 초기엔 소론을 중용했으나 신사의 옥, 임부의 옥사, 이잠의 옥사 등 여러가지 옥사들이 일어난 이후로 노론을 점점 계속 등용하더니[40]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을 대거 내몰고 노론을 대거 등용. 재위 21년 시절, 마지막 환국 이후 20년만에 벌어진 속편 격이라 잘 알려지지 않지만 이후의 붕당 대립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숙종은 자신이 죽인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훗날 연산군처럼 피바람을 불게 할까봐 두려워 '''노론과 공모해 경종을 폐세자하려던 중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 택군(擇君) 경험 때문에 노론은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면 소론은 이것을 이용해서 피바람이 일게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임옥사[42] 다.
숙종이 잦은 환국과 신권을 억누르는 정치를 한 탓에 몸이 약한 경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은 개판 5분 전 + 피를 피로 씻는 배틀로얄이 되었고, 독살설과 역모가 횡행하였다. 영조 즉위 이후에는 점점 소수 붕당의 독재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영조,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을 밀어붙여야만 했다. 사실 탕평책이란 이름은 숙종이 최초로 만들었다.
숙종은 또 기본적으로 신하들을 대등한 존재로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숙종 17년(1691년)엔 '''우의정''' 김덕원이 오래 봉직한 내시의 경험담을 듣고 '인조대왕과 효종대왕은 검약하셨는데 님도 좀 검약하시져'라고 했다가 '네가 감히 선조의 일을, 그것도 천한 내시의 말을 들먹이면서 나를 능멸?'이라는 식의 말과 함께 오래 전에 사망한 그 내시는 일가 친척들과 함께 내시 명단에서 삭제되고 발언자 본인은 단칼에 파직 크리를 먹은 적이 있다. 영의정을 비롯해 주변 신하들이 다 싹싹 빌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고. 바로 그해에 '그동안 당쟁이 심해 그거만큼 폐단이 없는데 나님이 그런거 다 없앰'이라는 율시도 지었다.[43] 그 내용을 다룬 만화, 송시열과 윤휴의 혼백이 숙종을 디스하는게 압권.
“예전부터 나라를 어지럽힘은 붕당보다 혹독한 것이 없는데, 동서(동인과 서인)가 겨우 주장을 내세우자 노소(노론과 소론)가 바로 마구 헐뜯어대어 공도는 때로 아주 없어지고 사심이 날로 이어 붙어 있으니 모름지기 은감이 가까운 줄 알아서 끝내 '''충성의 힘 다하여야 하리라.'''"(從古禍人國/莫如黨比酷/東西纔標榜/老少轉橫拆/公道時淪喪/私心日係着/須知殷鑑邇/終始竭忠力.)
5.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의 악연
환국을 일으킨 끝에 즉위하기 전부터 미워했던 송시열에게 결국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로써 본인의 증조부, 조부, 부친인 인조, 효종, 현종 선대 세 왕을 섬긴 거물 정치가 송시열도 별 수없이 "어, 어"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이 때 송시열이 사약 1사발에 안 죽자, 3사발을 먹여서야 죽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사약 참조.).
왕권 강화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송시열이 사약을 받은 계기가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삼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인 것을 생각하면 다소 감정적인 요인도 컸을 것이라 추측된다. 원래 숙종은 송시열을 싫어했고 송시열은 하던 버릇대로 숙종과 각을 세우다[44]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리고 송시열을 따르던 유생들이며 신하들이 상소를 올리자 상소를 올린 이들도 다 유배를 보내는 숙종다운 성질을 보여준다.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열불난 숙종이 송시열을 국문을 열기 위해 한양으로 불렀다. 그때 송시열이 올라오는 길에[45] 그를 따르는 노론들이 몇백명이었다한다. 점점 한양으로 올라가며 졸졸 따르는 이가 500명이 넘었다고 했으니 숙종이 국문이고 나발이고 사약을 출동시켜서 결국 죽여버렸다.
송시열은 할아버지인 효종을 둘째 아들이라 못을 박고, 그 부인인 인선왕후에 대해서도 대공복 주장을 폈다.[46] 이는 적자 - 적손으로 이어지는 숙종의 정통성을 건들게 되는 일이니 좋아할리 없었다. 그리고 송시열의 세자 책봉 반대는 단순 반대로 여기기에는 문제가 있다. 송시열 같은 거물이 세자 책봉에 반대한다면 세자의 정통성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다만 이런 일을 했던 숙종이 정작 죽을 때 경종의 정통성을 훼손해서 노론으로 하여금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게끔 만든 게 한편으로는 아이러니.
숙종과 송시열의 다툼은 야사에서는 숙종 탄생 시기까지 간다. 숙종의 회임 기간으로 볼 때 숙종을 임신한 시기가 하필이면 효종 초상기와 맞물린 것.[47] 야사에선 이때 송시열이 원자 축하를 디스했다고 한다.(사실은 상경하다가 중간에 일이 생겨 기일을 못 맞추게 되자 송시열이 이것을 이유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뒷날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준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단행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송시열의 학통이 교조화되는 데 한몫한 군주도 다름 아닌 숙종이라 할 수 있다.
