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골매(밴드)

 

[image]

'''하늘을 난 하드록 밴드'''

Mnet Legend 100 - 록&밴드:Legend 송골매

1980년대 초반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80년대 후반까지 가요계를 이끈 전설적인 록밴드다.
1. 송골매 (1979~1990)
1.1. 역대 라인업
2. 송골매 디럭스 (2010~)


1. 송골매 (1979~1990)


당대 최고의 대학교 캠퍼스 밴드였던 활주로[1] 출신의 배철수를 중심으로 1979년 결성되었고 활주로 출신인 배철수, 지덕엽이 알고 지내던 베이시스트 이응수와 키보드의 이봉환을 영입하여 시작되었다.[2]
대표곡으로, '모두 다 사랑하리', '세상만사','하늘나라 우리 님', '모여라' 등이 유명하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반 한국의 청년문화는 1975년 대마초 파동 이후 가요 대탄압으로 인해 전부 싹이 잘려 나갔다. 그래서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팝송을 들으며 해갈했고, 아마추어리즘에 입각한 그룹사운드가 성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산울림, 송골매 같은 밴드들은 한국식 록음악을 선보였고, 이들은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 대접을 받았다. 즉, 한국 록 음악의 암흑기 때를 대표하는 인기 밴드였다.
1979년에 발매한 송골매 1집은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 못한 송골매는 배철수, 이봉환을 제외하고 탈퇴를 하게 되고 배철수는 평소에 알고지내던 블랙 테트라[3] 출신의 구창모를 영입하면서 기타리스트 김정선[4]도 함께 영입하게 된다.
이후 1981년에 발표한 송골매의 전성기인 2집에는 최고의 라인업이 형성이 되는데 기타와 보컬의 배철수, 리드보컬 구창모, 기타의 김정선, 베이스의 김상복, 드럼의 오승동, 키보드의 이봉환 으로 발표한 2집은 송골매의 침체기를 한번에 뒤집어 버린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5], 이 곡은 전체적으로 1970년대 미국에서 인기 있었던 디스코에 Funk rock 적인 부분을 결합한 음악이다. 처음의 기타 리프는 1971년 빌보드 1위를 차지했던 Isaac Hayes의 "Theme From Shaft" [6]를 연상시킨다. 이때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하는 이들이 극히 적었음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Funk를 기반으로 한 디스코-락 넘버를 히트한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본다. 1982년 당시 한국에서 흑인 음악을 소개하고 히트시키던 아티스트는 송골매와 조용필밖에 없다. 사랑과 평화는 1979년의 잠깐 히트로 끝났고, 조용필은 4집에서 자존심, 못찾겠다 꾀꼬리 등의 흑인 음악 스타일의 곡들을 히트시킨 바 있다.
1983년에 발표한 송골매 3집은 전작에서의 인기를 또 한번 실감하듯 '처음 본 순간''아가에게' 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초반 송골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송골매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줄줄이 개봉되었을 정도였다. 1982년작 "갈채", 송골매의 모두 다 사랑하리(1983)
그러다가 1984년 당시 기획자로부터 솔로 가수 제의를 받은 구창모가 송골매에서 탈퇴하면서 4집활동은 아예 못하게 되어버리게 되지만 많은 우려와 달리 송골매의 리드보컬은 배철수가 맡게 된다. 4집에서 히트곡이었던 "난 정말 모르겠네"는 당시 영미권에서 유행하던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이다. 듀란 듀란이나 컬처 클럽 등의 뉴웨이브/신스팝 사운드가 아니라, Go Go's나 Men At Work와 같은 뉴웨이브/Pop rock 계열의 스타일이다. 1982~1983년에 영미권에서 인기가 많았던 시운드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신스팝 계열과 Pop rock 계열의 뉴웨이브가 공존하던 과도기적 시대였다. 실제로 기타 리프와 곡 분위기가 초기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호주 뉴웨이브 밴드 "Men At Work"와 흡사하며, Go Go's의 밝은 뉴웨이브 분위기도 든다.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락 밴드 "Huey Lewis & The News"의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1984년 당시 기준으로 꽤 트렌디한 뉴웨이브 곡이다.
1985년 에 발표한 송골매 5집은 라원주, 이응수의 지원을 받아 '하늘나라 우리님'이 「가요톱10」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송골매의 사실상 마지막 전성기에 깃발을 꽂았다.
1986년에 발표한 송골매 6집은 특별한 히트곡이 없었는데 1986년 그 해에만 백두산, 시나위, 부활이 데뷔를 한 해이고 헤비메탈 의 르네상스였던 시기이기에 큰 빛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부활(밴드) 의 전신인 '디 엔드'에서부터 베이스를 맡았던 베이스의 교과서이자 밴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에서 활동하게 되는 '이태윤이 이 시기에 송골매에 합류하게 된다.
1990년에 발표한 송골매의 마지막 앨범인 9집에서는 '모여라'라는 히트곡을 냈다. Huey Lewis & The News 풍의 블루스 록과 뉴웨이브를 기반으로 한 팝 록 사운드이다. 중간의 기타 솔로는 1980년대 중후반의 글램 메탈을 연상시킨다.
이후 송골매의 프론트맨이었던 배철수가 뮤지션으로서의 행보를 접으면서 밴드는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게 된다.
여담으로, 1983년 젊음의 행진에서 무대를 펼칠 때 배철수 인생의 마지막 무대가 될 뻔했던 위험한 방송사고가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이 항목 참고.

