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조선)

 



'''정종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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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고려국사'''
태조 이성계

'''정종 이경'''

태종 이방원


'''조선 제2대 국왕
정종 | 定宗'''

[image]
정종 후릉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묘호'''
'''정종(定宗)'''
'''시호'''
'''조선'''
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
(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
공정(恭靖)
'''출생'''
1357년 7월 18일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동 이성계 사저
'''즉위'''
1398년 10월 14일 (음력 9월 5일)
조선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사망'''
1419년 10월 15일 (음력 9월 26일)
(62년 2개월 28일 / 22,733일)

조선 한성부 인덕궁 정침
'''능묘'''
후릉(厚陵)
'''재위'''
'''조선 왕세자'''
1398년 9월 ~ 1398년 10월 14일
'''조선 국왕'''
1398년 10월 14일 ~ 1400년 11월 28일
(음력 1398년 9월 5일 ~ 1400년 11월 13일)
(2년 1개월 14일 / 775일)

'''조선 상왕'''[1]
1400년 11월 28일 ~ 1419년 10월 15일
(음력 1400년 11월 13일 ~ 1419년 9월 26일)
(18년 10개월 17일 / 6,89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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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全州)
''''''
방과(芳果) / 경(曔)[50]
''''''
광원(光遠)
'''공호'''
영안공(永安公)
'''전호'''
인덕전(仁德殿)
'''부모'''
부친 태조 고황제, 모친 신의고황후
'''왕비'''
정안왕후

1. 개요
2. 조선 건국 전
3. 조선 건국 후
4. 재위 기간
4.1. 양위 후
5. 가족
5.1. 효성과 우애
6.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
6.1. 반론
7. 공정왕에서 정종이 되기까지
8. 정종의 능
9. 여담
10. 현대 매체에서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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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2대 국왕. 묘호는 정종(定宗), 시호는 '''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2]이고 휘는 이방과(李芳果)였으나 즉위 후에 경(曔)으로 바꾸었다.
태조 이성계신의왕후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건국 후에 영안공에 책봉되었고[3] 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로부터 선위를 받아 즉위했으나 재위 기간이 겨우 2년 남짓이었다.
정종은 재위 동안 군왕의 대우를 온전하게 받지 못하였으며, 사후에도 정통성 시비 문제로 인해 제대로 된 예우를 받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정종은 유약했던 인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 말에는 장군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를 종군하기도 했던 전형적인 무골이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인 이성계의 무인적인 기질만큼은 형제들 중 가장 많이 물려받았다고 한다.[4]
역대 조선 국왕 중 최초로 한양(경복궁)에서 즉위한 왕이다. 또한 태조 이성계(즉위 당시 만 57세) 다음으로 즉위할 때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왕이기도 하다. 즉위 당시 만 41세. 참고로 정종비 정안왕후는 왕비 즉위 때의 나이가 가장 많은 왕후이다.

2. 조선 건국 전


고려 시대에는 명장이자 고려의 수호신이었던 이성계의 아들답게 무장으로 활약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긴 만 20세가 되던 1377년(우왕 3년) 5월에 태조를 수행하여 지리산까지 노략질하기 위해 진출한 왜구를 치는 데 동행하였으며 황산 대첩에서도 태조의 곁에서 함께 싸웠다. 이후 위화도 회군 때 형 이방우와 함께 우왕 진영을 탈출해 신속하게 이성계 측에 합류했으며 1389년(창왕 1년)에 절제사 유만수의 지휘하에 해주에서 왜구를 무찌른 기록도 있다.
정종이 본래 아버지 이성계 휘하의 무장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바가 있는데 정종은 단지 큰형님 이방우 다음 서열이기 때문에 실질적 장남 대우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이방우가 장남이기는 했지만 그건 고려의 중앙 귀족인 개경의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후계자로서 그러했다. 이방우가 개경에서 가문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면 동북면의 영지와 가별초를 통솔할 사람이 따로 필요하게 될 것이었고 그래서 다음 서열인 정종이 무장이 되어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직접 군인 수업을 받은 것이다. 정종은 조선 건국 이전부터 동북면의 영주 및 가별초 총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을 이성계의 또 다른 후계자였고 그래서 문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차남치고는 상당히 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장 이성계 유고시 문중의 사병인 가별초들이 가장 충성을 다할 사람은 오랫동안 같이 전쟁터에서 고생한 정종이었으니까.
조선 왕조의 개국 논의가 한참 일어날 무렵에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동생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를 척살할 계획을 세울 때 같이 동참했다.''' 이방원이 정몽주 암살 모의를 할 때 참여한 사람이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이방원의 숙부가 되는 의안대군 이화, 이방원의 이복여동생 경순공주의 남편 이제, 이방원의 심복 조영규, 그리고 둘째형 이방과였다. 참고로 이방원이 이성계의 의형제 이지란(퉁두란)에게도 모의를 건의했으나 이지란은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정몽주가 고려 최후의 보루로서 대활약했던 것을 방과도 모르지 않았을 터. 함께한 사람들이 전부 조선 개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들이고 4명의 형들 중 유일하게 방과와 상담한 것을 보면 방과도 그 당시 역성혁명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앞뒤 정황을 보면 억지로 끌어들였다고 보기엔 너무 적극적이다.
그리고 20대 초반에 불과한 이방원이 연배나 공적에서 훨씬 위인 둘째형을 억지로 끌고 갔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이방원 입장에서도 아버지 이성계는 정몽주 제거를 꺼리고 있었고 맏형 이방우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어 협력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이도 많고 아버지를 보필하며 공이 많은 둘째형의 지지가 여러모로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5] 태조와 정종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아예 정종을 정몽주 숙청의 주역으로 보기도 한다.

'''만약 정몽주 일당의 죄를 묻지 않으시겠다면, 청하건대 신들에게 죄를 주십시오.'''

정몽주가 살해된 후, 곧바로 총대를 메고 공양왕에게 정몽주 살해를 알렸으며, '''자신들을 처벌하든지''' 아니면 정몽주 계열 인사들을 모조리 처벌하라고 매섭게 압박했다.[6] 이성계와 더불어 전장을 누볐던 방과의 압박은, 공양왕에게 적지 않은 압박을 주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정몽주가 대로변에서 맞아죽은 마당에 정몽주 편인지 자기 편인지 묻는 질문은 협박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사건의 여파인지, 방과는 정몽주 세력이 제거된 직후 이지란 다음으로 높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의 직위를 받았다. 고려사절요
조선 건국 이후 막상 공이 있었던 왕자들에게는 별다른 혜택이 없고 오히려 정도전, 남은 등 소수의 재상들에게 권력이 쏠리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던 입장에 서 있기도 했다.

