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신옹주
1. 개요
淑愼翁主
태조와 관기출신 후궁인 화의옹주[1] 김씨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태조가 말년에 본 딸로 그 어머니 화의옹주는 김해의 관기 칠점선(七點仙)이었으며, 태조 7년(1398년) 후궁에 정식으로 봉작되었다. #
나이는 기록이 없지만 건문 3년(1401년) 당시 아직 어리다는 기록이 있고, 생모 화의옹주가 태조 7년(1398년)에 후궁으로 봉해졌으므로 이 해를 전후해서 태어났다고 하면 건문 3년(1401년) 시점에서 3, 4살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태조는 나이 70세를 앞두고 아직 어린 옹주를 위해 숙신옹주가대사급성문이라는 문서를 하나 남겨준다. 옹주의 집터, 집 방향, 집에 쓰이는 재목, 가옥의 배치, 건물의 칸수를 적었고 끝에는 그 집에 옹주의 자손이 영원히 거주할 것을 밝히는 문서이다. 여기에서는 옹주의 이름이 며치(㫆致)라고 나와 있다.
검교참찬문하부사(檢校參贊門下府事) 홍언수(洪彦修)의 아들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에게 하가하였다. 옹주는 단종시절인 1453년 사망했다.“건문(建文) 3년(1401) 신사년(辛巳年) 9월 15일 첩의 소생인 며치(㫆致)에게 상속 문서를 작성해 준다. 비록 며치가 나이 어리고 첩에게서 난 여자 아이지만, 지금 같이 내 나이 장차 70이 되는 마당에 가만히 있을 일만은 아닌 듯 하다. 동부(東部)에 있는 향방동(香房洞)의 빈터는 돌아간 재상 허금의 것으로 잘 다듬어진 주춧돌과 함께 샀으니, 집은 종을 시켜 나무를 베어다가 짓도록 하여라. 몸채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기와로, 동쪽에 붙여 지은 집 한 칸도 기와로, 부엌 한 칸도 기와로 잇는다. 술 방 세 칸은 이엉으로, 광 세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다락으로 된 곳간 두 칸은 이엉으로, 안 사랑 네 칸도 이엉으로, 서방 두 칸은 앞뒤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남쪽에 있는 마루방 세 칸은 앞에 툇마루를 하고 이엉으로 잇는다. 또 다락으로 된 곳간 세 칸은 기와로 이어서 모두 스물 네 칸을, 주춧돌과 함께 구입한 허금 집터의 매매 문서와 함께 상속해 주노라. 영원토록 그 곳에서 살도록 하되 훗날에 별다른 일이 있거든 이 상속 문서를 가지고 관청에 신고해서 올바르게 변별하고 자손들이 전해 가지며 오래도록 거주 하도록 하여라.”#
실록에서 숙신옹주를 검색해보면 정종과 태종, 성종에게도 똑같이 숙신옹주로 봉해진 딸이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정종의 딸 숙신옹주는 후궁 기씨(奇氏) 소생으로 전주부윤(全州府尹) 김검(金謙)의 아들 김세민(金世敏)에게 출가하였고, 태종의 딸 숙신옹주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창(尹敞)의 아들 파원군(坡原君) 윤평(尹泙)에게 시집갔는데, 실록에는 이때 숙신옹주는 전통적인 데릴사위 즉 장가드는 신랑이 신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친영을 처음으로 행했다고 적고 있다. [2] 성종의 딸 숙신옹주는 성종 18년(1487년)에 요절한 인물 외에도[3] 성종 20년(1489년)에 12세로 사망한 인물이 더 나와서 헷갈린다. [4]
2. 관련 문서
[1] 조선초기라 아직 내명부 품계가 뒤죽박죽으로 고려시대와 같이 후궁에게도 옹주의 품계가 내려졌다.[2] 세종실록 67권, 세종 17년 3월 4일 병자 3번째기사 1435년 명 선덕(宣德) 10년 파원군 윤평이 숙신 옹주를 맞아가니 친영이 여기로부터 비롯되다 [3] 성종실록 206권, 성종 18년 8월 20일 정해 5번째 기사 1487년 명 성화(成化) 23년 숙신 옹주의 졸기 [4] 성종실록 234권, 성종 20년 11월 8일 임술 5번째 기사 1489년 명 홍치(弘治) 2년 숙신 옹주의 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