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플레(테이스티 사가)
1. 개요
[image]
테이스티 사가의 등장 식신. 모티브는 수플레.표면적으로는 시간에 집착하고, 뭐든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하다가 우유부단하게 끝나는 나약하면서도 자존감 낮은 성격을 지녔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 심지어 존재의 의미조차 없는 대상으로 여기는 그는 온종일 인형과 붙어 다닌다. 하지만 실제로 그에게는 경박스러우면서도 쉽게 자신을 과시하고, 지배욕마저 강한 성격이 숨겨져 있다. 쾌락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고 생각해, 순간의 즐거움만을 좇는 쾌락주의자로, 화려한 물건을 좋아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인형이 바닥에 떨어지거나 더렵혀졌을 때, 내면의 자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실제로는 겉으로 드러난 인격이 강한 자격을 받거나 도피하고 싶을 때, 내면의 인격이 등장한다.
2. 초기 정보
3. 스킬[3]
4. 평가
5. 대사
6. 배경 이야기
6.1. 1장. 사랑하는 인형
「머리를 올리세요. 자작님이 좋아하실 거예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니야.」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가씨는 이제 자작님의 아이인걸요.」
나는 「아가씨」 등 뒤에 서서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하지만 내 눈동자는 화장대의 거울에 비친 무표정한 그 얼굴을 보고 있었다.
「우리가 애초에 왜 여기에 온 건데?」
맞다. 「아가씨」는 원래 나처럼 집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위해 이곳에 보내진 거였다.
「대체품이 아직도 수두룩하잖아, 안 그래?」
「아가씨야말로 자작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이예요.」
「네가 그렇다는 건, 내가 다른 아이들처럼 그에게 버림받지 않아서겠지?」
그 말을 듣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버림받는 일」은 요즘 들어 시작된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원래 자작이 밖에서 거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아가씨」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은 저택에 거의 남아있지 못했다.
겉에서 봤을 때 아이들에게는 특별한 점이 없었다. 공통적으로 그녀들 모두 금발이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하지만 최근 들어 상황이 점점 심각해졌다.
입가에 걸린 말을 또 다시 참지 못하고 집어 삼켰다.
난 여전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런 말 마세요. 제가 예쁘게 꾸며 드릴테니 자작님을 맞이하러 가시면 돼요.」
「맞이하려고? 아무것도 말하지 말고 그 악마한테 바보처럼 웃어만 주라고?」
「자작님은 아가씨를 사랑하세요.」
그렇게 말하면서 「아가씨」의 구불거리는 긴 금발머리를 묶어 들어 올리자, 목덜미에 진 보랏빛의 커다란 멍이 든 게 보였다.
다시 화장대 거울을 쳐다봤을 때, 내 눈에 들어은 것은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나였다.
「이럴 때는 웃으면 안돼~」
거울 속의 「나」는 그렇게 말했다.
웃음? 아니, 눈앞의 이 사람을 비웃으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수플레,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가씨를 돌봐 드리러 온 거랍니다.」
「여기를 떠나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떠나요? 어디로요? 부인의 분부가 없으면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이젠 없는 걸요...」
「...그래,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없는 거구나...」
「아가씨」는 뭔가에 홀린 듯 내 말을 따라했다.
내가 또 다른 화제를 생각해 내기 전까지 우리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가씨, 릴리아와 이야기해 보실래요? 릴리아는 좋은 아이예요, 언제나 제 말을 잘 들어준답니다.」
릴리아는 내가 인형에게 지어준 이름으로, 아주 오래전에 내가 만난 인간의 이름이기도 하다.
명랑하고 다정한 성격의 그녀는 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그 칠흑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내 말에 귀기울여 준 사람이었다.
「응, 고마워, 수플레.」
무기력한 내 위로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아가씨」의 입가에 보기 좋다고는 할 수 없는 곡선이 살짝 드러났다.
나와 똑같이 외롭고 기댈 곳 없는 인간을 위로하려던 것 뿐인데 순간 내 마음속에는 아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더욱 더 깊은 절망을 느껴봐. 사랑하는 내 인형 「아가씨」.
