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

 


'''태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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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고려국사'''
정종 이경

'''태종 이방원'''

정식 책봉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太宗'''

[image]
태종대왕 어진 (상상도)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태종(太宗)'''
'''별호'''
성종(聖宗)
'''존호'''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1]
'''시호'''
'''조선'''
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2]
''''''
공정(恭定)
'''출생'''
1367년 6월 13일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즉위'''
1400년 11월 28일 (음력 11월 13일)
조선 개경 수창궁
'''사망'''
1422년 6월 11일 (음력 5월 22일)
(54년 11개월 18일 / 20,087일)

조선 한성부 연화방 수강궁 별전(別殿)
'''능묘'''
헌릉(獻陵)
'''재위'''
'''조선 왕세자[3]'''
1400년 2월 26일 ~ 1400년 11월 28일
(음력 1400년 2월 2일 ~ 1400년 11월 13일)
'''조선 국왕'''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음력 1400년 11월 13일 ~ 1418년 8월 10일)
(17년 9개월 11일 / 6,494일)

'''조선 태상왕'''
1418년 9월 9일 ~ 1422년 6월 11일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22년 5월 22일)
(3년 9개월 2일 / 1,37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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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방원(芳遠)
''''''
유덕(遺德)
'''공호'''
정안공(靖安公) [108]
'''전호'''
광효전(廣孝殿)
'''부모'''
부친 태조, 모친 신의왕후
'''왕비'''
원경왕후

1. 개요
2. 상세
3. 묘호와 시호
4. 이름과 작위
5. 생애
5.1. 총명하고 영특했던 안변댁네 다섯째 아들
5.2. 격변의 난세 속에서
5.2.1. 계모와 이복동생을 구하다
5.2.2. 부친의 목숨을 구하다
5.2.3. 정적을 죽이다
5.2.4. 아비의 눈 밖에 난 왕자
5.3. 용상을 향하여
5.4.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5.4.1. 사병 혁파
5.4.2. 관제 정비
5.4.3. 경제 정책
5.4.4. 외척 말살
5.4.4.1. 신덕왕후 강씨 격하
5.4.4.2. 여흥 민씨 숙청
5.4.4.3. 광산 김씨 숙청
5.4.4.4. 청송 심씨 숙청
5.4.5. 공신 숙청
5.4.6. 지방 행정
5.4.7. 대명 외교
5.4.8. 여진 정벌
5.5. 퇴위와 상왕
5.5.1.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5.5.2. 최후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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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3대 국왕이자, 조선의 제4대 국왕인 세종대왕의 아버지.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며,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태조신의왕후의 5남으로 태어나 아버지 태조의 건국 과정을 돕다가, 조선 건국 뒤에는 정안공(靖安公)에 책봉되었고, 정도전, 남은 등과 이후 왕세자 책봉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끝내 왕세자가 되지 못하였다. 1398년(태조 6년)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과 남은 일파와 왕세자 이방석을 죽이고 대권을 잡고 1400년에는 태조로부터 선위 받은 정종이 왕위를 내주어 즉위하였다.
자신의 확실한 결단력으로 조선 정치의 질서를 잡았으며[4], 뒤를 이을 세종이 선정(善政)을 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준 군주.

2. 상세


역대 조선 왕들 중 그의 부왕 못지 않게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임금 중 한 명이다. 태조 이성계의 5남으로 태어나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권력욕이 강하다는 태조의 독자적인 판단으로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였고,[5][6][7] 계모 신덕왕후의 소생이자 건국에 공이 전혀 없는 막내 이복동생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 직접 난을 일으켜[9] 세자와 정적을 참살(斬殺) 후에 둘째 형이었던 방과를 왕으로 옹립, 권력을 잡았고 이후에는 (사실상 자신의 강압에 의한) 양위를 받아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즉위했다.
무인정사를 일으켜 이복 막내동생인 방석 세자와 세자를 지지하던 개국공신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둘째 형 방과를 옹립한 후 2년 만에 정식으로 왕으로 즉위하고 나서는 조선 초기의 불안정한 왕권을 더더욱 강화하기 위해 수없는 정적들과 외척들, 심지어 아들 세종의 외척들 등을 싸그리 제거해 왔다.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의 킬러 본능을 가진 사람'이기도 했다. 정몽주를 암살하여 조선 창업에 다른 형, 동생들보다 크게 이바지했고, 정도전, 심효생, 남은, 자신의 형제들을 죽여 왕이 되었고, 처남들인 민씨 형제를 죽여 외척을 쳐냈고, 갖은 구실로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소헌왕후의 아버지)까지 처형하여 아들조차 왕이 되면, 외척에 휘둘리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10]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방간이나 그 외 불온한 말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여러 신하들은 살려놓았다. 참 이중적인 왕이다. 이방원의 후계자인 세종대왕이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세종이 걸어갈 길을 사전에 방해 될 것을 잘 닦아놓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왕왕 있는 편. 분명 왕조의 초기에 불안정한 정국을 확실하게 다 잡았고, 후계자 세종을 위협할 만한 세력(정적)들을 다 제거해서 세종은 정국 안정에 덜 신경쓸 수 있게 한 것을 보았을 때 꽤 맞는 말로 볼 수도 있다.[11][12]
'용재총화'의 저자인 성현은 태종을 '''문관으로 패업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의외로 혁명의 난을 일으켜 왕이 된 것 치고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죽인 편은 아니다. 게다가 보통 이렇게 권력을 위한 숙청에서 자기 편은 건들지 않거나 국가에 해가 없음에도 맘에 안 든다고 없애버리는 일이 역사적으로 많은데, 태종의 경우 오로지 "장기적으로 왕권에 손해가 될까 아닐까" 하나만을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숙청하였다. 때문에 Badass 기질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세종대왕 그 이상으로 좋아하고 존경하기도 했다.
따지고본다면 건국왕이자 아버지인 이성계보다도 더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인물인데, 화통하고 진솔하며 포용력과 카리스마를 갖췄지만 무인 출신이다보니 정치적 감각과 역량에 한계가 있던 아버지와 달리 무인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에 합격할만큼 뛰어난 학식과[13] 훗날의 정치 역량까지 그야말로 왕의 그릇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묘호와 시호


"고애자(孤哀子) 사왕(嗣王) 신(臣) 【휘(諱).】[14]

는 삼가 재배(再拜) 돈수(頓首)하고 상언(上言)합니다. 삼가 큰 덕(德)과 높은 공(功)은 전고(前古)에 뛰어나니 큰 이름을 시책(謚冊)에 나타내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삼가 떳떳한 전장(典章)에 따라 휘호(徽號)를 올립니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황고(皇考) 성덕 신공 태상왕(聖德神功太上王)께서는 총명하고 신성(神聖)하며 용감하고 지혜로우며 너그럽고 어질어서 고려의 국운(國運)이 이미 다한 때를 당하여 천심(天心)의 돌아가는 바를 알고 태조(太祖)를 도와서 만세의 터전을 비로소 개척하였습니다.

중국에 들어가 고황제(高皇帝) 를 뵈올 때 세 번이나 접견(接見)하는 총영(寵榮)을 받았습니다. 일이 기미(幾微)[15]

가 아직 나타나지 않을 적에 환하게 알아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길이 평안하게 하였습니다. 천부(天賦)의 사랑이 오직 어버이에게 깊어 승안(承顔)[16]의 효(孝)에 지극히 독실하였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우애하여 이에 양덕(讓德) 의 빛을 내려 주었습니다.

무위(武威)는 바람과 우레보다 엄숙하고 문치(文治)는 해와 달보다 밝았습니다. 교린(交隣)하는 데 도(道)가 있고 사대(事大)하는 데 정성으로 하니, 덕화(德化)가 먼 데나 가까운 데나 흡족하여 은혜가 동물이나 식물에까지 미쳤습니다. 외람되게 큰 왕통을 이어받은 것을 생각하여 나이가 오래되시도록 영화롭게 봉양하리라 기약하였더니, 어찌 갑자기 승하(昇遐)하여 이에 말명(末命)[17]

을 남기십니까?

울부짖고 통곡하는 마음을 견디기가 어려워 이에 현양(顯揚)의 의식을 거행합니다. 삼가 옥책(玉冊)을 받들어 존시(尊謚)를 ‘성덕 신공 문무 광효 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라 올리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밝으신 영(靈)이 충감(沖鑑)을 굽어 내리어, 길이 다복(多福)을 주시어 자손을 무궁한 앞날에 보호하시고, 국가의 계책을 그윽이 도와주어 하늘과 땅과 더불어 구원(久遠)하게 하소서. 삼가 말씀드립니다."

태종실록 36권, 태종 18년 11월 8일 갑인 4번째기사


我馬帶矢 于廐猝來 願陪聖宗 九泉同歸

말이 화살을 맞아 마구에 들어오거늘, 성종[18]

을 모셔 구천에 가려 하시니

용비어천가 권제10 제109장

  • 묘호: 태종(太宗)
  • 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
태종이란 묘호 자체가 태조의 공에 버금갈 임금에게 바치는 묘호이다. 사후 업적을 인정받아 묘호가 태종으로 정해졌고 신하들의 찬사를 받는 영광을 누렸다.
또한 용비어천가에서는 태종을 달리 불러 '''성종(聖宗)'''이라 칭하였다. 일종의 '별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별호는 '성조(聖祖)'였었다.