숙종은 이런 송시열에 대해 짬밥이 너무 엄청나서 맞대결하기가 부담스러웠고[48] 그래서 장희빈을 이용한 것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장희빈이 숙종의 마음을 얻기도 전인 즉위 직후인 14살 시절부터 송시열을 갈구며 송시열의 제자들을 죄다 내쫓고 송시열을 귀양보낸 게 숙종이었다.
6. 치적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을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시행하여 민생의 안정을 추구했고 본격적으로 주전, 즉 화폐 제조를 실시했다. 흔히 우리가 잘아는 상평통보는 숙종 즉위 초년부터 주조되기 시작해 전국의 중앙, 지방 관청에서 유통되었다. 숙종이 상평통보를 발행한 목적은 국가 재정의 확충이라는 목적이 컸다.
숙종의 의도가 적중해서 이후 조선 말까지 화폐 제조를 통한 이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한다는 개념이 정착했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일본과의 은 무역에서 크게 번영했다.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숙종 시대 전반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국가 재정 역시 탄탄했다. 특히 숙종은 군주로서의 책임감이 강해서 민생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대동법의 영남 / 황해 확대와 후술하는 을해정식을 통한 궁방전의 억제 등이 대표적이다. #
조선의 국경도 숙종 년간에 사실상 확정되었는데, 조정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널리 알려졌듯 1690년대 안용복이 '''울릉도는 우리 땅'''(덤으로 독도도)을 외치고 왔고, 앞서 말했듯 북쪽은 백두산에 청과 국경선을 다시 긋고 정계비를 세워 "서위압록 동위토문"을 적어넣었다. 문제는 당시 이 작업에 참여한 청나라 관리 목극등의 문제로 근 170년쯤 뒤에 간도 떡밥이 시작되어 버린 것. 이는 조선 왕실에서도 알아챘기 때문에 '''숙종실록에 토문강을 치면 간도 떡밥을 분쇄하는 가장 큰 근거가 나온다'''. 다만 그 뒤에 대한 대응은 적혀있지 않다.
숙종연간인 1678년에 안남왕 희종은 안남(베트남)의 회안부(호이안)에 표류한 김태황(金泰璜)을 6개월 정도 머물게 한 후 청나라 상인을 통하여 조선으로 되돌려 보내면서 답신을 기대하며 조선에 교류 국서를 보냈으나, 조선은 제주에 도착한 김태황과 청나라 상인 일행을 그냥 표류한 것으로만 처리하였다.
6.1. 추증과 복권
조선 왕조의 과거사 정리에 관심이 많았는지 정종(定宗)과 단종(端宗)을 왕으로 복권시켰다.
정종은 본래 '공정온인순효대왕(恭靖溫仁順孝大王)'이라는 짧은 시호만 있어 약칭 '공정왕'이라고 불리고 묘호가 없었는데 이때 묘호와 조선의 다른 왕과 동일한 글자 수의 시호(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를 갖추게 되었다.
'노산군(魯山君)'이라 불렸던 단종은 숙종 7년(1681년)에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격상되었다가 숙종 24년(1698년)에 단종의 묘호와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의 시호를 받아 복위되었다. 이 때 혜빈 양씨와 사육신도 모두 복권되었다. 복권시킬 때의 명분은 단종이 강등되고 사사된 세조를 모시던 신하들의 요청과 강요 때문이므로, 단종을 복위시킨다고 세조에게 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 [49]
물론 한 번에 복위한 것은 아니고 이들에 대한 동정론을 배경을 바탕으로, 전국의 여론을 수렴하고 논쟁을 거치기는 했다. 단종 복위 때는 기념으로 특별 과거까지 열었다.세조대왕(世祖大王)께서 상왕(上王)으로 존봉(尊封)하신 뜻이 지극히 극진했었는데, 그 때의 대신들이 그 아름다움을 따르지 못하고 정청(庭請)하고 억지로 간쟁하여, 세조의 어지신 마음으로 하여금 시종(始終)을 보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신(神)과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오래 되었습니다.
- 숙종실록 39권, 숙종 30년 5월 14일
태종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의 자손들이 정식으로 왕족으로 복귀한 것도 이 때였다. 그 전까지는 사실상의 역적[50] 처럼 간주돼 그 후손들은 연좌제에 따라 족보상으로만 왕족이고 왕족으로서의 혜택은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다.[51]
신덕왕후강씨의 아들들인 방번과 방석을 복권시켜 이 때부터 무안대군과 의안대군으로 불리게 됐으며 소현세자의 아내인 민회빈 강씨를 복권시키기도 했다.[52]
숙종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은 왕권 강화 과정에서 무조건적인 충(忠)을 강조하고[53] 왕가의 정통성을 다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54]
숙종 자신이 출생 배경과 성장 과정에서 오는 정통성이 여느 왕과 달리 튼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왕권이 워낙 튼튼했기 때문에 과거사 정리쯤 폭넓게 들어줘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을 것이다.[55]
이런 작업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정조 대에 이르면 광해군의 충신으로 여겨져 사사되었던 유몽인이 복권되었고 철종 때에는 광해군의 사돈이자 소북의 영수인 박승종 또한 복권되었다. 고종 때는 정도전을 완전히 복권시켰고[56] 인조를 폐위시키고 광해군을 복위시키려 한 유효립도 복권 되었고[57] 순종 대에 이르러선 김일경, 유자광, 윤원형, 정인홍 같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인물들조차 대부분 복권된다.[58]
6.2. 국방 정책
숙종은 방위 체계를 수도 중심으로 대대적으로 손봤다. 임진왜란 이후 만들어진 오군영 제도가 확립된 것이 숙종 대로 평가되는데 방어 체계가 수도 중심으로 재편된 김에 북한산성을 축성한다. 상대적으로 한양도성은 성곽이 너무 길어 수비하기가 어렵고, 강화도는 바다에서 접근하는 적을 못막으며, 남한산성은 한강을 건너가야 하는 위험함이 있다는 이유였다.
