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자크 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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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사상가, 교육학자, 소설가, 작곡가, 철학자.
2. 상세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통해 훗날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계약론》을 통해 나타낸 그의 민권사상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민권사상은 자유·평등·박애'라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로 이어져 로베스피에르 등 혁명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로베스피에르는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루소와 카토,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고,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한다. 사실 로베스피에르 뿐만 아니라 괴테, 마르크스, 실러, 칸트, 톨스토이, 프뢰벨 등에게 이래저래 영향을 주었다.
중요도가 높은 저서를 꽤 집필했는데, 《에밀#s-6》은 19세기 교육학을 거쳐 현대 교육학의 체계를 만들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교육론 서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소설 형식을 띤 엄연한 문학 작품이다. 연애소설 《신 엘로이즈》는 19세기 낭만주의의 선구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밖에 애인 사이에 생긴 5명의 아이를 차례차례 버렸다고 고백한 《고백록》이 있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신 엘로이즈》의 영향을 받았다.
이마누엘 칸트는 매일 3시 30분이 되면 산책을 해서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딱 두 번 산책을 빼먹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중 한 번이 루소의 저서 《에밀》을 읽다가 놓친 것. 그리고 또 한 번은 프랑스 혁명을 보도한 신문을 읽다가 빼먹었은 것이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루소의 영향을 받아 당시 귀족 여성들이 애들을 팽겨치고 유모에게만 맡기는 것에 반대했다. 실제 루소는 모성애의 개념과 모유 수유를 매우 중시해 유모의 범람을 개탄했다.
성선설을 주장해 윤리학적 업적을 남겼다. 그래서 윤리 시간에 순자의 성악설을 토머스 홉스, 고자의 성무선악설은 존 로크에 비견하듯이. 맹자의 성선설과 루소의 철학을 비견한다. 다만 루소철학과 맹자의 성선설은 성선만 같고, 이에 대한 '''관점과 결론은 상이'''하니 주의하자.
"선거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씩 투표할 때만 주인과 자유인이 되고 선거만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이다."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직접 민주주의 신봉자였기 때문에 간접 민주주의적 성격을 띠는 선거를 불만족스러워했다. 헌법의 제정, 즉 제헌은 보통 시에예스(Emmanuel Joseph Sieyès)의 관점을 많이 따르는데, 시에예스가 제헌절차에 있어 간접제헌을 주장하면서, 직접제헌을 주장한 루소와 충돌하기도 하였다.
어록을 보면, 그가 자신의 심리에 대한 탐구를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1712년 루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가난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출산후유증으로 죽었는데, 아내를 사랑했던 루소의 아버지는 어린 루소를 잡고 죽은 아내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가 참회록에 나온다. 자신으로 인해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격에 심한 균열을 만들었다.
11살 때인 1722년 아버지가 불화를 겪게 되어 제네바 시를 떠나게 되자 그는 외삼촌에게 맡겨졌다. 외삼촌은 한 목사에게 그를 맡겼으나 그 집에서 오해를 받게 되어 쫓겨났게 되었고, 1724년 제네바에서 재판소 서기 밑에서 필사 견습공을 하거나 조각가 아벨 뒤코맹의 집에서 도제 일을 하게 된다. 그러다 1726년 아버지가 재혼하게 되었는데 돌아오지 않았고 루소는 아버지에게 버림받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728년 제네바 시의 법칙을 어긴 것을 계기로[1] 방랑의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3.2. 방랑 생활
제네바에서 나오게 된 이후 루소는 토리노로 가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고향에서 쫓겨나면서 신부가 '개종자들을 도와주는 마음씨 좋은 귀족 부인이 있다. 가서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소개장을 써주겠다'고 했고, 그래서 그는 여기서 프랑수아즈-루이즈 드 바랑 부인을 만나게 되어 그녀의 집사로 일하면서 공부를 하는 등 보호를 받게 된다. 당시 루소는 16세였고 남작부인은 29세였다. 루소는 부인을 '엄마'라고 부르고 부인은 그를 '꼬마'라고 불렀다. 루소는 당시 잘생긴 미소년이었다. 반대로 부인은 책을 많이 가지고 있어 루소가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부인은 정략결혼 때문에 남편과 별거중이었고, 자신의 재산으로 루소 외에도 여러 개종자들을 도와주면서 가톨릭 신도로서 살아가고 있었다.그녀가 흘깃 쳐다보는 순간 나의 놀라움은 참으로 컸다. 나는 심각한 얼굴의 나이든 신자를 상상하고 있었다. 퐁베르 신부가 말한 그 친절한 부인이란 내가 상상하기에 그 이상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는 우아함이 넘치는 얼굴, 상냥하면서 파랗고 아름다운 눈,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얼굴 빛, 그리고 황홀하게 드러나는 가슴의 윤곽을 목격하였다. 나, 젊은 개종자는 잽싼 눈길로 모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루소는 21세부터 26세까지 남작부인의 애인이었다. 남작부인이 먼저 접근해왔다고 한다. 루소는 저서 '고백'에서 '첫 관계에서 쾌락을 느꼈지만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 듯한 느낌도 받았다'고 했다. 루소가 26세였을 때 부인이 다른 남자 애인을 만들면서 루소를 쫓아냈다. 루소는 한동안 부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며 주위에서 맴돌다 결국 포기하고 파리로 나왔다.