6.2. 2장. 안개 속의 나비
「이런! 아가씨 이제 곧 자작님이 돌아오실 겁니다.」
회중시계를 꺼내든 난,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걸 확인하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알았어, 수플레 먼저 가봐.」
「하지만 아가씨가 제 시간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작님이...」
「아무것도 바뀌는 건 없어, 안 그래?」
눈앞의 인간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가씨가 말한 것처럼, 자작이 그녀를 난처하게 할 생각이라면 그 어떤 이유도 핑계에 불과할 뿐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다.
자작의 화를 조금이라도 가라앉히기 위해, 난 일찌감치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집사로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하는 건, 모든 사람의 시간을 완벽하게 조율하는 것이었다.
이건 예전에 있던 공작저의 집사가 알려준 것이다.
자신은 물론, 다른 시종 심지어 주인의 시간 모두 조리 정연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주인을 더욱 편안하게 보필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귀족에게 소환된 식신이지만, 이렇다 할 만한 능력이 없어서 단 한 번도 관심을 받은 적 없었다.
자유롭게 지낸 탓에 그동안 배웠던 귀족의 에티켓 같은 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또 한 편으로, 소위 귀족의 에티켓에는 날 집사로 만들어 줄 만한 기본 소양 따윈 전혀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난 공작부인의 지시로, 근래 들어 대공과 부쩍 어울려 다니는 펠 자작저로 오게 됐다. 공작부인의 미래 집사로서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안나는?」
역시나 자작은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아가씨」의 행방부터 물었다.
「아아, 아가씨께선 옷을 갈아입고 계십니다.」
「날 마중 나오도록 아가씨에게 전하라고 했을 텐데? 이런 것 하나 똑바로 못해서야!」
자작의 말에서 점점 노기가 묻어났다. 당장이라도 손에 든 지팡이를 내게 휘두를 것 같았다.
「자작님, 이 정도 일에 뭐 그리 화를 내십니까?」
자작의 곁에 있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원래 오늘 비타이 선생에게 안나라는 아이를 소개해 주려고 했소.」
「자작님, 서두르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은 실험 단계일 뿐이니까요.」
남자의 낯선 목소리는 친숙하지만 음침한,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땅히 잊었어야 할 과거가 일순 떠올랐다.
불안한 예감에 고개를 들자, 자작과 이야기 중인 남자가 보였다. 가느다란 안경테, 갈색 코트를 걸친 남자는 이상한 무늬가 찍힌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아... 그의 이름을 안다. 아주 오래전 그 인간의 입을 통해 수 없이 들었던 이름이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요?」
예의 바르면서도 다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붉은 눈가에는 차가움이 숨겨져 있었다.
「아니요.」
나는 이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잘못 봤나 보군요, 왠지 익숙한 느낌이라서요...」
그렇게 말한 남자는 뭔가를 알아내려는 듯한 눈길을 거두더니, 몸을 돌려 자작과 대화를 이어갔다.
「자작님, 안심하십시오. 모든 걸 철저히 계획해뒀으니까요.」
뜻밖에도 남자의 몇 마디 말에 자작이 금세 진정됐다.
「좋소, 비타이 선생은 실험을 계속해 주시오. 설비든 연구실이든 이쪽에서 확실히 준비해 둘 테니.」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자작님.」
「란돌프, 비타이 선생을 모셔라.」
「예, 저를 따라 오시죠. 비타이 님.」
란돌프는 자작의 집사로, 살짝 구부정한 자세와 희끗희끗한 귀밑머리가 오랫동안 자작을 보필하면서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자작을 향해 살짝 허리를 굽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오늘 백작님과 만나시기로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그 말에 자작은 살짝 당황하더니 이내 귀찮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후후, 맞아. 그랬었지... 이렇게 됐으니 이번엔 네가 날 따르거라, 수플레.」
「예... 예, 알겠습니다.」
자작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난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사실 내가 자작가에 온 데는 귀족가에 어울리는 집사가 되기 위한 교육 외에도 한 가지 임무가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펠 자작을 통해 노름꾼 백작이라 불리는 귀족에 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귀족들이 장악한 이 나라에서 귀족 간의 암투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공작부인은 노름꾼 백작의 세력이 최근 들어 부쩍 커지더니, 암암리에 대공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 같다고 했다.