실록에 보면 이 과정에서 신료 사이에 의견이 크게 갈려 싸우게 되는데 숙종은 이미 마음을 먹어놓고선 계속 논의토록 지시한다. 아마도 청나라의 간섭[59] 때문에 책임을 피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1711년에 청에서 해구[60] 의 준동이 있다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군사와 도성 백성들을 동원하여 그 험하디 험한 북한산에[61] 6개월 만에 성을 쌓아 올리고 행궁을 만든다.
이후에도 북한산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방비가 허술하다며 탕춘대성을 만들고, 크고 수비하기가 어렵다고 한 한양 성곽을 고치고,[62] 허술하고 멀다고 한 강화도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김포에 문수산성을 축성했다.
또한 추가로 개풍군에 있는 대흥산성을 고쳐 쌓고, 평안도 남포에 황룡산성, 강화성, 경상북도 칠곡에 가산산성, 황해도 해주 수양산의 수양산성, 평안북도 염주의 용골산성, 충청북도 청주시의 상당산성을 증개축하고, 남한산성 행궁을 증축한다. 이래저래 성도 많이 짓고 북한산성 행궁과 남한산성 행궁에는 각각 행차하여 잠시 지내고 오는 등 재위 동안[63] 수도 방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때 만들어진 수도 방어 체계는 영조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정조가 장용영을 만드는 등 약간의 변화를 거치긴 하지만 고종 때까지 유지되었고 덕분에 이때의 산성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손실된 내부 시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잘 남아있다.
또 한꺼번에 무과 합격자를 1만 8천여명이나 뽑아서 국방을 강화시킨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구관당상을 제도화 한 8도구관당상제(八道勾管堂上制)를 도입하였다. 각 도에 1명의 구관 당상관이 임명되어 군무를 분담하여 그 도의 장계(狀啓)와 문부(文簿)를 처리한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삼번의 난이 터지자 예의주시하며 북벌을 준비하는 구절이 실록에 여러번 등장한다. 결국 흐지부지 하긴 했지만...
7. 가계
- 정비 : 인경왕후 김씨
- 첫째 : 공주 - 요절
- 둘째 : 공주 - 요절
- 제1 계비 : 인현왕후 민씨
- 제2 계비 : 인원왕후 김씨
- 후궁 : 희빈 장씨
- 첫째 : 경종 이윤
- 둘째 : 왕자 성수 - 요절
- 후궁 : 숙빈 최씨
- 후궁 : 명빈 박씨
- 첫째 : 연령군 이훤
- 후궁 : 영빈 김씨
- 후궁 : 귀인 김씨
- 후궁 : 소의 유씨
8. 정유독대와 최후
숙종의 건강이 악화되어 가는 와중에도 세자를 연잉군(영조)으로 바꾸려는 노론과 경종을 지키려는 소론이 끊임없이 싸웠다. 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숙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자의 자리는 그대로였다.
다만 정작 숙종의 의중은 이미 은연중에 연잉군에게 넘어가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이 당시나 지금이나 주를 이룬다. 경종에게 후사가 없었고 그가 희빈 장씨의 친아들이라는 점도 정치적으로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숙종이 아무 말도 없이 죽었다면 왕위 문제가 한동안은 조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기어코 분란의 씨앗을 남기고 만다. 이것이 바로 정유독대다.
죽음이 임박했을 무렵, 숙종은 노론의 대신인 이이명을 불러 독대를 한다. 조선 시대에 사관도 없이 왕과 신하가 만나는 것은 불법이었다. 더욱이 왕의 임종이 임박한 시점의 독대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수 있는 사건이었다. 말 그대로 독대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무엇인지 실록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후 이이명의 말과 행동, 노론이라는 그의 위치로 볼 때 세자 교체나 경종 즉위 후에라도 연잉군의 세제 책봉을 부추기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추측된다. 어쨌든 숙종의 정유독대라는 나비 효과는 경종 기간 끝 없는 정쟁의 씨앗을 제공했고 신임옥사(신축옥사와 임인옥사)로 이어져 결국 당사자 이이명을 죽게 만든다.