3. 조선 건국 후


'''작위'''
영안군(永安君) / 왕세자(王世子)
''''''
방과(芳果)
''''''
광원(光遠)
'''세자 책봉'''
1398년 8월
'''국왕 즉위'''
1398년 9월 5일
'''생몰년'''
1357년 (공민왕 6년) ∼ 1419년 (세종 1년)
'''비고'''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1392년(태조 원년) 8월 초 7일에 만 35살의 나이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하여지고 당시 태조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의흥친군위 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었다. 1393년(태조 2년) 6월 초6일에 문화현, 영녕현에 출군하여 왜구를 물리쳤다. #
이후 1398년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권력을 장악하자 사실상 반강제로 세자에 임명되며 후에 태조가 왕위를 넘겨 2대왕으로 왕위에 오른다.

4. 재위 기간


실록에 의하면 재위 기간 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기며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격구를 하다가 곁에 있던 사관(史官)에게 "내가 격구하는 것도 다 기록되냐?" 하고 질문하자 사관이 "당연합니다." 하고 대답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자 정종은 "옛날 사람들이 격구한 일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봐야겠으니 <고려사>를 가지고 오라." 말했다.[7]
그뿐만 아니라 경연을 하다가도 '내가 병 때문에 팔다리가 저려서 격구를 해서 몸 좀 풀려고 한다.'고 말하자, 지경연사(知經筵事) 조박(趙璞)이 '하시는 건 좋은데 환관이나 간사한 애들하고는 같이 하지 마세요.' 하고 권하는 일도 있었다.[8]
아울러 격구와 관련해 태조에 대한 효심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많다. 대간에서 격구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간하자 대간을 불러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9] 사냥을 나가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잡은 짐승을 태조에게 보냈다고 한다.
정종은 잠시 조선의 수도를 개경(오늘날의 개성특별시)으로 돌려보냈다. 여러모로 고려시대에 대한 향수가 강했고,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한양(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정종실록을 보면, 개경으로 다시 수도를 돌리기까지 유독 까마귀까치에 시달린 기록이 많이 나왔다 여담으로 동생 태종은 부엉이에 시달린 기록이 나온다.
  • 정종 1년(1399) 2월 12일
밤중에 뭇 까마귀가 대궐 위에 날아와 울다
  • 동월 14일
뭇 까마귀가 궁성 북쪽 소나무에 모여 지저귀다
  • 동월 15일
뭇 까마귀가 경복궁을 빙빙 돌고 다음 날도 또한 그와 같이 하다
  • 동월 19일
뭇 까마귀가 궁성 북원에 모여 울다
  • 동월 23일
까치가 근정전 망새에 집을 지다.
그리고 이 까마귀, 까치 소동이 본격적으로 개경 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 동월 26일

종척과 공신을 모아 도읍 옮길 것을 의논하여 송경에 환도하기로 정하다

“뭇 까마귀가 모여서 울고, 들 까치가 와서 깃들고, 재이(災異)가 여러 번 보였사오니, 마땅히 수성(修省)하여 변(變)을 없애야 하고, 또 피방(避方)하셔야 합니다.”

임금이 이에 종친과 좌정승 조준(趙浚) 등 여러 재상들을 모두 불러 서운관에서 올린 글을 보이고, 또 피방해야 될지의 가부를 물으니, 모두 피방하여야 된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어느 방위로 피방하여야 할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경기 안의 주현(州縣)에는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의탁할 곳이 없고, 송도(松都)는 궁궐과 여러 신하의 제택(第宅)이 모두 완전합니다.”

하니, 드디어 송경(松京)에 환도하기로 의논을 정하였다. 애초부터 도성 사람들이 모두 구도(舊都)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환도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기뻐하여 손에 손을 잡고 이고 지고 하여 길에 연락부절하니, 성문(城門)을 지키어 이를 제지하도록 하였다.

기껏 한양으로 내려와 대공사를 벌이고, 골육상쟁의 난이 일어나 뒤숭숭한 와중에 까마귀가 수시로 울어대니 다시 개경으로 돌아가자는 내용이다. 물론 태종이 즉위한 이후 다시 천도하여(1405년 태종 5년 10월 8일) 창덕궁을 지으면서, "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은 2차 왕자의 난으로 그치게 되었다.

4.1. 양위 후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놀면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제사도 지내고 불공도 드리다가 이를 핑계로 전국 각지의 온천 유람을 떠나는 등, 말년에는 태종도 그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태종도 말년에는 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는지 상왕이 된 형과 어울려 노는 일이 잦았다. 실록에 정종과 태종이 첫눈이 내리는 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있다. 고려의 풍습에 첫눈을 보내는 심부름꾼을 서로 먼저 잡으면 한턱을 내는 풍습에 관한 이야기다.[10] 태종도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본인이 왕위를 물려받은 뒤에도 형을 웃어른으로서 제대로 대접해주었다.
상왕으로 물러난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원경왕후에게 후궁 관할권을 빼앗고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상왕 정종이 "금상(재위 중인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말해 태종이 거창하게 하려던 가례색을 폐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이기도 했다. 이건 태종이 뭘 하건 정치에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한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출처: 《태종실록》 권3 2년 2월 11일 갑자 3번째 기사. # 집안 어른으로서 그냥 보고만 있진 못했던 모양. 물론 태종은 거창한 행사만 안 했을 뿐이지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후궁을 9명까지 꽉 채워서 다 들였다.
더불어 63살로 천수를 누렸는데 당시의 평균적인 수명을 생각하자면 오래 산 편이다. 영조(83살),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74살), 고종(68살), 광해군(67살) 다음으로 역대 조선 국왕들 가운데 5번째로 장수했다. 6번째는 딱 환갑을 맞이하기 전에 승하한 숙종(60세)이다.
정종의 후예로는 덕천군의 후손이 주류를 이룬다. 이억기이경석, 서예가로 유명한 이광사와 이긍익이 정종의 후손이다.

5. 가족


후일 정안왕후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던 도중 갑자기 먼저 간 아내가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태종실록》 권24 12년 8월 15일 정묘 2번째 기사. #
허나 정안왕후와의 금슬과는 별개로 무려 7명의 첩에 15남 8녀를 두어 자녀가 상당히 많았다. 이들은 대체로 행실이 엉망이라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가 된다. 왕비가 불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1][12] 야사에는 모두 출가시켜서 승려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종의 아들을 사칭한(친아들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승려의 이야기가 후세에 들어서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 야사를 참조한 모습을 보여준다.
정종의 첩 중 기매라는 이름의 기생 출신이 있었는데, 바람기가 대단해서 많은 남자들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아들도 낳았지만 아버지가 의심스러워서 정종은 기매가 낳은 아들을 아들로 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아이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 기매가 가짜 내시와 바람을 피운 것이 들통이 났는데, 원칙대로라면 이는 처형감. 태종과 중신들은 가짜 내시와 기매를 처형하려 했으나, 정종은 직접 태종에게 부탁하여 기매를 살려주었다. 기매는 끝까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정종의 아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인정하지 않고, 대신 죽을 때까지 기매 모자를 보살펴 주었다고 한다.
정종 사후 기매의 아들은 '지운'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지만, 승려의 모습으로 왕자 대접을 받고 돌아다니며 권세를 누렸는데, 왕족 사칭죄로 문제가 되었다. 당시 상왕이 된 태종과 국왕 세종대왕은 일단 지운을 체포했는데, 태종과 세종은 지운이 정종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심증적으로는 정종의 아들이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지운에게 '왕족에 준하는 의식을 공급할 테니, 절대 왕자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 지운은 이 명을 듣지 않고 계속 문제 행동을 일삼다가 결국 세종 6년(1424)에 참수되고 만다.
바로 아래에 설명했듯이 '원자'로 불렸다는 불노(佛奴)는 실록에 정종의 친아들이 아니라 첩 유씨가 다른 사람에게서 낳은 아들이라고 기록됐다. 불노도 지운처럼 자기가 상왕(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했지만, 정종은 결코 내 아들이 아니라고 부정했다. 불노는 계속 정종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다가 공주에 안치됐다.[13]
그 외에 서자로 5남 선성군이 있는데, 첫째 부인이 바로 정몽주의 손녀인 오천군부인이다.