펠 자작은 원래 노름꾼 백작과 한패로, 서로 잘 아는 터라 평소에도 왕래가 빈번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작저에 머무는 시간 동안 관련된 자료를 찾아내려 했다.
그런데 공작부인은 내가 정말 증거를 찾아낼 거라 믿고 나를 이곳으로 보냈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거다.
「멍하니 뭘 그리 꾸물거리는 거지!」
「앗...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자작의 사나운 호통에 서둘러 정신을 차리곤, 마차를 준비하러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여는 순간, 붉은 빛의 보석 나비가 내 눈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뭔지 알고 있다. 예술품처럼 아름다운 나비는, 공작부인의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러니까 만약에... 이 나비가 비타이 선생을 따라 여기에 온 거라면...
공작부인은 이자가 여기에 올 것이라는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
6.3. 3장. 거울 속의 나
이러한 마음 속의 의문을 결국 내 스스로 지우고 말았다.
난 완전 우연하게도 공작부인의 손에 거둬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사람에게서 일어났던 비극이 재연되지 않도록 스스로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 냈으면 한다.
곧 마차를 몰고 난 자작을 따라 노름꾼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겉에서 봤을 땐 규모 면에서 자작저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다만, 지나칠 정도로 화려한 도금 장식을 보자 기억 속 화려하기 그지 없었던 황성의 모습이 또 다시 떠올랐다.
저택에 도착하자, 자작은 백작이 마중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듯, 자작은 태연하게 시종들을 따라서 노름꾼 백작의 지하실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하실은 평소 뭔가를 감추길 좋아하는 귀족들을 위해 지어진 곳 같았다.
그리고 이곳의 지하실은 내가 얻은 정보처럼 거대한 도박장이었다.
자작을 따라 노름꾼 백작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백작과 같은 테이블에는 훈작 두 명이 앉아 있었는데, 백작과 함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백작님, 제가 늦은 것 같군요. 정말 대단히 죄송합니다.」
「괜찮소, 여느 공작처럼 시간을 칼 같이 따지는 건 않으니까.」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외출할 때도 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니 정말 무서운 분이시네요!」
비정상적으로 시간에 집착하는 대공을 비웃고 있다는걸 눈치했다.
내가 대공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알아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펠 자작처럼 저런 말을 내뱉는 한편으로 내 반응을 살피는 걸까?
「펠 자작님, 최근에 백작님의 실력이 좋아지셨는지 지는 모습을 도통 보지 못했군요.」
「운도 실력이 아닙니까?」
이들은 그렇게 말하곤, 이내 새로운 판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럼 제가 카드를 섞겠습니다.」
금발 소년이 익숙하게 포커 카드를 섞었다.
도박판이 시작되자 모두 승부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지하실이 지나치게 넓은 탓에 카드끼리 부딪치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바로 그때 카드를 나눠 주던 금발 소년이 몰래 손을 쓰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도 이기셨군요, 백작님.」
카드판이 몇 번이나 돌도록, 금발 소년이 노름꾼 백작을 도와 카드를 바꿔치기 한다는 걸 눈치챈 건 나뿐이었다.
「운이 좋은 것 뿐이지.」
노름꾼 백작이 짤막하게 답했다.
「잠시 쉬도록 하죠 그나저나 무슨 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백작님?」
「수플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자작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며 밖에 나가서 기다리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다.
방을 나가기 전 테이블 앞에서 혼자 고개를 숙인 채 카드를 섞고있는 금발 소년을 몰래 훔쳐보았다.
백작 곁에 있는 그 소년이 한 짓에 대해 말해야 할까, 말까? 모두 눈치 채지 못한 걸, 왜 나만 알아차린 걸까?
이게 부인이 찾으려던 증거인 건가?