3.3. 무명 음악사에서 유명 음악가로
그 이후에도 방랑을 지속하던 루소는 파리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계기는 음악이었다. 원래 신학공부를 하던 그는 신학공부에 뜻이 없음을 알게 되고 1730년부터 로잔에 있으면서 음악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1742년 새로운 악보 표기법을 발표[2] 하고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발표하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1749년 유명한 계몽사상가 드니 디드로와 교우하게 되면서 1751년 편찬한 '''《백과전서》'''에 음악 관련 부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또 1752년에는 그가 작사, 작곡한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 Le Devin du village》'''가 상영되었는데 이 작품은 그가 음악가로 명성을 떨치는데 한 몫 했다. 또한 그의 작품들 중에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도 하나 있는데, 대표적으로 개신교 찬송가에도 《주여 복을 비옵나니(구하노니)》, 《예수님은 누구신가》[3] 등의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고, 동요 주먹 쥐고 손을 펴서로 유명한 선율이 바로 그것이다. 《마을의 점쟁이》 8장에 나오는 판토마임에 나온다.
그는 음악가로서 성공하여 루이 15세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으나 밤새 고민한 루소는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알현을 포기하였다.
음악가로서의 루소는 프랑스에서 논쟁이 되던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에 뛰어들면서 음악평론가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부퐁 논쟁이란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벌어진 음악 논쟁이다. 이 논쟁은 조반니 페르골레시가 작곡한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가 계기가 되었는데, 이 작품은 형식을 강조하고 웅장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한 이전까지의 오페라와는 상당히 성격이 다른 작품이었다. 이를 두고 오페라를 비롯한 음악의 형식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여기서 루소와 장 필리프 라모가 서로의 대척점이 된 것. 당연히 루소는 라모의 주장을 매우 강하게 비판하였다. 링크 그 후 1768년에 쓴 《음악사전 Dictionnaire de musique》에서 루소는 바로크 음악을 '화성적으로 혼란스럽고, 전조와 불협화음이 가득하고, 노래는 굳어 있고 자연스럽지 못하며, 음정도 잡기 어렵고 움직임은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평하였다. 링크, 네이버캐스트
3.4. 계몽주의를 비판한 계몽주의자
루소의 사상가로서의 면모는 1750년 '''《학문 예술론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학문 예술론에서 "학문과 예술의 발전은 인간의 도덕적 발전에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면서 사상계에 등단하였다. 이후 1755년 '''《인간 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égalité parmi les hommes》'''을 통해 자연상태를 논하고 재산의 사유와 산업의 발전을 통해 불평등이 심해졌다고 주장했다. 이는 같은 해 발표한 '''《정치 경제론 De l’économie politique》'''을 통해서도 설명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루소의 주장은 당시 프랑스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백과전서파 철학자와 볼테르와 같은 계몽주의자와의 생각과는 달랐다. 즉 인간 이성의 진보를 믿고 있던 주류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인간 본성의 감성과 자연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결국 1758년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연극에 관한 편지 Lettre à d’Alembert》'''를 통해 그 동안 교우하던 디드로와 절연하게 되고 극한 대립을 겪게 된다. 또한 상당히 사교적이고 세련된 사람이었던 볼테르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극도로 귀족적이고 폐쇄적인 루소와 반대되는 면이 많았는데, 볼테르는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당신만큼 인간을 동물로 만드려 한 사람은 없었다'는 평을 내렸다.
1755년에 포르투갈에 일어난 대지진 때 볼테르, 칸트, 괴테 등 당대의 사상가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전지전능하면서도 한없이 선하지만 대지진을 막지는 않은 신"에 대한 회의감을 드러냈다.