어쨌든 재위 46년째인 1720년 6월 8일 승하했다. 숙종은 역대 조선 왕 중 사망할 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된 왕인데 사망할 무렵에는 앞도 거의 못 보고 복수가 차서 배가 불룩 나온 상태였다고 하며 사망하던 날에는 인원왕후와 세자, 연잉군, 신하들이 와서 울면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고 가래 끓는 소리를 많이 냈다고 한다. 신하들과 연잉군이 서로 대화하던 사이 숨소리와 가래 끓는 소리가 점점 가늘어지다가 갑자기 크게 토하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image]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내에 있는 명릉(明陵). 숙종과 2번째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나란히 묻혀 있는 쌍릉과 3번째 왕비 인원왕후 김씨가 혼자 묻힌 능 1기가 오른쪽 위 언덕에 따로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능은 명릉 내에 있지 않고 아예 따로 조성되었다. 서오릉 내에 있는 익릉(翼陵)이 그것. 숙종의 명릉은 서오릉의 능역 중에서 유일하게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있는 능이다. 나머지 서오릉의 능들은 정자각 쪽에서만 구경할 수 있고 능침 앞까지 올라갈 수 없다. 덤으로 이 명릉 택지와 관련해서 야사도 있다. 암행 나갔다가 숨은 명풍수를 만나서 얻은 자리라 한다.[67]
9. 영향과 평가
전체적으로 군주로서의 자의식과 책임감이 강해서 여러 업적을 남긴 뛰어난 군주였지만, 민생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나 효과를 보는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이것도 "그 긴 재위 기간을 놀고만 있었다"라고 보기엔 실체화만 안되는 것이지, 이미 균역법의 근거가 되는 여러 조사들이 숙종 말년에 마련되고 있었다는 지적도 많다. 예를 들면 균역법이 "남자 1인당 포 2필"이었던 것을 1필로 줄인 것인데, '''전국의 군포를 모두 포 2필로 동결시킨 것이 바로 숙종 때 이루어졌다.'''
또한 부왕 현종이 기껏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산당의 세력을 약화시켜 서인과 남인간의 붕당의 균형을 간신히 맞추어 놓은 것을 환국을 통해 다 무너뜨려 정국의 혼란을 초래했으며 말년에는 아예 대놓고 노론의 편을 들면서 결국 조선 후기 노론의 일당 독재를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환국으로 촉발시킨 조선의 '''합리적 정치 시스템 파괴''' 역시 영조, 정조 시대까지 지속돼 마침내 정조 대에 붕당 정치의 붕괴로 절정에 이르니, 그 결과는 세도정치로 이어진다. 또한 숙종은 태종과 마찬가지로 왕권 강화를 이루었지만 그 과정에서 외척을 척결한 태종과는 다르게 외척에 많이 의지했다.[68]
이런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치세는 결국 영조, 정조 시대라는 조선 후기 중흥기의 기반이 되었던 만큼 제법 그 의의는 크다. 또한 숙종 무렵부터 조선이 여러 가지로 사회적인 변화를 겪기 시작해서 그런지 딱히 장희빈 이야기가 아니라도 사극에서 배경으로 많이 다뤄지곤 하는 시기가 바로 숙종 시기.
숙종은 예순살에 사망할 때까지 46년(정확히는 45년 10개월)[69] 을 다스렸다. 이는 아들 영조의 재위 기간인 52년(51년 7개월)에 맞먹는 것이며, '''조선 왕 중에 2번째로 재위 기간이 긴 인물이다.''' '''즉 숙종과 영조 부자가 합쳐 조선 왕조 500년중 100년 가까이 재위했다.'''[70] 참고로 재위 기간이 40년 이상인 왕은 이들 외에는 둘뿐으로 선조가 41년(40년 8개월), 고종이 43년(43년 7개월)을 다스렸다. 이 점에서 영조, 정조보다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숙종 치세는 전란으로 감소한 조선의 국력이 거의 수습된 시대였고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달했으며, 화폐 유통 경제가 정착되었고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시기라서 조선 경제사에서는 의미가 매우 큰 시대다.
10. 여러 이야깃거리
- 본격 관우 빠돌이였다. 숙종은 개인적으로도 관우가 보여준 충의로운 모습에 푹 빠져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 중에 들어왔지만 별 관심을 못받던 관우 신앙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관우에 대한 제사를 국가 주관 제사로 격상시켰고 자신이 직접 제사에 참석해서 제삿상에 술을 따르고 4번이나 절을 올릴 정도로[71] 열렬히 관우를 숭배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서종태가 항의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관우 사당인 동묘는 무속 신앙 시설이라, 유교 문묘와 분위기가 천양지차로 다르다. 유학자라면 당연히 항의를 했어야 한다. 그러고도 숙종이 별탈 없었다는 건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실려있으니 관심이 있으면 찾아보시라.
- 단, 관우와 현실 정치는 별개로 봤다. 특히 이 시기 북쪽에서 많이들 들어온 중국 이민자들이 재조지은이나 상국 드립 치며 차이나 타운에서 자기들끼리 노는 건 용납하지 않아서 강제 부역이 가미된 동화 정책을 실시. 말 그대로 싹 정리해 버렸다. 조선 땅에서 살고 싶으면 세금을 내라는 것이 그의 지론.