5.1. 효성과 우애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특히 효심이 깊었다.
사료에 의하면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는 홀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단 소식에 크게 놀라서 김인귀란 자의 집으로 도망갔고, 자신이 세자가 되었다는 말에 마지못해서 숨어 있던 곳에서 나온 후 "내가 세자라니! 차라리 정안공이 하지?"라며 발을 빼려다 역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태조가 "정안공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 없다"며 정종에게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군사를 일으킨 다음 지지를 바라며 보고하는 이방간에게 '''너, 미쳤구나. 당장 군대 해산하고 궁궐로 혼자 들어오면 내가 목숨만은 지켜주마'''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마디로 이방원에게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 정신나간 짓 하지 말고 얼른 항복하라는 이야기다.[14]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정안공이 패배한 방간의 처분을 어찌할지 조언을 구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결국 방간은 목숨을 건져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다. 후술하듯 식읍까지 받았으니 사실상 유배도 아니다.
이후 토산으로 유배 간 동생 이방간을 안산으로 옮겨 안치하면서 방간에게 전답을 마련해 주고, 고을의 주민 50호를 주도록 조치했으며 편지를 보내줬는데 이 편지를 보면 정종의 우애와 인간미가 잘 드러난다.

토산군[15]

은 동북면[16]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17]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2월 13일

방간은 이 편지를 받은 뒤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6. 정종 무인정사 배후설


흔히 권력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다고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지만,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자기 서자원자#s-2로 봉하려다 정안공 이방원의 압력 탓에 취소되고 그가 왕세자가 된 기록이 남아 있다.[18] 정치적 야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 적장자 계승이 무인정사의 가장 강력한 명분이었으니만큼 이방우 사후 적장자가 된 그가 명분상 밀릴 일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태조실록에서 태조와 정도전에 대한 곡필을 행한 것이 거의 확실한 상황에서 정종 실록이라고 곡필이 없으리란 법이 없다.[19] 태종이 조선 개국 과정에서 세운 공로도 과장되었다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는 만큼 개국 과정과 무인정사까지 정종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성이 있다.
사실 정종에 대한 연구는 많지는 않아도 1990년대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가지 의문점에 부딪히게 된다. 개국 과정에 세운 공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큰 방원과 달리 이성계를 따라 황산대첩에도 나섰고 조정의 중신으로 자리잡은 탓에 개국과정에서 세운 공도 상당하며 강건한 무장 출신에 중앙군 지휘권을 행사한 정도전을 위시한 공신그룹과 대치하던 왕자들의 가장 큰 형님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무인정사 때는 동복 아우 전원, 숙부에 조카까지 다 참여하고 심지어 이방석의 형 이방번에게까지 회유가 들어간 마당에 혼자 아무것도 모른 채 제사나 지냈다는 실록 기록 때문이었다. 승정원 일기가 없어 교차검증도 안되는 탓에 결국 태종의 역사를 그대로 따랐고 다른 의견들이래야 만만찮은 배경을 가진 형을 제치기 위해 방원이 일부러 배제시켰을 가능성을 소극적으로 제시하는 정도였다.(윤두수, 조선 정종에 관한 연구, 1990년)
그러다 2000년대 이후 태조에서 정종, 정종에서 태종, 태종에서 세종으로 넘어가는 계승 과정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어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면서 다른 의견이 제시되기 시작했다.(윤정, 정종의 즉위 과정과 즉위 명분, 2013년)
연구자에 따라서는 정몽주 격살은 물론 1차 왕자의 난 주동자를 태종이 아닌 정종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20] [21] 이는 태종의 집권 명분과 정종이 무인정사 이후 왕위에 올랐다는 점에 주목한다. 정종은 태조에게 전위를 받을 때 장남이란 명분으로 물려받았고 길지 않은 재위 기간 동안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된 게 적장(嫡長)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태종의 즉위 명분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택현(擇賢)이다.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재주가 뛰어난 왕자이기에 국가를 반석에 올릴 재목으로서 계승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후계자가 적장자가 되면 자기 권위가 흔들리고 골육상쟁을 거쳐 왕위에 오른 자신의 도덕적 결함이 강조될까 두려워 자기 맏아들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택현에 맞는 후계자(충녕대군)를 세운 사람이 태종이다.[22]
태종이 모든 걸 주도했다고 보기엔 자신에겐 별 도움이 안 되는 장자 계승이란 명분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택현을 명분으로 즉위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형의 아들이 되는 무리수를 감행했고[23] 뒷날의 용비어천가에서 빼버리는 건 물론 폐위당한 왕이 아님에도 묘호를 바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24] 이 때문에 1차 왕자의 난까지의 정종과 태종의 행보에 왜곡이 적잖이 들어갔다 보고 둘째 형 밑에서 세력을 키워간 태종이 적장자가 없는 정종의 약점을 노린 넷째 형과의 경쟁(2차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형의 왕위를 가져갔다는 해석이 나온 것이다. 즉, 아버지와 이복 동생을 끌어내린 것은 큰 형 정종이고 그 형을 무력으로 끌어내리고 모든 걸 빼앗은 사람이 태종이 된다.