내가 쉬지 않고 고민하고 갈등하던 사이, 시간은 조용히 흘러갔다.
지하실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자작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굳게 입을 다문 그를 보며 난 아무 수확도 없이 마차를 몰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비타이 선생은?」
자작은 돌아오자마자 집사를 불렀다.
「돌아오셨습니까, 주인님 분부하신대로 비타이 선생에게 모든 것을 준비해 드렸습니다.」
「그럼 됐다.」
「주인님, 오늘 저녁 식사는 서재로 보내 드릴까요. 아니면 식당에서 드시겠습니까?」
「식당, 비타이 선생도 모셔오도록 하게. 그리고 수플레, 오늘 저녁은 내려와서 먹으라고 아가씨에게 전하거라.」
마지막 지시를 내리는 자작의 목소리가 유독 착 가라앉아 있었다.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예...」
--하지만 지금의 「아가씨」는 자작을 전혀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속으로만 아무 소리없이 외치며 복도에 선 채로 미간을 찌푸렸다. 이리저리 발걸음을 옮기다가 우연히 옆에 있는 유리창을 흘끗 쳐다봤다.
「꽤나 내키지 않은가 보군. 자작의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해보던가!」
유리창에 비친 사람과 나는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낯선 웃음을 짓고 있었다.
「방금 백작저의 지하실에서도 그래. 왜 속 시원하게 말하지 않은 거지? 정말 재미있을거야, 사기극이 탄로 나면 이익 때문에 가면을 쓴 인간들끼리 어떻게 싸울지 말이야... 보고 싶지 않아? 분명 보고 싶을 텐데...」
또 시작이다. 유령처럼 벗어날 수 없는 환각.
「난, 네가 하는 말 따윈 믿지 않아. 아마 그 때 내가 뭘 잘못 본 걸지도 몰라...」
「그럴 리가 없어, 왜냐면 그 사기꾼 식신 녀석에게 네 시선이 가도록 한 게 나거든.」
「식신? 그 금발 소년도 식신이라고?」
「이제 와서 나를 믿는 건가?」
경악한 내 모습에, 유리창 속 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영력이 약한 애송이일 뿐이야. 그런 실력으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인간들이나 속이는 게 고작이니까.」
「넌 대체 누구야? 왜, 왜 자꾸 나를 따라다니는 거지?」
「아~ 나 말이야? 내가 바로 너거든~ 그때, 너의 바람이 나를 불러낸 거야~」
「나... 난 그런 적이...」
「하지만 릴리아는 죽었어~ 그렇게 아름다운 인간이 너무 아깝지 뭐야. 나도 꽤나 속상하다고~」
「그, 그만해!」
날카로운 뭔가가 온몸을 찌르고 있는 듯 끔찍한 고통이 몰려왔다. 내 곁에 숨어있던 릴리아와 비비안이 걱정된다는 듯 내 곁으로 날아왔다. 마치 나를 위로하려는 듯이.
「니가 지금 공작부인을 시중 드는 것도, 그 여자가 릴리아와 똑같게 생겨서 그런 거 아냐?」
「아... 아니야.」
「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속이고 살 거냐, 이 겁쟁이 자식!!!」
과거의 기억이 파도처럼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핏빛 기억이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처럼 점점 어둡게 변했다. 순간에 불과했지만 난 그 꿈에서 깨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군~ 릴리아가 보면 울겠어, 겁쟁이!」
하지만 이런 편이 내가 나오기에는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즐길 차례인가~」
6.4. 4장. 무대가 끝난 뒤
내게 있어서 공작가로 돌아가는 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공작부인의 집사라는 걸 공작이 신경 쓰여 한다면, 내게 엄한 벌을 내리진 못할 거다. 그러니 내가 공작부인을 방패 삼아 부인의 지시로 관저로 돌아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둘러댄다면, 더더욱 눈치 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공작부인은 특이한 여자였다. 게다가 온종일 애프터눈 티없이 못 사는 식신이었다.
우울하고 감정적인 성격은 아니었지만 인간들의 일에 관심을 보이곤 했다.