4. 이름과 작위


[image]
태종의 수결(서명).[19]
왕이 되면 피휘 때문에 보통은 이름을 바꾸는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과 멀 원자를 휘로 계속해서 사용했다.[20]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모친 안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李旦)으로 개명했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李瓊)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방원이 독특한 케이스인 것은 사실이다.[21] 어쨌든 현재에는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건국 직후 태조 대에는 고려 말기의 왕자 봉작제를 따랐다. 따라서 태조 대의 이방원의 호칭은 정안군이었다. 이후 1398년 9월 1차 왕자의 난 직후 왕친의 봉작이 개정되었다. 아마도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이방원 본인의 의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임금의 친왕자의 호칭이 공(公)으로 개정했다. 그래서 정종 실록에는 이방원의 호칭이 정안공으로 기록된 것이다. 이후 태종 본인이 임금으로 즉위한 직후 태종 1년(1401년) 1월 공(公)이라는 호칭을 부원대군(府院大君)으로 개정했고, 이후 다시 대군(大君)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최초로 대군(大君)이 된 사람들은 이방원의 친형제들이었다. 이후 1414년 태종은 왕의 아들로서 적비 소생은 대군(大君), 빈 소생은 군(君)으로 초칭을 완전히 확정하였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이방원은 '정안군', '정안공'이었던 적은 있으나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의 친형인 이방의와 이방간은 1401년 태종의 호칭 개정에 따라 각각 익안대군, 회안대군이 되었다. 그들도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태조 시절에는 익안군, 회안군이었고,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익안공, 회안공이었다.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쓰며,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예전 사극이나 소설 등[22]에서도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정안대군이 틀린 표현이라며 이를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후에 확립된 표기를 따라 관례적으로 대군이라 칭하는 것을 틀렸다고 지적질 하는 것 자체도 틀렸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조 동안 대군이 아니었던 친왕자는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 중 1401년 이전에 죽었거나 왕이 된 경우뿐인데, 이방우, 이방번, 이방석 등은 모두 1401년 이전에 사망했기에 대군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대부분 대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고 그렇지 않은 문서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정종 역시 왕자 시절을 언급할 때 영안대군이라 호칭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들은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경우 대군이라 호칭되었을 것이다. 후대에 확립된 호칭을 이전에 같은 지위에 있던 사람에게 소급 적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당장 이성계의 선조들이 싸그리 임금으로 추존되는 판에 군, 공이었던 이방원과 그의 형제들을 대군으로 호칭하는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며, 아마도 태종대 이후 그들을 대군으로 부르지 않고 군으로 호칭했다면 오히려 불경죄로 커다란 화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

5. 생애



5.1. 총명하고 영특했던 안변댁네 다섯째 아들


[image]
아버지 이성계
고려 동북면 화령부윤 이성계의 향처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실질적인 막내였다.[23] 이후 청소년기에 과거에 응시해 병과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24][25]

과거에서 김한로(金漢老) 등을 급제시켰는데 '''우리 태종(太宗)이 병과(丙科)에서 7등으로 뽑혔다.'''

고려사』 권135, 열전48 우왕3(1383년) 4월

나중에 보인 과격한 행적들을 보면 꽤 과감하고 패기가 넘치기에 흔히 야성적, 무인적인 인물로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면 본질적인 정체성은 지적 엘리트에 가까웠던 셈이다.[26] 훗날 이방원이 명나라에 입조하러 갈 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걱정하며 한 말도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한데 만 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27] 한창 젊을 나이인 20대 때 이야기가 이 정도라는 걸 근거로 이방원이 허약한 체형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연산군이 재위에 올랐을 때 실록에 '태조 이후로 역대 왕들은 다들 태조처럼 덩치가 우람했는데 연산군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빈약한 체형의 왕이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기에 이방원도 체격 자체는 우람했을 듯하다. 태종도 사냥과 군사 훈련을 즐기는 기록이 조선 왕들 중에 굉장히 많기에 인간 흉기인 이성계 기준에서 허약해보이는 것일 뿐 실제로는 건장했을 것이다.[28]

'''태종은 한국사 전체를 통해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 왕이다. 한국사를 통틀어 국왕이 등장한 이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한 왕은 태종이 유일무이하다.''' 사실 한국사에 등장했던 국왕들 중에는 1차 과거시험에도 떨어질 만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왕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통해 또는 세습에 의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볼 기회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만약 과거시험을 보았더라도 합격할 만한 왕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태종은 정식으로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당당하게 합격한 유일무이한 왕이었던 것이다.

태종이 과거시험을 준비할 때 공부한 것은 주자학이었다. 태종은 주자학으로 과거에 합격했기에 주자학에 일가견이 있었고, 나아가 정신적으로 도참과 불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왕을 위한 변명』''' | (공)저: 신명호

이방원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과거(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 급제와 관직 근무 경력 둘 다를 가진 임금'''이다.[29] 이방원의 과거 급제 사령장(합격 증명서)을 받았을 때, 이성계는 너무 기뻐서 그 사령장을 몇 번이고 읽게 했고 자신도 계속 읽었으며 궁궐에서 몇 번이고 절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등수는 아주 높지 않아도 기록상 '''해당 기수 최연소 합격자'''였으니. '촌뜨기 무인 집안'이라는 열등감[30]을 확 씻어준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상당한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아닌 게 아니라 이방원은 전주 이씨 집안이 이자춘 대에 고려로 귀순한 이래 가문 전체에서 최초로 배출한 과거 합격자인 데다, 고려 시대의 과거는 그 악명 높은 조선 후기 시대의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아서 준비 단계부터 수도 개경의 유명한 사립 학원에서 집중적인 사교육을 받은 중앙 귀족의 자제들이나 볼만한 수준이었던 걸 감안하면[31] 이성계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가문 최초로 고시에 합격하면 충분히 문중의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 이방원의 형들인 방우나 방과 등도 관직 생활을 하긴 했지만, 이성계처럼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거나[32] 전주 이씨 가문이 아직 원나라의 봉신일 때와 같이 음서를 통해 진출한 것이라서 이성계의 열등감을 완전히 씻어내주기엔 역부족이었다.
과거 합격 후 이방원은 개경에서 지낼 때 문신으로서 주로 인사 교류를 통해 이성계에게 꽤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직접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5.2. 격변의 난세 속에서



5.2.1. 계모와 이복동생을 구하다


1388년 21세의 젊은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당시 전리정랑(典理正郞)[33] 직위를 맡아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아버지를 지원하러 간 형님들 대신 아직 개경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들을 무사히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사태가 수습되자 개경으로 돌아왔다. 이방원이 이 임무에 실패했다면 정변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경처 강씨는 물론 방번, 방석까지 분노한 최영에게 잡혀서 죽었을 것이다.[34]

5.2.2. 부친의 목숨을 구하다


1392년(공양왕 4년) 3월 당시 이방원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삼년상(1391년 사망)을 치르고 있었는데[35] 아버지 이성계가 왕석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해주에 마중나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머무는 일이 발생했다. 하필 그 때가 이방원의 친모인 향처 한씨의 3년상 중인 관계로 이방원을 포함한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도 죄다 발이 묶여있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반 이성계 세력은 이성계가 완전히 무력화된 틈을 타 고려 왕실의 위협이던 이성계 일파들을 숙청하고 종국에는 이성계도 암살하려 하였다. 이 때 정몽주는 공양왕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귀양 보냈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가 모조리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이제를 통해서 이 위기 소식을 듣고는, 곧장 삼년상을 접고 벽란도로 달려가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에 데려와 전세를 다시 이성계 쪽으로 역전시키고 이성계파를 몰락 위기에서 구했다고 태조실록에서는 전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살면서 가장 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형제들 중 홀로 나서서 아버지를 지켜낸 셈이다.[36]

5.2.3. 정적을 죽이다


[image]
정적 정몽주
비록 이성계의 개경 귀환으로 이성계 일파 숙청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여전히 정몽주 일파는 성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정도전, 조준의 사형을 주청했고, 공양왕도 이성계가 두려워 대놓고 승인을 못할 뿐 사실상 정몽주에게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직접 제거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돌아가서 어머니 3년상이나 마치라고 강하게 핀잔을 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을 모아서 정몽주 제거를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성계의 반대 때문에 이지란처럼 정몽주 제거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정몽주 살해 계획을 강행하고, 직후 조영규, 고여, 이부,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리고 도평의사사를 살해 장소로 계획하는 등 살해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해나간다.
한편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서 자신의 살해 계획을 듣게 되는데 이에 정몽주는 1392년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게되고 이성계에게 환대를 받았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화가 이성계의 환대에 정몽주 살해를 주저하자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살해를 강행했고, 처음에는 정몽주가 사는 동리 입구에서 살해할 계획을 잡고 근처의 이방과의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정몽주가 유원(柳源)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대낮에 길바닥에서 철퇴로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 일설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대에 기록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에는 해당 시조가 없다. 애초에 기록상에는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로 이전부터 마음을 먹었고 최종적으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해를 감행했다. 일설[37]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한편,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는 설도 있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 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발언권이 약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애초에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 척살을 건의했다거나 척살 모의를 주도했다거나 하는 기록이 방원이 책임을 스스로 안고가기 위한 윤색일 가능성이 있다.
  • 다만 어디까지나 설일 뿐이다. 반론하자면 왕자의 난이나 기타 에피소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방원은 충분히 정몽주를 암살할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38] 그리고 이방원이 모의에 참가한 사람들 중 가장 실권 및 발언권과 멀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정몽주 한사람을 살해하는데 대낮에 고작 장사 몇 명만으로도 충분했고 이성계 일파는 고려의 군권을 꽉 쥐고 있어서 정몽주 및 공양왕와는 세력 면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이제껏 정몽주를 암살하지 못했던 건 결국 정몽주가 아니라 이성계의 분노가 두려워서였다. 그렇다보니 결국은 이방원이 나설 때가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이방원은 실행조에 불과하고 이방과나 다른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하면 아무리 그래도 이성계나 정도전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다.
  • 또한 이성계가 이를 알고나서 이방원을 질책했을 때, 이방원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님들의 말이라 따랐다고 변명하기는커녕 같이 논의했다는 이야기조차 일절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누가 결정하고 실행했는지와 별개로 이성계의 살기 어린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기로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이성계의 분노는 내내 이방원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리고 백주대낮에 대놓고 죽인 것도 아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못 박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밤에 암살해서 누가 죽였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사건을 수사한다고 범인을 찾느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게 먼저였을 테고 다른 집안 사람들도 모조리 의심하고 추궁했을 것이다. 신 왕조 건국을 앞둔 마당에 태조가 될 사람이 내막을 알고 자신의 절친을 살해할 목적으로 열린 회의에 가담한 자신의 동생들, 아들들과 모조리 의절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역성혁명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죽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크게 대노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둘이 같이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들끼리 혼인시킬 만큼 친분이 돈독했으며 공양왕 즉위 때까지 정치적으로도 동지 관계였다. 게다가 공적인 면에서도 분노할 이유는 충분했다.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이성계가 왜 정몽주를 진작에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대립했는지 생각해보자. 당시 정몽주는 단순한 이성계의 정적 수준이 아니었다. 당대의 대학자요 군자이며 백성들의 지지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를 떠받친 마지막 충신이었다. 이런 인물을 은밀한 암살도 아니고 자기 자식이 백주 대낮에 살해하는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은 이성계의 위신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성계로선 이방원은 참으로 '고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이후 수십 년간 두고두고 지속된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애증 관계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하자 조선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나서 정도전, 조준 등을 복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지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불과 석달만의 일이었다.관련기사

