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성동준은 1912년 8월 9일 전라남도 순천군 소안면 행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4년 일본구주제대(日本九州帝大) 법과를 졸업하고 학병으로 동원되어 중국 쑤저우로 보내져 일본군 60사단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훈련받는 동안 의거를 계획하고 다수의 동지를 포섭하고자 했다. 그러던 1945년 2월, 그는 일요일 외출시간을 이용해 김영남(金暎男), 정병훈(丁炳勳), 유재영(柳在榮), 최용덕(崔龍德), 박영, 전풍옥(全風玉) 등의 동지와 함께 기관총 1정, 소총 7정, 대검, 실탄 300발, 방독면 9개등의 무기와 비서문서를 휴대하고 최전선 시찰을 가장하고 탈출에 성공, 충칭으로 향했다. 이때 일본군은 잔류 학병 전원을 동원하여 색출에 나섰지만 끝내 실패하자 색출 책임자를 총살형에 처했다.
성동준은 동지들과 함께 충칭으로 향하던 중 태호에서 활동하던 중국군 유격대에 합류하여 활동했다. 그러나 유격대 하대장이 일군에게 매수되어 7명의 학병을 일본군에게 인도하고 유격대의 무기까지 매각하여 사복을 채우려 한다는 걸 알게 되자 앙군 제 3전구특파원 왕참모 등 7명의 중국군 장교에게 해당 사실을 직고해 하대장과 그에 빌붙은 인사들을 사살하고 왕참모를 책임자로 삼은 부대에 편성되었다. 1945년 3월, 그는 유격대와 함께 승산의 일본군 분견대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고 70여 정의 무기를 노획하고 중국인 70여 명을 새로 가입시켰다. 또 촉산의 친일 중국보안대를 습격해 20명을 생포하고 소총 20정을 빼앗았으며, 일본군 점령하에 있던 경덕을 습격해 소총 70정을 노획했다.
이후 효풍에 주둔하고 있던 충의구국군 별동대와 합세해 700명의 병력을 확보했으며, 충의구국군사령부에 도착한 뒤 미국 고문관에게 일본군 문서와 적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 사건은 중국 언론인 전선일보(戰線日報)에 대서특필되었고, 그는 이 공적으로 구국군 정치부 대일선전과에서 박영과 함께 소교대우관(少校對遇官)으로 임명되어 구국군정치부 대일선전과에서 선전활동을 전개되었다. 이후 1945년 4월에 김영남과 함께 전방 활동을 자원하여 석강성 천태산맥 일대를 공격하기 위해 부대가 출동할 때 종군하여 동강 반안전투에 참전했다. 1945년 6월 부대와 함께 천태산을 점거하고 있던 중 일본군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격전 끝에 격퇴시켰다.
이후에도 유격전에 참전하던 그는 8.15 광복 후 상하이로 가서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의 박용철(朴容喆), 구익균 등과 함께 귀환 교포들의 귀국 편의를 돕다가 광복군의 일원으로서 국내에 귀국했다. 이후 순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0년 10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성동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8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