정확히 말해서, 릴리아라는 인간을 굉장히 신경 썼다.
내가 어렵사리 그녀를 찾아가도, 그녀는 진짜 공작부인이 남겼다는 이야기책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녀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겁쟁이를 곁에 남겨뒀을 거라고 생각한다. 물론 정말로 시중이 필요해서 그랬을 거라는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나는 자작과 백작의 저택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녀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놀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내 말에 그녀는 뭔가 확실한 증거를 얻은 것 같았지만, 자신이 기다리던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우리의 공작부인은 새로운 주인공을 위해 앞으로 펼쳐질 시나리오를 계획했다.
그 겁쟁이 녀석한테 앞으로의 나날은 평온할지도 모르겠다.
시나리오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공작부인은 나를 그녀의 저택, 시간의 집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 대공에게 건의해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날의 파티는 유달리 길었다.
파티에서 펠 자작은 병에 걸린 대공에게 비타이 선생이라는 자를 소개했다.
파티가 끝난 후 대공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던 노름꾼 백작 역시 그 도박판에서 모든 것을 잃었다.
이 나라에서 왕권은 형식적으로 존재할 뿐. 귀족이야말로 한 손으로 하늘을 가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이 사실은 날로 쇠약해지는 대공만 봐도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노름꾼 백작에 관한 소식은 귀족들 사이에 오르내리기도 전에, 온 도시에 파다하게 알려져 버리고 말았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해? 수플레.」
「그렇게 물으시는 걸 보니 모든 것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말씀인 것 같군요.」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대답이야. 앞으로 심심하지는 않겠어.」
「부인께서 절 강제로 불러내신 건 제게 들려주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서인가요?」
난 눈앞에 있는 여인의 표정을 바라봤다. 도도하고 아름답지만 어울리지 않는 잔인함이 묻어났다.
기억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미소가,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의 얼굴에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을 거다.
이건 겁쟁이의 기억 속 그 사람의 모습인가보다.
「오늘은 공작의 생일이야, 방금 그가 내게 묻더군.」
공작부인은 입을 열며 손에 들린 책장을 한 장 넘겼다.
「다른 사람을 한 번 배신한 적이 있는 사랑을 믿을 가치가 있을까? 네가 보기엔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 거 같아?」
「배신당하는 게 두렵다면 배신당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으음?」
내 대답에 그녀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죽은 사람에겐 배신할 기회 따윈 없죠.」
그녀의 의중 따윈 알 바 없다. 앞으로 내가 뭘 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에는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저를 불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공작부인.」
그날 밤, 난 공작의 생일 파티에 가지 않고 어둠을 틈타 펠 자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잠시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기에 이층 서재로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서재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동안 내가 파악한 바로는, 지금은 자작이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었다.
당시 펠 자작은 노름꾼 백작의 몰락에 기뻐하고 있었다. 도박판에서 그에게 잃었던 재물이 고스란히 그의 손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공작부인의 집사인 내가 갑자기 서재 베란다에 나타나자, 자작은 크게 놀랐다.
「수플레? 여기에는 무슨 일 이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서 생일 파티에 참석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공작님께는 이미 사과 서신을 보냈는데.」
자작은 약간 미심쩍어 하면서도 일단은 친절한 척, 날 서재 안으로 들였다.
「아니요, 공작부인의 분부로 왔습니다.」
「공작부인의 분부라면 최선을 다해야지... 으윽... 크으윽... 어, 어째서!」
경계를 늦춘 자작이 등을 돌린 틈에, 난 그 옆에 있던 지팡이를 그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이리 흔쾌히 수락하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자작님.」
그리곤 그의 마지막 길에 불꽃을 선사해 줬다. 모든 것이 한 줌 잿더미로 변했다.
무슨 일이든 후환을 남겨선 안되는 법.