5.2.4. 아비의 눈 밖에 난 왕자


아버지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방원도 왕자로서 군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지지만, 정작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몽주 척살로 인해 이성계에게 미움을 산 것이 크게 작용한 탓이 컸다.
물론 정몽주 척살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동참했으나 실제로 척살을 실행에 옮긴 것은 방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이방원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사실상 이방원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를 죽여놓고도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는 사이코패스였거나 자신이 실행조가 되어서 형님들 대신 일부러 아버지의 분노를 모조리 감당했던 것이었을 텐데, 역전의 용사이자 용장이며 유사 이래 최고의 신궁인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대들다가는 그날로 아버지 손에 끝장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고[39], 또 방원은 향처 한씨 소생의 아들 중에서는 막내나 다름없었으니[40] 둘째 큰형님과 문중의 어르신이 시켜서 했다고 변명해도 되며, 여차하면 아버지와 형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 것이니 용서해달라고 사죄를 할 수 있었는데도 아버지의 분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낸 것을 보면 결국은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41]
이렇게 돼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첫째 형둘째 형도 자신도 아닌, 문중의 적장손인 이복근보다도 새파랗게 어린 막내 이복 아우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데, 적장자 대신 후처에서 얻은 막내를 편애해 나라를 흔드는 전형적인 창업 군주의 실책이었다는 주장과[42] 이성계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방석이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방석 문서 참조.
그러나 문제는 이게 태조의 입장에서'''만''' 합리적인 결정이었지, 이방원 등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자신의 아들들과 고려의 기득권층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몰려 한 것이다.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습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있는데다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그 다음에 할 일이란 뻔한 것이다.'''
그런데 방석이 세자가 되어서 이방원에게 다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장자 계승의 원칙을 철저히 받들어 방우나 방과가 세자가 됐으면 오히려 이방원은 왕좌에서 완전히 멀어질 뿐이었다. 정변을 일으켜 세자를 바꿀 명분도 없을 뿐더러 방우나 방과에게 적자가 없어도 서열상 손윗형님인 방의와 방간이 있으니 그 다음 대에도 세자가 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43][45]

5.3. 용상을 향하여



5.3.1. 왕위를 빼앗다


[image]
이방원의 난으로 살해당한 정도전
결정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세자 이방석의 지지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태조 이성계는 일부러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해가며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사수하려 했지만,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망자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46]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의 대권이 외척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전주 이씨 문중의 종친, 고려의 구 세력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47]
그리하여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종친, 사병 혁파 등 정도전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 이들이 모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목숨을 빼앗고 세자 이방석도 죽여버렸다. 귀양을 보냈는데 이거이가 손을 써서 죽였다는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사실은 쿠데타 당일에 자비없이 그냥 죽여버렸다.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대의 중진이었던 이제도 이날 살해당했다. 물론 실록에는 '''"나는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것이다!"'''라고 기록됐지만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48]
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된 기록은 전반적으로 곡필이 심하다. 예를 들면 방원 측의 병력은 무기 수도 모자라서 부러뜨려 둘로 나눈 몽둥이와 창자루 든 군사 몇십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냥 발라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방석)가 친위대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려 하나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즉,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고 동원된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49]
또한,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이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이 실행되던 당일에 판만 짜 놓고 태평하게 남은의 첩실의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말이 안 되는 부분 투성이니 이때의 실록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오늘날에 알려진 것만큼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극이나 영상물을 보면 조선 건국 후 대놓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대립하고 부딪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태조 초기부터 실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방과가 아직 살아있던 방우를 제치고 방번, 이제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 척할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50][51] 방원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방원은 처음에는 동북면의 가별초를 받았으나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52] 방번에게 동북면 가별초를 넘겨주고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경계했다면 방우가 배제된 이후 장남의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계가 일개 무신일 때부터 보좌하여 공도 크며 중앙 군권을 쥔 실력자인 방과를 더 위협적으로 여겼으면 여겼지 방원을 집중 경계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권신이 아니라 국왕 태조의 비호 아래 모든 일을 추진한 총신이었다. 이성계와 정도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비슷해서 정도전이 힘을 얻은 것이지 정도전이 주도해서 국가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경우 태조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했다. 세자 책봉, 공신 책봉, 천도, 불교 정책을 전부 자기 뜻대로 한 임금이 왕권이 약할 리가. 따라서 정도전 일파는 사극에 나오는 것 마냥 종실 인사들과 대놓고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쿠데타 발생 석 달 전까지 저서(이때 완성한 것이 불씨잡변.)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태조가 1차 왕자의 난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다는 주장 역시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걸핏하면 골골대며 드러눕는 말년의 태조라면 모를까 당시 태조의 행보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죽기 직전에 딸까지 얻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태종의 반란군들이 제일 처음으로 들이친 곳은 정도전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술집이 아닌 태조가 있던 경복궁이었고 태조는 태종의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 구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이를 두고 와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중병은 아니어도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경복궁으로 쳐들어온다? 그러면 직접 반란 진압을 시도했을 수 있어 명분에서 한참 밀리고 '''방원의 군사들은 태조를 마주치는 즉시 살아있는 과녁이 되었을 것이다.'''
아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꼭 허약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 쓰러져 의식잃고 오늘 내일해야 자리에 눕는 게 아니다. 뭐 잘못 먹고 장염에만 걸려도 허리 한 번 못 펴고 화장실만 들락거려야 하고 멀쩡한 사람도 숙취 앞엔 장사없다. 그리고 체력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치통이나 편두통으로도 사람이 드러눕기도 하며, 건강한 사람도 운동 안하다가 무리해서 허리를 삐거나 등에 담이 걸렸을 땐 일어나려고만 해도 통증이 심해서 화장실도 자기 맘대로 못간다. 게다가 당시 이성계의 나이가 이미 60을 넘었다. 그 시절에 그 나이라면 중병까지는 아니라도 며칠 자리보전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단지 생명과 의식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지병이니까 국가 비상 사태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의료 수준 상태에서 나이든 몸으로 나중에 회복한 것만 봐도 태조가 상당히 건강한 사람인 건 맞다. 앓아 눕게 된 타이밍이 정말로 좋지 않았을 뿐이다. 대중 매체 등에서는 대체로 이 와병설을 받아들인다.

5.3.2. 연이은 찬탈극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계승자 자리를 넷째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탐내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노리자 이방원은 이들마저 가차 없이 진압하는 무자비함을 보이며 자신의 권력을 지켜냈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 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쪽은 거의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이방원의 압승. 다만 역시 방번, 방석과는 달리 동복 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악당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대인적 면모(?)를 과시한다. 사실 동복 형제라는 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적인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 동생들과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여기서 동복 형제인 방간까지 죽였다간 이방원의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게다가 본인의 이미지로 끝나지 않고 건국 초기인 조선 왕실 자체의 이미지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훼손될 수 있었다. 이방원으로선 숙청은 하더라도 형님의 목숨만은 살려야 자신과 왕실에게도 정치적, 대외적 이득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동복 형제라는 덕을 봐서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으나, 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방원과 이방원의 가족을 공격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선 방간의 아들 맹종은 혐의가 혐의인지라 태종이 상왕 시절 사사하였고... 라고 적었지만, 이맹종은 태종 사후 세종이 자살하라고 어명을 내려 죽는다. 이방간의 자손들은 숙종 때에 복권되기 전까진 대대로 역적의 후손에 폐서인으로 취급돼서 평민과 똑같이 군역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한편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5.3.3. 세자에 책봉되다



'''작위'''
정안공(靖安公) / 왕세자(王世子)
''''''
방원(芳遠)
''''''
유덕(遺德)
'''세자 책봉'''
1400년 2월 4일
'''국왕 즉위'''
1400년 11월 13일
세자였던 형 방과가 즉위한 후 이방원 본인은 세자가 되었다.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그냥 무시한다.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 삼으면 되지 뭐 그런 걸 가지고."'''라며 넘긴다.[53]
조선왕조실록의 실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사실 정종과 태종의 나이는 겨우 10살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다이묘들이 자식이 없어서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사례는 꽤 흔했다. 결국 방원이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다. 아마 형인 정종은 어차피 자신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니, 위안으로 삼으려고 동생 방원을 자신의 아들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54] 얼마 있지 않아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아마도 임금 자리에 올랐다고해서 자기 야심을 부리려고 했다면 이방간과 같은 결말을 맞았을지도 모른다.혹은 정치적 판단력이 먼치킨인 이방원답게 정종이 야심이 크지 않다는걸 알고 이미 알아채고 내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실록에서 정종은 정치업무는 보지 않고 열심히 놀았다고 한다.
그래도 태종은 동생으로서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자신이 즉위한 뒤에도 정종을 형이자 상왕으로 톡톡히 대접했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같이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있을 정도이다.

5.4.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5.4.1. 사병 혁파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모조리 없애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바로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해서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병만큼은 철저하게 분쇄하고 인원을 흡수하여 모조리 국가 소속 군대로 만들어 버린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55][56] 정도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삼군부사로서 사병 혁파를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다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죽을 때까지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 사실 정도전은 뛰어난 사상가이자 이념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57]

5.4.2. 관제 정비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되는 대간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으며,[58] 전제 개혁도 이 시절에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했고 틈만 나면 때려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59]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좀 자제시켜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다.[60] 우선 본인부터가 간관들의 비판이나 사관들을 대단히 귀찮아했음에도 이렇게까지 두둔해 가면서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을 보면 명군은 명군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삼사가 확립된 것은 태종 대이다. 관리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이 태종이기 때문이다.
사실 태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 데다 코드까지 환상적으로 들어맞는 정도전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도적인 면으로는 정비된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이후 군약신강의 틀이 되는 재상 중심의 정치 이론(군신공치)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재상 중심의 정치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이 바로 태종이다. 이 때문에 옛 고려의, 조선과는 정치적 성향이 그다지 맞지 않는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해 가면서 정국을 꾸렸음에도 개혁안들을 보면 상당히 과감한 것들이 많다. 고려 시대의 도평의사사가 '''비로소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치되는 등 국가 운영 방식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고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물론 정도전을 때려잡은 태종답게 의정부에 자문기능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육조를 국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5.4.3. 경제 정책