-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호를 받고 사우에 향사된 것은 이순신,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과 함께였으나 조선 이전의 시대의 인물은 을지문덕이 유일하다.
- 상술된 이순신의 사우에 현충이라는 호를 내림과 동시에 을지문덕, 최윤덕, 이원익, 김덕함 등을 아울러 사우에 향사하게 하고 청천이라는 호를 내렸다. 1707년(숙종 33년)의 일이었다. 출처는 조선왕조실록.
-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이 재임하던 시기에 일지매가 도적질을 하고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말로 설치고 다닌 도적은 황해도의 장길산. 황석영의 동명 소설도 있다. 경신대기근에 맞먹는 을병대기근(1695년)도 있었다.
- 성종과 함께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조선 왕인데 함께 민담에서는 암행을 나가서 백성의 고충을 해결해주는 꽤 멋진 임금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많다. 서울 지역에서는 "숙종 시대는 태평성대였다"는 구비 설화가 상당히 많이 채록되어 있다. 이런 걸 보면 아무래도 백성들 사이의 이미지는 상당히 괜찮았던 모양이다. 백성들 입장에서야 신하들이 죽든 말든 왕비가 바뀌건 말건 기본적으로 별로 상관없는 문제이긴 하다. 하도 치세가 길기도 했고, 지역마다 이미지가 달랐을 수 있다.
- 조선이 고구려보다 큰 나라라고 믿었던 것 같다. [73] 숙종실록 38권에 보면 수성에 능했던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쳤거늘 더 큰 땅을 가진 조선이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했다고 통탄하는 내용[74][75]
- 박시백은 만화 조선 왕조 실록에서 꽤 박한 평가를 내렸다. 전체적으로 역량은 인정하면서도 결과에 대해선 비판의 강도가 높은 식. 군강신약을 이루었다는 점과 민생, 군역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썼다는 것을 비중있게 다루었다.
- 그러한 평가의 근거는 크게 2가지인데, 하나는 그의 치세를 대표하는 '환국'에 일관성이 없고 기준도 모호하였기에 정권 교체를 통한 개혁에 쓰여야 할 에너지를 정권 교체와 그 뒷수습에 소모했다는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바뀌는가 하면, 정치 세력과 명분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흑백 논리에 빠지는 등. 심지어 모 상소는 '권력을 잡게 한 초기에는 무릎에라도 앉힐 듯 하시다가, 배척할 적엔 연못에 밀어버리듯 하십니다'라는 비난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이러한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는 왕 아래에서 신하들은 그저 몸을 수그린 채 눈치만 살필 수 밖에 없었고, 행여나 눈 밖에 나 숙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제대로 된 비판 정신을 버렸으며[76] 생존을 위해 상대 붕당들에겐 더욱 가혹해져 허울뿐인 화합이 되고 말았다.
- 또 하나는 그렇게 거듭된 환국과 숙청으로 근래 볼 수 없었던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면서도 한게 딱히 없다는 것이다. 문제를 인식하고 개혁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 핵심에 다가서면 발을 빼기 일쑤였고(양반층 군포 징수에 일관되게 반대), 기득권층의 희생을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 모범을 보이는 일에도 인색하였다[77] 는 주장이다. 문제는 후자의 경우엔 그냥 저자의 조사가 부족해서 오류낸 거다. 숙종 대에는 궁방으로 하여금 해당 땅 주인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절수지를 획득하도록 한 금가 매토제와 절수지의 총량을 제한하는 을해정식이 제정, 시행되어 궁방전의 확대를 제한했다.[78] 양역변통이 사대부의 눈치보다 지지부진했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역시 틀렸다. 오히려 양영변통절목같은 절목들이 마련되어 영조 대 균역법의 기틀을 닦았다.[79]
- 유일하게 남은 여동생 명안공주(明安公主)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80] 돌아가신 아바 마마 대신해서 결혼식을 성대히 챙겨준 것도 오빠 숙종이고, 그 이후로도 사신을 통해 예쁜 수입산 비단이 들어오면 이걸 곧잘 선물로 챙겨주었다고 한다. 또 공주가 자기 땅을 갖고 싶다고 하니 마침 원을 그리면서 하늘을 날던 솔개를 가리키며 '쟤가 그리는 원 아래 땅 다 네 꺼 해라'고 했다는 야사에서는 숙종의 남다른 동생 사랑 스케일을 엿볼 수 있다.[81] 그러나 불행하게도 명안공주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했고, 결국 23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을 상심케 했다. 이때 실록의 기록을 보면 숙종은 아직 염습도 못 해서 문상객 받을 준비가 안 된 공주의 집에 만사 다 제치고 달려가 한참 통곡했다고 하며, 너무 슬퍼서 고기 반찬도 못 먹겠다는 걸 궁인과 신료들이 겨우 뜯어말리기도 했다[82] . 이후 먼저 간 여동생에게 못해줬던 걸 매제에게라도 대신 베풀고 싶었던 것인지, 숙종은 홀로 남겨진 매제 오태주(吳泰周)를 곁에 두고 매우 아꼈다.[83] 오태주가 49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숙종은 그에게 직접 지은 글을 내리며 애도를 표했다. 지금도 명안공주 부부 묘에 가면 제문비에 새겨진 숙종의 글들[84] 을 볼 수 있다.