6.1. 반론


사실 정종 배후설을 밀어붙이기엔 많은 무리가 있다. 애초에 정종의 원자 책봉 시도의 진정한 배후로 생각되는 사람이 바로 태조 이성계로 지목되고 있는데, 정몽주를 죽이고 자기 형제마저 비명에 가게 한 패륜아가 왕이 되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태조가 정종을 앞세워 이방원의 왕위 계승을 방해하려 했다고 보는 게 더 그럴 듯한 흐름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세자로 추대된 점을 볼 때 당시 정종 본인이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조정의 세력이 모두 이방원 휘하의 인물들로 가득 채워진 상황을 보면 정종을 주동자로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즉 정종 배후설은 원자 책봉시도와 같은 몇 안되는 기록을 보고 제시한 설일 뿐, 실록 및 타 기록에서 이방원이 난의 주체라고 적은 내용은 압도적으로 많다. 위에서 언급한 정몽주 주살 주체가 정종이라는 설은 굉장히 논파의 여지가 많다. 재반론 때문에 덧붙이지만 나중에 조선 개국의 중추가 된 정도전과 조준 남은 등을 모조리 죽이려고 있었던 정몽주를 어떻게든 살려두려 했던 이성계와 달리 이방원은 그를 사람들이 보는 길거리 한가운데서 죽였고 또 이성계의 질책을 받자 사죄는커녕 반항하기까지 했다.[25] 이성계 또한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까지 발언했고 나중에도 계속 이 일로 이방원을 미워한 것으로 보아 이성계가 정몽주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방원도 정몽주에 대해 극한의 친밀감과 존경심을 갖고 있는 아버지가 정몽주 살해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다 알고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이방원이 똥멍청이가 아닌 이상 그런 반응을 보인다고 당황했을 리도 없고[26] 그야말로 끔살을 각오하지 않으면 이렇게 총대를 매고 어그로를 끌 수 없는 것인데, 정종의 성격상 자기 막내동생보고 진짜 주동자인 자기 대신 정몽주를 살해한 다음 혼자서 아버지의 모든 분노를 감당하며 칼맞고 죽으라고 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킨다 한들 모양새가 굉장히 이상해지지 않는가. 그렇다면 혁명이 성공한다 해도 어차피 계승순위가 다소 먼 이방원이 형님들 대신 목숨을 내놓고 척살모의를 주도하였고 정종은 문중의 실질적인 대표로서 사후처리를 맡은 것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즉 이방원은 단순히 정몽주를 죽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형님들과 가문 전체를 구하기 위해 정몽주를 살해한 자라는 세간의 비난과 친구를 잃은 아버지의 분노를 한몸에 받고 비명 횡사하는(죽진 않았지만)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입지가 크게 올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며, 1차 왕자의 난에서도 동생들을 죽인 금수 같은 놈이라고 아버지에게 집중적으로 욕먹고 야사에서는 진짜로 아버지에게 화살 맞고 철퇴 맞아 죽을 뻔 했던 점, 정도전과 같은 친 이방석 세력의 주살 등의 주체가 이방원인 점이나 정종의 짧은 재위 기간 및 숨은 배후라 보기엔 매우 지지 기반이 약했던 점 등 여러 가지 주 기록들을 볼 때 정종 배후설이 이방원이 주도한 사건이라고 보는 기존의 통념을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27]
그렇기에 이후에 이루어진 정종의 원자 책봉 시도는 결국 태조가 그나마 당시 동원할 수 있었던 패였던 듯하다. 거의 유폐당하다시피 했지만 아버지의 명을 거스를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의 성품을 이용한 정치적 시도였다는 것.[28]. 태조가 보기에 이방원의 편을 들어준 둘째 또한 밉긴 했지만, 주체인 이방원보다는 나아보였을 것이다. 정종이 그동안의 사건의 배후였다면 원자 책봉 시도 방식 자체가 매우 부실한 점 등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막후라는 사람이 그런거 하나 공론화시켜서 정치 싸움을 못할 정도로 지지 기반이 없었단 말인가? 결국 축출당한 이성계가 정종을 앞세워서 이방원의 왕위 등극을[29] 어떻게든 막아보려 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종 배후설과 같은 주장은 조선전기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의 소실, 현재로서는 1차 사료라고 봐야 하는 조선왕조실록에서의 모순점 등을 근거로 연구하고 있는 학설이라 아직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물증이 확보되어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는 주의해야 한다. 하륜이 주도한 태조실록의 곡필 범위를 확정하는 것도 애매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비록 사료적 검증에서 한계가 존재하기는 하더라도, 기존의 패러다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7. 공정왕에서 정종이 되기까지


“대행 상왕(大行上王)의 능호·묘호·시호를 의논하여 아뢰어라. 내 생각으로는 사사 시호는 올릴 수 없고, 다만 〈명나라 황제가〉 하사하는 시호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우리 태조도 또한 사사 시호가 있었습니다. 묘호는 옛적에도 그 예가 없었으니, 지금도 없는 것이 좋습니다.”

