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준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최병준은 1896년 1월 5일 충청남도 서산군에서 최용규(崔鎔圭)의 독자로 태어났다. 부친 최용규는 구한말에 공주부사와 시골 군수를 역임했으며, 서울에 따로 집을 두어 딸 복동을 낳았다. 복동은 후에 동경여학교를 졸업하고 문인 홍효민(洪曉民)의 부인이 되었다. 1904년 최용규가 별세한 뒤, 최병준은 1907년 모친을 따라 전북 군산의 구암리로 이주했다. 1909년 오긍선 목사가 영명중학교를 설립하자, 최병준은 그 학교에서 공부하여 1913년에는 4년 과정을 마치고 졸업했다. 이후 1년간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915년 20세의 나이로 광주 숭일학교의 소학과정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1919년 3월 5일, 고종의 국장에 참례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발발한 3.1 운동에 참석하고 돌아온 최정두(崔正斗)가 그를 찾아와 서울에서의 상황을 전했다. 이에 최병준은 그날 밤 양림동에 소재한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최한영(崔漢泳)·황상호(黃尙鎬)·강석봉·한길상(韓吉祥)·최영균(崔瑛均)·김용규(金容奎)·서정희·김태열(金泰烈)·홍승애(洪承愛)등과 비밀회의를 열어 광주의 큰 장날인 3월 8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그는 숭일학교 학생의 시위 참가를 준비했지만, 준비기간이 너무 짧아서 부득이 작은 장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30분으로 변경했고, 숭일학교 생도 김성민(金聖敏)·정두범·김철주(金鐵柱)·김정수(金禎洙) 등에게 미리 인쇄된 독립선언서·경고문·독립가 등 약 1,000여매를 주고 거사일에 일반읍민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하였다. 거사일인 3월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아래의 작은 장터에는 기독교인·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須彼亞女學校)·농업학교 학생 및 일반 주민이 모여들어, 독립만세 시위군중은 순식간에 1천여명이 넘었다. 그는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안을 행진하였다. 점점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더욱 거세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대열이 시장에서 읍내로 빠져나가 행진시위를 계속하자 일본의 헌병·경찰은 시위대열의 기세에 놀라 감히 시위를 방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무렵 시위군중이 읍내를 돌아 경찰서 앞으로 행진하자, 많은 경찰과 기마헌병이 김 철 등의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이때 격노한 시위군중이 경찰서 마당으로 돌진할 때 그도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연행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그러자 일제는 재향군인과 소방서원까지 투입하여 총칼로 시위군중을 탄압하니 시위대열은 무너지고, 그는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9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 뒤에 감형되어 1920년에 출옥했다.
1920년 7월 29일 광주 YMCA 창립식에 참석한 그는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어 1922년까지 봉사했고, 1920년부터 1930년까지 선교사 노라복(Robert Knox)의 서기로 활동했다. 그리고 1922년에 남문밖교회(현 광주양림교회와 광주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임직했고, 192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1935년에 신학교를 졸업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제중병원 조사로 일했고, 1935년부터 1937년까지 순천교회 목사로 시무 하였다. 1937년 9월 15일부터 광주 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시무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모든 교회가 통합되어 조선교단으로 될 때 광주 교구장에 감리교 신학교 교수인 조직 신학자 정경옥 목사가 초빙되었으므로, 최병준 목사는 1943년 4월 17일 사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동방요배 등 일제의 강요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을 받아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4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고 출옥하여 순천교회 목사로 시무 하였으나 1945년 5월 5일 순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최병준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