-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아서 온갖 몸에 좋다는 약재들을 찾아 먹고는 했다. 우황 문서 참조.
- 한국에서는 여러 모로 영국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닮은 점이 많다고 평가받는 왕이다. 비정하고 다혈질스러운 성격, 절대왕권을 바탕으로 한 통치, 변덕스런 숙청, 여성 편력과 이로 인한 자손들의 편애와 냉정함, 후계 다툼 등 군주로 보면 명군이나 가정사나 개인의 인격 등을 보면 긍정적인 측면은 없고 가장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숙종은 백제의 동성왕과도 닮은 점이 있다. 재미있게도 두 왕의 후계자들의 행보나 성격에도 닮은 점이 있어서 경종은 메리 1세의 위치에, 영조는 엘리자베스 1세의 위치에 매치된다.
10.1. 고양이와 동물들을 사랑한 임금
고양이를 정성스럽게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金孫)이라 이름붙여 손수 먹이를 먹이며 정사를 볼 때도 곁에 두고 쓰다듬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이는 네이버캐스트와 다음 웹툰 <탐묘인간>(85화 ~ 89화)[85] 역사 웹툰,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왕의 위엄,숙종의 성격을 생각하면 놀라운 내용이 많다...훗날 금손은 숙종이 훙서한 직후 먹이도 안 먹고 울고 다니다가 시름시름 앓더니 죽어서, 왕대비(인원왕후)의 명으로 명릉(숙종의 릉) 옆에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양이집사’-숙종의-퍼스트캣-‘김손’-스토리
이 기록은 실록에는[86] 없는데 국정에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이라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을 듯.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익이 숙종 때의 관료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숙종이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 고양이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고양이 이야기는 다른 기록으로도 교차검증이 되며, 그 가운데는 금손의 어미인 금덕(金德)을 위해 장례식(!)을 치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위한 시까지 지었다고 한다. 빼도박도 못할 역대 한국사 최고위 애묘가가 맞을 것이다.(열성어제 수록.) 이 금덕 / 금손의 품종은 불명이나, 이름에 '금(金)'자가 들어간 것을 볼 때 '한국 고양이' 중 이른바 '치즈 태비'로 불리는 황색 종으로 추측하는 주장이 있다.대저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한다.’는 말은 옛적부터 있지만, 고양이란 성질이 매우 사나운 것이므로, 비록 여러 해를 길들여 친하게 만들었다 해도, 하루아침만 제 비위에 틀리면 갑자기 주인도 아는 체하지 않고 가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묘 같은 사실은 도화견[87]
에 비하면 더욱 이상하다.-
이익, 성호사설, 제4권 만물문(萬物門) 중 금묘(金猫)
또한 조선 후기의 문인 김시민(金時敏[88] , 1681년 ~ 1747년)의 문집인 동포집(東圃集)에도 금손이의 죽음을 추모한 시인 금묘가(金猫歌)가 전하고 있다.[89] 동포집을 보면 금묘가는 동포집 2권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포집 2권에는 김시민이 1715년에서 1721년 사이에 지은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이 시기는 숙종이 승하한 1720년과 딱 겹치는 시기이기 때문에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다는 사실은 제법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금묘만 가까이서 선왕 모시고 밥 먹었네
낮에는 조용히 궁궐 섬돌에서 고양이 세수하고
차가운 밤에는 몸을 말고 용상 곁에서 잠들었네
비빈들도 감히 고양이를 가까이하여 길들이지 못하는데
임금님 손으로 어루만져 주시며 고양이만 사랑하시었네
-
김시민, 동포집 중 금묘가(金猫歌)
실록을 보면 유독 고양이가 궁궐에서 깽판을 치는 기록이 숙종실록 이후 영조실록에까지 많이 나타난다. 궁궐에 고양이가 많기는 많았던 모양. 특히 영조는 팔에 통증이 오자 어의로부터 "고양이 생가죽이 팔 통증에 좋다고 하니까 시험해 보시옵소서"라는 처방을 들었는데 "내가 옛날부터 여러 고양이가 궁궐을 싸돌아다니는 걸 봐서 그런지 차마 못 죽이겠다"고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조의 발언으로 미뤄보면 숙종이 고양이를 길렀거나 기르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애묘가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더불어 단순히 고양이만 사랑했던 것은 아니고 동물들을 모두 좋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의 행장(行狀)에는 어릴 적 기르던 참새 새끼가 죽자 묻어주도록 했다는 말이 있는데 어릴 때 부터 참새를 기르고 이가 죽자 사람처럼 묻어주는 등의 행동을 했다. 현대의 관점에서도 동물이 사람이냐며 동물을 묻거나 장례를 지내는 것을 좋지 않게 보는 이가 많고 당 대에는 충정심이 깊은 개 조차도 묻는 일이 드물었다는 것을 보면, 이례적인 일이다. 행장에는 내국(內局·내의원)에서 우유를 취하는데 송아지의 슬픈 울음소리를 듣고 불쌍히 여겨 우유를 들지 않았다는 일화도 실려 있다. 송아지의 우유를 뺏을 수 없다며 자신이 먹지 않은 것은데, 이를 보면 궐 안에서 소도 키운 듯 하다.[90]