중국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다. 결과는 대실패였다.
당시 조선은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61]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대왕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대실패. 이 화폐 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비록 화폐 개혁은 실패했으나 '''단군 이래로 오늘날까지 국가 재정이 꾸준히 흑자를 기록한 것은 태종 때가 유일하다.'''[62] 때문에 다음 대의 왕인 세종이 대규모 사업이나 개혁을 시행할 수 있게 한 기본적인 재력을 마련한 것도 어떻게 보면 태종이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단종김종서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쉽게 무너진 이유도 세종 때 대규모 사업을 많이 벌여서 국가재정이 다 떨어져 단종의 왕권이 약해진 까닭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후에 훈구파 신하들과 같이 경제정책에 대해 몰두하곤 했다.[63]

5.4.4. 외척 말살


태종이 공신들을 숙청할 때에는 죽이기보다 적당한 곳으로 귀양을 보내놓고 잊어버리거나(…) 직위를 강등시키는 등, 간접적인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왕실의 외척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다 죽여버렸고, 나중엔 후계자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 가문마저 박살을 내버렸다.
죽인 사람 자체는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에게 피도 눈물도 없는 대숙청을 벌인 군주라는 이미지가 있는 이유가 바로 외척 말살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숙청은 대체로, '평소 절친한 인척들을 갑자기 불문곡직하고 잡아들인다 → 뜬금없이 역모 혐의를 뒤집어 씌운다 → 혹독하게 고문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낸다 → 일사천리로 죽인다'는 과정으로 진행됐다.
정작 유배형에 그쳐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것은 실제로 잘못한게 있는 이거이와 김한로 정도였고, 자기가 보기에 나중에 왕실을 위협할 권세를 가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가문이라면 아무 잘못이나 욕심이 없어도 가차없이 박살을 내놓았다.

5.4.4.1. 신덕왕후 강씨 격하

아무래도 외척의 발호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64] 실제로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사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강씨를 너무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정릉 근처의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최측근이었던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65] 신덕왕후의 능 근처에 공신들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파하지도 않다가,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신덕왕후를 대하는 예우를 왕비에서 후궁의 격으로 완전히 격하했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있었지만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한 술 더 떠서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 그리고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할 때 쓰이는 광교의 재료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한 정식 부인이었고, 이 때문에 신덕왕후는 왕비로 정식 책봉이 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66] 신덕왕후는 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무덤 또한 능으로 복구되었다.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록에 따르면 정릉이 태종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당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이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근거렸는데 훗날 250여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다고 한다. 이때도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 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정도전과 손을 잡고 막내 아들 의안대군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 이방과가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울 때, 태종 본인은 도성에서 아버지의 정적들을 견제 및 제거해가며 나라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일등 공신이다. 태조가 세자로 장남 이방우나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권좌에 대한 야심이 강한 태종이라 해도 자기가 왕위에 오를 명분을 찾는 데 엄청 애를 먹었거나, 아니면 끝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장남 이방우는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장자 승계 원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적장자였고,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태종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형들도, 자신도 아닌, 정작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막내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빌미로 첫째 부인의 아들들을 제거하려고 드니 그 적개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하다.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은 내게 조금의 은의(恩義)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7]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건너 뛰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정통성도 없이 세자가 된 것이 된다. 정통성 문제가 엮여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사적인 원한이라고만 단정짓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

5.4.4.2. 여흥 민씨 숙청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설도 있다. 양녕대군 이전에 태어난 자식들은 요절한 까닭에 원경왕후 민씨가 "이번엔 아이를 외가에서 기르면 괜찮지 않을까" 하여 친정에서 양녕대군을 자라게 하였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이 때문에 양녕대군은 외가인 민씨 집안의 입김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태종이 민씨 일문을 숙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양녕대군은 외숙부들이 숙청될 때...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양녕대군이 폐세자로 처리되고 세종대왕이 뒤를 이었으니 어찌보면 민씨 일가는 억울하게 숙청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양녕대군이 좀 더 일찍 세자에서 물러났다면 굳이 민씨 일족을 숙청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68]
그리고 양녕대군의 혼인과 관련해서 민씨 일족이 본의 아니게 태종에게 위기감을 느끼도록 한 사례가 있다. 양녕대군이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기 전, 명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의 사신과의 논의가 영 진전이 되지 않자 흐지부지되는 듯 했고 태종도 이를 포기한 채 위에 언급한 김한로의 딸과의 혼인을 진행했다.
그런데 공부, 이현 등이 민제를 찾아가서 명 공주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민제는 태종의 압력에 못 이겨 사직한 상태라서 자신은 감히 주상에게 아뢸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민제의 아들들도 "말할 자신이 없다." 하며 논의 자체에서 빠지려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안[69] 태종은 사사롭게 국가의 큰 일에 관여하려 했다며 공부와 이현을 처벌하였다.[70] 겉으로는 단순한 소동이었지만 이는 태종에겐 민씨 가문의 위세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 사건이었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민제와 아들들은 논의 자체를 버거워하며 신중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왕세자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정 문제를 국왕이나 현직 대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씨 가문에서 논의하려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위상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5.4.4.3. 광산 김씨 숙청

양녕대군이 혼인을 할 때, 즉 첫 번째 세자빈을 고를 때도 태종은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인 김한로였다.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를 한 수재이긴 했지만 조선 건국에 딱히 세운 공도 없고, 확고한 신념이나 정치적 야심도 없을 뿐더러 처세술에도 잼병인 책상물림형 관료였다. 남의 말을 빼앗아 타거나, 남이 사냥에서 잡은 사슴을 자기 집 개가 물어 죽인 것이라며 빼앗으려 드는 등 추태를 부렸으나 일처리를 잘한 흔적은 딱히 없다. 옹졸하지만 큰 사고를 치진 않는 소인배라 할 만한 사람.
태종이 이런 인물을 굳이 임용한 이유는, 그가 훗날 국구(임금의 장인) 자리에 오른다 해도 딱히 권세를 휘두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또 오늘날 고시 합격생들끼리 동기로 묶여 교류하곤 하는 것처럼, 이때에도 같은 기수 과거 합격생들끼리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김한로뿐 아니라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 가운데 많은 수가 고관에 임용되었고 인간적으로도 태종과 젊을 때부터 가까웠다. 이 점에서도 김한로는 태종의 친위 세력이 되기에는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 능력이나 성품과는 별개로 세자의 장인씩이나 될 수 있었다. 태종의 과거 동기들은 주로 간관으로 임명되거나, 군사와 관련된 사무를 맡아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왕권의 강화와 관련이 있는 방책이다. 김한로가 이런 케이스의 대표주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71], 그는 딸을 세자빈으로 맞이한 지 단 이틀 뒤에 좌군동지총제에 임명되고 5년 뒤인 태종 12년에는 아예 중군도총제가 된다. 모두 고위 군직(軍職)이다.
이렇듯 김한로는 국왕이 병권을 장악하려는 목적에 유용하게 쓰인 인사였지만, 김한로 역시 외척 숙청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쫓겨났다. 자기 사위(양녕대군)에게 불륜을 주선하는 등 난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손들까지 전부 영구 공직추방 및 등용금지 크리를 먹어서 정계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옛 친구였다가 사돈을 맺은 김한로가 양녕대군의 비행을 막지 않고 오히려 부추긴 정황에 태종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 김한로는 나와 급제(及第)의 동년(同年)이요, 서로 안 지도 가장 오래된다. 태조(太祖) 때에 있어서는 침체(沈滯)되었다가, 내가 즉위하자 이에 승선(承宣)을 제수(除授)하여서 재보(宰輔)에 이르렀고, 또 혼인(婚姻)을 하였는데, 금일에 이에 이러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 5월 15일 갑자 1번째기사

직첩만 거두고 유배로 그쳤으니 숙청당한 외척들 중에서는 그나마 온전한 편이었다. 억울하게 정치공학에 입각해 숙청을 당했다기보다는, 양녕대군을 아꼈던 태종의 배신감이 강하게 작용한데다 김한로 자신이 행동을 잘못했기에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인상을 준다.

5.4.4.4. 청송 심씨 숙청

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집안을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실권자였던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떨어졌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복권되었다. 이들을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들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했다. 즉, 정리하자면 딸이 조선의 정실 왕비이고, 사위는 왕인데 정작 그 장모와 처남들은 변방에서 노비로 굴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만든 사돈이 죽고도 친정을 시작한 사위가 자기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선뜻 고치질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 뒀다는 상황.
외척인 민씨 형제나 이숙번과 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이들은 왕권에 대해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 숙청은 조금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다. 심온도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와 같이 집안 배경이 좀 좋은 것 외에는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행정 관료였지 주변 세력을 결집시켜 파벌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72] 되려 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73]
그나마 이 시기의 세종은 그냥 똑똑한 왕자였을 뿐, 권좌 코스가 예정된 세자가 아니었으니 별 일 있겠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양녕이 폐출되고 덜컥 자기 사위가 세자가 되어...
심온 숙청 직후 박은 등이 소헌왕후도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태종이 거절했다. 이미 소헌왕후는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나름 좋은 며느리였던 데다가[74] 친가가 박살나 왕후로서 국정에 간섭할 힘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세종이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새 왕비의 가문도 또 어느 정도 박살내야 하는데다가[75]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소헌왕후의 자식들 때문에 정통성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으로선 소헌왕후의 폐출은 막아야 했던 것이다.
다만 소헌왕후로서는 가뜩이나 임신 중에[76][77] 친정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니 오히려 폐출당하고 싶은 심정인데도 막아버렸으니 시아버지 태종이 배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78] 소헌왕후가 불굴의 의지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기에 망정이지, 보통 여인이라면 홧병으로 유산하고 그대로 병사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79] 물론 그렇게 되면 태종 입장에서는 빅엿을 먹은 기분이겠지만.[80]
용의 눈물에서도 태종은 심온 일가에 대한 숙청을 멈춰달라는 원경왕후 민씨와 아들 세종 이도의 청을 묵살하고 숙청 작업을 그대로 진행시키면서도, 소헌왕후를 폐서인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 또한 거부하는데 결국은 폭발해 "나더러 이런 사람 잡는 짓거리를 또 하란 말이냐!"면서 소헌왕후를 폐비시키라는 신하들에게 격노를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태종의 사돈들 중에서 숙청을 피한 것은, 불교를 너무 좋아해서 아예 계승에서 배제된 효령대군과 요절해버린 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였다.[81]