하늘 높이 솟아 오르는 불꽃 속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찬란한 미소를 지으며 이 가 엾은 인간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제가 어렵사리 찾아낸 실험장을 이렇게 망쳐 버렸군요?」
다정하고 우아한 비타이 선생이 소리없이 내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불빛에 반사된 그의 그림자는 마치 검은 뱀의 그림자에 휘감겨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 때문에 도망친 겁쟁이와는 다르다. 뒤돌아서서 웃으며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이미 다음 무대를 찾지 않았던가, 검은뱀 선생?」
6.5. 5장. 수플레
많은 일이 처음부터 의미가 없었듯, 그의 탄생 역시 그러했다.
수플레는 향락에 빠진 어떤 귀족이 일시적인 흥미로 소환한 식신이었다.
「이게 식신인가? 인간과 별 차이가 없는데.」
그의 마스터는 왕실의 직계 친족으로, 단 한 번도 의식주를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식신을 소환했지만 정작 별다른 흥미를 보이진 않았다.
그 누구도 그를 기대하지도, 그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수플레는 영원히 어두운 구석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수플레한테 그건 더할 나위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그림자 귀족이 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평생 평온할 것 같던 왕국에서 마스터가 세상을 뜨자, 연약한 식신이었던 수플레는 그 존재마저 점점 잊혀 갔다.
전투에 소질이 없었던 수플레는 뜻밖에도 정교한 바느질 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이 역시 그가 귀족으로 가득한 왕국에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살아갈 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첫번째 인형, 비비안을 만들어냈다.
비비안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집착이 심한 아이였다.
가볍게 구불거리는 단발, 칠흑 같이 까만 눈동자로 언제나 수플레의 옷자락을 잡은 채 그의 곁을 따라다녔다.
하지만 인형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법이다.
그의 삶이 그러했듯이... 어느 누구도 이러한 삶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지 못했다.
비비안이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지...
운명의 수레바퀴가 점점 굴러가기 시작했다.
수플레는 비비안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왕궁 안을 돌아다녔다.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비비안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찾는 게 이 아이야?」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든 수플레의 눈에 방금 자신 위에 드리워진 햇살을 반쯤이나 가려버린 높다란 탑이 보였다.
질문을 한 사람은, 높은 탑에 난 창문에서 몸을 내민 소녀였다.
수플레는 살짝 걸음을 옮겨 고탑의 그늘진 곳에서 나왔다.
처음에 무방비로 햇살을 마주하게 된 수플레의 눈에, 황금빛 햇살처럼 드리워진 곱슬머리, 하늘처럼 푸르른 눈동자가 보였다.
그건 아마도 햇살 아래서 그가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색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종종 탑을 찾았다. 소녀는 자신이 모두에게 이미 잊혀진 존재라고 말했다.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수플레는 처음으로 이 왕국에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인간을 찾았다.
소녀는 아름다운 외모와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종종 탑에서 그에게 온갖 동화책을 읽어 주었다.
예전에 종종 여동생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고 했다. 하지만 수플레가 다른 것을 물으면 입을 다물거나 화제를 돌리곤 해선, 끝내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도 더는 이것저것 묻지 않게 되었다. 어쨌든 그녀는 처음으로 그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인간이었다.
너무 많은 비밀은 알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소녀의 등장은 이미 어마어마한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는 수플레가 유일하게 아는 것은 소녀의 이름이었다. --릴리아, 이 나라의 여왕와 똑같은 이름이다.
릴리아는 당분간 탑을 떠날 수 없지만, 비타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돌봐주러 온다고 했다. 릴리아가 말하는 비타이 선생이라는 자를 수플레는 만난 적 없었다.
왜냐면 그가 나타나려고 할 때마다 숨이 막힐 듯 차가운 기운이 몰려와 수플레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나곤 했기 때문이다.
릴리아는 어떤 끔찍한 악마에게 감금당한 게 분명하다.
그때 수플레는 릴리아가 높다란 탑에 갇힌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릴리아의 고요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며 수플레는 그녀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행한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읽어주는 이야기가 어찌 그리 아름다울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가 읽어주던 동화처럼 아름다운 삶은 갑자기 왕성에 들이닥친 사람들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분노한 대중은 사나운 맹수처럼 손에 쥔 무기로 왕성의 경비병과 귀족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피에 물든 수많은 발자국이 이 왕성의 평화를 짓발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수플레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왕국 전체가 지옥 한가운데로 빠져들었다.
