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흥진

 


[image]
성명
송흥진(宋興眞)
생몰
1886년 6월 14일 ~ 1960년 2월 23일
출생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대악리
사망지
전라남도 담양군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송흥진은 1886년 6월 14일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대악리에서 송덕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전리(全理)를 맡고 있던 김자현의 장녀 김애마(金愛馬)와 결혼했고, 1911년에는 장로회 신자가 되어 3년간 장성군 북하면 대방교회에 다녔다. 1913년 3월 미국인 선교사 존 반 네스트 타마자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1915년에 광주로 이사가서 숭일학교 농감으로 부임했다.
1919년 3월 6일,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가한 뒤 광주로 온 김강(金剛), 김복현(金福鉉) 등은 송흥진의 집에 유숙하며 독립운동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이후 김강은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거주하는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황상호(黃尙鎬)·강석봉(姜錫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徐廷禧)·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 송흥진 등과 회동하여 서울의 만세시위 정황을 알려줬다. 이에 그들은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그 자리에서 각 학교의 학생과 시민의 시위 참가 등 사전준비를 분하여 추진했다. 이때 송흥진은 숭실학교 학생들을 시위에 참가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부득이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일정을 변경하고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을 인쇄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천여명이 되었다. 송흥진은 동지들과 함께 시위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다음,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서 1천여명이 넘게 되자, 더욱 거세진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 나가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제 기마 경찰과 헌병대의 강경 진압으로 시위대가 강제해산되었고, 송흥진은 동지들과 함께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9년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은 송흥준에게 징역 2년을 언도하면서, "피고 김복현, 김강, 서정희, 송흥진, 최병준은 실로 본건 망동의 수괴(首魁)이며 여러 기도(企圖), 계책을 맡았다."고 비난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출소한 그는 1922년경부터는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자 전도사가 되어 담양 대치중앙교회, 무정교회, 담양읍교회, 개동교회 등에서 봉직하였다.
이후 담양읍 완동으로 이사하여 장로 안수를 받았고, 1930년경에는 담양 봉산면 양지리로 이사해 당시 황야 강변이던 독서골을 개간하고 와우리에 교회를 세웠다. 1940년경 와우리의 허름한 집을 개조해 만든 예배당을 양지리에 신축하여 이전했다. 그는 담양군 여러 지역의 교회에서 전도사 및 장로로 활동하다가 1960년 9월 23일에 자택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송흥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