- 허조세종대왕의 대화. 세종 1년 11월 29일 기사 #

세종 1년(1419)에 승하하였으나 오랫동안 제대로 조선국왕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 명나라가 조선국왕으로 인정하기 전에 태종에게 양위하고 죽었으므로 명나라는 정종을 前 권서국사(權署國事), 즉 임시로(권서) 나랏일(국사)을 처리했던 자로 간주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권한대행쯤으로 여겼다는 소리다.
태종은 형이 살아있는 동안은 상왕이자 형으로서 제대로 대우했고, 세종 역시 웃어른으로서 정종을 극진히 모셨으나 정종이 승하하고 시호를 올릴 때가 되자 문제가 심각해진다.
일단 세종은 정종을 제대로 선대왕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왕실의 웃어른으로 인정하고 종묘에 모시기는 하였으나, 그 대접이 매우 어중간하였다. 먼저 정종에게는 묘호를 올리지 않았다. 또한 시호도 처음에는 '''온인 공용 순효 대왕(溫仁恭勇順孝大王)'''이라고 올렸는데, 명나라가 공정(恭靖)이라는 시호를 내리자 공(恭)이라는 글자가 겹친다는 이유로 시호에서 공용(恭勇)을 삭제하였다.# 즉 조선에서 정종에게 올린 시호는 (대왕을 제외하고) 온인 순효, 단 4글자에 불과했다. 조선에서 국왕들에게 올리는 시호는 (대왕을 제외하고) 8자가 기본이고, 사람에 따라 추가적인 글자를 덧붙였다. 정종에게 시호를 단 4글자만 올렸으니(삭제된 공용을 합쳐도 6글자에 불과하다) 그 대접이 어떠한지 알 수 있다. 아예 종묘에서 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제대로 선대왕으로 인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명나라로부터 정식 조선국왕으로 책봉받지 못했다는 문제와, 태종의 왕통을 이은 후손으로서 정종을 제대로 인정하기 뭣하다는 문제까지 합쳐진 것이다.
다만 묘호를 올리지 않은 데에는 당시의 분위기도 있었다. 묘호는 원칙적으로 황제에게만 올릴 수 있었으며, 제후에게는 올릴 수 없었기에 원종 이후로 한반도에선 묘호가 폐지됐었다. 따라서 태조는 신성대왕, 광종은 대성대왕, 현종은 원문대왕이라고 부르는 식이었다. (물론 왕실 내부에서 암암리에는 묘호를 안 쓸 수가 없었다.) 세종 당시는 이미 150년 넘게 묘호가 잘 쓰이지 않았으며, 태조도 건국 직후엔 4대조를 목왕, 익왕, 도왕, 환왕으로만 추존했다가, 이후 1411년에 태종이 아버지에게 태조란 묘호를 올리면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묘호를 같이 올렸다. 제후가 묘호를 올리는 것이 원래는 유교예법에 어긋나는 거라 처음엔 당나라 이전의 중국처럼 업적이 있는 왕에게만 올리는 것으로 묘호를 부활시킨 것이다. 당장 세종 대에 고려사가 편찬될 때에도 저자들이 고려의 왕들에게 묘호를 올린 것을 참람한 것이라 표현할 정도로 당시까진 묘호를 꺼리는 분위기가 강했다. 정종에게 묘호가 올려지지 못한 것엔 이런 분위기도 일조했다. 이후 세종이 태종의 묘호를 올리면서 묘호제가 정착되었지만, 정종은 262년간 찬밥 신세였다.
용비어천가에서도 해동육룡이란 구절은 정종을 뺀 것이다. 종친들에게 관대한 세종대왕도 정종의 자식들(모두 서자)에게 상당히 냉정해서, 이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모조리 유배형을 내렸다. 연산군 때에는 정종의 위패가 동쪽 제일 끝방(좌익)에 있었다고 하는데, 위치 자체가 푸대접이다. 종묘는 죽은 자의 공간이므로 해지는 서쪽을 높은 자리, 동쪽을 낮은 자리로 본다. 정종은 태종과 같은 실, 또는 윗실을 써야 하는데, 한참 후손인 예종보다도 낮은 끝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자손들 또한 아무런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다른 임금들의 자손은 설령 서자라 하여도 나름대로 대우를 받았다. 결국 자손들이 따로 임금에게 청원하여 그제서야 칭호와 직책을 받았다.
예종 1년(1469)에 예종은 "공정대왕은 이유도 없이 묘호를 빠트렸으니 이제라도 더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바로 그해에 죽었으므로 논의는 거기서 그쳤다.
이후 정종의 자손들은 성종, 중종 때에 "예종대왕께서 공정대왕께 희종(熙宗)이라는 묘호를 정하셨는데 그만 승하하셨으니, 이제라도 묘호를 올려주십시오."라는 요지로 상소하였으나, 역시 제대로 논의되지 못하였다.[30] 특히 성종은 자신이 받은 상소에 비답 자체를 아예 내리지 않았다.
정종이 죽은 지 262년이 지나 숙종 7년(1681), 성원계보(왕실족보) 교정청이 묘호가 빠졌다고 숙종에게 보고했다. 이때 교정청은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집안의 기록에 양도대왕(襄悼大王) 때 공정왕의 묘호를 정하여 안종(安宗)이라 했다고 하지만, 사사로운 기록이니 믿기 어려우므로 실록을 참고하여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나중에 관리들이 조사해보니, 교정청의 상소와 달리 윤근수의 기록에 공정왕의 시호를 '안종'이라 정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하였다.
송시열에게 묘호를 추가하는 문제로 의견을 물으니, 송시열은 대략 아래와 같은 요지로 찬성하였다.
"공정대왕께서 겸손한 뜻으로 물러나셨으므로 태종대왕께서는 그분의 의사를 존중하여 억지로 아름다운 칭호를 올리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후대의 왕들도 그 뜻을 받드셨습니다. 하지만 태종대왕도 종묘에서 그분을 제치고 당신만 아름다운 칭호를 받음이 편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묘호와 시호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숙종은 '정종(定宗)'이라고 묘호를 정하고, 기존에 올린 시호에 '의문 장무(懿文莊武)'란 글자를 더하여 종묘에 이를 고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리하여 정종은 정말 뒤늦게 다른 조선국왕들의 예에 맞추어 '묘호 2자+명나라 시호 2자+시호 8자+대왕'이라는 형식에 맞춘 칭호를 받았다.#
아무튼 죽고 나서 대접이 너무 안습해서 왕실 제사를 맡는 하급관리 차식(車軾)[31]의 꿈에 나타나 전임들이 너무 소홀했다며 한탄했다는 야사가 있다. 꿈에서 깬 뒤 차식이 정종의 제사를 정갈하고 푸짐하게 잘 지내자 공정왕이 고마움을 표시하며 보답을 약속했다. 얼마 후 차식이 노모를 간병하고자 귀향하는 길에 갑자기 독수리(매라고도 한다.) 한 마리가 큰 물고기 한 마리를 던져주었는데, 공교롭게도 노모의 병환에 즉효인 가물치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하는 일이 순탄하게 잘 풀려서 출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명문장가로 이름을 날렸고, 아들 농사도 잘 지어 차씨 부자가 모두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예전에 나무위키의 태종 항목에는, 세종이 종묘에 영녕전을 지은 이유가 정종을 정전에 모시면 태종의 친아버지인 태조가 멀쩡히 있는데, 태종의 양아버지인 정종이 함께 있으니 족보가 꼬여서라고 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당시 종묘는 제후는 5대를 제사지낸다는 예법에 따라 5칸으로 지었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와 그 4대조(목조익조도조환조)를 모셔 5칸이 모두 찼다. 그런데 정종이 붕어했으니 그 위패를 종묘에 모셔야 하는데, 종묘가 모두 찼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유교적 예법의 원칙에 따르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오래된 위패(목조)를 땅에 묻어야 했다. 이것을 매안이라고 한다. 앞서 신라고려의 종묘에서는 중요한 왕[32]불천위로 고정시킨 뒤 중간 왕들의 위패는 그렇게 넣고 대가 멀어지면 빼기를 반복했고, 지금도 민간의 제사는 제주의 4대조(고조부)까지만 지내고 5대조 이상부터는 매안해 다같이 묘사를 지내는 것도 그렇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아무리 대가 멀어졌어도 매안을 인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여겼다. 마침 송나라 황실예법에 별묘를 세운 전례가 있으므로 이를 전거로 삼아, 종묘 정전과 별개로 사당을 세우고 영녕전이라고 이름을 붙인 뒤, 4대조의 위패를 그리로 옮겼다.

8. 정종의 능


그의 묘는 현재 북한개성에 있다. 함흥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 능을 제외하고는 조선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묘가 북한에 있으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 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의 첫 비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능인 '제릉'도 개성에 있다.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현정릉과 비슷한 형식이다. 참고로 남한의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인조장릉이다.
안타깝게도 후릉이 북한에 있는지라 같이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의 제릉, 왕릉의 제식을 못 갖춘 연산군묘광해군묘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 유산 등재에 올라가지 못하였다. 관련 기사.