3.5. 성공한 소설가, 혁명적 정치사상가, 이단의 교육가
1761년 루소는 서간체 소설 '''《신 엘로이즈 Nouvelle Héloïse》'''를 발표하면서 문학계에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 소설은 18세기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기존의 18세기 내내 이어져오던 고전주의 사조의 소설에서 벗어나 새로운 낭만주의 사조로 옮겨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1762년 그는 문제의 저작 둘을 내놓게 되는데 바로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과 '''《에밀 Émile》'''이다.
《사회계약론》에서 그는 '''인민주권설[4] ,'을 제창하게 되는데 "국가의 성립은 인민 전체의 사회 계약으로 성립하며 사회 구성원들의 의지 중 공공선을 지향하는 부분의 합, 즉 개별 의지들 중에서 공공선을 지향하는 부분의 교집합인 '''일반의지'''가 법질서 성립의 기반이 되는 것이며,(일반의지가 사회에 드러난 모습이 곧 법이라는 것이 루소의 주장이다.) 주권은 바로 이러한 인민 전체의 일반의지의 행사이며, 따라서 주권은 인민에게 있고 정부는 이를 집행할 따름이며, 그리하여 정부는 일반의지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급진적인 혁명사상으로 연결이 되어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에밀》에서 그는 사회적으로부터 고립된 인간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자연성을 잃지 않은 인간, 곧 자유로운 자연인을 길러내고자 하는 교육론을 펼쳤다. 그래서 그는 기존의 교사 중심의 전통적 교육관에 도전하고 어린이의 흥미와 개성, 경험을 중시하는 아동 중심적 자연주의 교육사상을 전개했고 이러한 내용이 《에밀》에 녹아들었다. 그의 이러한 자연주의를 대표하는 말로 "인간이여,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잘 알려져 있다. 중고등학교의 교사들은 물론 철학 교수들조차 그렇게 가르치고 있을 정도니까. 그러나 실제 루소는 에밀을 비롯한 그의 어떤 저서에서도 그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런 어록으로 유명하다.한 포기의 풀이 싱싱하게 자라려면 따스한 햇볕이 필요하듯이 한 인간이 건전하게 성장하려면 칭찬이라는 햇살이 필요하다.
하지만 《에밀》에는 당대의 종교계를 공격하는 내용이 들어가있어 결국 출판금지가 되었으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금서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스위스로 도피하게 된다. 그러나 스위스 제네바에서도 《사회계약론》과 《에밀》은 판매금지 도서가 된다. 오랜 도피생활로 피해망상까지 생겨났다. 도피생활이 어느 정도 정리되었을 때 그가 쓴 자서전인 '''《고백록 Les Confessions》''' 탄생에 도피생활은 어느 정도 일조했다. 《고백록》은 그의 위대한 역작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불행하게 지내야만 했던 자신에 대한 변호적 입장도 강한 책이기도 하다.
3.6. 말년
1768년 루소는 그동안 같이 지내오던 테레즈 라바쇠르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다시금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테레즈는 1745년 만난 젊은 세탁부였는데 당시 루소는 33세였고 테레즈는 23세였다. 처음에 루소는 테레즈와 결혼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재미 좀 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지적으로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자신을 지지해주는 테레즈와 오랫동안 함께하게 되었고 결국 20년 만에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5명은 당시 파리의 관행에 따라 고아원에 넘겼는데, 고아원에 자식을 버리는 풍조가 당시에 실제로 있기는 했지만 저건 표면상의 이유고 그가 자식을 버린 진짜 이유는 아버지인 자신이 돈이 없는데 키워봐야 삐뚤어질 것이라는, 핑계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것이 나중에 알려졌을 때 그의 역작인 《에밀》에서 보인 교육론과 전혀 다른 모습이어서 그가 비판받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나중에 볼테르는 '시민의 견해'라는 팜플렛에서 루소의 버림받은 아이들에 대해 비난했고 루소가 이 글을 보고 큰 충격을 받으면서 둘은 절교했다.
1776년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 Rousseau juge de Jean-Jacques》'''를 발표하고 1777년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을 집필하지만 결국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1778년 에름농빌에서 아침 식사 중 쓰러진 뒤 점심 무렵 숨을 거뒀다. 이때 그의 나이 66세였다. "아, 이제 더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구나."라는 말이 유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했다. 그는 사망한 이후 11년 뒤 일어난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고 1794년 그의 유해는 팡테옹으로 옮겨져서 볼테르와 나란히 묻혔다.
