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기식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기식은 1878년 9월 25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송천리에서 송순호(宋淳昊)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흥락(金興洛)과 이만도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된 후 스승 이만도가 단식 끝에 순절하자, 그는 1911년 식음을 전폐했다. 그러자 조부가 수치를 견디고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장부(丈夫)의 도리라며 만류헀고, 송기식은 이 말에 따라 단식을 중단한 뒤 인재를 배양하여 광복을 이루기 위해 가산을 털어 봉양의숙(鳳陽義塾)을 중축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유교 경전 뿐만 아니라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 찰스 다윈의 진화론, 벤자민 프랭클린의 전기에 관한 학설 등 서양 학문까지 두루 가르쳤다.
1914년 김흥락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선배 이상룡으로부터 만주로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만주로 향했지만 부친의 병환 소식을 듣고 돌아갔다. 이후 1919년 3월 전국에서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자, 그는 송홍식·유후직·문소원(文召源)·권중호(權重浩)·이종록(李鍾祿)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진행시켰다. 이윽고 3월 18일 오후 6시경, 그는 백여 명의 군중과 함께 읍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고, 이튿날 오전 1시경에는 3천여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군청·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으로 몰려가서 애국지사의 석방을 요구하며 투석전을 벌이다가 일경의 발포로 말미암아 부득이 해산하였다.
다음 장날인 23일에는 더욱 격렬한 제2차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었는데, 이날 오후 8시경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읍내 이곳 저곳을 시위행진하고 있을 때 일본 군경이 공포를 발사하며 시위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시위군중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경찰서·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을 포위하고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그러자 경찰은 무차별 사격을 가해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켰고, 군중은 해산했다. 이후 일본 헌병대와 경찰은 주동자 검거를 착수했고, 이때 송기식도 체포되었다. 그 후 그는 1919년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중에서 "이천만의 만세 소리 우레 치듯 울려 퍼지니(二千萬口發雷聲)/형체 없는 철옹성을 만들어 냈다네(團得無形鐵瓮城)…"라는 한시를 읊으며 3‧1운동이 막을 수 없는 독립의 거대한 물결임을 알리려 했다.
1920년경 출옥한 그는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도 넷째 동생 봉산(鳳山) 송연식(宋淵植)과 함께 봉양의숙을 운영하다가 1949년 3월 22일 안동군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기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