박용만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토끼를 길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당대 중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은 사신으로 가서 얻은 신기한 물건이나 동물을 임금에게 바치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 사신이 숙종에게 토끼를 바쳤다. 숙종은 토끼를 예뻐하며 추운 날씨에 혹시 탈이 날까 염려하여 따뜻한 밀실에 두었더니 며칠 뒤에 죽고 말았다. 추운 것을 좋아하고 따뜻한 것을 싫어하는 중국종 토끼의 성질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뒤 다시 토끼를 얻어 정원의 섬돌 사이를 마음껏 노닐게 하였더니 6년을 살고도 병들지 않았다고 한다. 숙종은 모든 생명에게 각각의 본성이 따로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는 자신의 무지를 탓하며 반성했다는 기록도 있다.#
애묘와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숙종실록을 보면 유난히 기형 고양이에 대한 기록도 자주 나온다. 각각 숙종 4년, 9년, 10년 기록에 나타나는데 눈이 4개였다거나 머리가 2개였다거나 머리는 하나인데 몸통이 2개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다. 기형 동물에 대한 기록은 이전 왕들의 실록에도 보이지만 대개 한 번 정도 기록되었을 뿐이고 숙종실록에는 그것도 고양이로 유난히 자주 나타난 편이다. 아마도 숙종이 고양이를 궐에 많이 두었기에 기형 고양이 목격도 높아졌고, 혹은 숙종에게 가깝게 느껴질려면 다른 동물보다 고양이가 기형인 것이 더욱 가깝게 느껴져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10.2. 지극한 자식 사랑
아들을 지극히 아끼기도 했다. 여섯 아들 중 겨우 살아서 성인이 된 세 아들 가운데 6남인 연령군 이훤을 가장 총애했다. 연령군이 5세 때 모친인 명빈 박씨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찾았다. 숙종은 이 어린 아들을 애처로워하며 조정 신료들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 어느 아들들보다 연령군을 아껴서, 원래 6세 이후에 봉군(奉君)하는 예법을 무시하고 5살 때 군호를 내렸고 7세의 나이엔 종친부 당상관의 작위까지 내렸다.使人長智莫如學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를 기르게 하려면 배움만 한 것이 없으니若玉求文必待琢
옥의 문채를 찾기 위해서는 절차탁마가 반드시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라經書奧旨于誰問
경서의 깊은 뜻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는가?師傅宜親不厭數
마땅히 사부를 가까이하여 자주 뵙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야 한다네
게다가 1708년 연령군이 출가할 땐 직접 제택(第宅)[92] 구입에 수만냥을 들이려고했다. 이에 부제학 조태구 등이 1년전 연잉군의 제택을 마련한 돈이 수천냥이라 지적하며 반대하자 숙종은 할 수 없이 선조의 적녀(嫡女)[93] 인 정명공주의 제택을 구입하여 하사하는데 그것도 연잉군이 구입하려 하는 것을 금한 것이었다[94] 더구나 이후 그 제택을 복구하는데 들인 비용도 중인 4가구에 해당하는 비용이었다고.
이후 연령군이 21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죽자 숙종은 오열을 하며 친히 제택(第宅)으로 찾아가려고 할 정도였으니, 가히 아들 영조의 딸 사랑에 견줄만 했다.
경종의 경우 완전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숙종이 심하게 갈구는 경우가 많았으며, 영조에 대해서는 똑똑하다 공부 잘한다 이런 칭찬이 아니라 유난히도 몸 튼튼해서 오래 살겠구나 하는 칭찬이 잦았다.[95]
헌데 정작 숙종을 본받아(?) 아들을 '''경종 이상으로''' 심하게 갈궈댄건 다름아닌 '''영조였다'''. 참으로 씁쓸한 부전자전. 게다가 숙종이 아들인 경종을 갈군 것은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갈군 것에 비하면 약과였다.
그러나 이렇듯 극진한 애정은 연령군에게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한 뒤에 바로 2번째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료들 앞에서도 매우 기뻐했다가, 나중에 그 아들이 100일을 갓 넘기고 죽었을 때에는 "내가 슬퍼서 마음을 진정할 수 없다" 라며 역시 신료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고 한다. 모후인 명성왕후가 언급한 것처럼 감정 기복이 매우 심하고 희로애락이 극단적인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11. 어진
일제강점기 당시 익선관본 어진이 원본 + 이모본 형태로 총 2점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관리 실수로 인한 화재로 소실된 줄 알았지만... '''사실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화재 당시 구출한 숙종으로 추정되는 어진 1본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절반이 훼손된 탓에 용모 파악은 불가능하며 오른쪽 표제가 불타버린 탓에 해당 어진이 원본인지 이모본인지 조차도 알 수 없다. 이 어진의 경우 훼손이 심한 탓에 보존처리만 마치고 수장고에 계속 보관되어 있었고 2019년 하반기에야 공개되었다.