5.4.5. 공신 숙청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손자 세조와 가장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으로,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을 싹 숙청해 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숙청했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에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82] 이숙번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복권이 안 되었고, 세종대왕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기록 보완이 완성되고 나서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83]
그래도 태종이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손에 피를 많이 묻혔을지언정, 공신 숙청에 한해서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태종의 치세에는 사화나 환국 같은 대형 사건들은 없었고,[84] 태종은 살생은 하되 피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숙청의 방식도 살생보다는 유배를 보내거나 실권을 빼앗는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썼다. 여타 다른 공신들도 직접 숙청하기보다는 나이 등의 이유로 품계는 높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식으로 그만두게 하였다.[85] 반면, 명나라의 시조 홍무제는 중원을 통일한 이후 호남의 옥을 필두로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1등 공신 이선장을 비롯한 수많은 공신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죽였는데, 최대 9만 명 정도가 처형되거나 연좌되어 유배 혹은 관노로 떨어지거나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86]
여기에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온갖 구실로 문사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며 재상직을 폐지하고 황제가 기분 내키는대로 시행하는 태형인 정장을 불문법화하는 등 황권에 걸리적거린다 싶어 제거한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더구나 그 뒤를 이은 영락제 또한 태종과 비슷하게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에 비하면 집권의 명분이 지극히 부족했고,[87][88] 끓어오르는 반대 여론을 십족을 멸하는 대숙청을 통해 잠재워야 했다. 살생을 해도 제거 대상을 최소한으로 한정시키고,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간언과 사관같은 언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지켜준 태종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대신들이 '전하께서도 이들을 귀찮아 하겠지' 하고 대신들이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도 탄핵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업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태종에게 간했는데,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명나라의 홍무제는 숙청을 너무나 많이 한 나머지, 역으로 후계자인 건문제를 봐줄 후견인이 없어져버려 제대로 된 숙청에 실패한 반면, 태종은 직접적인 위협 대상만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의 주요 정승들이었던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은 모두 세종대왕 이전부터 있던 관료들이다. 그야말로 아들에게 알짜배기 인재들을 물려준 셈. 거기다 문제가 될 것 같은 이들은 진작에 태종이 다 치워버렸으니 금상첨화.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하륜조영무 정도였다. 이 중 조영무는 처신을 철저히 잘해서 피했고,[89] 특히 하륜은 20세 연상의 고령이라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했는데 여러 삽질을 일으켜도 태종이 억지까지 부리며 보호했다. 하륜은 태종 16년, 조영무는 태종 14년에 태종보다 일찍 사망하였다.[90]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만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이 학살이나 피의 대숙청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조선시대 왕이 친정한 유일한 난인 조사의의 난에도 주모자급 십수 명 정도만 처형하는 자비로움을 보여 주었다. 이 정도의 난이면 관련자의 구족을 멸하는 게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91] 오히려 사람을 죽인 숫자는 세조, 연산군, 중종, 선조[92], 광해군, 숙종, 영조 때가 태종 때보다 훨씬 많았다. 그리고 이들은 태종보다 더 많이 죽였음에도 '''태종보다 안정적인 왕권을 얻지는 못했다.'''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고 벌인 일이지만, 손에 너무도 많은 피를 묻힌 나머지 성군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본인도 말년인 상왕 시절 최측근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과인은 덕이 없으므로..."라고 자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93]
조선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훈구파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파들을 불러들였다가 역으로 사림파들에게 쥐락펴락 당하며 좋아하는 매 한 마리 마음대로 날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94] 결과적으로 이는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5.4.6. 지방 행정


또한 태종은 지방 행정 조직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팔도다. 태종은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어 태종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으며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했다.

5.4.7. 대명 외교


애초에 제2차 요동정벌[95]에 참여하여 명나라를 침략할 뻔 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 전부터 태종 본인이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96] 홍무제영락제도 모두 접견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와는 서로 보위 계승자의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아래와 같이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97]

태종이 연부(燕府)를 지날 때는 연왕(燕王) 【즉 성조 황제.】 이 친히 대해 보았는데, 곁에 시위하는 군사가 없고 다만 한 사람이 모시고 서 있었다. 온순한 말과 예절로 후하게 대접하고, 모시고 선 사람을 시켜서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였는데, 극히 풍성하고 깨끗하였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이 서울 〈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태종이 명나라 황제의 우대를 받고 돌아오다. #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 기간이 겹친 시기였던 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사대주의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설왕설래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만한 요소들은 홍무제 대의 증거까지 들이대며 철저히 막았다. 명이 주도하는 질서에 앞장서 참여했고, 영락제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어느정도 작용했는지 조공 무역을 '''1년에 3회'''[98]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99]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또 여러 신하에게 이르기를,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한 자는 항상 스스로 병서(兵書)를 숙독(熟讀)하는가? 숙독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들으니, '''황제(皇帝)가 안남(安南)을 정벌할 때에 안남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고 대적할 자가 없었다 한다'''." 하니,

공조 판서(工曹判書) 이내(李來)가 대답하기를, "'''천하(天下)의 군사로 이 조그마한 나라를 정벌하니, 누가 감히 대적할 자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군사는 정(精)한 데에 있지 많은 데에 있지 않다. 어찌 한 가지만 가지고 말할 수 있는가?''' 또 안남 국왕(安南國王)이 황제에게 달려가서 고(告)하였으니, 황제의 거사(擧事)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황제가 본래 큰 것을 좋아하고 공(功)을 기뻐하니, '''만일 우리 나라가 조금이라도 사대(事大)의 예(禮)를 잃는다면, 황제는 반드시 군사를 일으켜 죄(罪)를 물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한편으로는 지성(至誠)으로 섬기고, 한편으로는 성(城)을 튼튼히 하고 군량(軍糧)을 저축하는 것이 가장 오늘날의 급무(急務)라고 여긴다'''."

편전에서 병조 판서 윤저 등과 궁방 대책에 관해 의논하다. #

하지만 마냥 태종이 명의 영락제와 사이가 좋았던것도 아니어서 여진족 관련 문제로 명과 충돌한적도 있었다. 조선 초기엔 여진 부족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과 명나라의 대립이 있었는데 당시 두만강 인근 변경 지역의 여진 부족은 조선의 지배를 받기로 했는데, 이 소식을 접한 명나라는 사신 '왕교화적'을 보내 여진족을 회유하였다. 그러나 그곳 여진족들은 조선을 섬기기로 회맹하며 맹약을 맺었다. 하지만 명나라는 이들 여진 부족에 대한 강력한 압력을 행사하였고, 결국 힘이 없는 약소한 여진 부족들은 대부분 조선의 질서에서 벗어나 명나라의 초유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노한 조선 태종은 곧바로 '보복 공격'에 나섰다. 길주도찰리사 조연이 이끈 1천여 명의 조선군 기병 부대는 올량합 부족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가옥과 논밭을 불태웠고, 수백여 명의 부족민을 참수, 이어 무기로 무장한 여진족 군사 160여 명을 포로로 잡아 또 참수하였다. 그러나 이는 명나라의 사전 동의를 받지 않은 조선군의 일방적인 토벌이었고, 태종도 이를 의식했는지 신하들과 대처 방안을 논의했다. 당시 태종은 자신의 상국인 명나라 황제를 속이기로 작정했고, 태종의 계책은 성공해서 외교적 문제로까지는 비화되지는 않았다.
이처럼 조선을 배반하고 명나라에 붙은 여진족들을 명나라를 속이면서까지 곧바로 토벌 할 정도로 태종은 명에대한 맹목적인 사대는 전혀 하지 않았다. 실제로 영락제가 베트남을 정벌하자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태종은 명에게 침공의 빌미를 주지않기 위해 지성으로 사대하면서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태종의 사대외교가 숭명주의가 아닌 냉철한 현실적 국익판단에 따른 실리외교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들이다.
그 외에 정도전제3차 요동정벌을 계획하던 시기는 명나라도 내부 사정으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정도전의 발안대로 했다면 요동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여서 좌절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긴하다. 그렇지만 영락제가 명나라 역사상 최고의 정복 군주였던 걸 생각해보면... 어차피 정벌해봤자 다시 빼앗겼거나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 태조요동 정벌을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가 여러 한계로 인해 다시 포기하고 철수했던 것을 알고 있던 인물이기에 그 역시도 요동 정벌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모를 리 없었다.

5.4.8. 여진 정벌


조선 최초의 여진 정벌은 태종에 의해 이루어졌다. 태종 즉위 이후 명은 조선의 북방에 건주위(建州衛)·모련위(毛憐衛) 등의 위소(衛所)를 설치하고, 오도리(吾都里)·올량합(兀良哈)·올적합(兀狄哈) 등 여진족 부족의 추장들을 위소의 수장으로 임명함으로써 조선의 영향력 내에 있던 여진족들에 대해 지배력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조선은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명의 관직 수여를 끝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1405년(태종 5) 유력 추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명의 건주위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파아손(把兒遜)은 모련위 지휘첨사(指揮僉事)로 임명되는 등 명의 관직을 받았다. 조선이 보복으로 여진족과의 무역을 일시적으로 단절하자, 이에 분개한 올적합(兀狄哈) 김문내(金文乃) 등이 1406년(태종 6)과 1410년(태종 10) 두 차례 경원을 침공하여 병마사(兵馬使) 한흥보(韓興寶)를 포함한 장병들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혔다. 출처
사건을 보고받은 태종은 즉각 올적합에 대한 정벌을 명하였다. 하륜(河崙)· 성석린(成石璘) 등의 정벌 반대가 있었으나, 태종은 조영무(趙英茂)· 유량(柳亮) 등의 찬성론을 따라 길주찰리사(吉州察理使) 조연(趙涓)을 주장(主將)으로 삼고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신유정(辛有定)·전 동지총제(同知摠制) 김중보(金重寶) 등을 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이끌게 하였다.
조연은 신유정·김중보· 곽승우(郭承祐)와 함께 원정군 1,150명을 이끌고 2월 29일 길주(吉州)를 출발, 3월 9일 모련위의 두문(豆門)에 도착, 모련위지휘(毛憐衛指揮) 파아손(把兒遜)과 아고거(阿古車)·착화(着和)·하을주(下乙主) 등 4명의 수장 및 여진족 160여 명을 죽였으며, 가옥을 불사르는 등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돌아왔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모련위의 핵심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출처
태종의 모련위 정벌은 단순히 약탈에 대한 징계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조선을 배신하고 명의 관직을 받은 여진족 세력들에 대한 보복전으로 이루어졌다. 정벌의 결과 여진족들이 조선을 불신하게 되고, 조선의 정벌에 대한 복수로 수 차례 조선의 변경을 침략하는 결과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모련위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으며, 건주위의 주요 세력이었던 동맹가첩목아는 조선의 원정군을 피하여 1411년(태종 11년) 오도리를 이끌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태종이 죽을 때까지 두만강 지역의 여진족 침입은 거의 사라졌다. 출처

5.5. 퇴위와 상왕



5.5.1.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


1418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양위의 뜻을 내비치면서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十八年騎虎, 亦已足矣)."'''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8월 8일, 세자에게 국보를 주며

참고로 조선왕조를 통틀어서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양위한 사람은 태종이 유일하다.[100][야사] 그런데 군권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세종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을 박살낸 것 때문에 그 당시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에서는 박은과 그의 가문 반남 박씨를 열렬히 비판하였다. 태종을 대놓고 비판할 순 없으므로 대신 심온 숙청을 주도한 박은을 비판한 것.[101] 또한 세종 즉위 초기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상왕이 되어서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놀러 다니려고 각지에 정자를 짓고, 좋아하는 사냥을 다니는 등 신나게 살았지만[102] 해야할 일은 꾸준히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명의 사신들이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도 했다.

