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구(독립운동가)

 

성명
이용구(李容九)
생몰
1902년 8월 16일 ~ 1977년 8월 15일
출생지
서울특별시
사망지
서울특별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용구와 동명이인이다.

2. 생애


이용구는 1902년 8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원산으로 이주했고, 1920년 8월 미국 국회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해 3월 1일 원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가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던 김장석(金章錫)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했다. 두 사람은 김상익(金相翊), 조병철(趙秉喆), 김병륜(金秉綸), 이용훤(李容暄), 서원태 등과 함께 함께 미국 의원단에게 보낼 환영문을 작성했다. 그 내용은 미국의원단 환영, 일제의 가혹한 통치와 조선인의 불만 폭로, 미국의원단의 현명한 판단과 협조 등이었다.
이용구 등은 만세 시위 일자를 9월 23일로 정했지만, 일제 경찰의 감시가 삼엄해 인근 주민들에게 사전 연락을 제대로 취하지 못했다. 결국 9월 23일에 만세시위를 벌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한 그는 그날 밤 동지들과 함께 남산교(南山橋) 부근을 거닐었다. 이때 최종빈이 우리끼리라도 만세를 부르자며 즉석에서 김연희(金演熙)와 함께 한양가(漢陽歌)를 부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인근의 최종현(崔鍾炫), 이용구 등이 합세했고, 원산 청년회관에서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들은 김장석, 김상익 등이 급히 보광학교 및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0명을 동원해 가세했다.
이리하여 갑작스럽게 시위를 벌이게 된 이용구는 군중을 이끌고 북촌동 경찰관파출소와 일본인 상점.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 동양척식회사 원산지점, 우체국 등을 파괴했다. 이에 원산경찰서 경찰들이 출동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면서 2명이 죽었고, 이용구를 비롯한 주동자 50명은 체포되어 원산경찰서에서 58일간 취조받았다. 그 후 그는 경성복심법원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소 후에는 원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 후 서울로 이주했고, 1977년 8월 1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용구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