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서원태는 1889년 3월 15일 함경남도 원산시 남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한국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장석(金章錫), 김상익(金相翊), 조병철(趙秉喆), 이용구(李容九)[1] , 이용훤(李容暄)과 함께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했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조선인의 불만 폭로, 미국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 등이었다. 또 그들은 1920년 9월 23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9월 23일 저녁, 원산 남산교 아래에서 산보하던 최종빈(崔鍾濱), 김연희(金演熙) 등이 한양가(漢陽歌)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인근의 최종현(崔鍾炫), 이용구 등이 합세했고, 원산청년회관에 있던 김장석, 김상익은 남산교의 함성을 듣고 동지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여기에 보광학교 및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0명이 가세하면서, 시위는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 동양척식주식회사 원산지점, 원산우체국, 파출소 등 일제기관을 공격했으며, 평소 조선인을 무시하고 학대하던 일본인의 가옥과 상점에 돌을 던졌다.
이때 서원태는 송일봉, 최문환 등과 함께 북촌동 경찰관파출소 부근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이용구 등이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을 파괴하라고 외치자, 그는 군중을 이끌고 경찰관 파출소와 일본인 상점에 돌을 던졌다. 이에 일본 경찰이 투입되어 총칼로 탄압해 현장에서 2명이 죽고 주동자 50명이 체포되어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 취조받았다.
서원태 역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22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항소했지만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함흥형무소 원산분감(元山分監)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의 경력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서원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