"내가 나라를 부탁해 맡김에 사람을 잘 얻었으니, 산수간에 한가로이 노니기를 이처럼 걱정이 없는 자는 이 천하에 오직 나 하나 사람 뿐이다. 중국 역대 제왕의 부자 사이도 진실로 나의 오늘과 같지 못하였고, 고려 때의 충숙왕과 충혜왕 사이에도 또 비평할 만한 것이 많으니, 내 어찌 이 천하에서 뿐이랴. 고금에도 역시 나 한사람 뿐일 것이다."

내가 후계자를 아주 잘 골랐다. 나만큼 좋은 후계자를 얻은 사람은 중국에도 없었으며 고금에도 드무니 대단히 자랑스럽다는 말이다. 태종은 세종을 후하게 평가하는 말을 아주 많이 남겼다.

5.5.2. 최후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세종과 매사냥을 돌아온 직후 갑자기 몸이 안좋아지더니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원경왕후가 태종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며, 태종보다 2년 일찍 사망했다). 아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종에게 자신이 과거 유배를 보냈던 황희[103] 다시 불러 중히 쓰라고 충고하였고, 태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황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왕릉 중 헌릉만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과 모후가 저세상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대왕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 물론 태종도 생전에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에 절을 지으려고 하자 "거긴 장차 내가 들어갈 곳이고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데 절은 왜 짓냐" 라며 반발했던 것으로 보아 본인도 죽으면 원경왕후의 곁에 묻히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6. 가족관계


'''총 12남 17녀''' (9명 조졸)
'''원경왕후'''
신빈 신씨
의빈 권씨
장녀 정순공주
차녀 경정공주
아들(조졸)
아들(조졸)
아들(조졸)
3녀 경안공주
장남 양녕대군
차남 효령대군
3남 충녕대군
4녀 정선공주
6남 성녕대군
왕자(조졸)
5남 함녕군
6녀 정신옹주
7남 온녕군
7녀 정정옹주
8녀 숙정옹주
9녀 소신옹주
11녀 숙녕옹주
13녀 숙경옹주
16녀 숙근옹주
왕자(조졸)

5녀 정혜옹주
정빈 고씨
9남 근녕군
숙의 최씨
10남 희령군
숙의 최씨
11남 후령군,숙순옹주
선빈 안씨
소빈 노씨
8남 혜령군
12남 익녕군
12녀 소숙옹주
14녀 경신옹주
10녀 숙혜옹주
효빈 김씨
김씨
4남 경녕군
15녀 숙안옹주
알 수 없음
이씨
왕자 2명(조졸), 옹주 2명(조졸)
17녀 후령군, 숙순옹주(숙의에게 양육)


7. 인물됨과 일화




8. 평가 및 비교




9. 태종우




10. 대중매체에서




11. 관련 문서



12. 둘러보기


[image]
태종 상상화[107]