9. 여담


이숙번과의 정쟁에서 진 적이 있다. 이숙번의 집 앞으로 새로 길이 나기로 됐는데 이숙번이 "누구 마음대로?" 라며 펄펄 뛰었고 "인덕궁 앞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 거기에 길을 놓으라"며 반협박을 했는데 인덕궁이 바로 정종이 사는 곳이다. 정종도 "내 집 앞에 길을 왜 놓냐"며 못마땅해 했으나 그로서는 이숙번의 요구를 철회시킬 힘이 없었고 결국 그의 집 앞으로 길이 놓였다.[33] 하지만 각각의 말년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정종. 거기다 이숙번이 유배를 가게 된 것은 결국엔 저 놈의 성질머리가 한몫했으니, 누가 정치적으로 더 옳게 처신했는지는 분명하다.[34]
한편 동생 태종과 훈훈한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첫눈이 내리면 그 첫 눈을 담아 약이 되는 음식(약이(藥餌))이라고 속이고 누군가에게 보내면 첫눈을 받은 사람이 술을 한 잔 쏴야 했고, 반대로 심부름 오거나 혹은 미리 보낸 사람을 잡으면 보낸 사람이 쏴야 하는 전통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태어난 정종과 태종도 이러한 장난을 즐겼던 듯,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인 세종 즉위년 10월 27일 첫눈이 내리자 장난기가 돈 태종이 첫눈을 상자에 담아 최유를 시켜서 형 정종에게 약이라고 속이고 전달했다. 그러나 약 상자(?)가 도착하기도 전에 소식을 들은 정종은 이미 이를 알고 최유를 잡으라고 하지만, 이미 최유는 눈치를 채고 도망가버렸다. 할 수 없이 정종은 첫눈을 받은 후 태종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35]
청나라로 보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2남인 예친왕 다이샨과 매우 유사하다. 둘 다 무골에 군공이 크고 정치적 야심이 적었다는 것. 이방원은 홍타이지와 비슷하다고 하겠다.[36]

10. 현대 매체에서


조선왕조 오백년 1부 추동궁 마마에서는 김구 전문 배우로 유명한 이영후가 연기했다.[37]
용의 눈물에서는 태민영(1954- 2000)[38]이 맡았다. 역사상의 소탈하고 호방한 무인의 모습은 없고 극초반의 위화도 회군 때 형제들 중 군대에 장수로서 종군하는 장면이 나와 나와 무인 출신임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전쟁에서 몇 번 승리한 다음에는 아우들의 야심과 거친 행동에 전전긍긍하는 나약한 모습으로 나온다.[39] 무인정사 당시 대궐의 소식을 듣고 양주로 몸을 피해서 전전긍긍했고[40], 방원에 의해 억지로 세자가 된 후 이성계를 배알하러 갔을 때도 이성계는 "네놈은 성정이 물러터져서 방원이놈이 시키는대로 했을 거다"라며 욕을 실컷 먹었다. 하지만 성격이 무를 뿐 미욱한 인물은 아니다.[41] 이성계가 조사의의 난 이후 환궁할 때는 그렇게 강경하던 아버님이 갑자기 그러는게 이상하다며 미심찍어했고[42] 태종이 민씨 형제를 노리고 양위 파동을 일으켰을 때도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생각하다 민씨 형제가 꾸중들은 이야기를 듣고 바로 상황을 파악한다. 여기에 아랫사람들을 최대한 챙겨주는 후덕한 성품이라 능력도 인품도 없이 꿈만 커서 여러 사람 심란하게 만든 방간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방원 같은 비전이나 왕실과 국가를 위해서라면 살인도 불사하는 냉혹함, 권력에 대한 욕망이 전혀 없어 왕에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태종이 왕세자가 되자 야사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모두 승려로 출가시켰다가 태종이 허락한 이후에야 다시 환속시킨다. 또한 효심이 깊고 형제들을 아끼는 면은 많이 표현되었다.[43]
이를테면 1차 왕자의 난으로 신의왕후의 아들들이라면 극혐하던 이성계도 정종은 따뜻하게 맞아주었고,[44] 상왕이 된 이성계를 자주 찾아가는 모습들을 계속해서 보여주었다. 이성계도 죽기 전에 정종을 찾을 정도.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임금임에도 불구하고 손수 근신하고 있던 회안대군을 찾아가 이방원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설득하는데 듣지 않자 눈물을 흘리며 지금까지 '회안 아우'라고 부르던 태도를 싹 바꾸어 "'''방간아'''! 그놈의 전하 소리좀 집어치워라![45] 왕으로써 명령하는 게 아니라 형으로써 설득하는 거다. 제발 빌고 살아라!" 라고 청하자 결국 회안대군 역시 마음을 바꿔[46] 살게 하는 중요한 역할도 한다. 정종 역을 맡은 태민영의 연기가 상당해서 그 호소력이 눈물을 불러일으킬 정도. 작중 정종이 화내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는데 친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방간을 분노로 다그치는 모습이 정말 애절하다. 그리고 형에 대한 우애도 적지 않아서 이방우 대해서도 자신을 대하는 이방원만큼이나 아끼는 마음도 커서 방우에게도 자주 가서 말을 걸며, 조선 건립 이후에도 그에게 같이 갈 것을 부탁할 만큼 아꼈다. 하지만 형이 너무 충신인지라 되려 정종에게 성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되려 그만큼 아꼈다.
이후 사냥 자리를 마련해 세자였던 방원과 함께 사냥을 나선다. 사냥지에서 야영하며 방원과 술잔을 나누며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 선언한다. 그러자 그때까지 모처럼 훈훈한 형제의 정을 느끼며 즐거워하던 방원은 깜짝 놀라며 만류하지만, 정종은 '''이것은 내가 왕으로서 내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어명이니, 이것만은 막지 마시게'''라고 하여 방원마저 뭐라 대꾸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사냥에서 돌아온 정종은 지금까지의 유약한 모습과는 다르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하여[47] 방원을 등극시키고 상왕으로 물러나 버린다. 이후로는 정안왕후와 함께 전국의 명소를 유람하거나[48] 아버지인 태상왕 태조를 찾아뵈며 유유자적하게 지낸다는 설정으로 한동안 짧게만 등장하다가 정안왕후가 세상을 떠나고 세종이 즉위한 후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장면을 끝으로 극에서 퇴장한다.
대왕 세종에선 초반부에 잠깐 등장하는데도 배우 노영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태종과 맞먹는 막후 권력 &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정치적 실권은 물론 없지만 카리스마만 따지면 '''과연 이방원의 형'''. 태종조차 형의 위치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정종이 연 잔치에 참석하기 전 '툭하면 잔치를 여는 것도 모자라서 귀한 명나라 활을 대군들에게 하사하질 않나, 상왕전 재미값으로 들어가는 백성들 혈세는 어쩌란 말인가?'라고 투덜거리다가 측근 상선 노희봉이 '다른 재미를 찾는 것보단 낫습니다.'라고 충고하자 '그렇겠지. 인덕궁(정종의 거처)이 회안 형님의 흉내를 냈다간 그 몇 십 배의 재물이 들어가고, 아까운 목숨도 숱하게 죽어나가겠지.'라고 받아들일 지경. 덧붙이자면 노영국은 권력을 제대로 못 써보고 죽은 고려 2대 국왕 혜종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한 바 있다. 다만 양녕대군의 비행으로 효령대군을 왕위에 올리려는 정치적 야심도 가지고 있었다고 묘사되는데, 물론 실제로는 그런 거 없다. 기존의 유약한 이미지에서는 벗어난 편이지만 오히려 고증 왜곡이 심하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황산대첩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후 무인의 역할로 간간히 등장하였다. 비중은 적지만 왕위에 관심없는 게 표현되면서도 '나약한 정종'이라는 클리셰를 벗어났다. 이방과(정도전) 문서 참고.
육룡이 나르샤에도 등장했다. '나약한 정종'에서 벗어나서 소탈하고 가족에 대한 정이 많은 무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JTBC 사극 나의 나라에서도 등장했다. 배우는 김서원.[49] 다만 비중은 거의 없는 수준.
네이버 웹소설인 연못에 핀 목화 - 송경별곡에서 주연 중 1명으로 등장한다. 이방과(송경별곡) 참고.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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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 상상화