4. 평가
루소는 있는 집 자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은 적도 없다. 생업 속에서 틈틈이 실행했던 독서와 개인의 통찰을 바탕으로 저작을 써내려갔다. 고백록에 따르면 그는 부친과 사이가 멀어지기 전 밤새도록 함께 책을 읽고 토론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단순한 다독보다는 토론과 의견 교환이 독서에 있어 더욱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루소의 저작은 간결하지도 않고, 통일성도 부족하고, 완결성도 부족하고, 저자의 삶과 이론이 일치하지도 않으며, 정확하지도 않으며, 식견이 넓지도 않다. 하지만 그의 풍부한 상상력과 생생함, 뜨거운 열정과 날카로운 통찰력은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감정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루소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사상가라서 계몽주의자로 엮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성과 감성의 조화, 자연권의 강조 등을 통해 이성의 진보만을 믿던 계몽주의와는 궤를 달리 하였다. 그의 정치사상은 위에도 언급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교육학에 있어서도 혁명적인 전환을 이룩하게 하여 아동중심 자유교육, 생활중심 교육, 노작주의 교육 등 19세기부터 교육학을 이끌어가는 대부분의 교육사조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문학에 있어서도 기존의 고전주의 문학에서 19세기를 이끄는 낭만주의 문학 사조로의 변화를 이끈 선구자적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18세기에 태어나서 19세기 더 나아가 현대에도 통용되는 생각을 한 위대한 인물이라 볼 수 있겠다.
동시대의 철학자 볼테르는 그의 자연론적인 사상을 '''루소의 책을 읽으면 네 발로 걷고 싶다'''고 비꼬았다.
전체주의의 시조라고 보는 시각도 있으며, 그가 설파한 '일반의지론'은 근현대적 의미의 급진적 민주주의를 정립하여 중우정치의 위협을 키웠다는 비판도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아예 서양철학사에서 '루스벨트와 처칠은 로크의 후예, 히틀러는 루소의 후예'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
그리고 테레즈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맡겼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교육학의 명저인 에밀의 저자이기도 해서 더더욱 비판을 받았다. 이때 루소는 무능한 가장 아래서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역으로 그런 무능한 자가 책이나 팔아먹으며 교육학을 논하고 남에게는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서 더더욱 비판 받았을 뿐이었다.
루소는 그 일에 대해 후회하며 《에밀》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또한 그의 철학적 바탕이 ‘평등’과 ‘자유’이나, 그 당시 보편적인 사회 분위기였던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저서 《에밀》 5편에서 "여성과 남성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르며 남성(최상위)과 동물(최하위) 사이에 놓인 존재"라고 규정했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고,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다"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만인평등 사상을 주장했던 것과 비교하면 분명한 모순이었지만, 당시 대부분의 계몽주의자들은 여성을 평등한 권리를 누릴 권리가 있는 인간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소의 저서 《에밀》은 최초의 페미니즘 도서로 알려진 《여성의 권리 옹호》에서도 엄청나게 공격을 받았다.아버지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다. 가난과 일 때문에, 아이들의 양육과 교육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독자여, 내 말을 믿어 주기 바란다.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성스러운 의무를 저버리는 사람은 자기의 죄로 인해 쓰디쓴 눈물을 흘릴 것이며 결코 위안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아울러 루소가 주장한 이른바 '고귀한 야만인' 즉, 원시 시대의 인류는 전쟁이 없이 평화롭게 살았다는 학설 또한 현대 고고학계와 역사학계가 오랫동안 원시 부족 사회들을 조사한 결과 허구로 밝혀졌다. 실제로 원시 시대의 인류는 매복과 기습 및 무차별 학살과 방화 같은 잔인한 전쟁들을 서로 주고받았다.[5] 루소가 '고귀한 야만인'을 주장했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좀 더 자세히는 https://en.wikipedia.org/wiki/Noble_savage#Erroneous_identification_of_Rousseau_with_the_noble_savage 참고.
에드먼드 버크도 루소의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의 자연론적 사상을 보면서 "그렇게 평등하다던 원시시대에 왜 인간이 후에 스스로 정부를 만들고 국가를 만드는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비판하였다.
5.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의 유포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이 고백록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나 이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좀 있는데, 이 글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가리키는 것이란 주장은 애초에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장자크 루소는 '''1766년''' 회고록을 쓰면서 '''1740년'''에 있었던 일화를 떠올린다는 식으로 언급하기 때문이다.Finally I recalled the stopgap solution of a great princess who was told that the peasants had no bread, and who responded: "Let them eat brioche.
최종적으로 나는 빵이 없다는 농부들의 말에 대한 고귀한 공주의 임시 방편- 그들에게 브리오슈를 먹이자!-에 대해 떠올렸다.