[1] 밑줄 표시는 1871년 고종이 추가로 올린 존호이다.[2] 밑줄 표시는 1683년 숙종이 추가로 올린 시호이다. 시호의 끝을 '○효대왕'으로 맞추기 위해 '광효'의 앞에 넣었다.[3] 정확히는 왕세제이다. 왜냐면 형인 정종이 왕이기 때문이다.[4] 대표적으로 자신을 왕으로 지지해 올려준 외척 일가의 세력과 세종의 비 소헌왕후 일가(나중에는 세종이 무죄방면)를 역모로 몰아 숙청을 하여 왕권 강화.[5] 물론 여기엔 단순히 이방원의 성질머리나 정몽주 살해 등 과격한 행태에 태조가 반감을 품은 것을 넘어선 복잡한 이유가 숨어있다. 그는 물론 다른 형제들, 심지어 친형제인 이방번까지도 제치고 세자로 책봉된 이방석의 경우 '''그나마''' 고려 구세력과의 연결고리가 적은 편이었기 때문. 사실 이방번-이방석 형제의 어머니 신덕왕후도 고려 명문가 출신이긴 했지만(...) 당시 왕자들 중 유일하게 혼인을 하지 않아 고려 구세력의 외척을 두지 않은 왕자는 그가 유일했다. 반면 왕자 시절 이방원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은 죄다 고려 구세력 중에서도 거물급 사람들의 딸들을 아내로 두고 있었다. 게다가 개국공신 중에서도 태조가 편을 들어준 정도전 등도 이방원을 밀지 않았던 것도 한 몫 했다. 덕분에 1차 왕자의 난의 구도는 사실상 태조 + 정도전 VS 이방원의 구도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보다도 더 결정적인 이유는 당시 태조의 '''생존한''' 부인이자 왕후였고 조선 개국에 많은 도움을 준데다 '''당시 왕실에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한 신덕왕후의 아들이 이방석이라는 점''' 탓이었다. 거기에 태조가 일단 신덕왕후의 아들을 세자로 하겠다고 먼저 찝어놨고 그 뒤에 정도전 등도 붙게 된 것이다.[6] 아이러니하게도 정도전의 경우 이방원도 세자가 될 가능성을 나름대로 열어놓은 입장을 취하기도 했지만, 윗선인 태조가 입장이 저러니 그 역시 신덕왕후 소생 아이들 중 방석 쪽을 추천했다.[7] 물론 어찌보면 이방원의 보위 등극 시나리오에 있어서 차라리 가장 어리고 외적 명분은 모자랐던 막내 방석이 세자가 된 게 다행이었다는 해석도 있다. 철두철미하게 장자계승을 세자 문제에 적용시키거든 이방원 앞에 형제가 꽤 많으니 왕위에 앉기가 보다 더 요원했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 세자 자리와 왕위를 탐내고자 한다면 동복형과 경쟁한 2차 왕자의 난보다 더한 것을 찍었을지도 모르고.[8] 고려 구세력과의 연결고리를 끊는다는 해석에서 봐도, 단순히 외척 파워로만 봐도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형제들은 아내의 외가/어머니(+ 외가) 때문에 후계서열에서 발목이 잡힌 셈이 되었다. 아내의 외가 쪽을 보자니 죄다 구세력들이고 어머니 쪽을 보자니 어머니 본인은 사망에 외척들도 계모의 외척보단 파워가 약했기 때문.[9] 이방원 입장에선 아무리봐도 아버지와 정도전 등의 일부 개국공신 파벌이 자신과 나머지 동복형제들을 토사구팽하는 것으로 여겨졌기에 행동에 나선 것. 구도상으로 봐도 이방원과 그의 동복형제들은 사실상 태조에게 토사구팽 당한 셈이 되었다. [8][10] 하여 킬방원이라는 별명이 널리 퍼져 있으며 이 검색어를 입력해도 이 항목으로 리다이렉트된다.[11] 여기에 더해 이덕일처럼 "태종의 제1업적은 세종"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제 뜻을 펼칠 환경을 완벽히 조성해놓았다[12] 실제로 이렇게 기반을 다져놨음에도 세종의 초기에는 신하들과 세종 간의 알력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13] 고려 시대 과거는 진입장벽이 조선시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유는 고려시대의 과거제도는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무과를 치르지 않았고 문과와 잡과만 치렀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니 경쟁률이 높을수밖에 없었는데 그 어려운 시험을그것도 불과 17세, '''현재 고1'''에 해당하는 나이에 붙었으니 보통내기가 아니었다.[14] 세종이 승하한 부왕에게 올리는 글이므로, 여기에 들어갈 휘는 세종의 본명인 '이도(李祹)'가 된다. 그러므로 비록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는 뒤에 오는 조사가 '은'으로 쓰여 있지만, '이도'를 적용하면 뒤에 오는 조사는 '는'이 맞는다.[15] 낌새[16] 즐거운 얼굴로 부모를 뵘.[17] 마지막 유언[18] 이방원[19] 이름인 '방원(芳遠)'을 갈겨 쓴 것으로 보인다.[20] 이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 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21] 때문에 피휘는 그냥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꽃다울 방(芳) 자는 8형제가 다 쓰는 돌림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멀 원(遠)자는 길 가다 발에 채일 만큼 흔한 글자여서 현실적으로 피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22]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23] 밑으로 동생 이방연이 있었으나, 태조 2년 환조의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조몰(早歿)”하여 원윤(元尹)으로 증직(贈職)하였다는 내용이 보여 개국 이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24] 이것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이냐면, 전국의 과거 응시자들 중 '''전국 10위'''의 성적이다. 그것도 불과 '''17세'''의 나이였다. 현대로 치면 고작 '''고1 나이에 고시에 붙은 격이다.'''[25] 이 당시 과거 시험의 최종 등급이 1~3등은 을과, 4~10등은 병과, 11~33등은 동진사로 구분되었다.[26] 오히려 조용하고 유약한 이미지가 강한 형 이방과야말로 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고려 말의 숱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27] 태조실록 태조 3년 갑술(1394년) 6월 1일 기사.[28] 태종은 조선 국왕 중 유일무이하게 친정을 한 왕이며, 사냥 덕후라서 기분전환을 위해 잔머리를 굴려 사냥을 나가려다 신하들이 말린 기록이 여럿 있다. 본인의 체력과 체격에 자신이 없다면 사냥애호를 하려고 들지 않았을 것이다.[29]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오른 적이 있지만 과거는 치르지 않았다. 이후 왕족 종친이 벼슬에 임하는 제도는 성종 대에 구성군(영의정 역임)을 끝으로 폐지되었...으나, 훗날 고종 때 중부(仲父), 즉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30] 무신 정변 시절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고려 시대에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차별은 상당했다.[31] 최충의 9재 학당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학 12도를 생각해보면 고려 시대의 과거는 아예 최고 수준의 사립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서는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이 사학들은 단순히 교육 수준만 문제가 아니라 좌주-문생 관계로 인맥을 쌓고 '족보'를 대대로 전해온 사학 출신 지공거, 즉 감독관과의 인맥 문제까지 엮여서 더더욱 공고한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있었으니 야만인 냄새 풀풀 풍기는 안변 촌구석에서 상경한 이성계로서는 이런 살벌한 경쟁을 자기 아들, 아니 손자라도 한 번은 뚫어볼 수 있을까 싶었을 것이다. 스승은 원천석으로 알려져 있다. 모 드라마를 근거로 정몽주 밑에서 배웠다는 루머도 떠돌지만 관련하여 드라마 이상의 근거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32] 방과의 경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투에 나섰던 전형적인 무인이다.[33] 지금으로 치면 중앙부처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국장급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아버지인 이성계가 최영과 함께 권신 이인임과 그의 잔당 제거에 동참하여 수문하시중이 되었다라는 것을 감안해봐도 어린나이에 꽤 높은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34] 훗날 이 이복동생들을 본인의 손으로 직접 죽이고, 계모인 신덕왕후는 그녀의 릉에 설치된 석물을 뭉개는 고인능욕을 시전했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라 하겠다.[35] 여말쯤 가면 국가의 기강 전체가 흔들리는 혼란상 때문에 3년상이라는 것을 제대로 지킨 사람이 별로 없었다. 굳이 말기가 아니더라도 고려시대에는 숭불 사상 때문에 유교의 영향력이 조선시대만큼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방원은 시묘살이까지 하면서 그 이름이 높아졌다.[36] 여기까지만 읽어도 세자 책봉 당시 이방원이 느꼈던 배신감을 잘 알 수 있다.[37] 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년 & 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년[38] 애시당초 이성계가 부상으로 잠시 리타이어한 상태에서 정몽주가 이성계의 당여들을 숙청하려 했을 때 당장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억지로 모셔온 사람이 방원이었다. 이후 태종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방원의 정치력과 판단력은 아버지 태조나 정도전보다도 위였다. 괜히 건국 직후 막강한 공신들 권력을 죄다 견제하고 세종이 마음껏 치세를 펼치도록 한 사람이 아니다.[39] 단지 아들이기 때문에 살려두기엔 이방원이 죽인 인물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40] 여섯째 방연은 20살도 되지 않아 죽었다.[41]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인간적인 면모들을 보면 정적들을 비롯해 왕권에 위해가 되는 이들은 누구라도 예외없이 숙청하는 냉혹한 모습을 보여줬을지언정 진짜 사이코패스였을 확률은 0에 수렴한다. 새국가 건설과 기틀 마련을 위해서 독하게 마음을 먹고 행동했다고 보는 것이 개연성있다.[42] 이는 태종이 만들어 놓은 사관을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태종은 정당화 과정에서 이러한 견해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이것이 수백 년 동안 국론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설이 되었다. 여말선초의 복잡한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과거의 선례가 많은 이런 종류의 설명이 좀 더 잘 와닿았을 것이다.[43] 세상을 떠난 순서만으로 봐도 얼핏 보면 태종이 가장 나중에 죽었으니 기회가 있었을거 같지만 가장 마지막에 죽은 회안대군 이방간의 경우 1421년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에 죽었다.[44] 아니면 1, 2차 왕자의 난 못잖은 내란이 벌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방원만 나서지 않고 다른 왕자들까지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45] 하지만 당시 정종 이방과에게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고 적자라 할 만한 아들도 없었다.(아들 자체는 많았지만 다 서자들 뿐이었다.) 물론 정종에게 정치적 능력과 기반(세력)이 있었다면 서자라도 태자로 세울 수 있었겠지만 애시당초 정종은 그런 게 전혀 없었다. 그렇다보니 설령 태조가 방석 대신 방과를 왕으로 세웠더라도 결국은 동생들 중 다음 왕을 고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44]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굳이 순서를 따지기 보다는 택현의 가능성이 크고 그렇게 되면 능력도 뛰어나고 지지자도 많은 방원이 선택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셋째 방의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넷째 방간은 2차 왕자의 난 당시 아버지와 형의 반응만 봐도...[46]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헤치도록 하고 석물을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아 버린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47] 본인이 와병 중이라 일선에 나설 수 없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구 세력의 불만으로부터 왕실을 보위해줘야 할 왕자와 종친들이 그들과 결탁해버려 왕실에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친위세력이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태조가 나서서 명분을 가져오고 반군의 사기를 꺾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48]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정변에서는 죽일 사람과 살려서 끌고 갈 사람까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원칙이다. 게다가 이제를 살려두면 후대에 문종의 사위인 정종이 문종의 하나뿐인 아들 단종의 복위사건을 도모한 것처럼 잡음이 생길 여지도 많았기에 본인의 승인이 없었다고 부인할 뿐이지, 이미 동의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도 이 기록을 언급할 때 '퍽이나 그럴 마음이 없으셨겠어.'라는 식으로 디스했다.[49]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반영했는데, 전자의 경우 이숙번이 이끄는 나무 몽둥이를 든 병사 수십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무기고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후자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 이끄는 병력이 이숙번의 원군으로 등장하여 숙위병들을 무찌르고 삼군부를 장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50]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51]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 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52] 태조 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53] 그리고 먼 훗날 경종 때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 경종 사후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다.[54] 이게 단순히 호칭에서 끝난게 아니라 훗날 정종이 사망하고 장례를 치를 때 태종이 아들 지위로 상주 역할을 맡는다.[55] 태종의 라이벌이었던 정도전도 사병을 혁파해야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하였다.[56] 이후 조선은 태종 ~ 문종 때 계속 군사력을 강화해 나갔다.[57]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 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했을 정도이다. 이는 정도전이 3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에 되어서야 다시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30, 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 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오히려 정도전에 가려졌지만 같은 동료였던 조준이 정치력이나 실무능력면에서는 끝판왕이라 불릴 정도로 정도전보다 뛰어났다. 게다가 외골수였던 정도전과 달리 비교적 온건한 태도로 일관해 별탈없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58] 태조 때, 세자빈이 쫓겨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유가 둘이 정을 통해서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대간에서 제대로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태조에게 간했다. 그러자 '''태조는 대로하여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것이냐?"라고 하면서 공신을 제외한 대간 전체를 죄다 유배보내버렸다.''' 이러니 대간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59] 오히려 태조 시절에는 거의 준 내관 취급이었던 사관의 대우를 격상시켜 준 것도 태종이다.[60] 이 점이 똑같이 종친들을 죽이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손자와는 다르게 태종이 명군이라 평가받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태종은 왕위를 향한 욕심 때문에 여러 사람을 죽였으나 동시에 나라를 위한 비전이 있었으며, 이를 관철시킬 카리스마와 정치력이 있었다. 