「얼른 그 붉은 나비를 찾아내!」
「그래! 그 마녀를 죽여!」
이런 말이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왔다.
수플레는 그들이 누구를 찾고 있는지 몰랐지만, 광분한 사람들이 화려한 예복을 걸친 귀족들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을 퍼붓는 걸 보았다.
그때의 그는, 아무 소리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방 안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란한 발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수플레는 그가 어렵사리 만든, 릴리아와 똑같은 인형을 끌어안은 채, 문을 넘어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비비안도 무서웠는지, 그의 옷자락을 잡은 채 한쪽에 숨어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식신처럼 강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어떤 능력이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는 문밖으로 나가 높은 탑에 갇혀있는 릴리아를 데려가고 싶었다.
그 사람들에게 발견되면 그녀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생길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수플레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누군가가 곁에 서 릴리아를 지켜줄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가 자신이 아니라도, 악마라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에서 점점 고통이 느껴졌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
수플레로서는 자신이 「쓰레기」라는 핑계로 이 사실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누군가에게 들키고 알았다.
「저기 봐! 또 귀족이야! 붉은 나비가 어디 있는지 분명 알 거야!」
수플레는 쉬지 않고 앞을 향해 달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멈추면 다른 귀족들과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거라는 잘 알고 있었다.
계속해서 도망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쫓는 사람들만 늘어났을 뿐이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순식간에 그의 길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몽등이를 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한 번, 두 번... 미처 세지도 못할 만큼 수많은 공격이 그의 몸 위로 쏟아졌다.
수플레는 죽기 살기로 기어갔다. 머릿속에는 릴리아를 만나러 가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일단 죽이지는 마, 붉은 나비가 어디 있는지 얼른 물어봐!」
「이봐! 아직 안 죽은 거지? 안 죽었으면 대답해!」
어느새, 수플레는 바깥 복도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기어 나왔다.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 아래, 수플레는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계속해서 양지로 기어갔다.
걸어나갈 수만 있다면, 저 아름다운 화원을 지나가기만 하면, 높다란 탑을, 아름다운 릴리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날 방법 따윈 이미 없었다.
그의 등 뒤에서 수플레가 어디의 인간을 만나러 기어가는 건지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플레에게는 그녀를 지킬 방법이 없었다. 왕성의 귀족을 죽일 생각으로 가득한 인간을 끌고 갈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분명 식신이지만 이럴 때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다.
그렇게 생각하던 수플레가 움직임을 멈추고 땅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머리에 난 상처가 터지는 바람에 눈앞이 붉게 온통 변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녀석 정말 귀족이 맞아? 꼭 미친놈 같은 걸!」
「저것 봐. 인형을 두 개나 끌어안고 있잖아! 역겨운 놈!!」
누가 비웃는 말투로 그런 악독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후회해? 너의 유약함이? 그럼 나를 갈망해봐! 내가 이 인간들을 다 죽여줄 테니!」
갑자기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수플레의 귓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누구? 누구야?」
수플레는 계속해서 물었다.
「혼자 중얼거리는 걸 보니 역시 미친놈이야, 치워버리자고!」
말이 떨어지자 수플레는 날카로운 뭔가가 복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잔뜩 해어진 옷을 입은 비비안과 릴리아도 함께...
「으아악! 인형들이 갑자기 움직이잖아! 저 놈도 괴물인 거야!」
공포에 질린 인간들이 손에 쥔 검을 다시 한 번 수플레의 몸에 찔러 넣었다.
이때 멀리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붉은 나비를 찾았다! 화원의 저쪽에 있는 탑에 숨어 있어!」
「정말? 서둘러! 그 마녀가 도망치게 둬선 절대 안돼!」
수플레의 두 눈이 커졌다. 숨조차 쉴 수 없을만큼 고통스러웠지만 어떻게 해서든 기어나려고 했다.