1.1. 역대 라인업


  • 1집 - 배철수, 이봉환, 이응수, 지덕엽
  • 2집 ~ 4집 - 구창모(리드보컬),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5집 ~ 6집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김상복(베이스), 오승동(드럼)
  • 7집 ~ 9집 - 배철수(기타/보컬), 김정선(기타), 이봉환(키보드), 이종욱(키보드), 이태윤(베이스), 이건태(드럼)

2. 송골매 디럭스 (2010~)


2010년 키보디스트였던 이봉환이 보컬이 되어 '송골매 디럭스'라는 이름으로 재결성되었지만 반응은 '배철수랑 구창모 없이 무슨 송골매냐'는 분위기. 게다가 팬카페와 관련해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 다음은 현재 카페를 양도한 카페지기 심연(深緣)의 마지막 메일 전문.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며 카페를 양도하려 맘먹었고 진행중에 있습니다. 헌데 내막을 모르는 회원들이 대부분이기에 대강이라도 해명을 해야 제가 떠난 이후에 구구한 억측들이 생기지 않을것 같아 작별인사겸 말씀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송골매와 블루버드간의 결별로 인해 불똥이 저한테 튄거지요.
카페는 작년5월 송골매의 재기를 준비하면서 필요를 느껴 이봉환님이 지인에게 부탁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운영이 되지않아 당시 매니지먼트를 맡고있던 블루버드의 김용환씨가 양도받았는데, 라이브클럽 운영과 공연기획등으로 카페운영에 전념을 할수가 없었던 용환씨가 블루버드에 라이브공연을 보러다녀서 친분이 있었던 저를 추천했고 이봉환님이 3,4개월간을 매달리면서 간곡한 부탁을 하셔서 끝까지 거절치 못하고 수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카페지기 양도직후 송골매와 블루버드 간에 문제가 생겨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로 카페지기 수락을 막았더라면 제가 쓸데없는 일에 체력을 소모하진 않았을거 아닙니까? 그 이후 리더 이봉환님은 태도가 180도 바뀌었고 급기야는 얼마전 자신의 게시글들을 모두 삭제한후 탈퇴하였습니다. 헌데 지금에 와서 본인이 만든 카페이니 자신들의 측근에게 카페를 양도하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카페란 팬들의 공간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팬들에 의해 굴러가는 곳입니다. 제가 블루버드쪽과 가까운 사이라 본인들의 편에서서 일을 하지 않을거란 판단이었겠지요.그런 사람이었다면 사건후 바로 물러나거나 폐쇄했을겁니다. 앞뒤분간 못하는 사람 아닙니다. 맡아만 준다면 어떻게 운영하든 무슨짓을 하든 일체 관여안하겠다고 하시더니 필요에 따라 말을 바꾸시는 그 모습 너무 비겁하단 생각 안드십니까?
이유없이 회원을 강퇴시켜 그랬다구요? 그당시 제가 카페지기도 아니었지만 어떤 운영자가 아무 이유없이 회원을 강퇴처리 하겠습니까? 왜 그랬는지 아시는분들은 아실겁니다. 본인들을 위해 구설수를 막아보려 그랬다는 생각은 못하시는지... 차라리 상황을 얘기하며 정중히 사과하고 부탁을 했더라면 일이 이지경이 되지는 않았을겁니다. 한때는 송골매의 진정한 팬이었고 잘되기를 바라던 사람이었는데 비수를 꽂다니요... 카페지기가 월급받는 자리던가요? 제돈 써가며 시간 투자해가며 좋은소리 못듣는 그런자리입니다.