[1] 당시에는 태종과의 구분을 위해 노상왕(老上王)으로 칭해졌다.[2] 숙종 7년에야 비로소 완성된 묘호 한 자, 명나라 시호 두 자, 조선 시호 여덟 자. 숙종의 추숭(복권)이 있기 전에는 명나라 시호 두 자, 조선 시호 넉 자가 전부였다.[3] 흔히 영안대군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호칭이다. 대군이라는 호칭은 동복동생인 태종고려시대의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에 생긴 호칭이다. 즉 태종이 '정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던 것처럼 정종도 '영안대군'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이성계의 아들 중 정말 대군이었던 사람은 친동생인 태종 이방원의 난을 묵인하고 그 편에 서서 이방원의 실권 획득을 도운 대가로 태종이 즉위하자마자 그에게 익안대군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방의(익안군 → 익안대군)뿐이다.[4] 어떻게보면 정종의 동생인 이방원과 이미지가 뒤바뀐 셈이다. 동생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는 한국의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가지기에, 그대로 태종의 이미지가 무인으로 자리잡았지만 태종은 고려 과거시험에 합격할 정도로 문(文)에도 재능이 특출한 인물이었다.[5] 흔히 알려진 사실과 달리 이방우도 정말 고려에 충성했는지 확실치 않다. 고려 왕실에 충성을 다했다는 기록은 어디까지나 공양왕 즉위 이후 세자 경쟁에서 탈락한 다음에 나온 기록이고 창왕 즉위 시점까지는 아버지의 일에 적극 참여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의도를 모르고 협력했을 수도 있지만 조선 개국 후 4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향을 피우면서 신주를 효사관에 안치하는 등 후계자만 못 되었을 뿐 새 왕조 임금의 맏아들로서 활동했다.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은거한 기록은 없다.[6] 고려사절요에서는 이방원이 이화와 논의하여 보냈다고 한다.[7] 《정종실록》 권1 1년 1월 19일 경인 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1019_003 [8] 《정종실록》 권1 1년 1월 9일 경진 1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1009_011 [9] 《정종실록》 권1 1년 5월 1일 경오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105001_001 [10] 세종 즉위년(1418) 10월 27일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010027_010 [11] 적장자가 있었다면 태종의 승계 과정에서 잡음이 매우 많았을 것이고 그 아들도 정쟁에 휩쓸려 일찌감치 황천행으로 직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적자가 없었던 덕에 정종은 아버지와 같은 불운은 겪지 않은 것이다. 정종 재위 당시 이방원은 형식상 세자였는데 적장자가 있었다면 족보가 상당히 꼬여버리고, 무엇보다도 이방원의 행보를 보았을 때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에 힘이 실린다. 그냥 짧게 설명해서 단종세조 관계가 되는것.[12]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런 점을 생각했는지 노년에 정안왕후가 '아들도 하나 못 낳아주고 미안하다'며 자책하자 '아들이 있었다면 잠깐이라도 왕 노릇도 못해봤을 텐데 자책하지 말아라'며 정종이 위로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13] 《태종실록》권18 9년 10월 27일 을축 3번째 기사. # [14] 태조 이성계 역시 난을 일으킨 이방간을 미련하다고 탓하며 성을 냈는데, 여기에는 1차 왕자의 난에 이어 드디어 친동기간인 태조의 아들들이 싸움박질을 시작한 데 대한 충격도 있겠지만 이방간이 성공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탓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방간에게 가망이 있었더라도 태조 입장에서는 가장 아끼던 막내 아들이자 세자를 죽인 한통속으로 보였을 테니 딱히 도와줄 마음이 없었을 수도 있다. 내심으로는 아예 이방원과 이방간이 공멸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15]황해북도 토산군, 옛 금천군의 일부[16] 함경도의 옛 이름. 이성계의 옛 근거지였던 만큼, 확실히 뒷말이 나올 법한 유배지이다.[17] 이때는 개경으로 다시 천도한 이후였다. [18] 《태조실록》 권15 7년 11월 7일 기묘 1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11007_001 [1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이런 시각이 어느 정도 드러나는데, 연회 때 태종이 정종을 껴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투로 협박(?)한다.[20]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의 존재덕분에 실록에서 비롯된 역사 인식을 재고하게 된 케이스가 꽤 있는데 조선 전기는 승정원 일기가 소실되어 그게 힘들다. 게다가 이 설이 맞다는 가정에서 생각해보면, 태종이 정몽주를 추숭한 일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다. 태종이 만약 정몽주 격살을 주도했다면 정몽주 추숭은 군신간에 충의를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동시에 태종 자신의 정당성 손상이라는 리스크를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선죽교에서의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 정종이었다고 하면, 태종의 정몽주 추숭은 이런 모순에서 태종이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정몽주를 죽인 정종의 정당성을 상당히 실추시킬 수 있는 한 수였던 셈이다. 실제로 정몽주 추숭은 태종의 즉위 원년에 이루어졌다.[21] 다만 정도전과 그 일파를 제거한 이방원으로써는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포은을 추숭하였을 수 있다. 당장에 이방원은 무인정사로 아비인 태조 이성계를 사실상 몰아냈기에 정당성이 원래부터 취약했다, 이에 통 크게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충신의 대표로 세워서 조선 건국이라는 불변적인 사실을 인정하기만 하면 과거에 적대하였던 사람이라도 포용할 수 있음을 보였을 수도 있다. 당장에 무인정사에서 사망한 남은과 이복동생의 남편인 매제 흥안군 이제 같은 경우에도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올려주었다.[22] 태종이 택현을 통해 세종을 즉위시켜 자신의 즉위까지 택현으로 포식한 과정, 양녕의 비행을 일부러 드러내고 그를 몰아붙인 상황은 최승희의 논문 太宗末 世子廢立事件의 政治史的 意義와 太宗朝의 王權과 政治運營體制, 윤정의 논문 태종 18년 開城 移御와 한양 還都의 정치사적 의미를 참고. 물론 언제까지 택현의 명분 아래 폐세자를 거듭할 순 없으니 세종은 자신의 후계자(문종)를 누가봐도 완벽한 차기 국왕으로 육성하고 세손까지 자기 살아 생전에 정해 놓는다.[23] 이것도 많은 논란이 있는데, '''세제'''가 아닌 '''세자'''로 지칭된 것과 정종이 묘호를 받지 못한 것을 연결시키면, 이때의 子는 정종의 子이라기보다는 태조의 子라는 것을 지칭한다는 의견도 있다.