ㅡ 장자크 루소, 참회록(1978년 출판)
그것도 무슨 정치적 비판을 하려는 의도도 아니고, 술 마시려고 빵을 찾다가 문득 저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브리오슈를 안주로 술마셨다는 이야기. 심지어 회고록을 쓴 시점 기준으로 봐도 1755년에 태어난 마리 앙투아네트의 나이는 이 때 '''12살'''이고, 프랑스에 시집가기로 결정한 건 1770년으로 책이 나오고도 4년 뒤이다. 그래서 일각에선 루소가 염두에 둔 '고귀한 공주'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친인 마리아 테레지아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하는데, 어차피 고증을 살린 이야기가 아니므로 누구라도 알 바는 아니다. 정작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 샬로트의 이야기에 따르면 어머니는 사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후대의 이미지와는 달리, 사생활에서 꽤 검소한 모습을 보였고 빈민들의 삶에도 신경을 썼다니 대혁명 시기에 붙은 나쁜 이미지가 현재까지 내려온 영향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의 루머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설도 있다.
문장 자체만 보고 따졌을 때, 언어학의 관점에서 보면 제유법을 알아듣지 못해 생긴 일화다. '빵'이라는 단어에는 '먹고 살 양식'이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므로 대유법, 그 중에서도 제유법이라 할 수 있다. 좌우간 잘못인 상식이라도 워낙 유명한 말인 탓에, 종종 다른 사안들과 엮여 돌곤 한다. 특히 세상 물정 모르는 높으신 분들의 탁상공론이 튀어나올 때면 빠짐없이 떠오르는 구절이다.
저 말은 루머지만 중국 서진의 백치황제 사마충(진혜제)은 진짜로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라는 말을 남겼고 그게 《자치통감》 진기에 기록되어 있다.
6. 기타
당대 프랑스에 엄청난 바람을 몰고 온 인물이다. 루소의 소설 및 저작들은 많은 독자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줬으며, 인쇄소의 신기록을 갈아치울 정도로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그 인기에 걸맞게 엄청난 팬레터를 받았다고 한다. 팬레터의 열정적인 표현들이 인상적이라고 하는데, 눈물, 감동, 공감, 감정의 폭포, 카타르시스 등을 열렬하게 고백해 온 독자들이 많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프랑스의 지역 유지는 루소의 모든 것을 파악하고 배우고 가까워지고자 그의 전집을 몇 차례나 개정판으로 구매하면서, 자녀교육 등에 있어서 루소의 사상을 신봉하며 모든 것을 루소처럼 행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라고 출판 관계자에게 편지했다고 한다.
케네스 월츠의 "인간, 국가, 전쟁"은 월츠가 대학원생 시절 정치사상을 공부했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왜 무정부적 국제체계에서는 국가간 협력이 힘든가를 설명하는 루소의 '사슴 사냥' 비유 등 그와 관련된 논의를 주로 언급하는 편이다.
사회계약론에서 예언에 가까운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유럽에서 아직 자체적인 입법이 가능한 곳은 코르시카 뿐이다....(중략)... 나는 언젠가 이 섬이 유럽을 크게 놀라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얼마 후 코르시카에서는...
원작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소설 《신 엘로이즈》가 나올 때 잠깐 언급되었다.
게임 스내쳐에 나오는 장 자크 깁슨이 루소와 윌리엄 깁슨을 합한 이름이다.
교과서 튜닝 사례 중 하나로, 루소의 머리에 가발을 씌우고, 턱을 좀 깎았더니 생각보다 괜찮게(?) 생겼다는 의견이 있다. 사실 위에 나오듯이, 루소는 당대에도 미소년, 미남 취급을 받았기에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다.
[1] 밤늦게 왔다가 도시의 성문이 닫혀서 못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진짜 원인은 루소를 좋게 대하지 않고 구타와 폭언을 일삼는 조각가 아벨의 학대였다. 특히 아벨의 학대를 3년이나 당하고 살았기에 견딜수가 없어 도망가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2] 악보를 숫자로 표기하는 형식이었는데 노래를 부르는 경우에는 편할지 몰라도 악기 연주자들 한테는 불편하다고 까였다. 무엇보다 옛날에 똑같은 방법을 먼저 발표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도 까였다고.[3] 나중에 Church Praise Revolution이 이 곡을 바탕으로 오진 예수를 만들었다.[4] 여기서 인민은 people(peuple)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민이라는 단어에 아직 부정적 뉘앙스가 남아있어서 절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인민주권이라는 용어보다 people주권 또는 실질적 국민주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주권개념에 대비되는 것으로는 국민주권, 즉 nation주권 또는 형식적 국민주권이 있다. 이 둘의 차이점은 주권 문서를 참고할 것.[5] 출처: 원시전쟁/ 로렌스 H. 킬리 지음/ 김성남 번역/ 수막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