감정대로 하자면 카페를 폐쇄하고 싶었으나 양도하기로 결심했던건 순수하게 송골매를 좋아해서 가입하신 회원님들을 생각해서였습니다. 송골매라는 타이틀을 가지신 분들이 팬카페에 집착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움을 넘어 측은지심도 생깁니다. 음반이 나오면 회원들 상대로 판매도 해야하고 공연 땐 티켓도 팔아야 하니 필요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어디까지나 팬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을 때 빛이 나는겁니다. 정략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팬카페는 언젠가는 곪아 터집니다.
부디 송골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은 더이상 없길 바라며 그 위상에 걸맞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다가서기 바랍니다. 더이상 상처받는 팬들이 없길 바랍니다. 이후에 저에대한 억측이나 모함의 얘기들, 제 귀에 들려오지 않길 부탁드립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답니다. 이 정도는 정말 최소한의 감정표현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자료들 모두 없어졌는데 회비잔액(\111,000)은 이봉환님 통장으로 송금했습니다. 회비까지 횡령했다는 소리 나올까 겁이 납니다. 앞으로 본인들과 뜻을 같이하는 측근들에 의해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 가시겠지요. 아마도 그동안 저한테 반기를 들었던 분들이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됩니다... 그런식의 처세술로는 큰그릇이 될 수 없답니다.
그동안 마음으로 힘을 주셨던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메일 안에 나오는 라이브 클럽 '블루버드'는 송골매 디럭스가 재기하는데 큰 도움을 준 라이브 카페로 송골매 디럭스의 공연을 여러번 주도한 적이 있다. 여러모로 예전의 송골매의 이름은커녕 악명만 남기지 않아도 좋을 지경.


[1] 한국항공대학교 출신의 밴드 http://bandrunway.com/[2] 이응수는 원래 항공대 재학생이었고 이봉환은 항공대 출신은 아니었지만(경희대 출신) 배철수와는 고교 동기로 오랜 친분이 있었다.[3] 홍익대학교 출신의 밴드[4] 김정선은 블랙 테트라에서 활동했지만 홍익대 출신은 아니었다. 최종 학력은 단국대 중퇴.[5]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리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곡이다. 이 곡으로 1982년 가요계를 석권했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6] 당시 엄청난 블록버스터 영화이자 흑인 주연으로 흥행을 거둔 첫 번째 영화였던 "Shaft"의 주제곡이었다. 얼마나 이 당시 임팩트가 컸으면 이 영화 이후 흑인 주연 영화가 대폭 늘었고 노래 자체는 1990년 심슨 가족에서도 패러디되었다. 리사와 바트가 카라오케에서 "Theme From Shaft"를 부른다. Theme From Shaft에서도 첫 부분에서 특유의 기타 리프를 쓴다. 그 곡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펑키한 디스코 넘버로, 1978년~1979년 즈음의 디스코 곡들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