[24] 세종이 벌인 일이긴 하나 정종이 사망할 때 태종이 상왕으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걸 감안하면 누구의 의중일지는 뻔하다.[25] 면전에서 '아버지가 제게 화내시는데 어머니(신덕왕후)께서 제 편을 좀 들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6] 이성계의 반응이 이방원을 당황시킨 게 아니라는 근거는 정몽주 척살을 논의하기 위한 회합 당시 이지란의 발언이다. 당시 그는 어르신(이성계)이 반대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즉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해야만 한다는 데 납득했다는 것은 이러한 사료와 정면으로 배치된다.[27] 무엇보다도 이방원은 무인출신 가문에서 나온 과거급제 출신자로 이 인물 하나로 이성계 가문의 위격이 달라졌음은 부정 할 수 없다. 또한 과거급제 홍패를 보고 이성계가 절을 했을 정도로 감격했다는 기록도 있는 만큼, 정몽주 척살 같은 정도가 아니라면 미움을 받을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또한 위화도 회군시기에는 개경집으로 달려가서 신덕왕후와 이복동생들을 탈출시키기도 하였다.)[28] 게다가 정종은 이성계가 고려의 무신으로 활약하던 시절 오랫동안 부관으로서 보좌했었다. 아버지인 동시에 자신의 직속상관이기도 했었던 이성계의 말을 정종이 거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29] 이전에는 왕위 찬탈이라고 했지만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형을 쫒아내는 등 패륜을 저지르긴 했지만 결코 명분에 어긋나는 짓을 하진 않았다. 정말로 이방원이 왕위찬탈을 꾀했다면 형 정종을 굳이 왕위에 올리고 그 양자로 들어가는 귀찮은 짓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미 이 시점에서 방원 외에는 왕위에 오를 만한 자도 없었을 텐데 굳이 사대부와 척을 지면서까지 급하게 왕위에 오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치 9단인 태종이 모를 리도 없고.[30] 실록에는 예종이 '희종'이란 묘호를 정했다는 구절은 없고, 성종 때 정종의 자손들이 그렇게 주장했단 이야기만 나온다.[31] 조선 중기의 명시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의 아버지.[32] 태종 무열왕, 문무왕, 고려 태조, 고려 현종[33] 《태종실록》 권25 13년 6월 19일 병인 2번째 기사[34] 더군다나 태종이 왕실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자기 형을 무시한 이숙번의 저 행실이 좋게 보일 수가 없다. 결국 이는 자신의 아들인 세종대왕에게 절대 이숙번의 유배를 풀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계기가 된다. 자기 형도 업신여기는 이숙번이 자기 아들이라고 업신여기지 않겠는가. 실제로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만들 때 필요한 중요 참고인으로서 이숙번을 잠깐 부른 적이 있는데, 이숙번은 마치 유배가 풀리고 다시 조정에 복귀를 했다고 착각하며 여전히 오만방자함을 잃지 않았으나 태종의 유언을 잊지 않던 세종은 이숙번이 경기도에서 지낼 수 있게 해주되 조정에 복직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불과 2년 뒤 이숙번은 사망했다.[35] 《세종실록》 1418년 10월 27일 기사[36] 정치적 야심이 적었다기 보다는 동생에게 밀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누르하치 사후 다이샨은 가장 유력한 후계자였지만, 홍타이지가 계모와의 불륜을 공개하면서 치명타를 받았다.[37] 공교롭게도 이 배우는 아래 나오는 용의 눈물에서 남은 역할을 맡았는데, 남은은 무인정사때 정종의 동생인 이방원에게 칼을 맞아 죽는다.[38] 태조 왕건에서 신강으로 출연하기도 한 배우이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영화판에서 성인 한병태 역으로도 출연했다. 2000년 11월에 간암으로 사망.[39] 신덕왕후는 이에 대해서 우유부단하다고 대놓고 무시했으며, 다른 인물들도 정치적 인사 등에 대해서는 정종을 무시하는 이들이 몇 있다.[40] 이는 뜻하지 않게 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초 정도전 일파는 신의왕후 소생 대군들을 모두 궁으로 불러들여 몰래 죽일 계획을 짰었는데, 방과가 오지 않아 거사 실행이 지연되어 이방원이 낌새를 채고 난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41] 성격이 무른것도 소탈한 마음씨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정치 문제가 발생하는 원인이 '''가족 문제'''이기 때문이다. 평화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은 있지만, 가족 문제에선 대체적으로 중립적이기에 크게 말릴 수 없었다. 정치문제가 끼어들자 어떻게 할 수 없게 되버린게 컸다.[42] 작중 이방원은 친혈육에 대한 정이 남달라서 이들과 관련된 일에서는 평소의 그라곤 생각도 못할 정도로 느슨해지는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이때도 하륜과 원경왕후가 "이성계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리가 없다, 이성계에겐 백우전이 있다"며 경고했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43] 심지어 방탕하고 거만한 이복동생들(신덕왕후 소생의 이방석이방번)까지 딱히 미워하지 않았기에, 1차 왕자의 난 때 죽어버린 방석의 시신을 보고 굳이 죽였어야 했냐며 슬퍼하고 방원이 방번과 이제를 언듯 살려주려고 하자 참 잘했다고 칭찬한다. 그리고 방간이가 화근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칼들고 쫓아가자 발을 동동 구르면서 말려보려 하지만 방원이가 좋은게 좋은거라고 한번 말려보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면서 실패.[44] 다만 처음에는 그래도 미워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덜 미운 아들인지라 '''방원이를 죽여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나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설득하지만, 아버지만큼 동생도 사랑하던 형인지라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면서 도망치기도 했다.[45] 방간이라고 부르는 순간까지도 자신을 '''전하'''라고 말하는 아우의 모습에서 더욱이 울분에 찬 듯한 목소리로 동생을 꾸짖는 것이 크게 느껴질 정도. 그리고 이 노함과 슬픔을 가지고 동생을 껴안으며 우는 장면 역시 명장면 중 하나.[46] 그러나 정작 이방원 앞에서는 끝까지 구차하게 살고 싶은 마음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은 목숨은 부지했지만.[47] 이는 이성계가 도성을 떠나 있어 반대할 겨를이 없는 사이 재빨리 일을 끝내버리기 위함이었기도 하다. 실제로 방원이 즉위한다는 말을 들은 이성계는 황급히 돌아가려 하지만 이미 즉위식이 끝나고도 남을 거리인지라 결국 포기하고 이후 조사의의 난이 끝날 때까지 아예 도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48] 실제로 정안왕후와 담소를 나누며 경치 좋은 곳을 느긋하게 거니는 장면이 몇번 스쳐지나간다. 실록에도 나와있지만 상왕으로 물러난 정종은 정말 속 편하게 놀러다녔으며, 왕위에 오른 후 일에 치이고 살던 태종은 '형님이 부럽다.'고 언급하기까지 했다.[49] 영화 부당거래에서 류승범이 분한 주양검사 사무실에 앉아있던 남자 사법연수생을 연기한 배우.