설사 본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참아냈으며,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도 나라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으면 가차없이 내쳤다. 이 때문에, 세조 때와는 달리 태종 대에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재정이 흑자를 기록했으며, 다음 대에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나올 수 있었다.[61] 이는 당시 조선의 경제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교통로가 죄 황폐화돼서 다시 고치기가 너무 빡쎘기 때문이다. 본래 고려에는 원과 만주, 고려, 그리고 류큐와 왜를 잇는 국제교통로가 활성화 되어 있었으나, 흑사병으로 중심 국가인 원나라가 폭삭 망해버리고 교통로가 비활성화됨과 동시에 홍건적, 왜적이라는 한반도 전체를 털어버리면서 안 그래도 안 써서 묻혀가던 교통로가 완전히 파괴된다. 때문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시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에 민간 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금난전권 폐지이다.[62] 현대에는 상황적인 문제도 있지만 일부러 재정흑자를 내지 않는 측면이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정책적으로도 재정흑자는 경기위축, 즉 불황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세입과 세출을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에 흑자 재정이 실질적으로 막혀있으며, 어쩌다 남는 금액은 우선적으로 국채 상환에 써야 하고 정부예비비도 일정 수준으로 제한되고 있다.[63] 그래서 훈구파가 아닌 사림에 가까운 신하들은 주상이 너무 잡학에 몰두한다며 비판했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기도 했다.[64] 게다가 정릉이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65] 하륜은 자신의 사위들까지 동원하여 노른자 땅을 가장 먼저 자기 것으로 삼았다.[66] 태종으로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 신덕왕후는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장자계승의 원칙을 어기기까지 했다. 또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했으며, 그중 가장 많이 견제당한 사람이 바로 다섯 아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났던 태종이었다. 비록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에는 태조의 의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나,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자신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신덕왕후를, 태종으로서는 좋게 볼 수 없었다.[67]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봐서 제사만은 지내주겠다는 말이다.[68] 다만 양녕대군이 아닌 다른 왕자가 세자가 되었어도 왕권 강화를 위해 민씨 집안을 숙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민씨 집안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상당히 권력이 강한 공신들이었던 데다가 아예 원경왕후가 민씨 집안이다. 외척에 대한 경계심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했던 태종 입장에서는 권력이 강했던 외척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69] 이 일이 소문이 퍼져 김한로의 귀에도 들어갔는데 김한로도 은근히 자신의 딸이 세자빈이 된다니 좋았는지 이걸 듣자 형조판서에게 가서 하소연했고 형조판서는 다시 태종에게 가서 아뢰었다.[70] 다만 곧 공부와 이현은 다시 석방되었다.[71] 이런 인물이 이외에도 더 있는데, 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된 박습 역시 태종의 동기였다가 간관직을 거쳐 병조판서를 역임한다. 심온의 옥사에 휘말리면서 끝이 좋지 못했다는 것도 김한로와 닮았다.[72] 다만 심온의 가문 자체는 상당히 빵빵한 가문으로 그 아버지가 개국공신이었다.[73] 그러나 이와는 정 반대로 박은은 세종이 충녕대군이던 시절에 심온에게 '사위 관리 좀 잘 하라.'고 말했지만 무시했다고 한다. 박은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양녕대군에게 자꾸 딴지걸었기 때문. 이 말에는 '이대로 세자가 즉위하면 당신이 왕에게 무사할 것 같냐.' 혹은 '충녕대군께서 왕이 되면 태종께서 당신을 가만히 놔둘 것 같냐.'는 의미다. 이를 두고 심온이 자기 사위가 왕이 되는 걸 보고 싶어했다는 해석도 있다.[74] 그 남편에 그 아내라고 세종대왕이 조선에서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았다면 소헌왕후는 최고의 왕비로 평가받았다. 더 말이 필요한지?[75] 간단히 말해서 폐출 후 새 왕비를 들이면 또 숙청 그리고 다시 또 폐출하면 또 숙청 말 그대로 폐출-숙청-폐출-숙청의 무한루프의 시작을 끊을 수 있었다.[76] 당시 세종의 넷째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소헌왕후는 일생일대의 몇몇 사건들이 임신중에 벌어졌다. 한양에 대화재가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77] 그 아버지, 그 어머니의 자식들이라고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의 자식들은 제법 능력이 괜찮았다. 너무 뛰어난 나머지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정도.[78] 물론 또 국모의 자리에서 내려오면 어떨지는 안 봐도 뻔하다. 농담이 아니고 태종에게 당한 건 고작(?) 심온이 사사되고 일가족이 관노가 된 것인데 그나마도 이것은 어쩌면 소헌왕후가 왕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로 유정현이 죽자 황희와 이직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왕비의 일가족'''이 관노인 게 말이 되나요? 사면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했고 세종도 이를 받아들였다. 달리 말하자면 소헌왕후가 왕비의 자리를 유지하지 않았다면 소헌왕후의 일가족들은 관노로 삶을 마쳤을 것이며 본인도 아무래도 한때는 왕비였으니 재혼은 꿈도 못 꿀 테니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했을 것이며 나중에라도 궁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다시 궁으로 돌아오긴 어려웠을 것이다. 이 이유는 소헌왕후를 폐출하려면 태종의 명령이 있어야 하는데 세종이 이를 뒤집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사면 때처럼 "실은 선왕의 진심은 달랐다."라고 하기도 뭣하고 더욱이 그 시점에서는 이미 세종은 새 마누라가 있었을 것이다. 즉, 전 왕비를 다시 맞이하려면 새 왕비가 죽기를 기다리거나 쫓아내거나 해야 한다는 것. 물론 후계구도도 왕창 개편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개판이 되는건 덤 결국 당장은 힘들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왕비 자리를 유지하는 게 유리했을 것이다.[79] 소헌왕후 입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명문가 딸로 태어나서 왕위 계승과는 상당히 멀어보이는 왕자와 결혼했는데 갑자기 세자가 되고 그 3개월만에 왕이 되어 자신의 신분이 불과 1년도 안되어 일개 왕자의 부인에서 왕비로 올라갔는데 그 다음 1년 사이에 시아버지가 아버지를 사사시키고 자신의 가족들을 관노로 보냈다고 쳐보자 그리고 소헌왕후가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걸 안다면?''' 그럼 엎친데 덮친 격이다.[80] 조선시대의 왕에게 왕비는 단순히 아들 낳아주는 기계가 아니라 내명부의 수장이기도 했기에, 왕은 아무리 싫다 해도 왕비를 얻을 것이 거의 의무이다시피 했다. 훗날 영조가 60 넘은 나이에 정순왕후를 맞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문종을 제외한 조선의 역대 왕들은 왕비가 일찍 죽으면 전원 예외없이 재혼하여 계비(두번째 왕비)를 맞아들였다.(예외적으로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후에도 새 왕비를 맞지는 않았다.) 태종쪽으로 돌아와 보면 소헌왕후가 죽어버리면 기껏 소헌왕후의 친정을 개작살냈더니만 덜컥 왕비가 죽어서 다시 왕비를 맞아야 하고 그 왕비의 친정을 개작살내야 한다는 심히 뒷골이 당기는 상황이 온다. 더욱이 이 시점에 이르면 "전 왕비 친정을 박살내서 전 왕비가 죽게 했는데 새 왕비 친정을 박살내서 새 왕비를 죽게 할 셈입니까?" 라는 반대론이 나올 수도 있으니 말 그대로 총체적 난국. 게다가 인륜상으로도 결국은 시아버지가 며느리네 집안을 박살내 며느리를 죽게 만든 것이니(그것도 며느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결코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81] 성녕대군의 처가의 경우에는 성녕대군이 너무 일찍 죽어서인지 좀 많이 우대받았다. 세종 때 바뀌긴 하지만 태종 때만 해도 사위는 군에 책봉되는 등 나름 우대받았다.[82] 감싸준 것도 대개 전반부 한정이다. 이 거만하다는 죄목에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큰 사건이 있는데, 이숙번이 사는 집 앞으로 길이 놓인다는 걸 안 이숙번이 길길이 날뛰며 태종의 형님이자 2대 국왕인 정종이 사는 인덕궁 앞에 길을 내라고 반협박을 가해 결국 정종이 물러서며 인덕궁 앞에 길이 났다. 왕권을 건드리는 짓을 절대 용납 안 하던 태종이 나중에 이숙번을 숙청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83] 그래도 세종대왕은 이숙번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세종대왕은 선왕인 태종이 내렸던 결정들은 웬만해선 존중했다.) 경기도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이숙번에게는 조금은 다행이었는데 원래의 유배지는 경상도였다. 유배지는 죄의 경중과 이전의 공적을 고려해 도읍지인 한양과 얼마나 가까울지, 멀지가 결정된다. 과거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마지막엔 유배지가 제주도로 옮겨진 것만 보더라도 이숙번의 유배지가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보다 도읍지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 것은 그의 명예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84] 오히려 후대의 영조 31년에는 무려 총 200명이 죽는 대형 옥사가 터진다. 이미지가 그렇지 죽인 숫자 자체는 태종이 더 적다. 차라리 태종은 자비로울 지경. 물론 중후반대로 가면 태종과는 사정이 약간 달라지지만.[85] 대표적으로 태종의 공신이었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실권을 상실하였다.[86] 물론 이는 홍무제가 중국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역대급 흙수저 출신 황제이다 보니 자신을 무시하는 기존 권력층을 때려잡아 왕권을 확보해야 할 이유도 있었다[87] 애초에 1차 왕자의 난은 잘못된 왕위 계승 문제가 주 원인이었고 2차도 태종이 유도한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어쩄든 방간이 선빵을 때린 거라 명분이 있었다. 문제는 영락제 쪽은 간문제가 선황의 적장손이다보니(조선으로 옮겨서 보면 이방우의 장남이 왕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명분에서 딸릴 수밖에 없다.[88] 다만 영락제는 건문제가 왕족들을 숙청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제거하려 해서 발악을 한 것이긴 했다. 명분 이전에 목숨이 날아갈 처지였던 것. 그런데 생각 외로 황제 측이 전력은 빵빵했어도 그 전력을 운용할 장수가 없고(전부 홍무제가 숙청했다) 건문제도 우유부단한 면이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89] 사관은 대개 무신들을 깔보기 쉬운 문신인데도 조영무의 졸기에는 '소박하고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라고 평가했다.[90] 다만 그렇다고 해도 하륜은 어떻게 보면 태종의 예상보다도 오래 살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앞서 하륜은 태종보다 20세 연상이었는데 그 하륜이 죽었을 때 나이가 70세로 당시 시대로는 60세부터는 죽어도 "죽었다고? 살만큼 살았네" 라고 넘어갈 나이인데 그 나이에서 10년을 더 산거다.[91] 단 구족은 중국에서 벌어졌고 조선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안 했다.[92] 기축옥사 때 무려 1000여명이 희생되었다. 지금은 그것이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지만[93] 물론 역대 왕들은 죄다 "내가 덕이 없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야 했다는 점은 유념해 두어야 한다.[94] 물론 성종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추문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95] 고려는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오녀산성을 비롯해 '''아주 잠깐 요동을 점령하였다.''' 이 때 큰 활약을 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도 관련이 있다.[96]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97] 심지어 나중에 성조로 고쳐지기는 했지만 영락제가 처음 받은 묘호가 태종이었다.[98] 이를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로 보는 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실제로 명과의 조공 무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서양 열강의 동방으로 손을 뻗기 이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강대국이었기에 조공 무역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이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황제국으로서 설마 빈손 대접을 할 거냐고 은근히 압박하는 거라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줘야하는데, 이 대부분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품이나 발전한 물건들인지라 조선은 이걸 받아서 자체적으로 발전에 필요한 재료 및 국고로 활용이 가능했다. 쉽게 비유하면 설날에 조카삼촌에게 세배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세뱃돈을 두둑히 주는 것과 같다.[99] 명의 입장에서는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에는 조선에게 조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했을 리가...[100] 형식상 스스로 양위한 왕은 태조, 정종, 태종, 단종, 세조, 중종, 고종 총 7명이 있었다. 그 중 태조와 정종은 태종의 무언의 압박으로 자의 반(권력에 대한 회의와 환멸) 타의 반으로 어쩔 수 없이 물려줬고, 세조와 중종은 죽기 하루 전에 물려줘서 사실상 양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인해 일본이 강제로 쫓아냈다. 단종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야사] 즉위식 때 세자인 충녕이 아직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세자가 사용하는 양산을 집어들었는데, 태종이 굳이 왕의 양산을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주상, 이 조선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감격하여 엎드려 통곡했지만, 충녕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되었음을 알고 위엄을 지키기 위해 울음을 꾹 참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01] 황희에 대한 비판이 올라오자 "정승이라고 다 완벽하지는 않았다. 하륜은 욕심많고 박은은 아첨하기 좋아하고 이원은 이(利)만 알고 의(義)는 모르는 인간이었다." 라고 반박했다. [102] 게다가 100간에 달하는 집을 네 채나 짓고 며칠 이 궁 또 저 궁 옮겨다니며 살았는데 몇몇 이들에게는 안 좋게 보였는지 누구는 "저렇게 놀고 사냥하고 자빠졌으니 우왕꼴이 날 것" 이라 말했다가 참수되기도 했다.[103] 양녕대군 문제로 인해 유배보냈다.[104] 1408년, 태종 8년.[105] 1433년, 세종 15년.[106] 왕위를 노리는 살얼음같은 정치판을 직접 플레이해보면 이방원의 정치 감각에 다시금 감탄하게된다.[107] 말 그대로 상상화다. 실제 생김새는 태조익안대군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다. 다만 이게 익안대군 초상화보다 훨씬 미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