아래는 국립고궁박물관이 해당 어진을 숙종어진으로 추정하게 된 결론의 근거이다.
열성 어진에서도 숙종의 간략하게 그려진 초상화를 볼 수 있다.관모 부분은 소실되었지만 곤룡포를 입었기 때문에 익선관을 착용한 어진의 형식임을 알 수 있다. 바닥에 깔린 화문석은 조선시대 어진 제작 연대의 지표가 되는 것으로 처음에는 태조와 세조의 어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화문석이 아닌 채전을 그렸다. 채전이 화문석으로 바뀌어 그려지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부터이다. 화문석의 용문양을 순조어진(1830년 도사)과 철종어진(1861년 도사)을 통해 분석해 보면 후대로 갈수록 용문양의 크기가 작아지면서 묘사, 채색이 정교해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와 비교해 보면 이 어진의 크고 거친 용문양은 순조어진보다 더 앞선 시기로 볼 수 있다. 화문석을 그려 넣은 순조 이전의 어진으로는 숙종, 영조, 정조 어진이 있으며 이 중 익선관본은 숙종과 영조의 어진이다. 곤룡포에 나타나는 양식은 18세기 초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 어진이 숙종의 어진으로 추정할 수 있다.
궁중서화Ⅱ_소장품도록 제14책, 2019년, 국립고궁박물관, 44쪽
12. 사극
12.1. 영화
12.2. 드라마
역대 숙종 중 가장 카리스마 있던 숙종을 꼽자면 단연 KBS 2TV 장희빈의 전광렬. 정말 카리스마 있고 불같은 성품이지만 실은 냉혹한 정치가였던 숙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나마 이 숙종이 역사의 숙종과 가장 비슷한 드라마 속 숙종이라 할 수 있다. 무예를 연마하며 칼을 휘두른다든지... 그러나 중반 이후부터는 기존 사극의 이미지로 되돌아갔다.
지진희가 연기한 드라마 동이에서는 시청자들이 깨방정 혹은 허당으로 부르며,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는 진중하고 고풍스러운 임금님이 아닌 유쾌하고 천진난만한 그렇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이른바 신세대 임금님으로 나왔다. (나는 이렇게 뛰어 본 적이 없다. 나는 담을 넘어본 적이 없다.) 이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왕이 뛰어다니거나 담 넘을 이유가 없으니까.
궁궐에서 빠져나와 암행하는게 취미 생활. 하지만 역적의 딸로 몰려 출궁당하게 된 동이를 끌어안고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임금 자리도 포기하겠다고 하는 장면에서는, 사랑하는 여자라도 왕권을 위해 이용하고 버렸던 실제 역사 속 숙종의 모습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했다.
드라마만 놓고 보면 괜찮은 주인공이지만, 노회한 정치인 송시열을 15살 때 귀양 크리 태우고 29살 때 사약을 내려 보내버린 역사 속의 냉혹한 카리스마 군주와는 거리가 멀다.[96] 일본판 성우는 이노우에 노리히로.
동이 다음으로 이병훈 pd의 사극이자 강한별이 연기한 드라마 마의(드라마)에서는 현종의 외동 아들로 극중에서 얼굴에 종기가 생겨 사투를 벌이고, 백광현의 외과술을 받고 무사히 목숨을 건졌다라고 나오지만 그게 전부다.
- 유아인 : 2013년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2013년 방영한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유아인이 캐스팅 되었다. 희빈 장씨 역은 김태희. 숙종 쪽이 연하라는 것을 반영한 것 같다. 특유의 목소리와 섬세한 연기에 시청자들의 호평이 줄을 잇고 있는 상태. 사실상 드라마를 떠받치는 기둥.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전의 냉철하고 정치적인 숙종의 모습은 사라지고 패악을 부리는 장옥정도 용인하는 등 갈수록 캐릭터가 붕괴하고 말았다. 일개 후궁이 대전에 난입하는데도 좋다고 지켜보는 꼴을 보면 혼군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듯. 훗날 유아인은 손자인 사도세자, 조상님격인 태종역을 맡기도 한다.
201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한 대중들 사이에서 숙종이 재조명 되기 시작했는데 하나는 애묘가의 모습이고, 하나는 그 엄청난 성질머리로 대표되는 불같은 성격과 냉철한 정치가의 모습이다. 때맞춰 숙종 시절의 드라마가 방영이 되는데 그게 바로 SBS의 대박.
대박에서의 숙종은 그 전에 묘사됐던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록상 기록된 모습과 가장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해당 배역을 맡은 최민수의 노력 덕분이다. 기사
13. 관련 문서
- 결송유취보
- 다섯발톱 용문 청화백자
- 단종대왕실록부록찬집청의궤
- 백자 달항아리
- 백자 철화포도원숭이문 항아리
- 병신처분
- 상평통보
- 수교집록
- 숙종실록
- 숙종실록보궐정오
- 신전자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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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록통고
- 진법언해
- 탐라지도 및 지도병서
- 행군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