아, 안돼... 그러지 마!
「그녀를 구하고 싶어? 너 같은 겁쟁이는 못할걸~」
그 목소리가 또 다시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마치 악마처럼 그를 구해줄거라 유혹하며 손을 내밀었다.
수플레는 환각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붙잡은 채 애원했다.
「제, 제발... 그녀를 구해줘. 나, 나는 어떻게 되든 괜찮으니까 릴리... 릴리아를 구해줘...」
「쯧, 정말이지... 애당초 이 몸을 빨리 버리고 나로 바뀌었으면 좋았잖아.」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자신이 내밀어진 손에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였다.
검은 기운 안에서 다시 서서히 일어난 수플레가 핏자국으로 가득한 무기를 쥔 인간들을 바라보며 사악하면서도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쓰옵~ 그럼 방금 이 겁쟁이한테 손댄 녀석들한테 번호를 매겨볼까~ 내가 친히, 지옥로 보내주마!」
종소리가 네 번 울리자, 다시 깨어난 수플레의 눈앞에 전혀 낮선 풍경이 펼쳐졌다.
자신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된 건지, 자신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누구한테서도 기대받지 못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끝없는 고통이 모든 게 끝났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도 그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그에게 기대감을 심어주던 친구도 결국 잃고 말았다.
하지만 자신은 왜 살아남은 걸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은 왜 여전히 살아있는 걸까?
기억의 책장에는 커다란 슬픔만이 가득한 빈 페이지가 있었다. 그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에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인형은 말을 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봤어도 아무것도 알려줄 수 없었다.
몇 년 후.
모든 것을 잃어버린 수플레는 여전히 돌아갈 곳 없는 길고양이처럼 어두운 골목을 배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요염한 나비 한 마리가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름다운 붉은 나비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나비를 쫓았다.
나비는 멀리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이는, 화려한 귀족 마차로 날아가더니 마차에 타고 있던 귀족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 순간 수플레는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나비가 아니라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 그의 기억 속 릴리아를 빼닮은 얼굴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수플레는 이미 마차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수플레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도 했지만, 마차는 그를 치지 않았다.
「왠 미친놈이야! 죽고 싶은 거냐!」
마부가 고삐를 힘껏 잡아당기며 욕설을 퍼부었다.
「릴리아...」
수플레는 자신도 모르게 이름을 부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친놈이 어디서 부인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마부의 채찍이 수플레의 몸 위로 떨어지면서, 품 안에 있던 인형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수플레의 몸이 굳어지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검은 기운이 그의 눈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이름을 안다니 놀라운 일이로군.」
뜻밖에도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부인은 관심을 보였다.
「놀라셨다면 저에 대해 알고 싶지는 않으신가요?」
「으응? 알고 싶다라? 네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그거야 부인의 판단에 달렸죠.」
마차 안에 타고 있던 부인은 방금 마차를 막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수플레의 모습에 더욱 진한 미소를 보였다.
「정 그렇다면 날 따라와.」
이건 어쩌면 아무 쓸모도 없던 그가 세상을 살아가게 된 기적이 일어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수플레는 그렇게 여기고 있다.
7. 코스튬
8. 기타
- 브라우니와 같은 집사 캐릭터다. 다만 브라우니는 집사 지망생이고, 수플레는 정식 집사다.
- 이중인격 캐릭터로 유약한 표면의 수플레와 사악한 내면의 수플레가 있다. 스토리상 내면의 수플레가 나올 때는 검은 기운이 나온다고 한다. 대사 중에서 내면의 수플레가 말하거나 표면의 수플레가 말하는 걸 자르고 말하는 대사가 있다.[4] SD 캐릭터 상태에서 랜덤으로 내면의 수플레가 거울에서 튀어나오기도 한다.
- 공작가에서 릴리아와 닮은 공작부인을 모시는 집사로 지내다가 '시간의 진혼가' 이벤트에서 공작을 살해한 범인으로 잠시 의심받는다. 진범이 밝혀진 후 공작가는 불타버리지만 여전히 공작부인을 모시며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